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여행하기 좋은 시절

   
김용기
ǻ
시공사
   
13500
2012�� 05��



■ 책 소개
황혼의 아프리카 여행으로 얻은 건 두 가지였다.
젊은 날의 나와 대면하는 값진 시간,
그리고두 번째 인생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법.

은퇴 후 인생 2막을 맞은 이들이 꼽은 버킷리스트 중 압도적인 1위는 여행이다. “시간도 많고, 급하게 할 일도 없는데, 여행이나떠나볼까?” 말로 하기엔 참 쉬운 소리, 그러나 두 다리를 움직이자니 천근만근이다. 

하루하루가 치열하던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은퇴 후 여행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저자의 아프리카 여행기.오래도록 상상해오던 세계 여행을 막상 떠나보니, 젊은이의 여행 못지않게 뜨거운 에너지와 황홀한 자극을 경험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는 트럭을 타고이동하며 텐트에서 잠을 해결하는 트러킹(Trucking)으로 아프리카 대장정에 나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를가로지르는 여행 속에서 굽이진 인생을 닮은 협곡, 20대를 떠오르게 하는 메마르고 끝없는 사막, 눈을 감고 자연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야생의 초원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오롯이 담아냈다. 그리고 때론 고생스럽고 불편하지만 당찬 도전이 비로소 결실을 보는 여행의말미에는, 두 번째 인생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자신감이 따라왔다. 단발성 이벤트로 끝날 줄 알았던 여행은 인생의 톡톡한 거름이 돼 주었다.

■ 저자 김용기
1950년생. LG그룹에서 23년간 근무한 후 현업에서 물러나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여행에 대한 열정은 그어느 때보다 뜨거워 매년 한 차례씩 길을 나선다. 인생 2막에 접어들었지만 아직은 도전 정신을 발휘할 만한 오지로의 여행을 즐긴다. 오랜 꿈인세계 일주 여정을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다.

■ 차례
유서 쓰고 떠나는 아프리카 여행
첫눈에 반한 케이프타운 
희망봉에서 부른 만세 
테이블마운틴에 오르다 
도미토리의 얼리 버드 
와인을 실컷 마시는재미 
물벼락 맞으며 찾아간 물개섬 
참 아프리카를 찾아가는 대장정 
트럭에서 발생한 첫 번째 반란 
이걸 먹어야 하나?말아야 하나? 
웰컴 투 나미비아 
아뿔싸! 새해맞이 파티 
나미브나우크루프트 국립공원 가는 길 
아! 듄45, 아이고!듄45 
왕국 하나 세우시지요 
외로운 남회귀선 
쿼드바이크 타고 사막을 탐험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스피츠코페에서 횡재 
여행은 버리는 연습 
사진 찍어줄까? 
힘바 부족 마을을 가다 
3시 방향, 라이온!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에토샤의 노을 
조나단의 편지 
모르는 남자와 잘 뻔한 이야기 
개미만 한 코끼리 
델타의일상, 부시 캠프 
이게 원더풀이야? 
생과 사의 팽팽한 전율 
거긴 항상 소나기가 와요 
여기가 아프리카 맞지?
애들아, 박수쳐라! 하지가 돌아간다!





인생 2막, 여행하기 좋은 시절


유서 쓰고 떠나는 아프리카 여행       

여행도 병이라고 하네. 그것도 아주 큰 병이라고.


나도 단단히 걸렸나 보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 바뀐다고, 날씨가 추워지면 춥다고 발병하니 현대 의학도 어쩔 수 없는 난치병 수준으로 걸린 게 분명하다. 이번 여행은 순전히 고질병이 도졌기 때문이다. 단풍 색깔이 진하게 물들어갈수록 히말라야가 부르는 소리가 내 마음을 붙잡고 늘어지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날씨는 겨울답게 기승을 부려 영하 10℃를 오르내리기 며칠째. 며칠 전 내린 눈이 꽁꽁 얼어붙어 멀리 내려다보이는 논밭이 온통 하얗기만 한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여행 계획서를 내밀었다. 미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여행 계획을 잘 심사해달라는 어색한 애교를 꼬리표로 달았다. 나의 어색한 애교가 정말 무색하게도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받을 것, 줄 것 다 적어주소."

