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

   
오주환
ǻ
북허브
   
15000
2011�� 07��



■ 책 소개
일반인의 시각에서 쉽게 볼수 있는 ‘눈높이 문화유산 여행 책!’ 

여행기자로 이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작가가 만난 여행지는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폐허가 된 절터에 덩그러니 남은 석탑도, 깊은 산중의사찰도, 화려한 단청을 뽐내는 건물도, 심지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만 같은 오지의 자연에도 우리의 역사가 있었고, 선인들의 예술혼이담겨 있었다. 

이렇듯 문화유산에 담긴 우리의 역사와선인들의 예술혼을 읽어내고자 한 책으로, 역사여행을 할 때 많이 접하게 되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사진과 삽화를 곁들였다. 또한 전국의 지역별로 역사여행을 쉽게 떠날 수 있는 추천 코스를 제시했다. 
또한 이 책은 문화유산에 대한 상식, 교양서인 동시에 부모가 읽고 아이에게 문화유산에대해 소개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들고, 문화기행을 떠나보자! 역사에 대해 문화유산에 대해 조금의 애정이라도 있다면 우리는누구나 훌륭한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오주환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했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거치는 동안 여행기자로일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어렵고 재미없어 하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글 쓰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길 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기 위해 늘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이다. 저서로 『문화유산을 찾아서』『답사여행 100배 즐기기』『조선500년 풍류지를 찾아서』『조선왕조 상식여행』『내 마음 속 꼭꼭 숨겨둔 여행지』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Part 1 문화유산이란
역사여행을 떠나기 전에
문화유산의 종류 

Part 2불교유산
절 
불탑 
불상 
전각 
부도 
탑비 
석등 
당간지주 
불화
불구 

Part 3목조건축
목조건축의 특징 
목조건축 구성요소 
공포
가구
지붕
대문

Part 4 성곽
성곽

Part 5석조건축
석비 
돌다리 
석빙고 

Part 6 고분
고분

부록 
문화유산 여행 코스
국보·보물 목록





부모와 함께 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


문화유산이란

역사여행을 떠나기 전에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일반 여행과는 좀 다른 면이 있다. 역사도 알아야 하고, 어렵게 풀이되어 있는 안내판의 설명을 이해하자니 전문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그만큼 어렵고 재미가 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재미없지는 않다. 어렵다고 느끼는 건 무언가 거창한 공부를 해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잘 몰라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걸 기대하지 말자.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나씩 알아가는 게 역사여행이다.


책을 통해서 혹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현장에서 실물을 통해 찾아낸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마치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가서 관심을 가지고 조금만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조상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바라보면 된다. 우리의 여행이 전문가들이나 대학생들이 떠나는 전문 답사에 비할 순 없다. 단지 놀고먹는 여행에 비해 좀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여행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싶다. 한 번쯤 시간을 투자해 문화유산 여행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도움말을 주고자 하니, 이를 두고 문화유산 여행의 십계명쯤이라고 해두자.


1. 여행지는 계절을 고려해 선택한다

떠나려는 시점에 가장 풍요로운 곳을 여행지로 선택한다. 그리고 주위에 어떤 문화유산이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볼 코스를 계획한다. 하동의 쌍계사를 간다면 1년 중 가장 적절한 때는 벚꽃과 배꽃으로 천지가 물드는 4월 초순이 좋게 마련이다.


2. 일정을 잘 짜야 유익한 여행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랑, 며칠 동안,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주말의 복잡한 시간대를 피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3. 여행지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일정과 여행지에 대한 선택이 끝나면 내실 있는 여행을 위해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면 의외로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지도책이나 내비게이션은 필수

내비게이션에 소재지만 입력하면 길 찾기는 식은 죽 먹기다. 만약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전국의 길이 상세하게 나와 있는 지도책을 구입하도록 하자. 지도책은 10만분의 1짜리가 적당하다. 지도 위에 1cm가 실제 거리 1km를 축약해 놓은 것이므로 거리를 짐작하기 편하고 웬만한 도로, 즉 지방도로는 물론이고 시멘트도로, 비포장도로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어 길눈이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다.


5. 여행카드를 기록하자

여행카드에 들어갈 내용은 일시, 함께 간 사람, 여행 코스, 여행지 개요, 문화유산 개요, 전체적인 인상, 계절 특징, 지역 특산물이나 별미, 약도 등이다. 처음엔 다소 번거로울 수도 있으나 하나둘 카드 작업이 진행될수록 재미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녀와 함께 떠나는 부모들이라면 아이들에게 꼭 카드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6. 입장권과 팜플렛을 모으자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내용과 사진들이 있어 두고두고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7. 간단한 카메라 조작법을 익혀라

초보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간단한 촬영 노하우를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우선 시간대를 잘 맞추어야 한다. 이른 아침이나 오후 늦은 시간은 햇빛의 노출도가 약하다. 절의 경우 나무, 각종 전각, 불탑 등이 많아 양지와 음지가 뒤섞여 있을 때가 많다. 따라서 사진 내에서 음지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능하면 줄여 찍는 게 좋다. 카메라는 햇빛을 등에 지고 찍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햇빛을 보고 찍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초보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카메라 렌즈로 들어오는 햇빛의 길목을 손이나 노트 따위로 막으면서 찍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멀리서 전경을 잡기보다 가까이서 피사체를 크게 담는 버릇을 들이라는 것이다.


