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정여울
ǻ
홍익출판사
   
15800
2014�� 01��



■ 책 소개
대한항공이 45만 여행자와 함께 뽑은 유럽의숨은 보석 같은 여행지 100곳, 
행복한 에세이로 들려주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101가지 유럽이야기!

사랑을 부르는 유럽, 한 달쯤살고 싶은 유럽, 유럽 속 숨겨진 유럽 등 열 개의 테마로 구성된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의 순위는 대한항공 캠페인의 참여자들이 직접뽑았다.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 유명 미술관 투어나 해안가 산책 코스는 물론이고 눈물겨운 러브스토리가 깃든 성당, 인생의 끝에 머물고픈 작은 마을등 너무 유명해지지 말았으면 하는 아이템까지 가득하기에, 언젠가 꼭 가보겠다는 열망과 또다시 떠나고 싶은 간절함 둘 다에 불을 지핀다.

똑 부러지는 문학평론뿐 아니라 감성의 결을 파고드는따스한 에세이를 써내는 정여울 작가는 특유의 감수성과 담백하고 소탈한 문체로 여행의 단상을 풀어놓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혼의 도피처,카프리섬’, ‘이 모든 슬픔이 작고 하찮게 여겨지는 낭만의 거처, 카를교’,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 잊게 만드는 감각의 향연, 플라멩코’와 같이충분한 감탄이 담긴 표현들은 이미 두어 번 유럽을 다녀온 여행자들의 마음까지도 다시금 팔랑이게 만든다. 

■ 저자 정여울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공간」「씨네21」「GQ」「출판저널」「드라마티크」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라디오프로그램 "시사플러스" 등의 게스트로 출연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한겨레」에 "내 마음 속의 도서관"을 연재하고, KBS1라디오‘책 읽는 밤’에서 <마음의 서재&&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삶’에 조용히 노크하기. 그것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다. 자신이 학창시절에 책과 문학을 통해 힘을얻고 길을 찾았기에 사람들에게도 그 길을 전파하고 알리려 힘쓴다. 책을 사랑하기에 책으로 소통하고 싶어 하지만 책에만 갇혀 있지는 않는다. TV드라마에 빠지기도 하고, 영화관과 미술관과 음악회를 부지런히 찾기도 한다. 그녀만의 생각들을 담은 저서로는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소통』, 옮긴 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가 있다.

■ 차례
CHAPTER 1 | 사랑을 부르는유럽

CHAPTER 2 |직접 느끼고 싶은 유럽

CHAPTER 3 | 먹고 싶은 유럽

CHAPTER 4 | 달리고 싶은 유럽

CHAPTER 5 | 시간이 멈춘유럽

CHAPTER 6 |한 달쯤 살고 싶은 유럽

CHAPTER 7 | 갖고 싶은 유럽

CHAPTER 8 | 그들을 만나러 가는 유럽

CHAPTER 9 | 도전해보고 싶은유럽

CHAPTER 10| 유럽 속 숨겨진 유럽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프롤로그

소문난 길치의 행복한 걷기 여행

유럽은 갈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었다. 그건 더 풍요로운 삶, 더 빨리 목표에 이르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삶이 아니라, 더 진정한 나와 가까워지는 삶, 더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 삶에 대한 바람직한 목마름이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필요 이상의 노동에 자신의 소중한 가능성을 낭비하는가. 돌이켜보면 내가 무엇에 쓰일 줄 몰라서, 혹은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이것저것 이름을 걸어두고 있는 것이 많았다. 잠시 삶의 만유인력에서 벗어나 일상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가지고 싶은 것보다는 버려야 할 것들의 목록이 떠오른다. 아깝지만, 버려야 한다. 안타깝지만 놓아주어야 한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붙잡고 있는 삶의 가능성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언제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간신히 떠났던 유럽여행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유럽의 밤열차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을 그리워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 ‘유럽’이 아니라 ‘여행’ 자체다. 우리가 단단히 무장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 삭막한 도시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엽서 속의 함초롬한 풍경으로 거듭날 것이다. 나는 또 무작정 떠나고 싶다. 여러분과 함께 배우고 싶다. 반복되는 삶의 권태에 지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을 생애 최초의 첫눈처럼 눈부시게 바라보는 법을, 이 무한한 시간의 바다 위에 내 그리움의 닻을 내리는 법을.



