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ǻ
푸른숲
   
12000
2012�� 07��



■ 책 소개
color=#ff8040>지나간시간을, 잊지 못할 기억을,
아름다운 장면을 되돌려주는 음식 이야기!
글 쓰는 요리사로 알려진 박찬일 셰프의 책으로, 삶의 일부로서의 음식, 우리를구성하는 기억으로서의 음식을 이야기한다. 머리가 어지러울 때 먹으러 가는 중국집 짜장면, 으슬으슬 인생이 추워질 때 떠오르는 아버지의 닭백숙,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부산의 맛……. 바다 내음 물씬 나는 민어와 꼬막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마시고 싶은 초여름 밤, 박찬일 셰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나간 순간을, 잊지 못한 기억을, 아름다운 장면을되돌려준다.

■ 저자박찬일
1965년생으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했다. 잡지 기자로 활동하던 30대 초반 돌연 요리에 흥미를느껴 유학을 결심, 1998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피에몬테 소재 요리학교 ICIF의 ‘요리와 양조’ 과정을이수했고, 로마의 소믈리에 코스와 SlowFood 로마 지부 와인 과정에서 공부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청담동에서스타 셰프로 이름을 날렸고, 이탈리아 토속 요리 레스토랑 ‘뚜또베네’를 히트시켰다. 수입 식재료가 최고인 줄 알던 시절, ‘동해안 피문어와 홍천찰옥수수찜을 곁들인 라비올리’처럼 한국의 산천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이탈리아 음식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2008년 신사동가로수길에 레스토랑 ‘트라토리아 논나’를 성공리에 론칭시키며 또 한 번 그 명성을 확인케 했다. 홍대 레스토랑 ‘라 꼼마’에서 최근까지 셰프로일했다. 지은 책으로 『와인 스캔들』『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보통날의 파스타』『어쨌든, 잇태리』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 

1부
솜사탕 같은 구름 한 점 떴다 - 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맛, 병어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 생명의힘, 짜장면 
짬뽕은 국물이다 - 짬뽕의 불맛 
여름 음식의 서정 - 우물가 음식, 국수 
얼음 배달하던 소년 - 수박과 화채
닭 한 마리의 충직한 투신 - 아버지의 닭백숙 
모든 기름진 것의 으뜸 - 돈가스의 추억 
나도 만두당이 있으면 가입하련다 -만두의 육즙 
운동회와 어머니의 찬합 쌓기 - 도시락 찬합 
전은 지구전(持久戰)이다 - 배추전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적 향신료- 마늘의 힘 
제철 게살에 간장의 조합 - 감칠맛의 황제, 서산 게국지 
소리 없는 자부심이 복작이는 새벽 해장국집 - 남도 한정식
바다는 그대로인데, 청어도 돌아왔는데 - 속초의 청어 
하와이 사람들이 낙지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 - 산낙지의 인생 
아작,깨무니 까칠한 가시가 무너진다 - 술을 부르는 안주, 멸치 
멍게 꼭지 좀 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 봄을 알리는 멍게 향 
아릿한맛 뒤에 천천히 개펄의 뒷맛이 퍼진다 - 꼬막 
바지락과 탁한 국수 국물의 절대적 상승작용 - 수수한 바지락 칼국수 
그 오랜 명망잃지 마시라 - 바다의 보리, 고등어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 부산의 맛 
2부 
총은 놔두고 카놀리나 챙기게 -<대부&&의 카놀리, 토마토소스 
세상의 모든 괴식 - 소내장 요리 
뉴칼레도니아에서 맛본 예술 - 달걀 
무심한우유의 완벽한 변신 - 치즈 
살에 기억된 세월의 맛 - 랍스터 
입이 미어터지게 달려드는 쥬이시한 매력 - 햄버거 
초콜릿소스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 - 토끼 고기와 초콜릿 
귀품의 반열에 올라선 맛 중의 맛 - 캐비아의 전설 
호로록, 국수를 예쁘게빨아들이는 법 - 쌀국수 
참을 수 없는 냄새의 입자 - 홍콩 딤섬 
L형의 팔뚝이 민속박물관에 가야 할 이유 - 볶음밥의 순수,나시고렝 
꾸득꾸득, 절임의 미학 - 바칼라 
지상에서 가장 경건한 식사법 - 할랄푸드 
쓸쓸한 샐러리맨의 어깨 - 라멘
하루키가 말하는 두부를 맛있게 먹는 법 세 가지 - 두부의 단순미 