8. 지역 별미와 특산물을 알아 둔다

비싼 돈 내고 그저 그런 음식을 먹기 보단 확실한 방법을 찾아 두자. 지역 별미를 찾아보고, 그 음식을 잘 하는 식당의 전화번호만 체크해 가면 현지에서 금세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지역 특산물을 알고 가면 알뜰 쇼핑의 기회를 만날 수 있다.


9. 여행지에 대한 편의 시설을 체크해 두어라

여행지 한 곳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엔 그 주위에 편의 시설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로 숙박 시설과 음식점 등이 되겠는데, 숙박지의 경우 상세하게 알아두는 게 좋다. 이는 다음에 들를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역사여행에 취미를 붙인 사람이라면 한 여행지를 일생 동안 최소한 3∼4번은 가기 마련이다.


10. 간단한 후기를 쓰자

다녀온 뒤 여행의 성과와 느낌 등을 전반적으로 적어보자. 이는 여행카드와는 또 다른 것으로 자신의 여행을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불교유산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는 불교의 나라였다. 불교가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불교문화를 알기 위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절이다. 절은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닦고 불교의 교리를 전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삼보가 모셔져 있고, 모든 불교의 예법과 전승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문화의 보물창고다.


불교의 시작과 절의 건립 시기는 서로 다르다. 석가모니가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전국을 순례하며 법을 전하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절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석가모니와 그를 따르는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아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전국을 떠돌며 설교하며 수행하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석가모니는 우기 동안 바깥 출입을 삼가는 계율을 정하고, 승려들이 한 곳에 모여 생활하게 하였다. 이것이 절이 생겨나게 된 이유다.


절은 우기에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된 공동 주거지란 성격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종교 의례를 행하는 곳으로 성격이 변화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에 절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형식으로 된 의례를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 행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의 근거지였던 절은 규모나 숫자에서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되었다.



* 쉬어가기

■ 절은 왜 산에 있나

불교가 국교였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평지에도 절이 많았다. 그러나 그 뒤에 산 속에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를 탄압했기 때문에 절이 산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의 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속세의 이익이나 행복보다는 자기 수양을 통해 불도를 깨치는 것이 중요하므로 조용한 산 속이 적합했다. 풍수지리도 한 몫 했다. 명산의 좋은 곳에 절을 세워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믿음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 사상에도 기인한다. 금강산, 오대산 등 신령이 깃든 산에 절을 짓고 불교의 성지로 발전시켰다.


■ 불가에서 말하는 삼보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이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부처(불), 부처의 말씀인 불전(법), 부처를 따르는 사람(승)이 그것이다. 삼보가 모셔져 있는 절을 3보사찰이라 한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3보사찰이다. 통도사는 부처의 사리와 가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 송광사는 지눌을 위시한 16국사를 배출해서 승보사찰이라고 불린다.



목조건축

목조건축의 특징     

자연과 함께 하는 목조건축 누구라도 한국 건축의 특징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우리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의 조화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물은 위압적이지 않다. 2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궁궐과 절의 몇몇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층건물이다. 이것은 자연과의 조화라는 근본 위에 음양오행설이 더해져 나타난 현상이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서 산은 양이며, 평지는 음이다. 양이 강한 지세에 고층건물, 즉 양의 건물을 지으면 양과 양이 상극을 이뤄 지력이 약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지세에 순응하며 양과 음이 서로 보완작용을 할 수 있도록 고층건물보다는 단층건물을 많이 지었다. 건축물의 규모에 있어서도 자연이란 존재는 크게 작용한다. 자연을 압도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적절한 규모를 생각했다.


자연과의 공존

자연과의 조화를 넘어 자연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목조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의 대응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산골의 주택의 경우 억지로 정원을 조성하거나 집을 파헤치지 않고 사면으로 둘러싸인 자연 그대로를 정원으로 삼았다. 창을 열면 멀리 보이는 큰 소나무 한 그루는 정원수로 이용되었다. 절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산 아래에서는 전혀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다. 산길을 올라 일주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절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는 자연을 해치며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주위 산세의 밋밋한 곳을 채워주는 역할도 한다.



