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육아

   
허백윤
ǻ
시공사
   
13500
2016�� 06��



■ 책 소개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출산을 계획 중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육아 필독서

 

보육 정책에 수조원을 쏟아 부어도 OECD 최하위를 달리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왜 좀처럼 오르지 않을까? 왜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어린이집 폭행에 멍들어야 할까? 왜 워킹맘으로 사는 일이 무모한 선택이 되고, 수많은 능력 있는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경단녀’가 되어야 할까? 과연 10년 뒤, 30년 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을 때 이러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을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단순히 육아의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에 저자는 ‘독박육아’에 대한 공감과 공분(公憤), 엄마들의 문제의식이 보다 발전적인 육아 문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 저자 허백윤
서른 살이 되던 해 첫날 덜컥 아이를 낳고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삶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는 남녀평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고, 국회 출입 기자로 일하면서는 ‘일과 가정이 양립 가능한 세상’이 왔다는 정치인들의 구호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365일, 24시간 아기와 한 몸 생활을 하는 처절한 독박육아를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의 혹독한 육아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어린이집과 베이비시터 등 남의 손에 아기를 맡기는 대가로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워킹맘의 길을 가면서 그동안 자신의 생각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 더불어 아이를 키우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달라져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절감했다.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후 서울신문 온라인 칼럼 ‘독박육아일기’를 연재하며 엄마라면 누구나 겪은 일이지만 아무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초보 엄마로서의 삶을 거침없이 쏟아내 수많은 엄마들의 공감과 열렬한 반응, 눈물 어린 격려를 받았다.

 

이후 한 가지 꿈을 갖게 되었다. 생생한 육아의 현장에서 수많은 엄마들의 목소리와 생각을 대변하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엄마의 눈’으로 꼼꼼히 기록하는 기자가 되겠다는 것.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게 만들자는 것이다. 아, 물론 당장의 목표는 지금처럼 하루하루, 차곡차곡, 일단은 녹록지 않은 엄마로서의 생활을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이메일 baikyoon@seoul.co.kr
블로그 blog.naver.com/dokbakdiary

 

■ 차례
프롤로그

 

1장 눈물과 함께한, 엄마가 되는 길
왜 하필 지금이니?
먹는 입덧의 정체
그깟 자리 하나
여전히, 아직도 육아휴직은 특혜
설마 1월 1일은 아니겠지
산후조리원은 모유수유 훈련소
산모의 ‘삼시 세 끼’
“내 신경은 온통 모유였어”
수습 시절 선배보다 무서운 존재
말만 육아 분담
엄마들의 개미지옥, 육아 커뮤니티
백화점 커피 한 잔의 해방감
잠깐 아기 봐줄 사람 없는 서러움
만나기도 힘들고, 만나도 어려운 육아 전문가
초보 엄마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아기 몸무게는 엄마의 육아 성적표
엄마의 결정권

 

2장 나는 일하는 엄마이고 싶다
내 새끼 남한테 맡기고 일하는 이유
왜 친정엄마가 안 봐줘요?
현대판 오복
첫인상으로 좋은 이모님 찾기
잘하는 것도 없이 모두에게 미안한 삶
밤 11시, 분노의 설거지
오늘 하루도 끝까지 버텨
엄마의 사춘기
왜 더 치열하게 살지 못했을까?
아이 손에 뽀로로 쥐여준 엄마의 반성문
일하는 엄마의 죄책감
모성애가 부족한 엄마, 나쁜 엄마일까?

 

3장 엄마가 되어 엄마를 생각한다
절대 물어서는 안 될 ‘좋은 소식’
아들 하나 더 낳아야겠네
연예인 만삭 화보는 그저 꿈
노 키즈 존에 대한 단상
육아에도 티타임이 필요해
어린이집 사고가 전업맘 때문이었을까?
엄마의 눈으로 본 저출산 대책
10년 뒤, 30년 뒤에는 달라져 있을까?
4개국 엄마들의 독박육아
세월호 참사가 초보 엄마에게 가르쳐준 것
엄마들은 왜 찌라시를 퍼다 날랐나?
아이가 내게 준 선물
엄마가 되어 엄마를 생각한다

 