3부 
참새머리의 맛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식으면 굳어요, 쭉내세요 - 김훈, 『남한산성』 
진짜 민어를 보긴 보았소?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연어와 함께 여행하는 법 - 움베르토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달큰한 토마토 향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지중해식 문어 삶기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어느 냉면 애호가의 역사 - 성석제, 『소풍』 
고기 권하는 사회 -백영옥, 『스타일』 
황새치를 가르는 장인의 솜씨 -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감사의 말 - 내가 먹고, 내가 되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서문 -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너는 당신에게

우리는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맛의 강물을 건넌다. 당신 삶 앞에 놓인 강물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때로 혀가 진저리치게 신맛도 있어야 하고, 고통스러운 늪 같은 쓴맛도 결국은 인생의 밥을 짓는 데 다 필요한 법이 아닐까. 밥의 욕망, 밥에 대한 욕망, 그것이 우리를 살린다. 내가 사랑하는 가장 심드렁한, 그렇지만 마력의 이 문장을 되새김질한다. 포드나 테일러가 가장 싫어할, 월스트리트가 증오할 문장이겠으니.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합시다!"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 생명의 힘, 짜장면

오래전 중국집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작은 타일이 붙은 외관에 소박한 이름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요즘처럼 가분수의 멋대가리 없는 커다란 간판도 아니었고, 수수한 멋이 있었다.


수원은 화상들이 많이 살고, 좋은 중국집들도 많다. 그 동네에서는 오랫동안 갈색으로 된 진짜 짜장면을 팔았다. 요새는 대부분 캐러멜을 넣어 검정색이 된 천하통일의 짜장을 쓰겠지만 말이다. 갈색의 짜장은 풍미가 달랐다. 달큼하다기보다 구수하고 짭짤했다. 소스의 양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짜장을 비비면 딱 면에 소스가 붙을 만큼만 넣었다. 전분을 많이 써서 윤기 있게 만들지 않았으니 볼품은 덜했지만, 칼로리는 더 낮았다. 콩으로 발효한 전통 짜장의 구수한 냄새가 지금도 혀 끝에 감돈다. 첨장이라고 하는, 밀가루를 함께 쓰는 이 장이 나중에 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들 한다.


내 예기를 하자면, 특이하게도 중국집에서 사색을 하는 스타일이다.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고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걸 기다린다.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모든 감각이 오직 짜장면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로 변해 복잡한 머릿속은 정돈이 되고, 생각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안개가 걷힌다. 그리고 짜장면을 먹으면서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반대로 얼마나 쓸쓸하고 한심한 일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런 깨우침은 복잡해진 인생사를 단순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중국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울을 떨쳐내기 위함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 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짜장면을 양껏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한 다발의 짜장면을 넘기는 장면……. 나는 거기서 생명의 힘을 느낀다. 우리가 뭘 먹는다는 행위는 진정 숭고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햄버거를 그렇게 먹는다고 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어서, 중국집이란 더욱 소중해진다.


그 짜장면이 슬플 때도 있다. 비 오는 날 저녁 어스름에, 주택가 골목이나 추레한 상가의 복도에서 만나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이다. 음식의 존엄은 사라지고, 칼로리만 존재하는 슬픈 풍경이다. 신문지라도 살포시 덮여 있으면 좀 나을까.


내 인생에서 짜장면이 기뻤던 순간도 많았다. 특히 딸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짜장면을 힘차게 빨아 당기는 모습의 경이가 마음에 새겨져 있다(국수를 빠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도대체 어떻게 유전되는 것일까).