사랑을 부르는 유럽

2위 프라하 카를교 - 체코

이 모든 슬픔이 작고 하찮게 여겨지는 낭만의 거처

같은 장소에 아무리 여러 번 가더라도 결코 질리지 않는 풍경이 있다. 내게는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프라하의 카를교가 그렇다. 사람들은 이곳에만 오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제정신을 잠시 집에 놓고 온 사람들처럼 애나 어른이나 평등하게 이성을 잃고 열심히들 논다.


특히 나는 카를교에 일곱 번이나 가봤는데 갈 때마다 다른 풍경, 다른 미소들을 볼 수 있어 뿌듯했다. 카를교는 무엇보다 숨 막히게 아름답다. 500미터 가까이 되는 커다란 다리 어느 한구석도 빤한 풍경이 없다. 조각상 하나하나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인물들의 사연이 꿈틀거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안락의자처럼 조각상에 기대어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조차도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카를교 자체도 아름답지만 각각의 조각상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여 끊임없이 여행자들로 하여금 셔터를 눌러대게 한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온갖 시름을 잊게 한다. 블타바강 어귀로 나룻배들이 천천히 노를 저어 가고,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강물 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프라하 고성을 비롯한 온갖 명물들이 오렌지빛과 체리빛 노을로 물들어 가면 정신없이 뛰놀던 아이들도, 은밀한 정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연인들도, 저마다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석양을 바라보게 된다.


해 질 녘의 카를교가 우수에 찬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면, 햇빛 찬란한 대낮의 카를교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뜻하게 않게 참석하게 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도 프라하의 카를교에서였다.


카를교에서의 결혼식은 연출되지 않은 거대한 세트장에서 로맨스영화 한 편을 찍는 것처럼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신부는 카를교 위에 내리쬐는 햇빛처럼 찬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주례도, 축의금도, 피로연도 없는 단출한 결혼식이라 더욱 로맨틱한 느낌을 주었다. 천연 세트장이라 따로 꽃 장식도 필요 없었고, 그저 다리 위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옷차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꽃 장식처럼 어여쁘게 보였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모여 그들의 결혼식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축하해주었고, 신부와 신랑은 모두에게 “땡큐”를 연발하며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끽했다.


카를교에서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사람들, 서로의 손을 잡고 오래오래 산책하는 사람들,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 홀로 석양을 바라보며 옛사랑을 추억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낭만의 거처’를 아는 사람들 같다. 아름다운 공간은 단순히 인물 뒤를 받쳐주는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빛나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거대한 마음의 그릇이다.



직접 느끼고 싶은 유럽

1위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 - 스페인

건축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

10년 전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내가 차라리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그저 마음에 조용히 담아만 두자고 결심했던 첫 번째 공간이 바로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었다. 그곳은 보자마자 탄성이 나오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 순간에는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정말 이걸 인간이 만든 것일까. 어디서도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없다. 마치 인간의 신비로운 무의식을 건축물로 형상화한 것 같은 느낌, 인간 영혼의 심해를 조심스럽게 잠수하듯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을 최고의 황금비율로 유전자 조합한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과 기이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카사 밀라는 마치 자연 암벽 위에 그대로 테라스를 빚어놓은 듯한 모습인데,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 미학을 집안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일상 속의 예술을 구현해놓았다. 물결치듯 과감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벽과 동굴처럼 생긴 신비로운 출입구, 투구를 쓴 사람의 머리를 닮은 굴뚝 등 모든 것이 ‘집’에 관한 인간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라 그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든, 구엘 공원이든, 아니면 카사 밀라든 모든 가우디 건축에 깔려 있는 예술가의 영혼은 디오니소스의 축제적 광기가 아닐까. 나는 구엘 공원의 타일 구조물 하나하나를 보면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예술과 기술의 극한까지 인간을 밀어붙이는 광기 어린 흥분으로 충만하다. 구엘 공원은 햇빛이 내리쬐는 대낮에는 축제적 명랑함이, 석양 무렵에는 서글픈 애상으로 물들며 모든 쾌락에는 피할 수 없는 끝맺음이 있음을 아련하게 일깨워주는 것 같다.


