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음양오행은 여전히 매력적인 탐구 주제다.『주역』의 사고를 이루는 기본적인 개념이 음양이고 중국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음양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방대한음양오행을 오랫동안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쉽고 재미있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1994년의 초판 이후 나온 개정판이다.
■ 저자 전창선· 어윤형
경희대한의학과를 함께 다녔고, 1986년 졸업 후 서울에서 행림(杏林)의 뜻을 펼치고 있다. 한의학 연구 모임 ‘추상한의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있으며, 동양정신문화의 올바른 이해와 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일주일의 3일은 진료를, 나머지 3일은 전국의 산야를 답사하며 이 땅에서자생하는 약초들을 연구·정리하는 작업에 몰두 중이다.
■ 차례
1장 잃어버린 원을찾아서
우리의 둥근 원 | 사람의 몸속에 살아 숨 쉬는 바다 | 하나를 알면 만을 안다 | 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순한 공간은 시간의 원운동을 한다 | 다이아몬드와 흑연 | 시간과 공간은 둘인가, 하나인가? |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다 | 어린 왕자의눈에만 보이는 코끼리 | 잃어버린 원을 찾아서 | 얻기 위해 비우자
2장 우주를 낚는 그물
음양이란? |우주를 낚는 그물 | 음양(陰陽)의 탄생 | 음양(陰陽)을 깨닫기 위하여
3장 세상을 보는 음양의 눈
하나. 짝이있는 우주 | 생쥐와 녹색식물 |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 | 꽃들의 유혹 | 뱀을 먹는 돼지 | 쥐와 고양이 | 도(道)란 무엇인가? | 결혼을하지 않으면? | 반상의 질서 | 하늘과 땅이 이루는 짝 | 천지(天地)의 바둑 | 머릿속에 떠 있는 해와 달 | 몸속을 밝히는 별,성신(星辰) | 여자는 월경, 남자는 수염 | 삶과 죽음의 원운동 | 음양의 상대성 | 둘. 홀로 있는 우주 | 몸과 맘 | 블랙홀은 우주의자궁 | 따뜻한 남자, 차가운 여자 | 딱딱한 오징어, 부드러운 쇠 | 오징어에 체(滯)하면 오징어를 먹는다 | 여름엔 삼계탕, 겨울엔 냉면 |자석과 지구, 그리고 우주 | 1+1=0 ?! | 심자 중앙지태극야(心者 中央之太極也) |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 만 가지 법(法)은 하나로돌아간다 | 음양의 일원성 | 셋. 밝혀지는 우주 | 결정되어야 할 음과 양 | 누가 주인인가 |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 주인과 손님은바뀐다 | 소심(笑?)과 흙탕물 | 식물과 동물 | 버섯과 선인장 | 살찌는 체질과 마른 체질 | 산삼은 명당에 나는 영약(靈藥) | 체질의한(寒)과 열(熱) | 당신의 주인은? | 녹용(鹿茸)의 효능 | 약(藥)을 보는 법 | 진맥(診脈)이란? | 풍수지리(風水地理)와 명당(明堂)| 명당(明堂)의 발복(發福) |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다 | 주인과 손님은 어디서 오는가? | 음양의역동성
4장 나는 누구인가
음양으로 풀어본컴퓨터 | 인간과 지구의 중심(中心) | 사람의 삼극(三極) | 단전(丹田)이란 | 수승화강(水升火降) | 임맥(任脈)과 독맥(督脈) |월인천강(月印千江)과 만법귀일(萬法歸一) | 뇌 속에 살고 있는 해태 | 몸과 마음의 행로 |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 램프의 요정 |중용(中庸) | 삼태극(三太極) | 시각 바꾸기 | 음양을 마치면서
음양이 뭐지?
1장 잃어버린 원을 찾아서
우주 내 삼라만상은 모두 동일한 질료와 동일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대답을 얻기까지는 동양의 자연주의적 사유 방법에 더욱 정통하셔야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던 들풀이 새로이 보이고 먼 산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자연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원(圓)이고 마지막 결론도 원으로 끝나게 됩니다. 도시를 떠나 깊고 깊은 산속에 혼자서 며칠을 지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낮이면 해는 동에서 떠서 서로 넘어가고 밤이면 달도 역시 같은 원 운동을 합니다. 나무나 풀들이 자라고 시드는 것도 직선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하나의 둥근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본모습인 이러한 원이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는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봅시다.