여름 음식의 서정 - 우물가 음식, 국수

봄에 김장은 떨어지고 봄배추는 잠깐 나오다 말았을 때, 조금 기다리면 열무가 나왔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일산에서 열무가 잘 자라 모래내시장에 쏟아지면 어머니는 열무김치를 담갔다. 어머니는 그 열무김치로 들기름 떨궈 비빔밥을 만들었다. 양푼에 써억썩 비빈 비빔밥을 입이 미어져라 우겨 넣으면 열무 이파리가 입가로 튀어나와 볼에 양념을 묻혔다. 먹어도 먹어도 한정 없이 비빔밥이 들어갔다. 새콤 달콤한 열무 비빔밥, 어머니가 해주는 그 비빔밥! 비싸다고 손톱만큼 넣은 깨소금이 우연히 잇새에서 튀어나와 고소하게 여운을 주는 것처럼, 그 비빔밥의 맛이 지금 생생하게 되살아나 입안에 막 번진다.


비빔밥도 하기 귀찮으면 국수를 말았다. 열심히 길어 올린 우물물에 갓 삶은 국수를 헹구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나무 채반에 놓인 국수를 사리로 만들어 그릇에 담는다. 열무김치를 올리고, 김칫국과 깨소금을 뿌렸다. 그렇지, 내가 심부름 해온 얼음 오십 원어치를 바늘로 톡톡, 깨뜨려 얹는 일은 누가 했더라. 귀한 달걀도 반씩 잘라 그릇에 올렸다. 어머니가 딸자식들 몰래 달걀 반 개를 내 그릇에 더 얹어주는 걸, 누이들은 모른 척 했다.


국수는 어느 작가가 혁명가의 음식이라고 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이 한 그릇 바쁘게 뚝딱 해치우는 음식이라는 뜻일 테다. 나는 그런 국수에게 우물가 음식이라고 한 줄 더한다. 펌프든 우물이든, 그 습하고 더운 여름날의 오후, 국수 한 그릇을 마당에서 말아 먹을 수 있었던 우리는 행복했다. 지금 다시 그 국수를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암담하여 체념하게 된다.


콩국수는 또 어떤가. 백태를 푹 삶아 껍질을 골라내는 일부터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파는 콩물이 못 미더워 어머니는 간혹 콩국수를 말았다. 그 정이 무서워서 내 콩국수 그릇은 비지처럼 뻑뻑했다. 얼음이 다 녹아야 그 콩국이 먹을 만한 농도가 되었는데, 그걸 기다리는 내가 어머니는 못마땅해서 연신 어서 먹으라고 재촉을 했다. 그래서 나는 으레 콩국수는 그런 음식인 줄 알았더랬다. 어른이 되어 직장 동료들과 콩국수를 먹으러 가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법 진하다고 소문난 집에서 주는 콩국의 농도가 내게는 겨우 다 먹은 국수에 물 부어 헹궈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콩국수란 국수를 감아올리면 진득한 콩국이 국숫발에 처덕처덕 붙어 따라올 정도가 되어야 진국이 아니냐고, 그런 황당한 표준이 내게는 있었던 것이다.


여름의 국수라면 또 냉면이다. 콩국수나 열무국수 따위, 냉면이 더 윗길이라고 할 분도 있겠다. 허수룩하게 대충 말아 먹는 그런 국수에 비하면, 냉면이 손도 많이 가고 재료비도 더 든다. 시내의 냉면 면가들의 자존심과 위신도 드높다. 그렇지만 난 그런 쪽 냉면집보다는 시장 통의 데면데면한 집들이 더 기억난다. 번듯한 양복쟁이들은 도저히 오지 않는, 시장 상인들과 주머니 가벼운 월남 인사들이 향우회 하듯 모이는 남대문시장 통의 부원집이 그것이다. 지금도 한결같이 문을 열고 있는데, 값도 헐고 맛은 평양의 그 맛이라고 했다. 여름이 바짝 고삐를 조이면 어머니는 겨울 동안 몇 번 다녀오고 잊고 있던 이 집을 다시 찾았다. 앞섶에 비닐 앞치마를 댄 요리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이 액자만 한 주방 창으로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우리 식구는 주인네에게 참 고마운 존재였을 텐데, 한가한 시간 골라 오지, 거기에다가 냉면을 먹고 일어서기까지 딱 오 분이면 족했기 때문이었다. 냉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젓가락에 부러지도록 말아서 먹는 음식이라고 어머니가 누누이 강조한 까닭이었다. 냉면이 목에 걸려 눈물이 날 지경이어야 진짜 냉면 맛을 안다고, 나의 요상한 냉면론은 거기서 출발한 셈이다.


