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역자: 홍은택)
ǻ
동아일보사
   
12000
2008�� 03��



>& ■ 책 소개
빌 브라이슨은 20년간영국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에 이르는 3천360킬로미터의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결심한다. 그것이 그가 다시고국과 친해지는 방식이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고요한 숲과 반짝이는 호수의 놀라운 경치를 선사한다. 특히 이 천재적인 유머작가에게는 인간의웅대한 어리석음을 목격할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다.


& 뚱뚱하고 약하지만 인간적인 친구 스티븐 카츠가 종주에 동행하면서 많은 문제가생기지만, 종주길에서 그들은 많은 낯설고 흥미로운 인물들을 만난다. 이 책은 신나게 웃고 다니는 등산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이다. 마지막 남은위대한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호소를 담고 있는 기행문학이다.


■ 저자 빌 브라이슨 (BillBryson)
미국 아이오아주 디모인 출생. 영국으로 건너가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 신문사에서 여행작가 겸 기자로활동한 후, 20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더 타임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찬미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유머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미국 뉴햄프셔 주 하노버에서 부인, 아들 4명과 함께 살고있다.


& 지은 책으로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나를 부르는 숲』『거의 모든것의 역사』『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을 비롯하여, 『햇볕에 타버린 나라에서』『잃어버린 대륙』『작은 섬에서부친 편지』 등이 있다.


■ 역자 홍은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졸업하고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이라크전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미주리대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 ‘글로벌저널리스트’의 프로듀서로 일했다.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는 네이버(nhn)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블루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옮긴 책으로 『나를 부르는 숲』『천천히 달려라』『102분』 등이 있다.


■ 차례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


& 1부 
2부 


& 옮긴이 후기 




나를 부르는 숲

나를 부르는 숲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했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 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 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튼이라든지 셰넌도어 국립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주의자 존 뮤어가 표현한 대로 빵 한 덩어리와 차 한 봉지를 낡은 배낭에 넣고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내가 막 정착한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의 6개 주를 이름)의 조그만 마을에 뜻하지 않게도 이 트레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이 길을 따라 조지아 주까지 2천 88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거나, 또는 반대 방향을 택해 거칠고 돌이 많은 화이트 마운튼을 따라 720킬로미터는 걸어서 몇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전설적인 마운트 캐터딘 산을 밟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뜨거워졌다. 근사하지 않은가. 당장 바로 하자는 충동이 불끈 솟았다.


나는 대장정을 위한 구실 찾기에 들어갔다. 게을러 터졌던 수년 간의 생활을 바로잡을 기회다. 20년간 해외에서 생활하다 돌아왔으니 조국의 장관과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명분도 있지 않은가. 또는 거친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것도 유용한 일이다. 가야 할, 더 설득력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세계의 온대지방에서 가장 다양하고 풍성한 수종을 자랑하는 위대한 숲의 하나인데,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만약 향후 50년 동안 지구의 온도가 4℃ 상승한다면 뉴잉글랜드 이남에 있는 전 애팔래치아 산맥의 숲은 사바나(대초원)로 바뀌게 된다. 이미 나무들은 놀라운 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참나무와 밤나무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소나무도 사라지고 있으며 붉은 전나무와 단풍나무 등도 그 뒤를 따를 조짐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경험하려면 지금이 적기다.


나는 종주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둘러 내 결심을 친구와 이웃, 그리고 출판사 사장에게 전해 나를 아는 사람들 치고 이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했다. 그런 뒤 관련 서적을 몇 권 사고 이미 이 트레일을 종주하거나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했다. 그 결과 이번 종주는 내가 과거에 시도했던 어떤 일보다도 훨씬 어려운,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말을 붙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아는 친구의 얘기라며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느날 희망에 부풀어 새 등산화를 신고 종주에 나섰다가 머리에 살쾡이가 달라붙어 이틀 만에 돌아오거나 소매가 찢겨진 채 피를 흘리면서 쉰 목소리로 "곰이다."를 외친 뒤 의식을 잃었다는 식의 얘기들뿐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나는, 제발 트레일의 일부분이라도 같이 갈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는 문구를 넣어 수없이 많은 카드를 지인들에게 보냈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도 회신을 보내오지 않았다. 출발 일자가 가까워진 2월의 어느 날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오랜 고향 친구 스티븐 카츠였다. 카츠와 나는 아이오와 주에서 함께 자랐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어쩌면 몇 명쯤은 내가 쓴 책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다』에서 어릴 때 유럽 여행을 함께한 친구인 카츠를 기억할 것이다. 그 이후 25년 동안 고향을 찾을 때 서너 차례 그를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본 일이 없었다. 삶이 이러하듯 우리는 이름만 친구로 남아 있을 뿐 인생의 길은 명확하게 갈렸다.


