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관객이다

   
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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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유
   
15500
2020�� 07��



■ 책 소개

 

“가장 즐겁고 행복해야 할 육아,
나는 왜 이토록 힘들고 불안한 걸까?”

 

우리의 육아 문화에 경종을 울리며 색다른 시선을 제시하는 책. 이 책의 각 글에는 감동적이고 위트 있는 그림일기가 함께 소개된다. 국민 수면동화 『잠이 오는 이야기』를 쓴 유희진 작가는, 우연히 박혜윤 작가가 블로그에 연재하던 글을 발견하고 자신의 현실육아에 적용해본 후 그림일기를 그려왔다. 서로의 글과 그림에 감동받은 두 작가는, 또 다른 부모들에게도 이 독특한 육아법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기대하며 이를 엮어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상위권 성적, 뛰어난 사회성과 리더십, 재능을 잘 키운 성공 등을 육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대신, 부모가 아이를 낳고 키움으로써 자기다움을 더 발견하고, 동시에 아이도 스스로의 삶과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다. 그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아이를 잘 관찰하기’ 딱 하나뿐이다. 아이의 성장과 생각, 스스로의 발전을 부모가 옆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봐주는 것 말이다.

 

■ 저자 박혜윤


서울대 영어영문학 학사, 시애틀 워싱턴대학교 교육심리석사와 박사.

 

1975년 태어난 알파걸 1세대로 슈퍼우먼 직장맘을 꿈꿨다. 엄마가 되고 나서, 처음 만난 아기보다 더 낯선 나를 만났다. 사회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 성공해도 성공 같지 않고 실패조차 실패일 수 없는 ‘엄마 되기’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나 자신을. 아이의 성장을 직접 관찰하고 싶어서 동아일보 기자 일을 그만뒀다. 지금은 아이를 키우듯 나의 일상을 애지중지하고 싶어서,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숲과 개울이 있는 너른 땅에서 야생 잡초를 캐먹고, 누룩 균을 키워 미소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밀을 갈아 통밀빵을 굽는다.

 

엄마의 시각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경험과 가족의 돈 쓰기 팁에 대한 글을 써서 정기구독 메일을 보내는 작업을 한다.

 

■ 그림 유희진
1983년에 태어났다.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대구에 산다.

 

그림일기를 그리는 오랜 취미가 있다. 아이들과 나눈 대화, 가족이 함께한 찰나의 순간을 그날의 행복으로 기록한다. 지은 책으로 아이들과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옮긴 그림책『잠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인스타그램 @yooheejin1

 

■ 차례
프롤로그_ ‘나다운 엄마 되기’의 여정

 

PART 1. 나답게 자라는 아이: 시작도 끝도, 바라봐주기
아이들을 공평하지 않게 사랑하기
자식과 부모, 서로 이해하지 못해서 더 채워지는 것들
조기교육, 맥락 전체를 흡수하는 스펀지 학습
불량 엄마의 철학: 아닌 걸 하지 않는다
잔소리 안 하는 법: 모르면 된다
아이는 부모의 단단함을 테스트한다
엄마 없는 동안에도 아이는 자란다
배움, 나만의 스토리를 쌓아간다

 

PART 2. 세상과 연결되는 길: 불완전해서 나다울 수 있는 자유
서로 무관심한 세상, 나는 네게 관심이 있다
치우는 것도 즐거운 놀이
자유란 무한의 선택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신나는 교육비 지출, 결과 대신 과정을 산다
해줄 수 없는 일, 엄마도 자신을 알아간다
타인과 부대끼며 가장 나다워지는 일
불편의 반대 지점에 끈질김이 있다
과정에서 배운다는 것
아이와 돈 이야기하기
사물의 교육, 아이에게 주는 자유와 훈육

 

PART 3. 가족: ‘우리’라는 경쟁력
희생하는 엄마 되기를 거부한다
함께 하는 즐거움, 가사 나눔
잔소리와 대화의 차이
좋은 부모가 아니라, 그냥 부모면 좋아
둘 다 이길 수 있는 자식과의 즐거운 싸움
나다운 엄마 되기, 사실은 불량 엄마
아이와의 기 싸움, 바오밥나무 기르듯
완벽으로 가는 길, 우리만의 모자람을 사랑하기
또 다시 가족, 서로 발견해주는 기쁨

