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야마자키 후미오(역자 : 김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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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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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2>■ 책 소개
과연 병원은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로 적당한 것일까. 일본 현직의사인 이 책의 저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의사로서 16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고, 그 가운데 300명에 가까운환자가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약 불치의 병에 걸려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결코 내 마지막 순간을 병원에서보내고 싶지 않다.” 의사이면서도 그는 왜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까.


size=2>저자가 전하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의 실상은 비참함 바로 그 자체다.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맹순이가 그랬던것처럼, 일단 치료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환자는 의료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방치되기 십상이다. 근본적으로 병원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곳이 아니라 병든 환자를 치료해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한 곳’이고, 항상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병원에 방치된 환자는 죽는 순간까지 의사나간호사,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된 채 고독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의사나 간호사의 관심은 치료 가능한 병에만 있지 정작 죽어가는 환자에게는있지 않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위한 의료 시스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엄하고 품위 있는 인간다운 죽음도 기대하기어렵다.


size=2>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일본 의료계에는 상당한 변화가 찾아왔다. 또한 바람직한 죽음의 형태에 대한 일반인들의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매스컴도 인간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임종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환자들의 인권이공론의 마당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그때까지 무분별하게 시행하던 심폐소생술을 보다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등장했고,병원들은 앞 다투어 호스피스 병동을 늘리는 등 말기 환자에 대한 의료체계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았다.


size=2>한편 일본과 우리의 현실은 다르지 않다. 우리도 매년 사망인구의 절반가량인 11만 5천여 명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고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이 책은 우리 의료 현실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size=2>■ 저자 야마자키 후미오 
1947년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났다. 1975년 지바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8년 동안 같은 대학 부속병원 제1과에서 근무했다. 1983년부터 1년 동안 북양 사케머스 호와 남극 해저 조사선의선의로 활동했다. 1984년부터 7년 동안 지바 현 요카이치바 시립병원 수석의사를 지냈다. 지금은 도쿄 사쿠라마치 병원 호스피스 케어 연구소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속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나의 호스피스 1200일』 『내가 의사로서 할 수 있는것』 등이 있다. 


size=2>■ 역자 김대환
1971년 인천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국제통상학부 일본학과를졸업했다. 광고회사와 번역회사, 출판사 등을 거치며 일본 문화와 일본어로 된 좋은 책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현재 출판 기획자 및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관리의 달인』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size=2>한 남자의 죽음 
밀실 
협박 
시베리아 
소망 
나의 이야기 
15분동안
패닉 
5월의 바람 속에서 
약속 
아들에게 
그리고 나는 호스피스를목표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한 남자의 죽음

잃어버린 목소리

그 해 1월 12일 이른 새벽에 한 남자가 죽었다. 나이는 이른 여덟이었다. 이 남자가 인생의 마지막 두 달 가운데 희망을 느낀 기간이 있었다면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 1주일 동안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7주는 고통과 절망, 불신과 분노의 연속이었음에 틀림없다.


약 두 달 전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고열과 심한 기침에 따른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근처의 병원을 찾았다. 담당 의사는 그가 호소하는 증세와 가슴 청진만으로 중증 폐렴이라 판단했다. 서둘러 촬영한 가슴 엑스선 사진은 양쪽 폐 모두 불투명 유리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다. 이는 의사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원 후 점적(點適) 정맥 주사와 항생제 투여, 산소 흡입 등의 치료로도 그의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들은 급기야 그의 기관을 절개하기로 했다. 기관 절개로 그는 목소리를 잃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마 안 있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일시적인 처치라는 의사들의 설명을 듣고 기관 절개에 동의했다. 그의 증상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 그는 의사들과 악수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보통의 폐렴치고는 회복이 늦어지자 의사들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기관 절개구에서 빼낸 가래는 일반적인 염증에 의한 분비물과는 달랐다. 의사들은 어떤 질환을 의심하면서 기관지 내시경 검사와 식도 내시경 검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알아낸 사실에 절망했다.