보통 ‘공사 중’이라고 하면 건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아직 공사 중인 것이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답고 경이롭다. 가우디는 저 거대한 건축물에 직선은 전혀 없고 철저히 곡선만으로 설계를 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직접 완성한 동쪽 파사드는 외벽의 조각에 예수의 탄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곳을 바라보고 있자면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예수의 탄생을 다시금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에는 가우디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사실 안치되어 있다기보다는 죽어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을 진두진휘하고 싶은 가우디의 진념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직선이 전혀 없는 그의 건축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혈관과 근육을 가진 존재로, 나아가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빚어낸다. 그는 건축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였다.

 

 

먹고 싶은 유럽

4위 퐁뒤스위스

뜨거운 국물의 힘을 보여주는 친숙한 맛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는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좀 낯선 맛일지라도 그 나라 음식을 먹자’고 결심하고 나니 모든 음식이 다 제 나름대로 맛있었다. 유일하게 적응할 수 없었던 음식은 파리에서 먹었던 생선샐러드였다. 프랑스 사람으로 보이는 옆 사람이 하도 맛있게 먹고 있기에 한 번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덜컥 시켰다가 ‘생선 따로, 샐러드 따로’인 맛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생선의 비릿한 냄새가 전혀 가시지 않아 샐러드라기보다는 날생선 맛이 훨씬 강했다.


반면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리워지는 음식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퐁뒤다. 퐁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몇 번 본 음식이라 왠지 친근감이 있었다. 막상 가까이서 보니 퐁뒤는 우리나라의 전골요리와 무척 비슷했다. 팔팔 끓는 육수에 오뎅이나 야채 꼬치를 풍덩 담가서 적셔 먹는 전골요리를 연상시키는 퐁뒤는 그 고급스런 어감과 달리 매우 친근하고 재미있는 요리였다.


퐁뒤는 원래 스위스나 프랑스 알프스 지방의 전통요리라고 한다. 그뤼에르치즈를 기본으로 쓰면서 에멘탈치즈나 꽁떼치즈를 함께 녹여 화이트와인을 섞어내는 요리다. 뜨겁게 녹인 치즈에 하루 정도 숙성시킨 빵 조각을 꼬챙이처럼 생긴 퐁뒤용 포크에 꽂아 풍덩, 담가 먹는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지친 원기를 회복하는 데 그만이다. 진골요리를 먹으면 온몸이 따뜻해지고 힘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퐁뒤도 ‘뜨거운 국물’의 힘을 보여주는 음식이다.


9위 굴라쉬 – 헝가리

착한 가격에 얼큰한 맛이 반가웠던 해장스프

몇 년 전 프라하에서 굴라쉬를 처음 맛봤을 때의 반가움을 잊을 수가 없다. 굴라쉬의 칼칼하면서도 얼큰한 맛은 밤새 술 먹고 그 다음 날 쓰린 배를 움켜잡고 먹었던 뼈다귀 해장국을 닮았다. 유럽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맛이 좋거나 새롭다는 느낌보다 ‘반갑다’는 느낌을 준 것은 굴라쉬가 처음이었다.

완전히 낯선 맛을 기대했던 이국적인 음식에서 한국음식과 뭔가 묘하게 통하는 친밀감을 느꼈다. 더위에 지치거나 기력이 달리거나 느끼한 음식에 질릴 때 굴라쉬는 반가운 해장스프가 되어줄 것이다.


유럽 레스토랑의 메뉴는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하다. 메인 요리는 보통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해산물 카테고리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웬만하면 실패하지 않는 요리가 바로 돼지고기나 닭고기요리다.