에필로그




독박육아


눈물과 함께한, 엄마가 되는 길

수습 시절 선배보다 무서운 존재

일찌감치 깨우쳤어야 했다. 엄마가 되는 길은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고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혼자 택시 타고 신음 소리를 삼켜가며 아기를 낳으러 간 것부터가 너는 앞으로 외로운 어미가 될 것이라는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독 혼자였다. 해외에 살고 있는 친정 가족들, 일하시느라 바쁜 시부모님, 회사가 너무 멀리 있어 늘 시간에 쫓기고 피곤한 남편. 물론 처음부터 외로움을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해외에 계신 친정엄마가 내 출산일에 맞춰 한국에 들어오시겠다고 했지만 기껏 3~4주 있다 가실 거면 아예 오지 마시라고 거절했다. 짧은 시간 동안 어설프게 엄마의 도움에 의존했다가 엄마가 돌아가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힘들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직후 미역국과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 이모의 도움도 스스로 거절했다. 연락도 없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시더니 냉장고를 뒤지며 잔뜩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모에게 예의 없게 굴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예민한 시기이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가뜩이나 어려운 시어머니께도 먼저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나 홀로 독박육아를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내게 아이 키우는 데 뭐가 가장 힘들었냐고 물으면 나는 첫째도 외로움, 둘째도 외로움, 셋째도 외로움이라고 답할 것이다. 굳이 산후우울증이라는 거창한 병명을 달지 않아도 모든 것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단순한 고독의 차원을 넘어선 외로움, 이 세상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외로움, 이것이 육아를 더욱 우울하고 힘들게 했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그 외로움을 오롯이 혼자 참고 견뎌야 했다.


물론 사랑스러운 아기는 그 자체로 엄청난 축복과 기쁨이다. 아기를 키우며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매 순간 느끼게 되는 생명의 신비로움 역시 어떤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크다. 그런데 그토록 맑고 투명한 아기의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미소로 웃어주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해야 했다.


아기는 같이 만들었는데 육아에 있어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임신도 내가 하고 출산의 고통도 나만 겪었다. 12시간 동안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으며, 울부짖는 짐승 소리를 내는 것도 나뿐이었다. 열 달 동안 무거운 몸을 지탱하며 아기를 품느라 고생했으니 아기를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이 끝날 줄 알았다. 요즘은 육아도 부부가 공동으로 하는 세상이라고 하니 남편에게 의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잠도 좀 푹 자고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기와 단 둘이 집에 있기 시작한 날부터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소할 수 없었다. 처음 두 달은 세수도 사치였고, 누워서 2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온종일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소파에 붙박이로 앉아 모유수유를 하며 졸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늦은 오후 겨우 첫 끼니를,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으로 때웠다. 그조차도 국에 밥을 말아 선 채로 후루룩 들이켜야 했다.


매일 밤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쭉 뻗고 자는 남편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갓난쟁이에게 "그만 좀 울어라" 하며 아이 핑계를 대면서 큰 소리로 남편을 깨우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봐야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사실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을 벌세우듯 앉혀놓고 멍하니 젖 먹이는 것이나 지켜보게 하는 일도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편히 자라고, 얼른 들어가 자라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순순히 방에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야속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다시 나와 아기만 남겨진 그 차가운 새벽 공기, 매일 밤 자정을 넘기는 시계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혹독한 수습 기간을 거쳤다. 4개월간 평일에는 집에 못 들어가고 꼼짝없이 경찰서 2진 기자실에서 생활했다. 아침 6시에 선배에게 사건 보고를 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경찰서 서너 군데를 다녔고, 자정에 보고를 마친 뒤 일지를 쓴 뒤 씻고 나면 새벽 1시가 훌쩍 넘었다. 그때는 "아, 내가 이렇게 잠을 줄일 수 있는 줄 알았다면 고시를 볼 걸 그랬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더했다. SNS에 "아기는 수습 시절 선배보다 무서운 존재"라는 글을 적었다. 그나마 수습 때 선배는 3~4시간은 자게 해주었다. 그 잠조차 방해하는 선배는 없었다.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챙겨 먹을 시간도 1시간씩 주었다. 늘 선배의 전화에 쫓겨 지시한 과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됐다. 선배가 뭘 원하는지 알았고, 과제를 잘 해결하면 약간의 달콤한 휴식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 밤 집으로 돌아가면 토요일 하루는 내내 이불 속에 파묻혀 마음껏 잠을 잘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깨웠고, 온종일 옴짝달싹도 못하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제가 뭔지 알 수 없는 거였다. 앙칼진 울음을 있는 힘껏 내뱉는데 배가 고픈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아기를 거의 종일 안고 있으니 팔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줄이기 위해서라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긴 머리를 질끈 묶고서 몇 시간 지나면 어느새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었지만 어떤 때에는 그걸 다시 묶는 일조차 귀찮고 힘이 달렸다. 점점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상태는 좀비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았다.