 

에필로그_ 아빠를 질투하게 만드는 엄마 / 완벽한 우리 엄마
부모는 관객

 




부모는 관객이다


나답게 자라는 아이: 시작도 끝도, 바라봐주기

불량 엄마의 철학: 아닌 걸 하지 않는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아이 키우기가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나도 체면, 양심, 욕심, 불안... 이 모든 것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를 잘 키우겠다’ 하는 의욕이 넘쳤다. 지금처럼 ‘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이가 알아서 잘 크는 걸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난 속 편하게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 그랬던 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계기를 통해 바뀐 것도 아니다. TV를 보며 시간을 때우면서, 사람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예전에 읽던 책을 생각하면서, 그냥 매순간 어떻게 ‘잘 키울까가 머리 한켠에 항상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게 바뀌어 갔다. 누구나 살면서 갖게 되는 자기만의 철학은 이렇게 생기나보다.


장사 안 되는 골목 식당을 찾아다니며 컨설팅을 해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외식 사업가 백종원이 한 다음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음식 장사를 시작한다. 메뉴를 정한다. 파스타든, 칼국수든, 고깃집이든. 그러고 나서 해당 메뉴로 잘나가는 맛집에 먹으러 간다. 먹으면서 자기 가게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백이면 백,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 ‘에이, 그냥 먹을 만한 정도인걸. 서비스도 겨우 이거야? 나도 이쯤은 하겠다.’ 하지만 가게를 차리려면 잘되는 가게가 아니라, 망하고 있는 가게에서 먹어봐야 한다. 안 되는 가게에 가도 딱히 엄청 못하는 건 없어보인다. 그런데도 파리 날리는 가게에서 우울한 인상의 가게 주인을 봐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가게가 잘되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후, 안 된는 가게가 왜 안 되는지를 분석하면서 장사가 안 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대비해야 한다.”


여러 자녀, 부모들을 만나면서 이 실패한 가게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들을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적당히 고민도 있고, 실수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서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나누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엄청난 장점을 가진 것 같지도 않다. 평범하게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행복해 죽겠다’ 이러면서 사는 건 아니란 의미다. 그런데 가족관계 때문에 혹은 자식이 속을 썩여 고통스러워하는 가족들을 만나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못된 부모나 아이들은 한 번도 못 봤다. 다들 성실하고 착하고 장점이 많다. 화목한 가정에도 있을 법한 별거 아닌 것 같은 한두 가지의 실수, 고집, 단점 때문에 불행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가게를 차리든 애를 키우든 누구나 열심히는 한다. 재능의 차이도 실전에서는 별로 중요치 않다. 성공하는 가게를 차리기 위해 천재적인 요리 실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대단한 학식이나 많은 돈, 혹은 도인 수준의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비법, 뛰어난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아마도 치명적인 실수를 줄여나가는 건지도 모른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을 궁리하는 것보다, 엄마로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말이다.


한마디로 ‘부정의 부정’이랄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정의하면서 같은 방법을 썼다. 사랑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아닌지 말이다. 그는 신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며, 우리가 신을 사랑할 때 신의 긍정적 성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신이 자비롭다거나 전지전능하다거나 하는 긍정적인 속성은 신을 내 자신의 수준으로 묶어두는 셈이다. 대신 ‘신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내 자신을 넘어서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악하지 않다’, ‘신은 노하지 않는다’와 같이 말이다. 신이 어떻게 선한 모습을 보이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악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이 자비롭다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노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와 엄마는 신에 대한 사랑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만난다. 아이를 향해 ‘너는 어떠한 인간이다’, 즉 ‘너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나의 기준에 묶어 사랑하는 것은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을 속박하는 것이다.