현지의 다양한 언어로 표기된 메뉴를 판독할 수 없을 때는 영어 메뉴를 부탁하면 된다. ‘아, 정말 뭘 시켜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싶을 때 가장 무난한 요리 중 하나가 굴라쉬다. 지금도 나의 따뜻한 해장스프 굴라쉬가 그리워질 때는 홍대 근처의 체코 레스토랑에 가곤 한다.



시간이 멈춘 유럽

3위 폼페이 화산 유적 – 이탈리아

아름다운 소멸을 생각하며 문득 겸허해지다

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 종일 예쁘고 빛나는 것들만 본 날은 훨씬 더 피곤하고 허무해진다.


빛나는 존재들로 꽉 찬 박물관 투어에 불현듯 지칠 때,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는 것에도 ‘포화 상태’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폼페이나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이나 아테네 신전 같은 거대한 폐허 앞에 서볼 필요가 있다.


베수비오 산기슭에 자리 잡은 폼페이는 로마의 번영을 상징했던 화려한 문명의 도시였다. 그러나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도시는 불과 연기와 재로 휩싸였고 도시 전체가 참혹한 폐허로 변해버렸다.


화산재로 뒤덮여 사라져버린 도시 폼페이. 18세기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이제는 도시의 거리와 집들의 윤곽이 대부분 드러났다.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폼페이 사람들이 즐기던 일상과 축제의 흔적들은 꽤 많이 남아있다.


폐허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있었던 한때를 조용히 반추하는 곳이다. 폐허는 사라진 것들의 허무를 생각하는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것들이 한때는 빛났다는 것, 지금은 빛나는 것들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임을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성찰의 공간이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오래된 유적지에 다녀오면, 나는 ‘개인의 성소’가 아닌 ‘공동체의 성소’에 다녀온 듯한 뿌듯함에 젖어들곤 한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내면의 성소가 필요하다. 일상의 필요와 세속의 고통이 침범할 수 없는 곳,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의 비무장지대가 필요하다. 진정 아름다운 폐허는 ‘세속적인 필요’를 없앰으로써 ‘영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내면의 성소가 아닐까.



한 달쯤 살고 싶은 유럽

2위 성곽도시 두브로브니크 – 크로아티

저마다의 작은 공간들이 모여 거대한 이야기의 벽화를 이루는 곳

여행으로 깨달은 나의 취향은 바로 공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어떤 공간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가’였다. 예전에는 그저 눈으로 봤을 때 아름다우면 무조건 다 좋은 줄 알았다. 이렇게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아름다운 것’은 곧 ‘유명한 것’과 비슷해져 버린다. 단체여행이 아닌, 내가 처음으로 기획한 첫 여행루트는 그래서 당연히 파리-런던-로마였다. 가장 유명한 볼거리들이 많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영어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알파벳부터 처음 배우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혹은 백과사전을 가나다라 순으로 섭렵하듯이, 학술 답사라도 나온 것처럼 파리-런던-로마의 명소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당연히 모범생답게(?) 여행 책자를 달달 외워 갔다.


그런데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본 유럽은 짐작과는 정말 달랐다. 여행 책자에서 ‘꼭 가보라’고 한 곳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고, ‘여긴 우범지역이라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한 곳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 책자를 내던지고 지도 하나 달랑 들고 뚜벅뚜벅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곳,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버킷리스트처럼 ‘죽기 전에 꼭 다녀와야 할 절경’ 같은 절박한 리스트는 우리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년 동안 거의 매해 빠지지 않고 유레일 열차에 몸을 실어온 결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공간은 바로 이야기를 창조하는 도시임을 깨달았다. 그곳에 산다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 나만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신나는 장소, 내가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마을, 굳이 숨 막히는 압도적 풍경이 아니라 이미 굳은 살이 박혀버린 내 단단한 일상에 아주 작은 틈새를 만들어주는 곳들.