얼마 전, 어머니를 모시고 그 냉면집에 들렀다. 메밀 삶은 물에 예의 그 간장을 타서 드시면서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이 집이 참 컸는데……. 너희들은 참 작았고……."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앞서 걸으시던 그 시절의 냉면집 골목길도 어머니의 치마폭도 참 넓었더란 생각이 들었다.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 부산의 맛

전국 어디서나 맛이 비슷할 것 같은 그런 음식들도 지역색이 강렬하게 묻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걸 느껴보는 재미가 꽤 흔쾌하다. 심지어 인스턴트 라면도 지역마다 다른 색깔이 덧입혀진다. 이제 불과 두어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있는 도시들이 모두 서울을 닮아갈까 두렵지만, 어쨌든 이런 지역의 특성이 아직은 면면하다. 그렇다면 남포동 노점 포장마차-이 연속된 두 낱말의 이율배반을 욕하지 마시길-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어봐야 한다. 구루마에 나란히 놓인 교자도 놓치지 말자. 앞뒤로 야무지게 기름 철판에 갈색으로 지져내는 교자다운 교자다.


남포동에서 교자 하나씩 입에 물고 옛날 식의 자그마한 부산극장 구경도 좋으리라. 곱창처럼 좁은 국제시장 골목을 누비면서-당신의 허벅지에 노점에 앉은 이들의 등이 닿는다-노점에서 지지미에 소주 한잔도 좋다. 부산 사투리의 하이 소프라노를 들으며 자갈치시장으로 내뺀다. 꼼장어를 파는 포장집도 좋지만, 커다란 갈치나 고등어를 잔뜩 구워주는 6천 원짜리 생선구이 집에 부산 사람인 척 들어가는 것도 묘미다. 상어 수육이나 꼼장어 껍질로 쑨 묵에 소주를 걸치는 것도 부산 사람 흉내 내기의 정점이다.


밀면은 또 어떤가. 부산 사람들도 줄을 서서 먹는 아무개 밀면이 굳이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집들은 기본 이상 한다. 이왕이면 간판에 소박한 정취가 있는 집, 그러니까 연식이 좀 된 집이면 좋겠다. 그런 집에서 나무젓가락을 달라고 하여 싹싹, 비벼서 떨고는 한 그릇의 밀면을 기다리시라.


앞서의 음식들은 정말 맛있다거나 부산의 정취에 흠뻑 젖어보는 기본적인 성지순례에 가깝다. 진짜 맛은 복국이나 돼지국밥 같은 국물 요리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돼지국밥은, 정말 이 얘기를 하려고 변죽을 울렸다고 고백할 음식이다. 찬밥을 솜씨 있게 몇 번이고 설설 끓는 국물에 토렴하는 그 놀라운 기술을 보면, 생활의 달인이라는 호칭보다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숨은 아낙들의 오랜 세월의 인내를 읽어보게 된다. 밥알의 전분이 깨끗이 씻겨나가 국물에 풀리지 않으니 다 먹을 때까지 혀가 깔끔한 비결이다. 진한 것도 묽은 것도 아닌 그 절묘한 중용의 국물의 두께는 또 어떻고. 소금 간 짭짤하게 하고, 여긴 부산이니까, 역시 짠 정구지라고 불리는 부추무침을 소박하게 밥술에 얹어서 목이 미어지도록 넘겨보자. 아아, 그리고 그 비곗점과 밥알과 설핏 말린 국물과 부산의 사투리와, 그리고 국밥만 평생을 만 주인할머니의 앞치마를 함께 씹어 넘기는 것이다. 그것이 부산이다.