초보 엄마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동네 소아과 대여섯 군데를 더 전전하다 결국 한곳에 정착했다. 그 결정에는 바로 의사 선생님의 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특별히 진단을 잘하거나, 약을 빨리 처방해주는 곳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아기에 대해 걱정하고 조바심을 낼 때 조금이라도 엄마인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병원,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 걸로는 아기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하고 위로해주는 병원이어서 좋았다. 의미상으로는 "그거 별거 아니에요"와 비슷한 말이었지만 아이가 아픈 게 엄마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고 조바심이 드는 그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있는 병원이라면 집에서 자동차로 20분이 넘게 가고 대기 시간이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라도 괜찮았다.


동네마다 병원이 널려 있지만 유독 몇몇 소아과에만 항상 엄마들이 줄지어 찾아가는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엄마들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을 만한 병원, 의지할 수 있는 의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옆 동네의 가장 인기 있는 병원은 엄마들이 영유아 건강검진 때마다 눈물 바람으로 진료실을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의사는 아기를 상담한 뒤 엄마에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렇게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는 말을 해준다고 한다. 지역 육아 커뮤니티에서 이 이야기를 읽기만 하는데도 마음이 울컥했다.


육아 전문가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까닭에 휴직 기간 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방송되었던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챙겨보곤 했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육아 전문 교수와 박사는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전문가였다. 아기가 이유식을 심하게 먹지 않을 때에는 나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 신청을 해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조금 창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의 상황을 짚어보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복직을 한 뒤에야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우리동네 보육반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2013년에 시작된 것으로 35개 자치구에 총 132명의 보육반장이 활동한다고 한다. 구별로 4~8명의 보육반장이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육아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고민 해결이나 상담하는 역할도 한다. 30~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선배 엄마들이 활동한다. 각 자치구에는 육아종합지원센터도 있다.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인지 엄마들에게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이런 식의 육아 길잡이 프로그램들이 좀 더 활성화되면 좋을 것 같다.


아이 하나는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처럼 육아에는 항상 주변의 손길이 필요하다. 특히 초보 엄마에게는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아이를 건강하게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비해 너무 아는 것도 없이 육아를 시작한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내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여러 번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이를 두고 겪는 시행착오는 겁이 난다. 누구나 육아 길잡이가 되어주고, 또 누구나 길잡이와 함께 육아를 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일하는 엄마이고 싶다

내 새끼 남한테 맡기고 일하는 이유

"도대체 이 어린애를 온종일 남에게 맡기면서까지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뭐예요?" 복직이 가까워질 무렵 동네에서 알게 된 한 엄마가 내게 물었다. 일을 하려는 이유라니…….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게요. 제가 좋아서죠, 뭐." 겨우 이 말을 내뱉고 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매정한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내게 육아는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아주 근본적인 물음의 답을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육아를 하면서 찾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일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6년 동안 정규 교육을 받는 것과 같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 직장에 다니는 것은 내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거창한 이유 따위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토록 당연했던 내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산을 했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우리 어머니 세대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간 뒤에야 적지 않은 엄마들이 출산과 함께 일을 그만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이 시작됐다.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육아와 무관하게 여성도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계속하는 것은 책에 나오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여성 5명 중 1명이 결혼과 육아로 인해 직장을 그만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4월 기준 15~54세 기혼 여성 956만 1,000명 가운데 결혼, 임신·출산, 육아, 자녀 교육(초등학생) 등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둔 경력 단절 여성은 총 213만 9,000명으로 22.4퍼센트를 차지했다. 일을 그만둔 사유는 결혼이 41.6%로 가장 많았고 이어 육아(31.7퍼센트)와 임신·출산(22.1퍼센트) 등의 순이었는데 2013년 대비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은 9.7퍼센트나 늘었다. 임신·출산으로 인한 단절도 5.4퍼센트, 자녀 교육으로 인한 단절은 27.9퍼센트나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 절반 이상이 30대(52.2%)였고 이들 역시 육아(35.9퍼센트) 때문에 직장을 떠나야 했다. 이런 통계를 매년 접하면서도 내가 이 과정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이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겠거니 했다.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많은 엄마들이 육아에 전념하며 전적으로 아이의 일과에 맞춰 생활하고 있다.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 사람들과 약속을 잡는다. 아이에게 오늘 뭘 먹일지가 큰 고민이다.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는 엄마들도 많지만 대부분 그 바람들은 기한도 없이 늦춰지곤 했다. "아이가 세 살이 지나면 일을 해야지" 했다가 세 살은 다섯 살, 초등학교 입학, 이런 식으로 미뤄진다.