재료의 특성을 이용

한국에서 가장 흔한 목재는 육송이었다. 육송은 송진이 많아 다듬고 손질하기 어렵고, 마름질 후에도 잘 터지고 비틀어지는 특성을 지녔다. 또한 장대한 부재를 얻기 힘들고 곧게 자란 목재가 드문 수종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되는 목재에 비해 좋은 수종이라 할 수 없는 재료인 것이다. 조상들이 선택한 방법은 육송의 재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육송이 틀어지고 터질 것을 감안한 정밀도를 찾아내 적용한 것이다. 건축 재료인 육송의 재질적 특성에 순응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필요 이상의 노력이나 정성을 쓰지 않는 현명함에서 나온 선택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 재료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흔히 절이나 고택에 가면 기둥이나 대들보에 S형으로 구부러진 큰 나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가공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시각적 효과보다는 구부러진 나무를 매우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목재가 지닌 최상의 특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선의 부재가 갖는 단조로움을 탈피해 곡선을 아름답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국 목조건축의 조형미는 깊고 큰 멋을 지향한 조촐함과 의젓함이며, 자연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자연으로의 귀환을 목표로 삼고 있다.


* 쉬어가기

■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건물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옥개 부분을 보수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다. 건립 연대는 그보다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이 조사되기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인되었던 건물로 주심포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가장 오랜 건물이다. 1937∼1940년에 해체·수리될 당시 1308년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 가장 큰 목조건물

조선 선조 36년(1603)에 지어진 경남 통영의 세병관이 목조건축물 중에서 평면 면적이 가장 큰 건물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어진 여수 진남관은 객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건물이다. 숙종 23년(1697)에 건립된 화엄사 각황전은 법당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중층의 법당인 각황전은 상·하층이 모두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다포양식이다.



성곽

조선 세종 때의 학자 양성지는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했다. 일찍이 중국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쳐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조상들의 성곽 축조 기술은 뛰어났다.


이 땅의 전략적 요충지에는 반드시 성곽이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조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조선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한이 위만을 침공했을 때 왕검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조선의 말기,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는 성곽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여러 달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정도로 본격적인 성곽전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담을 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과 돌로 쌓은 석축, 벽돌로 쌓는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이라고 했을 때는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 바깥쪽의 것을 곽 또는 외성이라고 구분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이라 부른다.


*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

자연의 방어력 이용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 성을 쌓을 때 자연의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러 개의 계곡을 둘러싸며 구축되기도 하고 산등성이의 구불거리는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니 성벽을 평지에서보다 낮게 쌓아도 밖에서 볼 때는 높아 보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성 안에서는 성벽이 낮아서 유사시 방어에 유리하다. 계곡은 폭이 좁고 물이 흘러서 적병의 이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행동도 자유롭지 못해 공격력을 약화시키는 이점이 있다. 자연 지형이 취약한 부분에는 방어에 유리하도록 구조물을 쌓거나 주변 지형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썼다.


지형 활용한 효율적 구조

성을 축조할 때 산의 능선을 최대한 활용하다 보니 부대시설을 배치할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성문은 계곡을 중심으로 왼편이나 오른편에 설치해 드나들기 편리하도록 했다. 성문 앞길은 직선이 아닌 S자형으로 부대시설의 배치에 있어서 산의 능선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수문과 성문을 계곡의 중앙과 그 좌우에 설치하여 다니기 편리하도록 했다. 반대로 담문은 산등성이로 통하는 능선부의 바로 아래 비탈진 부분을 이용하여 설치했다. 치성(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산성의 경우 비교적 평탄한 지형의 성벽이 곧게 뻗은 곳에서 산등성이 쪽에 배치되었으며 대부분 곡선을 이룬다.


자연석이 주재료

우리나라는 성을 쌓는 주재료가 돌이다. 그렇기 때문에 흙으로 판축의 기법을 사용해 쌓은 중국의 토성과는 축성기술면에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성은 석성으로 자연할석의 평평한 한쪽 면을 성벽의 바깥부분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뗄 때 생기는 부스러기를 넣으며, 다시 그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우는 내탁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작업 비용을 최소화하는 장점이 있다. 성을 쌓는 재료는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돌을 이용했다. 돌이 없는 산이라면 경사면을 깎아 성벽을 만들기도 했다.