원시의 수렵 생활이 끝나고 농경에 의한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 철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는 농경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나 학문의 과정에서 원은 보편적인 도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4대 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는 원형의 도형이 많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영어로 spring(튀어 오름), summer(불), fall(떨어짐), winter(물)라고 하듯 순환의 사고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서구 사회는 중세를 거치면서 도시가 형성되고 기술혁명을 통한 상업 자본이 만들어지면서 농업은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습니다. 봉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반인 농업이 허물어지면서 자본주의적 체제로 전환한 것입니다. 농경이 등한시된다는 것은 곧 자연과의 결별을 뜻하는 것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구인들의 생활에서 원은 점차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 땅에서는 19세기 말 서구의 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전까지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 하여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자연주의 원리가 강인한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둥근 원-자연주의적 도형’을 잃어버린 것은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둥근 원은 녹슨 청동 거울처럼 퇴락되어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둥근 원은 우리의 선조들이 보물처럼 쥐고 계시다가 물려주신 위대한 정신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며 놀던 때를 회상하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 듯이 우리 민족 정서의 저변에 마르지 않는 강물로 흐르고 있는 자연주의의 원리, 둥근 원은 결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굴렁쇠, 동그라미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2장 우주를 낚는 그물
음양(陰陽)의 탄생
음과 양은 상대적인 두 개의 힘으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음양이 최초로 탄생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천지창조 첫째 날에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언덕 위로 해가 떠오르면 응달과 양달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을 만드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소우주(小宇宙)인 언덕을 통해 이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관찰해 봅시다. 하루해가 지고 밤이 되면 천지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편의상, 별빛과 달빛도 없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상태에서는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아무런 판단이 설 수 없습니다.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없는 것도 아니며 적막한 상태로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무극(無極)이라 합니다.
영원히 변함 없을 것 같던 어둠 속에서도 시간이 흘러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순간, 텅 비어 있던 천지가 밝은 햇빛 아래 갑자기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태양이 떠올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언덕입니다. 빛이 비치자마자 언덕에는 양달과 응달이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양달과 응달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긴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양은 순식간에 함께 태어난 것입니다. 음과 양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덕을 주시해 봅시다. 언덕이 빛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 후 응달인 음과 양달인 양이 뚜렷하게 나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언덕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비록 음양의 작용에 의해 밝은 쪽과 어두운 쪽으로 나뉘었지만 언덕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양달과 응달로 나뉘는 것과 관계없이 음양이 실현되는 장(場)인 언덕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태극이며, 음양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둘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그림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언덕은 응달과 양달이 직선으로 나뉘었는데, 태극은 응달과 양달이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네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해는 동에서 떠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서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언덕에 비치는 응달과 양달의 비율은 한쪽이 많아지면 다른 한쪽이 적어지고, 또한 반대편이 많아지면 다른 반대편이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음양은 [A]의 도형이 아닌 [B]의 도형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음과 양을 나누는 선이 곡선을 이루는 것은 시간이 직선이 아닌 곡선 운동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언덕에 시간의 개념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음양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응달과 양달이 균등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력권의 판도가 달라지고 음양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태양을 동에서 서로 움직이게 하고, 태양 빛은 언덕을 비추면서 시간에 따라 응달과 양달의 세력 변화를 일으킵니다. 변화가 일어나고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개입되면서 드디어 음양은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태극도의 이면에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곡선이 있는 것을 통해, 음양은 항상 변화가 일어나고 또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 세상을 보는 음양의 눈
하나. 짝이 있는 우주
도(道)란 무엇인가?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을 일컬어 도라 한다’는 뜻의 이 말은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늘은 양(陽)이고 땅은 음(陰)으로서 천지가 만나 도를 이루듯, 자연계에서는 암컷과 수컷이 만나 도(道)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룹니다. 결혼 생활이란 음과 양이 만나 어울려 천지의 이치를 배우는 도장(道場)과도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음과 양은 힘겨운 조화를 이루게 되고 천지(天地)의 이치를 가장 현실적으로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음양이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면 창조가 일어납니다. 즉, 천(天)과 지(地)가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녀의 화합을 통해 자식이 생겨납니다. 이제 가정이 가지고 있는 그 큰 뜻을 느낄 수 있겠죠? 아내와 남편은 마주 보고 있는 음과 양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마침내 도(道)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음양의 상대성
언덕의 응달과 양달처럼 현상계에 음이 존재하면 양이 상대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음양의 상대성’이라고 합니다. 음양의 상대성이야말로 음양으로 하여금 수천 수만 가지의 현상을 설명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의 실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자연은 신비롭게도 상대적인 두 가지로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 홀로 있는 우주
따뜻한 남자, 차가운 여자
하나 속에 정반대되는 음과 양의 성질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는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개체의 형태나 성질은 반대되는 두 힘에 의해 이루어져 있습니다.