두브로브니크도 바로 그런 곳이다. 현란한 스펙터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집 한 집 저마다의 작은 공간들이 점점이 모여 거대한 이야기의 벽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브로브니크는 우리 마음속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도시, 머나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시,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도시다. 세상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변해도 흔들림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장소들이야말로 여행자에게 최고의 축복을 선물한다.



갖고 싶은 유럽

4위 전통 카펫 – 터키

정성 어린 염색 방법에서 나오는 터키 카펫의 오묘한 색조

실크 카펫은 워낙 고가일 수밖에 없지만 양털 카펫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라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다. 터키 어디서나 카펫 매장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수공예 공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곳도 많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아나톨리아 지역을 여행한 후에 터키식 카펫을 극찬하기도 했다. 터키 카펫의 기하학적 문양이나 동물 문양은 가히 세계 최고라고 말이다.


지금까지도 천연염료를 사용해 빚어내는 카펫의 빛깔도 무척 아름답다. 터키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색채 감각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카펫의 현묘한 색상 배합뿐만 아니라 옷이나 스카프, 심지어 요리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빛깔을 최고의 조합으로 섞어낼 줄 아는 터키 사람들의 색채 감각은 그 자체로 예술의 경지다.


나는 파란색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터키시 블루를 가장 좋아한다. 지중해의 바닷물을 그대로 한 국자 덜어내어 종이 위에 살포시 아로새긴 듯한 터키시 블루, 이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변치 않는 빛깔을 유지하기 위해 카펫 명가들에서는 모든 색을 천연 염료만 사용한다. 샤프란꽃에서는 노란색, 오디나무에서는 연두색, 인디고나무에서는 푸른색, 덜 익은 밤이나 도토리껍질에서는 밤색의 염료를 얻는다.


터키 카펫의 오묘한 색조는 정성어린 염색 방법에서 나온다. 실타래를 통째로 염료에 담그지 않고, 실타래의 한쪽만 염료에 담가두어 나머지 한쪽 끝까지 자연스럽게 천천히 염색되도록 놓아둔다. 실타래를 염료에 담그는 것은 인간이지만, 층층이 다른 명도와 채도로 염색을 완성시키는 것은 바람과 햇빛의 마법이다. 이렇게 ‘천연 그러데이션’을 거친 오묘한 빛깔의 실 한 올 한 올이 터키 카펫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유럽

2위 베로나의 ‘로미오와 줄리엣’ - 이탈리아

도시 전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는 체험의 광장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현상이 있다.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줄기찬 몸짓들이다. 유명한 동상이나 조각상마다 어찌나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쓰다듬었는지 그 부분만 반짝반짝 윤이 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아름다운 도시 베로나의 줄리엣 동상도 그렇다.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며 전 세계 여행자들이 하도 쓰다듬어서 줄리엣의 코와 가슴은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베로나는 도시 전체가 줄리엣과 로미오를 떠올릴 수 있는 ‘열린 체험’의 광장이다. 특히 ‘줄리엣의 집’이 인상적이다. 특히 여성들은 줄리엣의 방, 줄리엣의 가구, 줄리엣의 발코니를 직접 만져보고 체험해보면서 줄리엣이 된 듯한 기분으로 변치 않는 사랑을 기원한다.


흥미로운 것은 줄리엣의 편지함이다. 줄리엣을 위한 편지함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이나 사랑의 사연을 담은 절절한 편지로 가득하다. 베로나에는 ‘줄리엣 클럽’도 있는데 이렇게 줄리엣의 편지함에 모인 편지들을 합해서,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줄리엣을 대신하여’ 답장을 써주는 것이다.


‘줄리엣 클럽’의 자원봉사자들은 편지를 부친 사람의 얼굴도 신상 명세도 잘 모르지만, 그들이 보낸 사연의 절실함을 믿고 정성 어린 답장을 전 세계로 열심히 보낸다.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는 현상은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한글로 된 편지들도 많은데, 안타깝게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가 없어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사랑의 큐피드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베로나에 가서 ‘줄리엣을 대신하여’ 아름다운 답장을 부쳐주었으면 좋겠다.