그리하면, 부산에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하고 빌게 되는 것이다. 우울할 때면 기차를 따고 훌쩍 들르고 싶도록.



L형의 팔뚝이 민속박물관에 가야 할 이유 - 볶음밥의 순수, 나시고렝

"어떻게 볶아줄까?"


L형은 볶음밥의 달인이다. 그가 중국요리사 전통 복장, 그러니까 훅훅 찌는 주방에 가장 걸맞은 러닝셔츠를 입고서 물었다. 그의 팔뚝에는 수많은 흉터가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는데, 모두 고온으로 가열된 기름방울이 튀면서 피부를 지져낸 상처다. 홀에서 먹는 볶음밥은 이미 불의 기운이 한풀 꺾여서 다소곳해지는데, L형이 무지막지한 팬을 마구 흔들어 볶아 내게 주는 밥에서는 불이 확확 치솟는 것 같다. 그가 팬에서 마지막 밥풀까지 탁탁, 커다란 주걱으로 쳐서 그릇 위에 밥을 떨구면 나도 모르게 식욕이 돋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꼴이라니.


볶음밥의 순수는 불의 기운으로 밥알을 하나하나 감싸듯 익히는 데 있다. 요리사가 웍을 흔들 때마다 밥알이 몇 번씩 천장까지 솟을 듯 키질을 하며, 철판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듯 익혀져야 맛을 낸다. 볶음밥은 그래서 집에서 먹는 요리가 아니다. 웍을 워낙 흔들어 왼팔이 기형적으로 더 굵어진 요리사가 해주는 밥이다. 앞서 L형의 왼 팔뚝은, 할 수만 있다면 민중사의 인간문화재, 민속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 뽀빠이처럼 두툼하고, 기름 화상과 칼자국으로 아름답게 도배된 상징물이니까.


어려서 나의 작은누이는 일찍 회사에 취직했다. 대학 같은 건, 사치였다. 그 누이가 사환 노릇을 하며 지폐를 벌었다. 간혹, 나를 회사 근처로 불러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의 메뉴는 볶음밥이었다. 짜장면이나 짬뽕보다 비쌌기 때문에 누이가 고른 메뉴였다. 간혹 누이는 붉은 고추기름으로 볶은 잡채밥을 시켜줄 때도 있었는데, 그건 더 비싼 메뉴였으므로 쉽게 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누이는 꼭 내게만 볶음밥을 시켜주고 자기는 마치 나는 속이 좋지 않다던 어머니처럼, 그렇게 맨입으로 앉아 내 입에 밥숟갈이 들어가는 걸 흐뭇하게 들여다보곤 했다. 그래봤자, 그 누이의 나이 고작 스무 살 초입이었을 테다.


그때 볶음밥은 짜장 같은 건 곁들여주지 않았다. 불땀이 바싹 바싹 입혀진 진짜 볶음밥이었다. 주문을 하면 쇠 국자로 웍을 긁고 치면서 센 불에 밥을 볶는 소리가 들렸다. 다 볶은 밥을 국자로 긁어 그릇에 탁탁,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면 행복했다. 무엇보다, 높은 온도에 튀기듯 만든 계란프라이가 올라갔다. 흰자는 바삭하게 튀겨지고, 노른자 속은 주르륵, 흐를 정도로 익힌 완벽한 계란.


