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 부모를 위한 SnS심리학

   
케이트 아이크혼(역:이종민)
ǻ
현대지성
   
13000
2020�� 09��



■ 책 소개


디지털 기술로 망각이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성장하는가?
유년기 기억을 제대로 잊어야 삶은 더 건강해진다 

저자는 초창기에 사이버 공간은 이런 망각을 돕는 역할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온라인에 접속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잊고 자신을 다른 인물로 재창조하고 대안 세계를 탐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완충지대’였으며 이곳에서 사람들은 안식을 누렸다. 

이제는 기억보다 망각(잊힐 권리)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기억(기록)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보다 잊히기(삭제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훨씬 더 크다는 데서 이것은 분명하다. 

망각은 그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분명한 역할이 있다. 기억을 적당히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망각’이 담당하는데, 이 과정이 없으면 사람은 성장을 멈춘다. 망각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심리적ㆍ정신적 성장을 돕는다. 심각한 트라우마까지도 망각을 통해 치유한다. 

이 책은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으로도 불리며 인생 자체가 디지털인 ‘Z세대’를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의 삶 전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망각의 힘’을 선물해보자.

■ 저자 케이트 아이크혼 
케이트는 미디어의 발달이 삶에 끼친 영향에 관해 평생 탐구해왔다. 그에 따르면, 아이가 온전한 인격을 지닌 성인이 되려면 유년기 기억을 잊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디지털 기술은 이 과정을 철저히 방해하며 “어린 시절이 끝없이 계속되는” 환경을 만든다. 온갖 기술과 정보로 넘쳐나지만 마음은 철부지 어린아이 그대로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인터넷 태동기인 1990년대 초부터 최근의 SNS 확산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미디어와 사회문화적 변화 그리고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촘촘하게 추적하여 부모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이 책에 담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슨스디자인스쿨(Parsons The New School for Design)이 속한 뉴스쿨(The New School)에서 문화와 미디어를 가르치는 부교수이며, Adjusted Margin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역자 이종민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간스포츠와 스포츠투데이에서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로 일했다.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근무 중으로, 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일터의 품격』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사 
서문 

1장. SNS 시대, 아이들에게 열린 새로운 세상 
2장. 망각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 
3장. 멀티 스크린 시대, 기억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4장. 끝까지 따라붙는 꼬리표 
5장. 디지털 시대, 사라질 권리를 찾아서 

결론. 망각, 자유 그리고 정보 

주 
감사의 글 

 




Z세대 부모를 위한 SNS 심리학


디지털 기술로 망각이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성장하는가

잊는 것 그리고 잊히는 것의 가치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스스로 잊고 싶고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도 없애고 싶은 일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대부분 중학교 1학년 때 일기장에 적어 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중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사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계속 묻혀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청소년들의 자아의식은 쉽게 왜곡되거나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사진이 정확히 어떠한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많은 청소년이 아주 작은 흠결을 찾아낸 후에도 벗어날 수 없는 무능력의 낙인이자 치욕의 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신경 과학자 도나 브리지와 조엘 보스는 2014년 자기공명 영상장치 MRI로 실험 참가자들의 뇌를 관찰한 결과 뇌가 기억을 ‘편집’한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유지되지만, 적절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쳐 쓴다는 것이다.


두 연구자는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과 깊이 연관된 뇌 영역인 해마가, 과거 경험에 관한 기억에 현재의 정보가 영향을 미치도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했다.


현재가 과거에 ‘침투’할 때 현재는 오래된 기억들이 적절성을 유지하고 계속 간직할 만한 가치를 지니도록 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부적절하거나 불쾌한 정보는 삭제한다. 기억은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억은 늘 일정 형태의 망각 또는 왜곡의 대상이 된다.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억은 더 많이 왜곡된다.


다시 말해 유년기 기억은 단순히 특정한 사건을 정확하게 생각해 내는 차원을 넘어, 돌이킬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때때로 소환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년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더 이상 현실을 닮은 이야기들에 의존하지 않고, 온라인에 공유된 사진과 영상 같은 증거 자료들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면?


아마도 스스로 잊는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타인에게서 잊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더는 감내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을 쉽게 없앨 수 없게 되었다. 이 딜레마는 단지 굴욕 사진을 슬며시 삭제하지 못하게 된 정도가 아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면 보통 친한 사람들과 낯선 이들이 한데 섞인 전체 소셜 네트워크에 링크된다. 때문에 오늘날 청소년들은 디지털 사진과 영상뿐만 아니라 계속 유지하고 싶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적 맥락 전체를 짊어지고 가야 할 수도 있다.