입을 다문 사람들

그는 손쓰기에 너무 늦어버린 말기 식도암 환자였다. 진행될 대로 진행된 암은 식도와 주변 기관으로 번져 기관벽을 파괴하고, 식도와 기관 사이에 작은 터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터널을 통해 자극이 강한 위액, 삼킨 침과 음식물의 일부가 식도에서 폐 쪽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폐렴이 좋아질 리 없었던 것이다. 그 날부터 모든 음식물의 경구 섭취가 금지되었고, 그의 우쇄골하(오른쪽  빗장뼈 아래 - 옮긴이)에서 심장으로 연결된 정맥에 가늘고 부드러운 튜브가 삽입되었다. 앞으로는 그의 생명을 유지시킬 모든 영양분이 이 튜브를 통해 한 방울씩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병원에 입원하고 1주일이 지나자 그는 자신의 증상이 어느 일정한 상태에서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 물어보려 해도 기관을 절개한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필담을 나누려 해도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것과 묻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할 길이 없었다. 입원 2주 후부터 그는 절망의 늪에 빠졌다. 회진하는 의사와 가래를 빼주러 오는 간호사들을 그저 매섭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손발을 버둥거리며 항의할 만한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서는 더 이상 감사하고 신뢰하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신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침대 위의 물체

5주 무렵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실금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요도에 카테테르가 삽입되었고, 엉덩이에는 하루 종일 종이 기저귀가 채워지게 되었다. 또 욕창을 예방한답시고 기계적으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대는 바람에 몹시 아팠지만, 기관이 절개된 탓에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무 말도 못하는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머릿속만 온전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도 고통과 굴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들은 그가 어떤 운명을 밟을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저 연명지상주의(延命至上主義)를 표방하는 현대 의학의 가르침에 순종할 따름이다. 아내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일분일초라도 더 살 수 있게 치료하겠다는 의사들의 말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동의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모든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정해지고 말았다. 간호사들은 의사들의 방침에 따라 간호할 뿐이었고, 가족들은 그의 주위에서 그저 우왕좌왕 하기만 했다.


아내의 결심

생각해보면 그녀에게는 정말 잔혹한 나날이었다. 아무런 희망 없이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날이 야위어 가는 남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음에 틀림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남편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이별의 말을, 감사의 말을 한마디도 건넬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그녀는 몇 번이나 불신의 지옥에 빠진 남편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 진저리를 쳤지만, 그럴 때마다 의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해준 충고가 떠올랐다.


"환자에게 진실을 밝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환자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삶의 의욕을 잃고 급격히 악화됩니다. 자칫 생명이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미안한 일 아닐까요? 일분일초라도 더 살게 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생각은 마침내 폭발했다. 그녀는 의사들에게 "남편의 고통만 길게 늘려줄 뿐이니 이제 더 이상 치료는 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남편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치료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의사들은 그녀의 의견에 곧 동의했고,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가족이 바라는 일이니까 하고 그 변화의 책임 소재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도 환자인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그는 계속 잠을 잤다. 그리고 점점 더 쇠약해졌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사, 간호사, 아내 모두가 그의 호흡과 심장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로부터 1주일 후 그는 눈을 뜨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게 된 채, 정말이지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뜻도 나타낼 수 없는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솔직히 말해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의료 행위는 피곤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그녀에게 "남편의 시체를 해부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대답했다. 의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그녀의 굳은 의지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노인의 죽음은 비참하기 그지없지만 병원에서의 죽음치고는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다. 이런 죽음은 병원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의사가 된 지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1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찰했다. 그 대부분이 건강을 되찾아 퇴원했다. 그러나 300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죽는 것도 보았다. 물론 나는 의사로서 그들의 죽음을 보아온 것이다. 최근 6년 동안은 나도 모르게 죽어 가는 환자의 입장에 나 자신을 세워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의사로서 환자를 상대하면서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병원이라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려 만약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결코 내 마지막 삶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협박

병원의 방침

그는 아까부터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정지시킨 채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의 죽음은 10분쯤 전 의사가 임종을 선언했을 때부터 틀림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 눈앞에 누워 있는 남편을 내려다보면서 "여보, 이제 집으로 가요. 병원과는 이만 인연을 끊자고요" 하고 말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형제자매들은 그의 침대 주변에 놓여 있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간호사가 그의 병실로 찾아와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간호사 대기실로 좀 오시랍니다" 하고 말했다. 의사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내와 아들도 "정말이지 폐가 많았습니다" 하고 답례했다. 주치의는 "그런데…" 하고 얘기를 꺼냈다. "방금 돌아가신 분한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남편의 시체를 병리해부 해보고 싶습니다." 아내는 아연해졌다. 이 의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하지만 선생님, 남편은 암으로 첫 수술을 받았고, 그 후 두 번이나 암이 전이된 곳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병원으로 옮겨온 것도 암이 척추로 퍼져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암 때문에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고 대꾸했다.