겉이 딱딱하면 속이 부드러운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겉이 부드러우면 속이 딱딱한 것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 속에 공존하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이치를 인체에도 적용해 봅시다. 인체는 하늘로 올라갈수록 바깥에 뼈가 있어 겉이 딱딱하고 속이 부드러우며, 땅으로 내려갈수록 속에 뼈가 있어 속이 딱딱하고 겉이 부드럽습니다. 우리 인체에서 양(陽)인 상부는 외강내유하며, 음(陰)인 하부는 내강외유합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하나 속에 맞물려 있는 것은 형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물의 성질을 통해 강유를 살펴봅시다. 이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러운 것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토록 부드러운 물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본성을 숨기고 있다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딱딱하게 되지 못합니다. 쉽게 들 수 있는 예가 바로 콘크리트입니다. 시멘트는 물을 만나지 못하면 가루일 뿐입니다. 물이 시멘트를 결집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딱딱한 콘크리트가 되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만물을 하나로 붙이는 것 역시 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부드러운 물속에 숨은 본성이 딱딱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수(水)를 북방(北方)에 배속하고 천지의 기운이 하나로 응결된 모습으로 추상(抽象)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도 이와 같습니다. 여자는 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여자의 이면에는 강인한 본성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강해 보이는 남자의 이면에 한없이 약한 본성이 숨어 있습니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여자의 속마음이 활화산같이 타오를 수 있으며, 항상 친절한 여자의 속마음이 의외로 냉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겉이 부드러우면 속이 딱딱하고, 속이 부드러우면 겉이 딱딱합니다. 강유(剛柔)는 하나 속의 음과 양이 태극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음양의 일원성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각각의 대상은 개체로서 홀로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우주입니다. 이러한 하나의 우주는 벌판에 외로이 솟아 있는 언덕처럼 홀로 존재하지만, 언덕이 양달과 응달을 동시에 품고 있듯 그 이면에는 음과 양의 반대되는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질을 음양의 일원성이라고 합니다. 짝이 있는 우주에서 관찰된 음양의 상대성과 마찬가지로 음양의 일원성은 삼라만상 어디에나 적용되는 이치입니다.
동양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실제 모습을 보고 거기에 숨어 있는 성질을 뽑아내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이런 이치를 통해 사물을 관찰한다면 침묵만 하고 있는 듯한 자연이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셋. 밝혀지는 우주
주인과 손님은 바뀐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절대적인 음과 절대적인 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인과 손님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지구의 상황을 봅시다. 봄과 여름 동안은 낮이 길어 태양이 지구를 주도하므로 지구의 주인은 양(陽)이 되고, 음(陰)은 손님입니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 동안은 밤이 길어져 달이 지구를 주도하므로 지구의 주인은 음이 되고, 양은 손님이 됩니다. 하루를 놓고 보더라도 주인과 손님이 뒤바뀝니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이 지구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작은 원은 큰 원 속에서 큰 원의 지배를 받습니다. 즉, 하루의 주인과 손님은 일 년의 주인과 손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지구의 입장에서 해와 달을 통틀어 생각해 볼 때 절대적인 주인과 손님은 없습니다. 하지만 태양과 같은 양이 주인이 되고 달과 같은 음이 손님이 됩니다. 왜냐하면 양은 알맹이고 음은 껍데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알맹이와 껍데기의 음양은 남녀의 음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도 순양(純陽)이 아니고, 여자도 순음(純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음양이 혼융되어 일대일의 힘을 유지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바뀌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4장 나는 누구인가
몸과 마음의 행로
인간은 몸과 마음이 합쳐져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합쳐진 모습은 태극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삶의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되는지 음양의 원리를 통해 밝혀 봅시다. 먼저 몸을 봅시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수정란을 이루며 우리의 몸은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음정(陰精)과 아버지의 양정(陽精)이 서로 합쳐진 수정란은 급속도로 분열과 성장을 거듭해 마침내 출산할 때 약 2천억에 가까운 세포를 가진 태아가 됩니다.