지금 나는 디지털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유년기 및 청소년기와 결별하고 유년기 기억을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과거와 단절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제한을 받고, 심지어 우리의 과거 관계망을 보존하는데 투자한 민간 기업들이 그 능력을 통제할 수도 있는 세상이 다가왔다. 한때는 적절히 감내할 수 있는 정보만 간직하기 위해 유년기 기억을 편집하거나 ‘덮어 쓰는’ 일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과거와의 관계를 우리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망각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

망각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집단 망각은 집단 기억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며 대체로 부정적인 단어로 묘사된다. 집단 망각은 보통 식민주의나 노예제도의 잔재를 잊고 살자는 등의 특정한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적 망각은 철학자와 정신 분석가 실험 심리학자들에 의해 보통 치유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망각은 단순히 의식의 문과 창을 닫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 일에 몰두하기 위해 서재 문을 닫는 것처럼 때로는 의식의 창을 닫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망각 능력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행복도 희망도 현재로 없다고 단언했다. 망각이 기억을 위협하는 요인이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기억이 망각이라는 고마운 습관을 위협한다는 정반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망각은 천박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단순한 타성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억제 능력”이라는 게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 이후 다양한 분야의 사상가들이 망각의 치유적 측면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인간은 참기 힘들거나 충격적인 일에 대처하기 위해 종종 상황을 잊거나 왜곡한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행복과 기쁨, 희망과 자긍심을 어느 정도라도 유지하려면 망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니체처럼 앤더슨과 헨슬메이어도 “긍정적인 마음이나 집중력, 특정 상황에 대한 믿음, 확신 또는 희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 상태를 뒤흔드는 경험에 접하는 기회를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경험 심리학자 벤저민 스톰 역시 “망각이 불만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도, 망각 없는 세상보다 망각이 있는 세상이 우리에게는 훨씬 낫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는 (한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의식의 문과 창을 잠시 닫아 두는’ 능력이 위험에 처했다. 21세기에는 니체의 비유조차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창(window)’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원래 니체가 암시한 건축 구조물보다 디지털 기기 화면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기기의 창을 닫는 것은 집의 창을 닫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디지털 기기의 창을 닫으면 (인터넷 접속이 끊기므로) 더 이상 밖을 내다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은 우리를 계속 관찰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심지어 우리가 활동을 멈춘 상태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다).


잊고 잊히는 경험이 한때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디지털 세상에서 창을 닫거나 완전히 접속을 끊으면 우리의 디지털 발자국(우리가 남기는 정보)은 줄어들지만 우리의 그림자 정보(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만들어 내는 정보)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요컨대 창을 닫고, 정보를 삭제하고, 접속을 끊거나 선을 뽑아 버리는 등 개인의 망각 욕구는 타인에게 잊히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정보 주체와 연결된 실제 개인은 활동을 중단하더라도 정보 주체는 활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보 주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확장되고 악명을 높여 가면서, 니체가 정신 건강과 자족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긴 ‘능동적 망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다. 능동적인 망각이 온갖 정보가 다 기억으로 저장되는 상황을 더 이상 막아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어떤 영향이 미칠까?

 


디지털 시대, 사라질 권리를 찾아서

플랫폼 사용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것들

기업의 이익이 왜 디지털 소멸과 망각의 미래까지 좌우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현재의 기술적·경제적 지형에서 소멸과 망각이 차지하는 위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술 기업들이 보유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은 정보 저장소다. 19세기의 목재와 철강처럼 정보는 이제 필수 자원이 됐다. 아직 수익 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한 디지털 플랫폼들이 수백만 달러의 가치로 인정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의 경우 그 가치는 10억 달러에 달했다. 광고가 직접적인 수입원이긴 하지만, 이 기업들의 가치는 보통 정보를 만들어 내고 이를 이용해서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는 능력에 근거한다.


미디어 이론가 조디 딘은 이 같은 현상을 ‘통신자본주의(communicative capitalism)’라고 표현했다. 딘은 현재 전 세계 선진국들을 지배하는 경제 구조인 통신자본주의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유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콘텐츠든 구체적인 내용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메시지가 전송됐고, 누가 언제 보냈는지, 그리고 상대가 이를 확인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보가 계속 만들어지는 한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계속 번성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비교를 해 보는 게 좋겠다. ‘아랍의 봄’이나 ‘윌스트리트 점령 운동’,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 같은 운동을 벌인 활동가들이 소셜 미디어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과거에도 활동가들은 자신과 정치적 지향점이 다른 기업이 만든 기술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 제록스가 특정 사무 업무를 돕기 위해, 건식 복사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후 이 기술은 활동가들이 계속해서 저렴한 비용으로 벽보과 소책자를 만드는 데 쓰였다.


제록스를 비롯한 복사기 제조업체 경영진과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사무용 기기가 체제 전복의 방편으로 활용될 수도 있음을 알겠지만 자신들이 만든 기기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것들이 복사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또 활동가들이 복사기를 활용하는 대가로 제조업체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반면 요즘은 활동가들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면 이 플랫폼 기업들은 아주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다. 일단 게시되고 나면 원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용도로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바로 통신자본주의의 힘이다.


조디 딘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신자본주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빨아들여서” “우리의 모든 상호작용을 자본을 위한 원자재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정보를 ‘탈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오래전부터 탈취를 통한 축적에 의존해 왔다.


요즘엔 뭔가 다른 것을 빼돌리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보다. 여기에는 현재 우리가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 내는 정보도 포함 돼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신용카드 정보를 갱신 때처럼) 정보 탈취가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이보다는 덜 노골적인 형태를 띤다.