주치의도 쉽게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확실히 암으로 돌아가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저희가 외부로부터 파악한 병소나 전이 병소뿐만 아니라 실제로 병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자세히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해부는 필요한 일입니다. 다른 병원에서는 암에 의한 사망이라고 사망진단서를 떼어드리겠죠. 하지만 저희는 병리해부를 하지 않으면 사망진단서는 떼어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저희 병원의 방침입니다."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는 절대적 권리를 의사가 가지고 있는 이상, 결국  가족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어머니, 한 번만 더 아버지더러 참으라고 하죠.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모시고 가요.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 하고 위로했다. 아들의 마음속에도 서러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큰 병원으로의 이송

예전의 병원은 규모가 작아 방사선 치료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병원으로 옮겨온 것인데, 예전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의 투병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이젠 고인이 된) 시마다가 자신의 병 상태에 의문을 품으며 의료에 불신을 갖기 시작했고, 또 그 때문에 가족관계까지 서먹해지자 그들은 결국 가족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결국 그에게 암에 걸린 사실을 말해주기로 결론을 내렸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동안 몇 번이나 그렇게 상담에 응하며 진지하게 그의 병에 대해 고민해 주었다. 주치의가 볼 때 그의 병은 심각했지만, 그래도 희망만은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서 해준 설명이었다. 어쨌든 그의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하는 말에 주치의는 순순히 따랐다. 그는 그런 의사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의 투병 노력을 무시했다. 폐 전이 병소를 절제하고 3개월쯤 지났을 때 그는 요통을 호소했다. 요추로 암이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투쟁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느 가을 화창한 날의 오후, 그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기분 좋은 하늘이네요. 난 아직 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이런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다시 한 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앞에 버티고 선 벽을 떠밀어 쓰러뜨리겠다기보다 담담히 뛰어넘어 보이겠다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희망과 선택에 의해 인생의 마지막 장소가 된 이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먼저 입원해 있던 병원의 주치의는 정중한 내용의 소개장을 써주었고, 전화로도 자세히 병의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서른을 갓 넘긴 이 병원 내과의인 그의 주치의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옮겨왔을 뿐더러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방사선 치료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그에게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약 4주 동안 치료를 받았다. 중간에 방사선의 영향으로 온몸에 권태감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평 없이 참아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사선 요법은 안타깝게도 요추의 전이 병소에 거의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치료 중에도 진통제는 계속 필요했고, 조사 후에도 진통제의 양을 줄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전에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도, 퇴원하는 것도 모두 포기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내에게 말하며 세상일에 대한 모든 미련을 떨쳐버렸다.


그날도 하늘은 푸르렀다

몸이 더욱 쇠약해진 그는 12월 초 어느 날 저녁이 다가올 무렵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각오한 대로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도 결코 초조해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죽기 이틀 전부터는 거의 자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눈을 뜨면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나 아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죽기 전날 의식을 잃기 직전에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그것이 그가 가족과 나눈 마지막 교류였다.


*  *  *


해부가 시작되고 두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아직 안 끝났나?" 하고 말했을 때 휴게실 문이 열리면서 수술모를 쓰고 마스크를 한 주치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적출된 장기의 일부인 간과 폐를 담은 표본 접시를 그들 앞에 내밀며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음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이 피할 수 없었다고? 그것을 누가 몰랐단 말인가. 가족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한 번 잃은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이유로 죽었느냐 하는 것이다. 원인이 불분명한 죽음에는 항상 타살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이루어지는 사법해부는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병사의 경우는 어떨까. 병사인 경우에도 입원하고 나서 진단할 틈도 없이 바로 죽었거나, 완치되어가던 환자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처럼 아무도 그 죽음을 납득할 수 없을 때 병원 측과 가족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병리해부는 정당하다.


그러면 이 "협박"에 등장하는 병리해부는 어떨까. 나는 이 "협박"의 주치의가 근무하는 대도시 병원의 원장도 자기 병원의 해부율이 높다고 자랑하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부분적일지는 몰라도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는 절대적 권리를 무기로 삼아 자행되는 병리해부가 높은 해부율을 지탱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뢰나 병원의 수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병리해부율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그 병원의 방침이 비윤리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협박적 병리해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이야기

현대 의료 시스템 아래서

일반병원의 의료 시스템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병이 치유되어 건강을 되찾아 퇴원할 수 있는 사람이나 병은 치유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퇴원 가능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입원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완치되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투병을 벌인다. 그러나 언젠가 완치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투병하는 사람들 중 몇 퍼센트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확실히 죽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그 확실히 죽어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병명과 병상에 대한 거짓 설명을 듣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비참한 일들은 대개 그처럼 자신의 병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는 환자가 바쁘게 돌아가는 의료 시스템 아래에서 투병할 때 일어난다.