아이도 엄마인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지 않을까? ‘엄마는 어떤 걸 내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는 어떤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는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는 궁리 대신, ‘아이에게 화내지 않는다.’ 그냥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서 ‘단 한 번도’ 화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특히 나 같이 참을성이 부족하고 성질 급한 인간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화내지 않기’ 딱 그거 하나만 하는 것은 노력하면 가능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성격이 바뀐 것도 아니다. 무엇을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 아이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없으면, 내 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다. 저절로 화가 안 난다. 가끔 다른 일로 피곤하거나 짜증이 날 때도, 평소에 아이에게 해주는 게 별로 없는 엄마로서 화를 낼 수가 없다. 참는 것이 쉬워진다. 모든 사람의 내부에는 양심의 저울이라는 것이 있어서 아이에게 평소에 해준 것이 많으면 그만큼 화도 쉽게 나는 것이다.


바쁜 직장맘 엄마를 가진 아이 가운데 원만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경우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경우, 엄마가 평소 전업주부 엄마보다 많이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돈이나 물질 같은 것으로 보상하지 않는다.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상태를 다른 보상으로써 ‘하는 상태’를 만드는 대신, 엄마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아이를 지켜보고 아이의 자유와 책임을 폭넓게 허용한다. 당연히 아이에게 화도 안 낸다. 다른 엄마만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니까.


아닌 것만 하지 않아도 반은 성공한 것이다. 성경의 명시적인 육아법은 딱 하나다. ‘네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 역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자의 ‘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기로 작정만 한다면 열 살짜리도 이해할 수 있다. ‘도’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묻지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그게 ‘도’다. 이 역시 ‘부정의 부정’이다.


‘도’는 혼자 닦아야 하니 얼마만큼 배웠는지 알기 어렵지만, 육아는 아이와 함께하니까 처음에만 좀 참으면 할 만하다. 사실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쉬워진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주려고 끙끙 참는 동안,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아이에게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아이한테 ‘잘못하는 것’ 하나만 ‘하지 말자.’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 하지 말고, ‘너무 아닌 인간’만 안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육아뿐만 아니라, 장사든 직업이든 연애든 나 자신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나의 그 작은 문제가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다. 장사 안 되는 가게에 대해서 훈수 두면 다 보이는 것처럼. 왜 그렇게 분명한 것이 막상 내 눈에는 안 보일까?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단점은 잘 보이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뭔가를 자꾸 더 잘하기 위해 정신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덜 해주려고’ 애쓴다. 내가 하는 것 중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내 눈에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조언을 들을 기회조차 이 ‘안 하기’를 ‘하고’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린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문제점을 말해주지 않는다. 괜히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무엇을 자꾸 더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에는 혹시 누군가 나의 문제를 지적해주면 화가 난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네가 뭘 알아.’ 이런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들의 이야기가 절대로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한 심리다.


결론적으로,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완벽함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부족함이다. 나의 완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은 발전과 향상을 전제로 하는 부족함이 아니라, 부족함을 통해서 완벽해지겠다는 의지다.



세상과 연결되는 길: 불완전해서 나다울 수 있는 자유

타인과 부대끼며 가장 나다워지는 일

남을 배려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동시에, 남에게 이용만 당하진 않는 아이로도 키우고 싶어요. 자기주장을 잘해야 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렇다고 이기적인 아이가 되어서도 안 되겠죠. 적절한 중간 지점이 있을까요?


아이의 학교 성적이나 미래의 직업 전망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야말로 내 교육 목표의 핵심이다. ‘안 하고, 없는 것’이 어떻게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내 딴에는 이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리도 하다. 아이가 자기다운 방식으로 자기기 위치한 시대와 장소와 맞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내가 빼앗지 않고 아이에게 남겨주는 일 말이다.


어떻게 나다워질까?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까? 그것이 어떻게 인생을 사는 즐거움이 될까? 이 질문들이 얼마나 어렵게 느껴지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은 타인과 함께하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영원히 홀로 나다워질 수 없는 존재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다른 아이들의 학원 스케줄이 궁금한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99퍼센트 강력한 본능의 지배를 받으면서 미미한 1퍼센트의 자유를 위해 살아간다. 1퍼센트의 나다움이라도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불균형한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갖는 교육의 목표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머물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지켜내는 기쁨을 느끼기.


큰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의 조부모님 댁에서 몇 달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아이와 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같이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는 날 아침에 아이가 짐을 싸다 내게 물어왔다.


“엄마, 내 MP3 가져가서 음악 들으면 안 되겠지?”

“왜 안 돼?”