"받을 것…?"

"당신 떠나고 나면 내 맘이 어떤지 알아요?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잠이…?"


짧게 반문하는 것 말고는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와야 잠이 오지. 내가 얼마나 맘 졸이는지 말로는 다 못해. 정말 못해."

"알았소."


아내는 굳이 가려면 유서라도 쓰고 떠나라는 얘기다. 내가 유서라도 쓴다고 마음이 편안해질까? 그보다는 남편 걱정이 앞서는 아내의 가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꼭 떠나야 하는가 재삼, 재사 반문했다. 그런데 어찌하리 다들 이것도 병이라는데, 중독이라는데….


아내의 말이 하루 종일 귓전을 맴돌았다. 가지 말까 하는 조그만 반란도 마음속에 일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으면 기나긴 겨울을 견디어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가야겠는데 또 다른 나의 마음도 도닥거려주어야 하니 어쩌면 좋을까? 궁리 끝에 타협안을 내놓았다. 춥고, 높은 히말라야 대신 따뜻하고, 평원이 드넓은 아프리카로 여행지를 바꾼 것이다. 아프리카가 히말라야보다는 아내의 마음을 덜 졸이게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프리카는 아내가 이미 경험한 대륙이 아닌가? 6년 전이던가? 아내와 함께 이집트 카이로로 입국해 아스완, 아부심벨, 룩소르, 다합, 시나이 산을 배낭을 벗 삼아 용감하게 다녔는데 다합에서 즐거웠던 스킨스쿠버와 시나이 산의 추위는 아직도 우리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런 즐거운 기억들이 아내의 마음을 다소나마 보듬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해서 내 여행 계획의 마지막 순위인 아프리카가 급부상하여 우선순위를 차지하였으니 인생으로 치면 역전 드라마가 아닐까?


아내와 어색하게 작별하는 순간을 손자 준형이가 귀엽게 마무리해주었다. 인천공항행 버스정거장에 내린 내게 손자가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할아버지!" 하며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러대는 손자가 착잡한 분위기에 주눅 들어 있던 내게는 곧 구세주이고 돌파구였다. 어느 누구의 작별 인사보다도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참이나 식지 않는 뿌듯한 흥분을 느끼면서 나직이 말했다.


"준형아, 고맙다! 네가 벌써 그렇게 컸구나!"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없을 것을 생각하니 아쉬움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미어졌다. 설렘, 어색함, 아쉬움, 미안함. 이렇게 이번 여행은 복잡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희망봉에서 부른 만세     

내가 묵고 있는 케이프타운 숙소는 한 방에 벽 따라 네 개의 2층 침대가 놓여 있는 도미토리형 백패커스 호스텔이다. 요즈음은 성수기여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침대 하나 잡기가 어렵단다.


"오늘 가신다고요?" 아침나절 9시가 훌쩍 지났을 즈음 테이블마운틴 등산을 떠나려는데 프런트의 아가씨가 출발을 막고 나섰다. 날씨가 쾌청하여 내심 환호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아니 왜요? 날씨도 좋은데."

"정상은 바람이 세서 매우 위험해요."


테이블마운틴을 쳐다보고 또 쳐다봐도 맑은 하늘을 이고 있는 모습이 단아한데 정상에는 바람이 위험할 정도로 분다니 믿기질 않았다. 기껏해야 동네 뒷동산 정도인데 바람이 세면 얼마나 셀까 싶어 등산을 강행하려는데 재차, 삼차 위험하다며 날 막고 나섰다.


등산을 포기하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모든 여행사, 상점, 음식점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서 할 일이 없어 호스텔 방에 박혀 있어야 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유일하게 가게 문을 열 것이라는 워터프런트에 가서 사람 구경이나 할까 하고 자료를 꺼내 뒤적이고 있는데 침대 위 칸의 예쁘장한 아가씨가 오늘 스케줄이 어찌 되냐며 말을 걸어왔다.