병원에서 죽어 가는 경우 그 사람의 죽음은 의료진과 가족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이야기되고, 지체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완치될 것이라는 거짓 설명을 들은 환자 본인이 참여할 여지는 전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말기 암 환자들이 때로는 거짓된 격려에 의지하고, 때로는 의사들의 거짓 설명과 악화되는 병상의 큰 차이에 심한 불안을 느끼고, 결국 주위 사람들을 더욱 불신하면서 쇠약해져간다. 그리고 많은 의사와 가족들도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있고, 설령 죽을 것이 분명하다 해도 환자의 목숨을 일분일초라도 연장시키려는 노력이 당연시되고 있는 한 그러한 사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나 자신도 1983년까지는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바꾼 한 권의 책

1983년 11월 하순, 서른 네 살의 생일을 막 보낸 나는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났다. 그리고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남극. 그 배는 남극해의 지질 조사선이었다. 나는 선의(船醫)로 배에 오른 것이었다. 나는 의사가 되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언젠가는 선의로 전 세계를 돌아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한 남극의 바다에서 승조원들은 곧장 해저의 지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청결한 자연 속에서 배 멀미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많은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책들 가운데 한 권이 내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다.


그 한 권의 책이란 1926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난 미국 여성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죽음의 순간 On Death and Dying』이었다. 기이한 제목의 책이었지만, 의사 나부랭이인 나는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두면 어떻게든 직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샀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예비 지식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읽기 시작해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의사가 되고 8년이나 걸려서 얻은 몇 가지의 바로 그런 것이다 하는 상식이 너무나도 간단히 뒤집어져버린 것을 내 가슴속에 차 오른 뜨거운 감동 속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몇 가지의 의료 행위가 급격하게 괴로운 과거가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한 구절을 읽고 나서 잠시 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 한 구절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을 정이 들고 애착이 가는 환경에서 보낼 수 있다면, 환자를 위해 일부러 환경을 조정할 필요는 거의 없다. 가족들은 그를 잘 알고 있으므로 진통제를 대신해 그가 좋아하는 한 잔의 포도주를 따라줄 것이다. 집에서 만든 수프라면 그 냄새에 자극을 받은 그가 두 숟가락에서 세 숟가락 정도는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에게 수혈보다도 훨씬 더 즐거운 일이 아닐까?"


이 한 구절은 내가 의사가 되고 나서 배운, 또 당연한 것으로 알고 시행하던,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일분일초라도 연장시키려는 의료 행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죽어 가는 사람을 대하는 내 자세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던 어느 환자의 임종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소생술의 주인공

나는 1983년까지 임종 직전에 있는 거의 모든 환자들에게 소생술을 시행했다. 처음 그 생생한 소생술의 현장에서 느꼈던, 의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그 처절하기까지 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행위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1초라도 더 연장시키려고 하는 행위를, 의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전혀 비난받지 않을 당연한 행위로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과의 투쟁인 소생술에서 본래 싸워야 할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물론 지금 정말로 죽음에 임박해 있는 환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소생술이 한창 이루어질 때 사력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일 뿐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이미 싸움을 끝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된 평화와 안락의 세계에 들어서려는 순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백하게 죽음의 징후를 보인 환자에게 시행하는 소생술은 그 환자가 안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억지로 막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소생술의 대부분은 의사들이 일방적이 의지이자 행위이며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대적할 수 없는 병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환자가 아닌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행위였다. 그리고 사실 의견도 묻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시행하는 소생술이어서 가족들의 생각조차 무시될 때가 많았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질 정도로 애를 쓰고, 지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후에 느껴지던 허탈감은 싸움에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다가 결국 자기만족밖에 남지 않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 죽을 것으로 보이는 말기 암 환자의 소생술은 가능한 한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환자와 가족들에게 소중한 이별의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내가 임종을 맞은 말기 암 환자에게 소생술을 시행할 때는 환자가 급변하거나 가족들이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않았을 경우, 가족들이 병원에 올 때까지 혹은 가족들이 급변한 사태를 이해할 때까지 소생술을 시행하는 것이다.