"전화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는 천천히 말했다. 할 말을 생각해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건 말이야. 같이 가도 돼?"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진짜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혼자서 산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음정 박자를 넣어 혼자서 나~는 이제 혼자 산~행을 하지 않아도~되~엔~다라고 읊조렸다. 우리는 서로 어머니의 안부를 묻거나 고향 디모인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릴 기다리고 있는 트레일과 산야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일러주었다. 그가 다음 주 수요일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이틀간 준비를 한 뒤 종주에 나서기로 했다.


1996년 3월 9일. 이제 출발이다. 길은, 살얼음이 낀 시내가 졸졸 흐르는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가 800미터쯤 지나서 다시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 여기가 처음 만날 봉우리인 프로스티 산의 밑바닥이라는 게 분명했다.


곧바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해는 빛나고 하늘은 가슴이 시릴 만큼 푸르렀지만, 지상에 있는 모든 게 갈색-갈색 나무, 갈색 땅, 얼어붙은 갈색 잎사귀-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추위처럼 달라붙은 갈색 천지. 봉우리를 향해 30미터쯤 갔을까. 눈알이 튀어나오고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서 멈추어 섰다. 카츠는 벌써 뒤로 쳐져서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전진했다. 지옥이었다. 내 몸 상태는 구제 불능이었다. 배낭은 그냥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천근만근이었다. 준비가 안 된 채 이렇게 무거운 걸 메본 것도 처음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겨운 투쟁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리 걸어도 끊임없이 새로운 봉우리가 나온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훤히 보이지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나무 커튼 사이로 가파른 비탈길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고, 그럴수록 몸의 기운은 쪽쪽 빠지고 얼마나 왔는지조차 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꼭대기라고 생각한 곳까지 억지로 몸을 끌고 올라갈 때마다 그 너머에 또 다른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다. 그것도 전혀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각 비탈마다 새로운 비탈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길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비탈이 늘어서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질 때까지 비탈이 나타난다. 마침내 그 너머로 맑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고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의 맨 위를 볼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면 "바로 저기다!"하면서 전의가 다시 살아나지만, 이내 잔인한 기만으로 끝난다. 교묘히 치고 빠지는 산 정상은 나아간 만큼 계속해서 후퇴한다. 그래서 전경을 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열릴 때마다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이 전과 다름없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결국은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우리는 단순한 일상에 빠져 들었다. 매일 아침 첫 햇살에 일어나 추위에 진저리를 치고 손을 비비면서 커피를 끓이고 짐을 정리하고 한 줌의 건포도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 뒤 고요한 숲으로 다시 출발했다.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걸었다. 그러나 거의 함께 걷질 못했다. 보속이 서로 달랐기 때문인데, 나는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항상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곰이나 멧돼지가 다가오는 소리가 아닌지 덤불을 살펴보면서-카츠가 따라오고 있는지, 그래서 만사가 OK인지를 확인했다. 길은 나보다 카츠에게 훨씬 더 힘들었지만, 기특하게도 그는 불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여러 등산객들을 만나 함께 종주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등산객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모두 다른 보속과 다른 간격으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번씩은 등산 동료들을 마주칠 수 있다. 특히 전경이 탁 트인 산마루나 깨끗한 물의 시냇가, 무엇보다 표면적으로 일정하지만 실제는 항상 그렇지 않은 간격으로 나타나는 대피소에서 마주치곤 한다. 그러나, 심지어 대낮에도 숲은 고독의 위대한 공급처다. 몇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을 때, 특히 카츠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조차 오지 않을 때 나는 완전무결한 고독을 길게 맛보았다. 그때는 그가 괜찮은지 배낭을 내려놓고 온 길을 다시 내려가본다. 카츠는 내가 되밟아 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한번은 그가 내 지팡이를 들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 지팡이는 내가 등산화 끈이나 배낭을 고쳐 메려고 나무에 기대 세워 놓고는 깜빡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관계가 된 듯했다.