"딱히 할 일이 없네요. 테이블마운틴은 바람이 너무 세게 분다는군요."

"우리는 오늘 희망봉에 갈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

이런, 이런, 어찌 이런 일이!


이름은 안나.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엄마, 오빠랑 가족 여행 중인 체코 아가씨였다. 가족 여행이라 소형차를 빌려 케이프타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 해안을 따라 요하네스버그까지 갈 예정이란다.


이런 횡재가 여행할 때 가끔씩 양념처럼 생기는데 이번에는 초반부터 진하게 양념 맛을 보다니 앞으로 조짐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뜻밖에 동양인 손님을 태운 자동차는 신이 났는지 부르릉~ 하며 기합을 넣더니 케이프타운을 벗어나 시원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아래가 제 세상인 양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해변 도로를 한참이나 달리다가 길 옆 전망 포인트에서 차를 세웠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해안에는 넓게 모래사장이 전개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세일링하는 청년들이 여럿 보였다. 이곳은 바람이 좋은 바다 같았다. 알록달록한 돛을 달고 제 키만 한 파도를 뛰어넘는 모습들이 경쾌하고 신나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마주쳐오는 파도를 타고 넘는 듯한 착각에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생각 속에 있는데 그들은 바닷속에 있으니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었다. 세일링이 어찌 젊은이의 전유물이라고 할까마는 세상살이에 쫓겨서 별다른 취미, 특기를 익히지 못했으니 이렇게 저들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역시 내 탓이었구나. 내 노력이 모자랐기 때문이구나. 친구 D군은 이 나이에도 자주 한강에 나가 돛배를 탄다고 했지 아마.


카이트에 매달린 보드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카이트보딩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람이 강해서인지 높게 뜬 카이트를 따라 보드는 빠르게 바다 가운데로 가마득히 나갔다.


아니, 어쩌자고 자꾸 바닷속으로 나가나?


아스라이 검푸른 바다에서 점처럼 가물거리는 보드를 보며 내심 걱정이 앞섰다. 젊은이들이라 뒷생각 없이 바람 따라 열정 따라 바다로, 바다로 나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보니 역시 높은 파도를 가르며 카이트보더들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해변으로 되돌아왔다. 그저 재미만 가득 담아온 것 같았다.


해안선은 구불구불 한없이 굽었고 군데군데 바다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유려한 만(灣)이 형성되어 있다. 만을 중심으로 마을이 있고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고급 주택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급 호텔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은 유럽의 어느 휴양지와 비교해도 호사스러운 면에선 뒤지지 않았다. 듬성듬성 눈에 띄는 흑인을 제외한다면 여기가 아프리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팬티만 간신히 걸친 부시맨이 맨발에 몽둥이를 들고 춤추는 곳이라는 나의 견고한 선입견 때문에 아주 낯선 대륙이었던 아프리카. 그런데 팬티 입은 사람을 만나려면 이제 민속촌이나 가야 할 판이니 한순간에 생각이 뒤엉켜버렸다. 앞으로 여행하며 어떻게 뒤엉킨 아프리카를 풀어낼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도미토리의 얼리 버드

얼리버드.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자주 들었는데 그간 무심히 들어 넘겼다가 이곳 아프리카에 와서 새삼 떠오른 단어였다. 밝고 상큼한 뉘앙스와 함께.


케이프타운에 와서는 대개 아침 6시경 저절로 잠이 깼다. 6시면 창문이 어느 정도 환해지고 달리는 자동차 소음도 차츰 커지는 시간이지만 왠지 얼리 버드가 된 느낌이었다. 하기야 룸메이트들은 대부분 8시가 넘어서야 슬슬 타월을 걸치고 샤워장으로 가는 데 비하면 대단한 얼리 버드인 셈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도 젊은 여행자의 특권일까?


밤늦은 시간인데도 호스텔 바는 음악 소리에 천장이 쩌렁쩌렁 울리고 와인 한잔, 맥주 한잔을 걸친 청춘 남녀들은 마냥 웃으며 떠들어댔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이 다가와서야 잠자리에 드는 이들이니 이른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덕분에 나는 정말로 얼리 버드가 된 듯 살금살금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나는 여행 중에는 주로 아침 시간에 전날 일들을 정리한다.