도전해보고 싶은 유럽

4위 알프스 캠핑 – 스위스

‘내 안의 무한한 우주’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몰라

어려서부터 심각한 몸치였던 나는 몸을 써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늘 동경해왔다. 몇 년 전 스위스의 루체른에 갔을 때, 나는 스스로의 체력을 믿지 못해 알프스 트레킹을 포기했었다. 여러 가지 장비도 갖추지도 못했고, 두꺼운 점퍼나 등산화도 챙겨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사실은 그저 ‘몸이 힘든 게 싫어서’였지만, 다른 핑곗거리를 또 찾아냈다. 등산장비 일습을 그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다 산다는 건 엄청난 낭비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천천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시내 관광만으로 지극히 만족했다. 하지만 돌아온 뒤에는 내내 후회했다. 가져간 옷을 몽땅 껴입고서라도, 그저 등산화 하나만 달랑 사서라도 알프스 트래킹의 진수를 맛보고 올걸, 하는 뒤늦은 미련 때문이었다.


여행 가서 가장 부러운 사람들 중 하나가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또는 텐트를 비롯한 캠핑 장비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현지인일 경우가 많지만 간혹 머나먼 나라에서 와서도 적극적으로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매사에 ‘도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나는 그래도 여행하는 동안만은 나만의 작은 도전들을 즐겨보고 싶다. 눈 덮인 알프스의 전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푸르카패스나 만년설이 하얗게 덮인 웅장한 체르마트의 어느 산자락에서 나만의 작고 어설픈 베이스캠프를 꾸려보고 싶다.


 

유럽 속 숨겨진 유럽

1위 스테판 불꽃 축제 – 헝가리

충분히 아름다운 스테판의 야경을 더 환상적인 스펙터클로 물들인다

도시 문명이 발달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최고의 축제, 그것이 바로 불꽃놀이인 것 같다. 물건을 태우는 게 아니라 하늘을 태워 온갖 아름다운 문양을 조형해내는 불꽃놀이.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도 하고 도구를 쓰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불을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것의 강약을 조절해서 유리하게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니 말이다.


‘불은 좋은 종이지만, 그러나 나쁜 주인이다’라는 영국 속담처럼 인간은 불을 다스림으로써, 아니 불을 다스린다고 믿음으로써 문명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꽃의 어떤 용도보다도 내게는 ‘불꽃놀이용 불’이 최고의 ‘불의 용법’으로 다가온다. 불은 어떤 도구로서 사용하기보다 불 자체를 축제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스테판의 불꽃 축제는 안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운 스테판의 야경을 더욱 꿈결 같은 빛으로 물들인다.


7위 포스토이나 동굴 – 슬로베니아

1년에 100만 명 이상 찾는 슬로베니아 최고 관광지

동굴은 외부의 풍경이 사라진 곳에서 내면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성찰과 은둔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그 거대한 규모뿐 아니라 종유석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로 수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서늘한 기운에 몸이 움츠러지지만, 곧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자연의 신비에 넋을 잃고 집중하게 된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중국 장가계의 용왕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카르스트 동굴이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길이가 무려 20킬로미터가 넘는데, 관광객들에게는 5.2킬로미터 정도만 개방한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가 가장 경이로운 자연미술관 이라 칭송했던 이곳에서는 때로는 고드름 같고, 때로는 다이아몬드 같기도 하여, 때로는 수만 년 동안 돌들이 흘려온 눈물처럼 보이는 종유석들의 장엄한 향연이 펼쳐진다.


1년에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할 정도로, 블레드섬과 함께 슬로베니아 최고의 관광지로 사랑받는 곳이다. 이 동굴에는 무려 100년이나 살 수 있다는 독특한 물고기가 산다. 손과 발이 달려 있어 인간 물고기라는 별명의 이 물고기는 동물 속에서 오래 살아 눈은 퇴화되어 없어지고 아가미로 호흡하며 한 달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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