4시경 우리는 쉴 장소를 정하고 텐트를 쳤다. 한 사람이 물을 뜨러 가면 다른 한 사람은 국수를 삶았다. 때로 말을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침묵을 사귀어 친구로 삼았다. 6시가 되면 어둠과 추위 그리고 지루함 때문에 각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카츠는 대개 즉각 잠에 곯아떨어졌으므로 나는 매우 신기해하는 한편, 비효율적이라고 판명난 광부의 램프를 머리에 쓰고 한 시간 가량 책을 읽었다. 그 램프는 자전거의 램프처럼 매우 변덕스러운데다가 좁은 동심원을 비출 뿐이었다. 나는 슬리핑 백 밖으로 나온 어깨가 시려오고 전등의 불빛을 받기 위해 웅크린 자세로 책을 받쳐 든 팔목이 아파오면 독서를 중단하고 어둠에 나를 맡겼다. 가만히 누워서 기묘하게도 명료하고 분명한 밤 숲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바람과 나뭇잎이 안달하면서 내쉬는 한숨과 나뭇가지의 지루한 신음, 끊임없는 중얼거림과 살랑거림에 마치 전기가 나간 회복기의 환자 병동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는 일어나 추위에 다시 진저리를 치고 손을 비비면서 말없이 우리의 사소한 일상, 배낭을 싸서 메고 모든 게 뒤엉킨 거대한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났다.


우리는 일주일을 걸었지만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덕분에 대피소를 우리 둘만 썼다. 우리는 감격했다. 트레일의 이 구간 대피소들은 대부분 새로 지은 것이어서 기막히게 깨끗했다. 모든 대피소에 옥외 화장실과 깨끗한 샘물, 야외 식탁이 딸려 있어 젖은 나무토막 위에 쪼그리지 않고 거의 정상적인 자세로 식사를 준비하고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트레일에서는 사치다.


나흘째 되던 날, 유일하게 가져온 책을 다 읽어버리고 나서 초저녁에 잠을 청하거나 카츠의 코 고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걸 알고 우울해했다. 그런데 먼저 대피소를 사용한 사람이 그레이엄 그린의 페이퍼백판 책을 두고 간 걸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으며, 정말로 감읍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가르쳐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우리 둘 다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환희를 정말 행복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하루에 24~26킬로미터를 주파했다. 이전에 우리가 38킬로미터씩 주파할 수 있을 거라고 들은 것과는 달랐지만, 우리 기준에서 보면 상당한 거리가 분명했다. 나는 용수철같이 경쾌하게 걸었고, 몸 상태도 좋아져 수년 만에 처음으로 배의 모습이 커다란 공 같지 않아 보였다. 지루한 일과가 끝나고 몸이 뻐근해지는 현상은 여전했지만, 통증이나 물집이 내 존재의 일부분이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매번 사랑스럽고 깨끗한 마을을 떠나 산으로 들어갈 때마다 단계별 변환-지저분함 속으로 우아하게 안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변환을 할 때마다 전에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첫날에는 등산이 끝날 무렵 자신이 조금 지저분해졌다는 걸 의식한다. 다음 날에는 지저분해졌다는 게 불쾌해진다. 그 다음 날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다음 날에는 지저분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잊어버린다. 배고픔도 역시 규정된 단계를 따른다. 첫날 밤에는 국수를 갈망한다. 다음 날 밤에는, 배는 고프지만 국수가 아니길 빈다. 그 다음 날 밤에는, 국수를 먹고 싶지 않지만 뭔가는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 다음 날 밤에는, 전혀 식욕을 못 느끼지만 그냥 먹는다. 왜냐하면 그게 그 시간에 내가 해 오던 일이니까. 왜 그렇게 되는지 나로선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그렇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게 있다. 카츠와 내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20분 걸을 때마다 우리는 미국인이 평균 일주일에 걷는 것보다 더 걷는 셈이 된다. 집 바깥을 나서기만 하면, 거리가 얼마가 되든, 무슨 목적으로 나가든 간에 외출의 93퍼센트는 차에 의존한다. 요즘 미국인의 평균 보행 거리-어떤 보행이든 간에, 즉 차에서 사무실, 사무실에서 차, 슈퍼마켓과 쇼핑몰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포함해서-는 일주일에 2.24킬로미터, 하루에 320미터밖에 안 된다. 웃기는 일이다.