호스텔 베란다에 앉아 테이블마운틴을 올랐던 일을 찬찬히 되씹어보고 있는데 열여섯 살 수줍은 시골 처녀 눈길처럼 보드라운 아침 바람 한 자락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휴! 좋구나!"


산들바람 없어도 조용히 앉아 있기에는 충분히 시원한 남국의 아침인데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임금인들 무슨 소용이며 사장인들 무슨 소용이리오? 한 줌 바람만 있어도 부러울 게 없는데.


대부분 여행자에게 아침은 최고의 순간이다. 하루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라도 흥얼대다 보면 참 잘 왔구나라는 만족감이 더욱 커진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춘삼월 눈 녹듯 하고 여행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들뜬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 세세하게 미리 계획을 짜는 대신 대략적인 여정과 일정만 정하는 타입이다. 아무리 잘 짠 계획도 여행지에 가면 틀어지기 일쑤이므로 현지 돌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여행을 쉬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일상 탈출을 기대하며 떠나는 마당에 의외의 상황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쁨이 되기도, 아쉬움을 안기기도 하는 사건들이 결국엔 추억이 되고, 이 추억들이 쌓여 여행의 맛을 더욱 진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낯선 곳이라도 다 사람 사는 세상이겠거니 하고 마음을 편히 먹는 편인데, 그럼에도 이방인에게 생소하고 익숙지 않은 문제들이 생긴다. 이럴 땐 도미토리의 여행자들이 벌이는 이야기판에 끼어들면 대부분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여행자들이 이미 겪은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담이 곧 해답이 되는 것이다. 해답뿐만이 아니라 유럽도 가고, 남극도 가며 보고 듣고 겪은 희로애락 인간만사가 이야기판에 넘쳐난다. 그래서 도미토리는 항상 뜨겁고 활기차다.



쿼드바이크 타고 사막을 탐험하다      

아프리카 사막까지 왔는데 적어도 한 가지 액티비티는 경험해야겠기에 긴가민가하며 쿼드바이크를 신청했다.


일행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키가 큰 백인 청년은 반갑다며 멋쩍게 웃더니 간단한 교육을 실시했다. 교관이 일일이 쿼드바이크의 시동을 걸어주었다. 일행은 앞장선 교관을 따라 센터를 떠났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성능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자, 준비되었지요?"


교관은 쿼드바이크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우리도 대오를 유지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사막은 아직 초입이라 평탄하지만 모래 위를 달리는 느낌이 바퀴에서 엉덩이로 전해왔다.


교관을 따라 모래 사면을 전속력으로 오르자 몸과 쿼드바이크가 함께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곧 엎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몸과 허벅지는 자꾸 반대편으로 힘을 줬다. 겁이 나서 중간쯤 올랐을 때 방향을 틀어 사면을 타고 내려갔다. 이번에는 앞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두려움에 온몸이 굳었다.


"으악!"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으로 액셀러레이터 레버를 최대한 쥐어틀어 속도를 높이며 사면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오르내리는 것을 반복할수록 요령이 생겨서 롤러코스트의 짜릿한 전율을 즐길 수 있었다. 내 눈에는 사막 언덕이 모두 같은 모양으로 보이는데 교관은 코스를 용케도 잘 찾아갔다. 롤러코스트 코스, 평탄 코스, 급회전 코스가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가운데 짜릿한 느낌은 점차 고조되었다.


사막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잠시 휴식 겸 포토 타임을 갖기 위해서다. 멀리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은 뼛속까지 시릴 듯 짙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간간이 떠 있는 흰 구름 때문에 더욱 하늘이 파랗게 보였다. 금빛 모래와 파란색 하늘의 대비.