출산 이후에도 우리의 몸은 계속 성장하는데, 약 30세 전후에 종적(縱的)인 성장이 멈추고도 죽을 때까지 각 조직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합니다. 즉, 육체적 상황인 몸은 호흡이 멈출 때까지 지속적으로 세포 분열을 일으키며 자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마음을 봅시다. 우리의 몸을 끌고 다니는 이면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의 마음은 백지처럼 순결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배우고 언어를 통해 사고의 체계가 서면 비어 있던 무질서의 마음이 질서로 바뀌어 갑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도 이루어지며 부모의 가정교육, 학교교육을 통해 사고는 더욱더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과정은 몸과 정반대의 진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은 한없이 분열하지만 마음은 거꾸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듯 몸은 한 점 태극(太極)에서 출발하여 한없이 분열하는 과정이며, 마음은 분열되어 백지처럼 비어 있는 무극(无極)에서 출발하여 한없이 수렴하는 과정입니다.
위 그림을 통해 다시 봅시다. 몸은 양정(兩精)이 상박(相搏)하여 북방의 일점 태극으로 태어납니다. 몸이 점차 자라나는 과정은 동남방에서 분열을 거듭하는 과정으로, 호흡을 통해 기(氣)를 받으며 음식을 통해 혈(血)을 이루어 확장되어 갑니다. 육체의 이런 과정은 태극에서 출발해 무극에서 끝납니다. 끊임없이 몸의 음형(陰刑)을 확장하며 흩어가는 것으로 팽창만 하며 거의 수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노후에 각 조직의 위축(Atrophy)이 조금씩 일어나지만 세포분열이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남방의 무극에서 태어납니다. 점차 성장하며 서북방의 수렴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부모의 꾸중과 선생님의 회초리로 통일되어 갑니다. 이 과정은 무극에서 출발해 일점 태극에서 끝나는데, 끊임없이 마음의 양신(陽神)을 모아서 충양(充陽)하는 것으로 수렴만 하지 거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몸과 마음의 행로를 잘 생각해 봅시다. 수정란이 분열되어 몸이 자라나는 것은 물질적인 성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몸이 자라나는 것은 물질이 늘어나는 것으로 영양공급을 통해 가능합니다. 영양공급을 받는 몸의 내부는 끊임없이 산화와 환원이 반복되며 쉬임 없이 돌아가는 화학 공장과도 같습니다. 그 결과 몸은 소모되고 닳게 되어 남방(南方) 분열의 끝에서 더 이상 분열할 힘이 없을 때 심장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은 물질적 상황이 아니며 그 형태조차 규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닳아가는 몸과는 반대로 오히려 빛이 나고 지혜로워지고 명(明)이 밝아지게 됩니다. 그 결과 북방(北方) 수축의 끝에서 몸과 결별하고 일점 태극으로 돌아갑니다.
몸(刑)은 삶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마음(神)은 삶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시각 바꾸기
음과 양의 이치를 체득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음형(陰形)은 보이는데 양기(陽氣)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양기는 항상 음형의 껍데기를 쓰고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감(五感)과 지각(知覺)은 음형만 파악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우주의 실상 중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절반이고,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절반으로 숨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외모만 보고 마음은 무시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강가의 둑에서 내려다보는 강은 일 년 전이든 어제이든 오늘이든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에 변함 없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강의 주체인 강물은 어떻습니까? 오늘 보는 강물이 어제와 같습니까? 우리의 눈은 같은 강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은 어제와 전혀 다른 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강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강물과 같습니다 사람의 몸은 단 1초에도 수백만의 세포가 죽어가고 수백만의 세포가 새로 태어나 교체됩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는 그 사이에 전혀 다른 몸을 입고 나타난 셈입니다. 몸만 이야기한다면 그 친구는 몇 년 전의 친구가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경직되어 왔습니다. 사물은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끊임없이 자기의 모습을 바꾸고 있습니다. 경직된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자연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길 때 자연은 비로소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