물론 아이에게 전념하는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나 역시 예쁜 내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아이만을 위해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나 역시 일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한다.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 아이에게 올인한 엄마들이 부럽기도 하다. 물론 내가 일을 안 하게 되면 당장 가정 경제에 큰 여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돈인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자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기도 한 이 직접을 포기하기는 참 힘들다. 직장을 그만두고 난 다음, 다시 일을 하고 싶을 때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각종 사고가 발생하는 어린이집에 돌도 안 된 아이를 밀어 넣고, 생판 모르는 남에게 아기를 맡기면서까지 일을 계속해야 하는 그럴싸한 이유를 매일 아침 회사로 향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최소한 세 돌까지는 엄마가 직접 키우는 게 좋다는 육아 이론을 거슬러야 할 만큼 내가 꼭 일을 해야 하는 이유 또한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복직을 한 지 여섯 달째인 오늘까지도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내 어깨를 짓누른다. 감히 아기가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잘 돌보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은 언제쯤 당연해질까. 일과 육아, 둘 다 잘하는 것이 욕심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엄마가 되어 엄마를 생각한다

10년 뒤, 30년 뒤에는 달라져 있을까?

보육 문제를 통틀어 가장 바뀌어야 할, 아주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부모의 근무시간이다. 현재 우리나라 부모들의 근무시간은 너무 길다. 아빠의 양육 참여를 위해 아빠의 달 인센티브를 1개월에서 3개월로 늘리고 아빠들도 육아휴직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는데, 사실 이런 제도는 별 실효성이 없다.

그보다는 일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과 분위기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후 6~7시에 집에 도착할 수 있는 퇴근 시간을 가진 직장이라면 하원도우미를 고용하지 않아도 된다. 나처럼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어린이집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일을 마칠 수 있게 해주면 월 100만 원 이상의 추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할 일은 일하는 부모에게 돈 몇십만 원을 더 쥐어주는 것이 아닌, 근무시간이 길어야 일을 열심히, 더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근무시간도 긴데, 아이를 봐주는 곳도 없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고, 친정이든 시댁이든 부모님 혹은 타인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칼럼 독박육아일기를 연재하며 정부 인사들이 주최하는 저출산 대책 간담회에 초청받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내가 경험한 현실을, 왜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는지, 애를 하나 낳으면 어떤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현 제도의 잘못된 부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간담회에 함께한 관료, 교수, 학자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의 내 목소리는 별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왜 오랜 시간 정부의 보육 정책이 이렇게 답답한 방향으로 흘러오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일단 저출산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아이 키우는 데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일을 쉬었다가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가 어렵고,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계속하기에도 녹록치 않은 환경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 양육에 있어 국가적·사회적 제도의 뒷받침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 아이는 개인이 낳지만 그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한 책임은 국가가 함께 진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하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저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게 할까, 출산율 1.21의 숫자를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그들은 그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문제 인식은 부모들에게 인센티브를 많이 주면 줄수록 출산율 역시 늘어날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이어졌다. 한두 사람의 의견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간담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에 생각을 같이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을 때 힘주어 말했다. 몇 푼의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말이 별로 공감을 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동안의 정부 정책이 너무 보육에만 몰두한 나머지 돈을 지나치게 많이 지출한 것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많은 돈이 과연 제대로 쓰여졌는가에 대한 자성보다는 이미 국공립 어린이집 수가 충분히 늘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으로 그쳤다. 1시간 반 남짓의 간담회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을 내 아이가 그대로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답답함만 커졌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하루는 내 칼럼을 읽고 한 40대 독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그 메일을 읽으며 나는 눈물을 쏟았다. "저보다 한참 어린 기자님의 삶이 저의 지난 삶과 너무 비슷해서,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일하는 엄마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예전의 상황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에, 딸 가진 엄마로서 가슴이 미어지네요." 10년 뒤 나 역시 또 다른 직장맘 후배에게 이런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30년 뒤, 내 딸이 엄마가 되는 날이 되었을 때는 어떨까? 내 눈물과 불안함이 그때는 좀 가셔 있을까? 안타깝고 슬프다.


엄마가 되어 엄마를 생각한다

일주일에 한 번, 오후 출근이 있는 날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직접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 집에서 2시간 재택근무를 한 뒤 아이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일이 여간 정신없는 게 아니다. 아이는 오히려 엄마인 나와 있을 때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지 못하는 날이 많다. 아침에 준비된 반찬도 없고 시간도 부족하면 맨밥을 치즈나 김에 싸서 아이 입에 넣어준다. 너무 미안했지만 그래도 빈속으로 보내는 것보단 낫겠지, 하면서 먹였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맛있는 반찬을 차려줄 때보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그리곤 말한다. "엄마, 고마워요." 갑자기 튀어나온 그 말에 울컥했다.