나는 또래 중에는 그래도 모험지향적인 여행을 하는 축에 든다. 몇 차례 배낭여행도 다녀온 터라 여행 얘기가 나오면 곧잘 얼굴을 내밀며 말을 섞는다. 쿼드바이크의 여운도 가라앉힐 겸해서 맥주 캔을 들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여행 얘기로 이어졌다. 물론 내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목소리는 이내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말았다. 신 선생, 이 선생의 여행 경력이 나보다 몇 단계나 위라 족보를 견주어볼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젊은이와 여행 얘기를 할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 끼어들다가는 본전은 고사하고 몇 푼 안 되는 밑천마저 털릴지도 모른다. 밑천이야 털려도 믿음직한 후배에게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괜찮은데 참 좋은 때다라는 부러움은 어쩔 수가 없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더 넓고, 더 높은 세상을 찾아 분망하게 여행하는 젊은 세대가 마냥 부러운 것이다.


그래, 우리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들도 20, 30년 후쯤 후배들을 보며 우리같이 부러움을 느끼겠지. 그게 삶이고 순리인 것을. 오늘은 내가 가고 내일은 네가 가고.


여행은 다닐수록 인생의 연습장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여행은 성공한 사람도, 불쌍한 영혼도 만나게 해주고 희열도, 눈물도, 분노도, 체념도, 사랑도 맛보게 해주고 아름다움도, 추악함도 내보인다. 보는 것이 배우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이 성숙해가는 것인데 그런 다양함을 인생에 그려보기도 하고 지워보기도 할 수 있다니 여행이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지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여행은 젊은이에게 주식도 되고 보약도 되는 것이겠지. 젊을 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많이 배우고 경험해서 젊은이들이 내일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졌으면 좋겠다. 파이팅!



여행은 버리는 연습       

여행 중에는 걸려올 전화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다. 여정에만 충실하면 되고 시간을 잊기에 안성맞춤인 여행 중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즐겁다. 이렇게 한번 시간을 놓아버리니 머리도 마음도 새털처럼 가벼운 게 사는 맛이 더욱 존득했다. 사는 것이 즐겁다 보니 후다닥 날짜가 지나가버려 오늘이 며칠인지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아내는 또 혀를 끌끌 차겠지. 철없는 남편이라고.


문득 어떤 회사의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영광스러운 정년퇴직을 했다.

모두들 수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와이프가 째려본다.

아, 내일부터 월급이 안 나온다.


시간을 잊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항상 짊어져야 하는 갖가지 욕심을 내려놓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을 잊는 여행이 즐겁다면 욕심을 내려놓은 일상도 즐거운 나날이 될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버릴 것이 없어 행복하다.


어느 문인이 재작년 세상을 떠나면서 하신 말씀인데 한동안 잔잔한 물결이 되어 넓게 퍼져 나갔다. 환갑이 가까워오자 그것도 나이라고 어깨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우리는 그 말씀에 공감해 이제 버리기를 시작할 때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기에 이르렀다. 말이 쉬워 버리기지 실천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욕심을 버리려니 욕심은 더욱 커지고 미련을 버리려니 미련은 더더욱 악착같이 달라붙어 커다란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구도하는 종교인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어찌 쉽게 욕망을 떼고 미련을 떨칠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돌아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한평생 무언가 움켜쥐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온 내가….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갖고 싶고 되고 싶은 욕심, 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심, 휘두르고 소리치고 싶은 욕심이 마음에 가득하였으니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걸음걸이는 무거웠으리라. 욕심이 없었다면, 아니 적었다면 훨씬 많은 것을 이루었을 텐데. 젊음의 야망은 야망이어야 빛이 나는데 욕심을 더하니 변질되고 미련이 쌓이니 왜곡되어 지난 삶을 후회하게 되나 보다.


욕심을 버리기에는 여행이 안성맞춤이다. 여행을 나서면 한줌 솔바람에도 행복을 느끼고 푸른 하늘만 봐도 마음이 그득하니 욕심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시간을 잊고 미련도 씻어 보내면 여행자는 참으로 행복해진다. 세상이 낙원처럼 느껴진다.


비록 아내가 또 한 번 혀를 끌끌 차더라도 아프리카에 있는 지금은 행복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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