정보 탈취는 기업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서 우리에게 팔기 위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제품을 무슨 요일에 구매하고 건강 관련 증상을 얼마나 자주 검색하는지 등의) 가기 다른 정보 묶음을 수집하고 결합하고 캐낼 때도 발생한다. 소량의 정보는 그다지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정보 탈취는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상호작용들이 민간 기업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파헤쳐지고 있다. 잊는 능력과 잊히는 능력을 미래에도 간직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 새로운 형태의 탈취를 극복해야 한다.


페이스북은 거대한 기억 비즈니스다

잊는 것과 잊히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잊는 것은 보통 신경학적 과정 또는 심리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뇌는(더 이상 의미가 없는 정보 등) 일부 정보를 막아서 우리가 보다 최신 정보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잊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잊히는 것은 전적으로 타인에게 달려 있다. 때로는 타인이 나를 잊지 못해 나의 잊는 능력이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가 (기억할 필요가 없거나 부정적인 점 때문에) 잊고 지내던 사람이나 함께 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망각은 중단된다.


이처럼 잊고 잊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며, 이것이 바로 소셜 미디어가 미래에 대단한 위협이 되는 이유이다.


민간 기업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에 돈을 투자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잊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됐다.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이 우리가 잊지 않고 타인에게도(심지어는 지난 수십 년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최근 들어 십대와 청년들 사이에서 페이스북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고 이들은 보통 인스타그램이나 스냅챗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이 세 플랫폼은 모두 비슷한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페이스북은 내가 친구의 아기들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기를 원하고,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은 사용자들이 끊임없이 더 많은 정보를 생성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스냅챗은 2016년 ‘연속 스냅(snapstreaks)’이라는 기능을 도입했다.


연속 스냅은 친구와 일대일 스냅 메시지를 사흘 이상 연속으로 주고받아야 달성할 수 있다. 이 임무를 완수하면 불꽃 모양 이모티콘이 당신 이름 옆에 나타나 연속 기록이 시작됐다고 표시해 준다. 불꽃 이모티콘 바로 옆에는 숫자가 나타나서 연속 스냅이 며칠 동안 이어지고 있는지 알려 준다.


모래시계 이모티콘은 연속 스냅 기록이 곧 중단된다는 우울한 신호다. 이게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청소년에게는 압박감이 꽤나 심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 메리 최(Mary Choi)는 사춘기 소녀 다섯 명의 스냅챗 세계에 직접 참여해 본 뒤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내가 대화를 나눈 청소년들은 연속 스냅을 동시에 2개에서 12개까지 이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속 스냅이 살짝 귀찮게 느껴지긴 하지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대화하기엔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연속 스냅으로 보내는 내용은 대부분 얼굴을 근접 촬영한 사진처럼 꾸미지 않은 이미지들이다. 이모티콘처럼 거의 노력이 들지 않지만 이모티콘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게 느껴진다. 스냅은 누군가에게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일부 청소년들은 연속 스냅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 십대 청소년과 대학생 또래 청년 몇 사람에게 왜 연속 스냅을 계속 이어 가는지 물었다. 연속 스냅은 우정이나 연인 관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나 ‘징표’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연속 스냅은 분명 또래들과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려는 청소년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기능이지만, 사실 통신자본주의가 성공하려면 꼭 있어야 하는 ‘지속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결론. 망각, 자유 그리고 정보

망각, 자유 그리고 정보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경험한 가장 창피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과 손쉽게 결별할 수 있었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진입하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스스로 유년기와 청소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타인의 기억에서 우리의 과거 모습을 지우는 능력을 빼앗기고 있다.


기술 변화와 경제 변화가 맞물리면서 모든 사람이 잊고 잊히는 능력을 쓸 수 없게 됐다. 청소년들 입장에서는 얻는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무척 많다.


만약 디지털 세계에서 자기 정보를 지워 주는 대가로 대가를 요구하는 시스템이 개발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주변인인 청소년들은 부모의 선의와 현명한 판단에 기대 삭제 비용을 내 달라고 요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녀의 바람과 달리 부모는 자녀의 온라인 정체성 중 특정 부분만 삭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용을 지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성적 취향에 관해 올린 게시물만 삭제해 달라고 하는 식이다.


만약 디지털 소멸이 또 다른 형태를 띤다면, 즉 원치 않은 정보를 삭제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면, 역시 청소년이 성인보다 잃을 게 더 많다. 이미 통제하기 힘들어진 기존의 디지털 발자국과 디지털 그림자를 관리하기 위해 또 다른 정보를 공유하고 생성하는 쳇바퀴에 갇히게 될 수 있다.


더 어린 나이부터 이런 식의 합의를 반족하면 자신의 정보 주체를 관리하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살펴보았듯, 망각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고, 때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망각은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서 개인의 성장을 돕는다.


망각은 가벼운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요긴한 버팀목이자 심각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 주는 만병통치약이다. 스스로 잊고 타인에게도 잊히는 것은 이런 면에서 누릴 수 있는 큰 자유다. 자신의 기억이나 누군가의 기억 때문에 과거에 얽매인다면 현재와 미래에 자신을 재창조할 수 없다.


망각의 종말이 누구보다 청소년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망각이 그러한 자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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