택시는 우리를 셰넌도어 국립공원의 남쪽 관문이자 우리의 여정 제 1부를 마감하는, 가장 긴 마지막 구간의 시발점이 되는 록피시 갭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전반부 모험에 6주 반을 배정했고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휴가를 즐길 준비가 되었다. 나는 절실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가족이 그리웠다. 그리고 휴가를 떠나기 전 등산도 절정에 달할 것으로 기대했다. 셰년도어 국립공원은 길이 164킬로미터의 구간으로,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있어 나는 내 눈으로 그걸 확인하길 열망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정말 먼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셰넌도어 국립공원은 문제투성이다. 스모키보다 더 만성적인 자금 부족-냉소적인 어떤 사람은, 만성적인 자금의 부적절한 사용이라고 말했지만-에 시달리고 있다. 공원의 주요 휴양시설 중 하나인 매튜 암 캠프장은 1993년에 예산 부족으로 폐쇄되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개장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한동안 트레일 대피소들-또는 오두막집들이 문을 닫았다. 셰넌도어는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점 외에도 그들의 통제 범위를 넘는 요인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너무 북적댄다는 것이 하나다. 가장 인기 있는-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아닌-올드 랙 마운트 등산길은 수요 과잉이어서 여름 주말에 한번 오르려면 줄을 서야 한다. 그리고 공해라는 난처한 문제가 있다. 30년 전에는 특별히 맑은 날 120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텅 모뉴먼트까지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무덥고 스모그가 많은 여름날, 시계가 3~4킬로미터밖에 안 되고 최소한 48킬로미터밖에 볼 수 없다. 또, 계곡물에 내린 산성비는 공원의 송어를 씻어 내려가버렸다. 1983년에 도착한 집시나방은 엄청난 에이커에서 참나무와 히코리 나무를 유린했다. 남부의 소나무벌은 침엽수에 비슷한 해를 가했고, 로커스트 립 마이너는 수천 그루의 개아카시아 나무를 뒤틀어 놓는 부상-자비롭게도 치명적이지는 않다-을 입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넌도어 국립공원은 아름답다. 아마 내가 가 본 국립공원 중 가장 훌륭한 공원이고 또 엄청난 수의 관광객 숫자를 감안하면, 매우 잘 운영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을 보자마자 애팔래치아 트레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 되었다.


6킬로미터 정도를 걸으면 오르막길은 150킬로미터밖에 안 되었다. 날씨는 우호적이었고, 봄이 저 모퉁이를 돌아 우리를 향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사방에 생명이 살아 움직였다. 벌레들은 붕붕거리고, 다람쥐들은 날쌔게 나뭇가지를 뛰어다니고, 새들은 지저귀고, 거미줄은 햇살에 은색으로 빛났다. 나는 단단한 나뭇가지에 앉아 능청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올빼미와 내가 지나칠 때 머리를 들어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아무런 공포감도 못 느끼는 듯 다시 풀을 뜯어 먹는 한 무리의 사슴들도 보았다. 60년 전에는 블루리지 산맥의 계곡에 사슴이 한 마리도 없었다. 1936년 공원이 생긴 뒤 흰꼬리사슴 열세 마리를 방목한 뒤로, 사냥꾼도 없고 더 힘센 짐승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번성했다. 오늘날 공원 내에는 조상 사슴 열세 마리나, 근처에서 이사 온 다른 사슴의 후손인 사슴들이 5천 마리나 산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과, 진짜로 후미진 곳은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셰년도어 공원은 놀랍게도 많은 야생동물이 산다. 살쾡이와 곰, 빨간색이나 회색 여우들, 비버, 스컹크, 너구리, 날쌘 다람쥐, 그리고 우리의 친구 도롱뇽이 감탄할 만큼 많이 살고 있다. 셰넌도어는 세계에서 흑곰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1평방미터당 한 마리를 조금 넘는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국적인 것은 보지 못했지만, 다람쥐나 사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숲에서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았다. 길모퉁이를 돌다가 야생 칠면조와 어린 새끼들이 내 앞에서 트레일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어미는 품위 있고 동요하지 않았다. 잘 걷지 못하는 새끼들은 넘어지고 일어서는 데 바빠서 미처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숲은 응당 그래야 했다. 더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