“동생이랑 아빠는 없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가는 거니까 나 혼자 음악 들으면 안 되잖아.”


아이가 이런 허락을 구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의 원칙은 ‘가족이 함께 있는 동안, 고립된 개인이 되는 전자기기 사용 금지’다. 일단 우리 가족이 힘을 합쳐 외부와 맞서 지키는 것이 우리 가정의 개인용 전자기기 청정지역 만들기다. TV, 인터넷, 스마트폰, 게임기가 없다. 그러다 큰아이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만 13세가 됐을 때 MP3 플레이어를 갖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 새로운 기기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함께 의논했다. 이 의논을 하는 데에만 반년이 넘게 걸렸다. 또 기회가 될 때마다 온 가족이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새로운 기기를 가졌을 때, 당사자인 큰아이의 행동은 어떻게 바뀔까?

-그 변화에 따라 다른 가족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기기가 없었을 때 좋았던 점은 무엇일까? 또한 예상되는 나쁜 점은 무엇일까?

-없었을 때의 장점을 어떻게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나쁜 점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할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적당한 기기들을 같이 쇼핑했다. 결과적으로 나온 원칙이 ‘가족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혼자서 음악을 듣지 않는다. 모든 가족이 함께 즐길 때에만 스피커로 함께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끼고 혼자 음악을 듣는 것은 등하교 스쿨버스에서 하루 2시간씩만 한다’이다. 다른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그 시간 동안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네가 듣고 싶은 음악을 설명해서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MP3 가져가도 돼.”


아이가 차 안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BTS의 ‘페이크 러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표정이 그야말로 외계어를 듣는 표정이다. 아이가 두 번쯤 설명하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엄마, 그냥 나 음악 안 들을래.”

“지금 포기하면 안 돼. 우리 넷이 똑같은 이유와 강도로 즐길 수는 없지만 함께 들을 수는 있어. 조금 더 열심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설명하고 공감을 얻어내.”


이때부터 코미디보다 더 웃긴 대화들이 오간다. 영어 같지 영어와 한국어 같지 않은 한국어를 써가며 15세 손녀와 70세 조부모의 대화가 떠들썩하다. 그렇게 30분 동안 대화 폭풍이 지나고, 드디어 차 안을 쾅쾅 울리는 BTS의 노래.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혼 없는 감상평이다.


“음악 좋네.”


아이는 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30분 동안 서로 노력했던 엉망진창 대화에 대한 감사 표현이라는 것을. 아이가 싱긋 웃는다. 이제는 짜증이 없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던 대화 자체를 거쳤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음악 안 좋다고 하셔도 돼요.”

“아니야, 네 설명을 듣고 나니까 정말 좋아.”


한참 BTS의 노래를 듣고 나서 내가 아이에게 슬쩍 찔러줬다.


“네 USB에 있는 복면가왕 보전 ‘백만송이 장미’와 ‘낭만에 대하여’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그래? 할머니, 할아버지! 이 노래 좋아요?”


그러고 나니 할아버지도 진지하게 들으시다가 역시 진심 어린 감상평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흥얼흥얼..., 우리 넷은 그렇게 함께 음악을 감상했다. 그리고 아이는 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설명한다.


“동생은요, 저랑 음악 듣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걘 아직 어려서 제가 틀어줘야 들을 수 있거든요. 워너원의 ‘뷰티풀’만 수십 번씩 틀어달라고 해서 너무 짜증나요. 저는 좋아하는 노래 숫자가 굉장히 많아서 이것저것 들을 수 있고, 아무리 좋은 노래도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 듣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걘 좋아하는 노래 수는 적은데 심하게 좋아해요.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해도 이렇게 다르거든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떻게 다르세요?”


역시 이 질문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주지 못하셨다. 그분들은 당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즐기고, 그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동생이랑 사이좋게 음악을 들어야지.”

“네? 그게 아니고요. 걔는요...”


그러면서 또 옥신각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도 깔깔 웃는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엇나가는 대화를 즐기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넷은 좁은 차 안에서 함께여서 즐겁게, 하지만 각자 자기만의 방식과 취향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렇다. 혼자 음악을 듣는다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지독하게 세밀한 개인적인 취향 말이다. 더 세밀하게 나다운 개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 가족은 함께하면 함께할수록 서로 너무나 다른 독특함을 확인하며 그렇게 자신을 지켜가려고 한다. 그 과정이 바로 교육이 아닐까?