여전히 아이 키우기 힘들다며 울기도 하고 툴툴대지만,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감격스러울 때가 더 많다. 아이가 말을 할 줄 알게 되니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사랑해요, 엄마 최고예요"라고도 하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지곤 한다.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두리번거리며 엄마 얼굴을 확인하고, 엄마가 안 보이면 얼른 뛰어나와서 찾는 아이의 모습은 매일 아침 봐도 고맙다. 게슴츠레한 눈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휘둥그레 커진다.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도 이랬을까. 아기를 품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 엄마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엄마는 얼마나 조심스럽게 나를 품었을까. 나를 낳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12시간 진통을 참아내며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나 떨어뜨릴까 겁이 날 정도로 작은 신생아를 목욕시키면서 우리 엄마는 유독 작게 태어난 나를 안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돌이 될 때까지 잔병치레를 많이 하느라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했던 나를 보며 그때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내 아이에게서 누런 콧물이 뚝뚝 떨어질 때 나는 30년 전의 엄마 마음을 생각했다.


어린 나도 내 딸처럼, 엄마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을 많이 했을까. 서툰 단어들을 종알거렸을 그 모습이 정작 내 기억에는 없다. 커서는 무뚝뚝한 성격 탓에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고, 지금은 눈물이 날 것 같아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직까지 엄마에게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 내 모든 처음을 함께했던 엄마는 "너는 내게 엄청난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너는 처음이라 엄마가 서툴러서 항상 미안했다"는 엄마의 말은 두고두고 내가 딸에게 할 말이기도 하다.


아이와 함께하면서 내가 목표로 세운 것 중 하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되어주자는 것이다. 사실 자신은 없다. 30년 동안 엄마가 나를 키워냈던 시간이 마치 기적같이 느껴질 때도 많다. 나는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외롭다고,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지 않아 너무 힘들다고 원망하고 투정한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20대 중반에 나를 낳았고, 시집살이를 하며 우리 자매들을 키웠다. 내가 자라는 내내 엄마의 일과는 항상 내게 맞춰져 있었고, 늘 내 옆에 함께 계셨다. 나는 배 속에 아기 하나를 겨우 품어 키워내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엄마는 10살 차이 나는 막둥이를 임신한 만삭 때까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녔다. 집에는 중증 치매를 앓는 할머니까지 계셨다. 아이를 갖고 낳아보니 그때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이제야 아주 조금 와 닿아 마음이 아프다.


든든한 조리원 동기는커녕 휴대전화도 없던 그 시절 우리 엄마는 어디서 그 많은 정보들을 얻고 친구를 사귀며 위안을 삼았을까? 어디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은 정보를 얻어 나를 키우셨을까? 나와 동생이 학교에 간 시간 엄마는 텅 빈 거실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외로움을 달랬을까? 그 시절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고 부러운 게 많은 보통의 여자였을 텐데, 그냥 평생을 엄마로만 살면서 모든 꿈과 희망을 아이들에게로 돌려버렸을 것을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죄송하고 안쓰럽다.


아기를 낳고 해외에 있는 친정을 찾았을 때, 엄마가 "이제 여기가 별로 편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기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서운했다. 그런데 정말 그곳에서 두 달을 머물며 반 정도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엄마의 말대로 "친정이 더 이상 편하지 않은 순간"이 왔고, 나는 아기와 함께 얼른 내 집에 가고 싶었다.


몇 년 전까지 힘든 일이 생기면 안방에 들어가 엄마 냄새가 가득한 이불을 푹 덮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 걸로 기분을 풀었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보다 남편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아이의 살 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 아이를 낳기 전 몸이 크게 아팠을 때는 부모님이 많이 슬퍼하시겠다는 것 말고는 다른 걱정이 없어 이대로 세상을 떠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내 아이 때문에 건강을 챙긴다. 아이가 엄마 없이 자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해서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또 하나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내게 다가온 엄마로서의 삶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아이가 자라고 아이와 함께 처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더욱더 엄마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며 가슴이 아플 것 같다. 도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 어떻게 엄마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다. 다만 부디 엄마가 내 아주 작고 소심한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이라도 좀 더 많이 들어주시기를, 오래도록 나와 함께 내 딸의 모든 처음 또한 함께해주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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