볶음밥의 변주는 그 무서운 화력이 밥알을 코팅하듯 기름을 발라 익히는 데서 출발한다. 그다음은? 양주식이든 광둥식이든 태국식이든 인도네시아식이든 고명과 보조 재료의 스타일로 맛을 가른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네시아식으로 세계의 명물이 된 나시고렝의 맛도 불에서 출발한다. 발리의 고급 리조트 레스토랑이든 거리의 1, 2천 원짜리 싸구려 노점이든 나시고렝은 누구든 최고의 솜씨로 볶는다. 그건 인도네시안의 자존심 같은 것이기 때문일까.


여행하는 어디선가 그 동네의 볶음밥이 있으면, 나는 시키고 본다. 그리고 L형과 어린 누이의 정을 생각한다. 그리고 잠시 눈앞이 흐려져서 볶음밥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의 말 - 내가 먹고, 내가 되었다

잇몸에 들러붙는 초여름 도다리, 관상용으로 기르고 싶은 비단멍게, 반투명한 여름 오징어의 자태, 그 팔팔한 다리가 내 목을 힘껏 졸라주었으면. 주문진항 새벽 네 시에 보았던 산다는 것의 막막함, 속초 바닷가 양미리 구잇집에서 눈을 찌르던 연기, 남대천에서 은거하는 은어 소금구이, 양양 산골의 5년 묵은 김치광, 리어카로 그 김치를 나르는 소년의 발목. 백촌 막국수의 편육, 그리고 속초 사람인 후배 오성택이 실감나게 말해주는 명태 올린 냉면 먹는 법.


묵호에 가면 꼭 들르는, 아줌마가 연속극 보며 말아내는 신공의 물횟집. 김연수의 『7번 국도』를 읽으며 먹으면 착 달라붙던 그 맛. 포항 죽도시장의 물회, 노점에서 파는 참가자미 말린 것, 그걸 파는 아낙의 주근깨와 비비크림, 이병률이 울컥한 울진의 아침 밥상 생선찌개, 신 김치 넣고 끓인 삼척의 물메기탕, 강원도의 경월소주. 부산 가기 전에 기장에서 비닐 천막 구석에 앉아 붕장어 굽던 시간, 탄 냄새에 반쯤 취해서 붕장어 뒤집어 익히기. 아지매! 크게 불러보기(서울 놈인지 다 안다).


부산 자갈치 아지매의 예술적인 호객 행위, 엉덩이 빼고 상체의 각은 15도 예각, 오이소! 절박한 인토네이션, 손님이 온다. 그걸 배우면 굶지는 않을 거다. 그 옛날, 부산 사람들의 잠을 깨우던 새벽녘 "재칫국 사이소" 소리. 팍팍한 그날치 삶을 열어주던 소리. 그리고 돼지국밥집 아지매들의 절묘한 토렴의 기술, 마음을 덥히는 기술.


경상도 영주에는 묵호 문어라는 간판이 있다. 그야말로 도시의 간판이다. 영주 사는 우리 이모는 아들 결혼잔치 계획에 딱 한 가지만 강조했다.


"문어만 내면 되지러."


영주 문어는 정작 산지인 동해의 문어보다 맛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삶는 기술이 최고라고들 한다. 영주에서 다양한 문어 요리법을 물어보면 다들 뚱하게 쳐다본다. 그냥 삶으면 제일 맛있는 걸 왜 요리를 한다고 나대나? 그런 표정이다.


충청도 해안에서는 시장에서 살아 있는 생선을 판다. 봄 간재미를 사려는데, 아낙들이 옛날 동사무소 직원 같다. 살 테면 사고 말래면 말어, 이눔아. 어차피 살 거면서. 생선이 힘이 없고, 곧 죽을 것 같더라도 깎으려 들지 마라. "안 사도 되유. 이거 판다고 뭐 서산 땅이 다 내 땅 되겄슈?" 시간이 흐르고, 생선이 완전히 죽었다. 그래도 어림없으리니. 최양락이 흉내 내던 그 말이 나오고 만다. "못 팔믄 애들이나 믹이쥬 머." 그냥 사는 게 상책이고, 게국지나 한 그릇 먹고, 천천히 올라왔다. 서산의 낙지는 힘이 세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