가족: ‘우리’라는 경쟁력

완벽으로 가는 길, 우리만의 모자람을 사랑하기

SNS나 주변을 보면 다른 엄마들은 다들 아이를 잘 키우는 것 같고 아이들도 잘 자라는 것 같은데, 저만 서투르고 형편없이 육아하는 기분이 들어요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공부를 강조하지 않고, 타고난 성향을 키워주고, 미니멀리즘의 실천을 통해 삶의 여유와 의미를 찾는 책들이 많다. 미니멀리즘, 중년 은퇴, 귀촌, 짠돌이 재테크, 미니멀 육아, 자급자족, 환경보호, 소비 줄이기, 쓰레기 줄이기 등이 결을 같이한다. 이렇게 훌륭한 이야기들이 이미 많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은 이유가 있다.


큰애가 6개월 때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아기 숟가락을 열 개 정도 샀다. 한 개에 만 원이 훌쩍 넘는 온갖 기능을 갖춘 것으로 말이다. 이것저것 시험해보던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집에 와계시던 내 할머니가 어른용 대형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계셨다. 아이의 잇몸이 찢어지지도 않고, 납죽납죽 잘도 받아먹고 있었다. 정말 머리가 띵하도록 충격을 받았다. 적절한 온도가 유지되는 부드럽고 친환경적인 소재에 아기 손에 잘 맞는 숟가락이 아니면 아기가 굶어죽을 것처럼 호들갑 떨던 내가 그제야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후 아기 용품이라는 것은 일회용 물티슈든 아기 의자든 무엇도 사지 않는다. 아이와 외출해도 기저귀 두 개만 달랑 챙기기 때문에 기저귀 가방이라는 것도 따로 없었다. 어차피 애는 신경도 안 쓰고, 애 씻기고 먹이는 건 이러나저러나 힘들게 돼 있다. 그리고 현대 대학민국에서 자연스럽게 지키는 정도의 위생 관념과 상식만으로도 애는 멀쩡히 잘 큰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지금까지도 우리 집은 장난감을 세상에 없는 셈 친다.


시골에 살며 자급자족 생활을 연구하면서 온갖 종류의 가축 키우기, 태양열 발전, 빗물 받아 정수하기, 농기구 쓰지 않는 농법, 치즈와 요거트, 비누, 맥주, 화장품과 온갖 세제 만들기, 뜨개질, 옷 만들기, 창고나 지하 저장실 만들기 등 몇 달씩 투자해야 하는 전문적인 실습 수업도 듣고, 어마어마한 양의 책도 조사하고 실제로 심혈을 기울여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한다.


이쯤이면 웬만한 미니멀리스트들보다 내가 더 극성인데 왜 나는 이런 삶이 더 좋다고 하는 대신, 이게 나만의 방식이라고, 그것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돈 쓰는 게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돈을 쓰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처럼 돈 안 쓰고 아이들과 살면 당연히 불편하고, 구질구질하고, 아이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 분명 일정한 어려움을 느낀다(가령, 같이 공유할 비디오 게임이나 장난감 같은 게 없다).


사실 남과 다르기 때문에 육아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전과 어려움을 깊게 대면하게 되고, 무엇보다 엄청 구질구질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좋다. 그리고 나는 돈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즉, 나의 초라함과 한계를 분명하게, 그것도 매일 적나라하게 마주한다. 나는 그게 좋다.


나의 육아 방법이 최고도 아니고, 나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많이 쓰고 부지런하게 아이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하는 가정들을 보면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이들에게 파이팅해준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약 육아에 대한 단 하나의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어떤 방법이든 아이와 부모가 함께 즐거운 길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옳은 길이 딱 하나라는 생각,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방법으로 잘 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


하나의 정해진 행복과 정답을 찾지 않아도, 나만의 이유로 불행한 것이 나는 좋다. 그래서 우리의 글과 그림을 보면서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엄마, 그리고 한 가족이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설령 불행이라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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