아들에게

아빠로부터의 편지

S에게

아빠가 투병하는 모습은 어땠을까? 아빠는 병을 꽤 잘 이겨냈단다. 그래, 아빠도 의사 선생님한테서 "이번에는 병에 질 수도 있습니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그래도 그 말을 들었을 때 함께 듣고 있던 네 엄마가 먼저 우는 바람에 아빠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단다. 너도 남자니까 그런 기분은 이해할 거야.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여자 앞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한단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죽음에 관련된 문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네 엄마가 울다 지쳐서 잠든 한밤중에도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너와 네 누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그때 처음으로 눈물이 나더구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얼마 안 있어 죽을지 몰라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정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지. 그보다는 너희들이 커가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나,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여러 가지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다. 지금 아빠는 잠자는 너희들의 얼굴을 몰래 엿보고 말았다. 너희들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지금 꼭 봐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단다. 그만 몰래 엿보고 만 것을 용서해주렴. 모두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더구나. 너희들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사랑하는지 잘 알게 된단다. 그리고 죽을지도 모르는 현실에 직면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된단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들을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있고,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야.


그래, 그런 거란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용기도 체념도 아닌 바로 사랑이란다. 사랑하고 있는 것, 사랑 받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 모든 공포는 사라져버리지. 언젠가 너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될 거야. 서운함이야 한이 없지만 이제 슬슬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겠구나. 마지막 싸움을 위한 준비 말이다. 이제 이 편지도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한 마디만 더 보태마. 아직 너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남자니까 부탁한다. 엄마랑 네 누나를 잘 보살펴주렴. 아빠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안녕.

- 아빠가


그는 아내와 딸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나는 생전의 그를 떠올리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투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가족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만남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정확히 1년 6개월 전이었다. 얼굴은 핼쑥했지만 그 가는 눈은 조용하고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정중한 말투로 자신의 병상을 이야기했다. 식욕이 저하되었고, 조금만 많이 먹으면 바로 토해버리고, 체중이 줄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호소에 따라 위를 엑스레이와 내시경으로 검사했는데, 그는 위암에 걸려 있었다. 당연히 수술이 필요했다.


그는 입원하고 일주일 후에 수술했다. 그런데 그의 배를 열고 나서 우리는 수술 전의 진단이 어설펐음을 씁쓸한 기분 속에서 알았다. 그의 암이 국한성인 것은 확실했지만 간 동맥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 바람에 절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술 후 우리는 그에게 수술 전과는 달리 진실을 전할 수 없었다. 그의 아내도 "수술은 무사히 끝난 것으로 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래서 우리 의료진은 그가 회복될 때까지는 무사히 수술이 끝난 것으로 하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는 퇴원해서 얼마 후 사회에 복귀하기까지 했고, 2주에 한 번씩 통원 치료도 성실하게 받았다. 나는 이렇게 사회에 복귀한 뒤 즐거워하는 그에게 암이 제거되지 않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지금과 같은 상태가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우려하던 재발

그렇지만 퇴원하고 9개월이 지나자 그는 다시 식후의 구역질과 식욕 저하를 호소했다. 우리가 우려한 날이 마침내 찾아왔던 것이다. 엑스레이 검사를 해보니 위와 소장의 문합부까지 암이 침윤해 문합부가 좁아져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진실을 전할 수 없어 애매모호한 설명을 하며 다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순순히 재입원에 동의했다. 우리는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며 침윤부에 직접 면역 활성화제를 국소 주입하기로 했다. 이것은 예상보다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재입원했을 때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그는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개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 의료진은 안심을 하면서도 무작정 기뻐할 수 없었다.


4개월 째로 접어든 날, 병원에 온 그는 더 야위어 있었다. 이번에는 문합부 협착이 아니었다. 암 전이로 인해 위 입구인 분무부의 외측 림프절이 종대해서 음식물 통과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앞으로는 그저 항암제 효과에 의존할 뿐이었다. 경구 섭취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양 보급은 쇄골하정맥을 이용한 고칼로리 수액법을 채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입원하고 한 달이 지나도 병상은 호전되기는커녕 조금씩 악화되고 있었다. 그도 한 달째 이어지는 이번 투병이 아무 성과를 보이지 않자 점점 초조해했고, 항상 우리 의료진을 반듯하게 대하며 불안정한 정서를 드러내지 않던 그가 아내와 말다툼을 벌인다든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생동하는 것을 가끔 간호사가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를 방치해둘 수 없었다. 6개월 이상이나 보류했던 그 이야기를 다시 그의 아내에게 꺼냈고,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되도록 차분하게 재입원 후의 검사와 사진 등을 설명하며 앞으로는 림프절의 종대를 억제하는 화학요법이 주된 치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강한 어조로 "선생님, 저도 가능한 최선을 다할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집에서 외박하기를 가장 바랐다. 우리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두 차례 외박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외박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다시 한 번 외박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때 나는 굳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병상으로 봐서 이번 외박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유서를 통해 알았다.