수비 유리한 위치 선정

평지의 경우에는 물을 이용하여 천연의 저지선을 만들었고, 산성의 경우는 규봉(넘겨다보는 산)을 피하며 위로부터 공격을 못하도록 위치를 선정한다. 또한 성을 부수는 무기인 충차가 산의 험한 지형을 올라오기 어려운 점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평지성은 대개 앞에는 물이 좌우에서 합쳐져 자연적 참호를 이루게 하고, 뒤에는 험준한 산에 의지하도록 하여 자연에 방어력을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위치 선정은 사람의 힘을 가장 덜 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석조건축

돌다리 

이 땅의 크고 작은 하천에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중간 중간 이어 놓은 징검다리, 통나무와 솔가지 등 작은 나무를 엮어서 만든 섶다리 등 무수히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돌다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리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홍수 같은 자연재해에 사라지고 현재 옛 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돌다리는 다리 밑이 무지개처럼 휘어 있는 반원형의 홍예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명 아치교, 홍교, 무지개다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홍예교는 하천 양쪽에서 돌을 쌓아 올라가다 중앙에 이맛돌이라는 쐐기모양의 돌을 넣어서 완성한다. 이맛돌만 빠지지 않으면 홍예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리 밑을 무지개 모양으로 하는 것은 수평으로 했을 때보다 돌과 돌 사이에 작용하는 압축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가설할 때 석회 등의 접착제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또한 홍예교는 일반 다리에 비해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쉬어가기

■ 이색 돌다리 진천농교

충북 진천군 굴티마을 앞 세금천에는 진천농교라는 독특한 형태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물을 건너기 위해 지네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기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다리는 자연석으로 쌓은 다리 중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라고 한다.


작은 돌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 올렸다. 돌을 쌓을 때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돌의 생긴 모습이 잘 맞물리게 쌓았다. 다리 위에는 커다란 통돌을 하나 또는 둘을 올려 사람이 지날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다리의 폭과 두께가 위로 갈수록 좁아지고 다리 기둥 양끝을 유선형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물의 흐름에 영향을 덜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는 다리 길이가 100m가 넘고 교각 수도 28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m, 교각 24개만 남아 있다.



고분

사람이 시신을 매장한 흔적은 약 7∼8만 년 전인 중기구석기 시대부터 나타났다고 하며, 청동기시대 이후에 형식이 다양해진다. 무덤 중에서 가장 간단한 형식은 시신을 땅 위에 놓고 돌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돌무지무덤이라고 한다.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덮는 것은 구덩무덤(토장묘)이라고 한다. 이들 무덤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면에 둥글게 흙을 쌓게 되었는데, 이를 봉토라고 한다.


무덤 형태는 계급사회로 들어오면서 변화된다. 권력을 가진 왕족이나 귀족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죽어서도 유지하기 위해 일반 서민들과는 차별화된 무덤을 조성했다. 일반 서민들은 구덩무덤을 기본으로 간단한 형식의 무덤을 만들지만, 권력자들은 크고 복잡한 무덤을 조성한다.


무덤 안에는 장식류, 무기류, 의식용 그릇류 등 많은 껴묻거리(부장품)를 매장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제작 연대가 비슷한 것들이어서 연대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에 일정한 형식과 의미를 부여했는데, 지배층의 무덤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지배층의 무덤, 즉 고분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자들이 말하는 특정 시기란 선시시대의 부족사회, 고대 왕권이 확립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이후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법이 유행해 고분 축조가 쇠퇴하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무덤이 커지고 내부에 각종 껴묻거리를 풍부하게 매장하였기 때문에, 고분은 기록에 나타나는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을 실제로 보여주거나 보충 설명해준다. 껴묻거리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빈약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조선시대 무덤의 대표적인 것은 왕릉이다. 왕릉은 조선 왕조의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 등 능원제도가 잘 나타나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하여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소중한 자산이다. 유네스코는 조선 왕릉의 이러한 점들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판단해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왕이 죽으면 장례는 왕의 시신을 안치한 빈소의 제사와 호위를 담당하는 빈전도감, 왕의 장례에 관한 업무를 책임지는 국장도감, 왕릉 축조를 맡은 산릉도감에서 순서대로 진행을 한다. 왕의 무덤 자리는 미리 정해 놓지 않고 왕실에서 그때마다 상지관이라 해서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을 보내 최고의 명당을 찾도록 했다.


명당을 선택하면 마지막으로 토질 검사를 한다. 관이 들어설 땅은 물기가 없으면서도 너무 건조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흙의 입자가 곱고 윤이 나야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까다로운 조건이 만족되어야 비로소 왕의 무덤 자리로 손색이 없다. 왕릉 조성을 위하여 명당을 찾는 데 대략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다. 능역에 동원된 총 인원은 6,000명 내지 9,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 쉬어가기

■ 총(塚)과 분(墳)은 이렇게 다르다

무덤의 이름을 보면 천마총, 황남대총, 장군총이라고 해서 총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반면에 송산리고분, 능산리고분이라고 해서 분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다 같은 무덤인데 어느 것은 총으로, 또 어느 것은 분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분은 흙무덤으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유력자의 무덤을 말한다. 총은 문헌상으로 또는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살펴봤을 때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 붙인다. 만약 매장자의 신원이 확실하다면 (왕)릉이라고 명명한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