마지막까지 싸워낸 사람

그가 죽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 병원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당직 간호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환자 분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의 병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아내와 아이들뿐 아니라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제들이 그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 정말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요. 이제 좀 편안하게 해주세요" 하고 괴로운 듯 말했다. 나는 그의 의식을 저하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용하려는 주사약은 그의 의식을 얕은 수면상태로 바꿔 그가 느끼는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주사를 놓으면 의식이 떨어져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상관없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음 말을 입 밖에 꺼내려고 했을 때 갑자기 격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 했다간 내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언제 또 말할 것인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Y씨, 당신이 잠들어버리기 전에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저는 당신을 만나 정말로 좋았습니다. 항상, 항상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괴로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도 선생님을 만나 좋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병실 여기저기서 오열이 시작된 그때, 그의 아내와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연히 똑같은 말을 했다. "아빠, 오랫동안 정말 고생하셨어요" 하고. 그것은 조용하지만 마음속에 스며드는 말이었다. 그의 소중한 아들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아빠의 손위에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호스피스를 목표로

거짓 없는 교류 속에서

나는 지금의 병원에서 7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내가 병명과 병상을 전해준 말기 암 환자는 20여 명에 이른다. 그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할 때는 마지막까지 함께 싸우고 함께 있겠다는 말도 전하고, 가능한 한 그렇게 실천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와는 깊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병명과 병상을 전했다고 해서, 즉 거짓이 없어졌다고 해서 깊은 교류 관계가 성립된다기보다는 깊이 교류했기 때문에 진실을 전할 수 있었고, 또 그에 따라 더욱 깊은 신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의료자와 환자, 그리고 환자 가족이 서로에게 우정을 느낄 정도로 교류를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은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다. 그러니까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고, 환자가 자신의 진심에 근거한 인생을 보내게 해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각오하고 매달리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환자나 그 가족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말기 암 환자는 자신의 실상을 모른 채 투병하고 있고, 가족과 의료자는 환자에게 진실을 전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서는 의료 현장의 현상이 그렇게 간단히 바뀌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호스피스에 대해

호스피스의 이념과 호스피스의 구체적인 내용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불모의 병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호스피스 간호를 받으면서 보내고 싶다는 사람들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쪽이 종말 의료의 실체를 바꾸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럼 여기서 호스피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겠다.


ㆍ호스피스는 말기 환자, 특히 말기 암 환자 및 그 가족을 응원하기 위한 시설이기도 하고, 응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호스피스라 하기도 한다.


ㆍ 호스피스를 떠받치는 이념은 말기 암 환자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쾌적하고 환자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근거해서 살 수 있게 응원한다는 것이다.


ㆍ 호스피스에서 시행되는 의료는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에 최대의 역점을 둔다. 특히 동통 컨트롤은 큰 기둥이 된다. 그러나 통상적인 항암치료나 연명치료도 환자가 바라면 당연히 제공된다.


ㆍ 호스피스에서는 환자 자신의 본심에 근거한 의지를 응원하기 위해 늘 환자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환자 자신이 정보를 전달받지 않기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ㆍ 호스피스에서는 환자는 자신과 친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뻐하고, 머지않아 찾아올 이별을 자신이 죽기 전 마음의 교류가 가능할 때 서로 눈물 흘리면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이 가능하다. 거짓이 없기 때문에 환자는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면서 살 수 있다.


요컨대 말기 암 환자에게는 자신이 결코 고독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환자와 그 주위의 사람들 사이에 그런 관계가 성립한다면 그 누구라도 어떤 장소에서든 생기 넘치는 삶 속에서 투병하며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종교가 없는 많은 환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호스피스 간호를 받고 싶어도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호스피스의 수가 너무나 적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몰두해온 종말기 의료를 더욱 발전시켜 호스피스를 구체적인 목표로 삼고 싶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많은 말기 암 환자들로부터 부여받은 숙제의 회답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앞에도 뒤에도 호스피스로 이어지는 길은 있다. 그렇지만 아직 그 길은 좁고 험난하다. 나는 그 길의 정비에 의사가 직업이 사람으로서 참가하려고 한다. 21세기가 과학기술 만능의 사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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