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박한아
ǻ
21세기북스
   
14000
2019�� 09��



■ 책 소개

 

보편적인 남자아이와 엄마는 없다!
무례한 세상에서 육아를 외치는 페미니스트 엄마의 고군분투 육아 일기!

 

이 책은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양육자로서 아이와 엄마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무례한 시선들을 짚어내고, 그 안에서 아이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또 세상의 시선에 대항해 지금 시대의 양육자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 고민한다. 뿐만 아니라 박한아는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콘텐츠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를 지적하며, 아이들에게 더 다양한 여성 서사를 보여주고자 시작한 동화책, 애니메이션 큐레이션에 관한 수많은 팁을 전한다. 또한 여성 양육자인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되어준 콘텐츠에 관한 정보 역시 아낌없이 소개한다. 이 시대의 양육자들에게 저자 박한아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이 고민이 절대 사소하지 않다고 전한다. 이런 무례한 세상 속에서 여자아이, 남자아이를 벗어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공감의 육아 일기를 보낸다.

 

■ 저자 박한아
여성, 양육자, 페미니스트.

어렸을 적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입학한 대학에서는 정작 영화에 마음을 뺏겨 영상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주로 영화제와 서울의 작은 골목들로, 또 각종 리뷰와 비평들로 채워졌다. 이후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으로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4년간의 디지털 미디어 플래너로 일하면서 광고가 언어보다는 숫자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곤 퇴사, 이후 새 삶을 도모하기 위해 떠난 제주에서 엄마가 되었다.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그림이지만 하여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한편에는 여성 양육자로서 겪는 부당함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양육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해내고 싶은 일들이 있다. 지금은 이에 대해 읽고 쓰며 네 살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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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프롤로그 핑크와 파랑을 벗어난 아이는 훨씬 찬란히 빛난다

 

1장 무례한 세상에서 육아를 외치다
제 자아는 걱정마세요
좋은 아빠, 그냥 엄마
엄마 운전사가 필요한 이유
낮말도 밤말도 아이가 듣는다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아이의 취향
노키즈존에 찬성하신다고요?
개념맘과 맘충, 그 사이에서
○ 스몰토크의 생활화
○ 나의 첫 번째 내적 육아 동지를 소개합니다 (상)

 

2장 아이로 키우고 있습니다
네? 아들이라고요?
뽀뽀는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세상에 맞아도 되는 아이는 없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아들 키우는 법, 따로 있다?
핑크는 죄가 없다
남자애들은 다 그렇지 뭐?
남자아이들에게 더 관대한 세상
리본은 왜 미니마우스에만 있을까?
날카로운 첫 성교육의 기억
○ 아이들에게 더 많은 여성 서사를!
○ 동화책 버전의 ‘백델 테스트’

 

3장 아이는 한 뼘씩, 엄마는 반 뼘씩 자란다
예쁜 건 예쁜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3년 차의 함정
엄마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
완벽주의자의 육아: 흑역사 편
완벽주의자의 육아: 점진적 해결 편
착한 어린이가 될 필요 없어
엄마라는 직업
아이를 지켜주는 말
원 데이 앳 어 타임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아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 나부터 잘하자
○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4장 아이에게는 더 큰 마을이 필요하다
나의 작은 사람
나의 가족, 나의 동료
아이는 자란다, 계속 자란다
어쩌자고 자식은 낳아가지고
어른이 된다는 것
카르마 폴리스
네 바퀴로 굴러가는 삶
출생율 최저 시대에 부쳐
○ 나의 두 번째 내적 육아 동지를 소개합니다 (하)

 

에필로그 양육은 모두의 과업

 




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무례한 세상에서 육아를 외치다

아이의 취향

“출동! 불이 났다. 얼른 불 끄러 가야 돼! 자, 나 따라와!” “삐뽀삐뽀, 어디지? 어느 쪽으로 가는 거지?” “이쪽이야, 이쪽! 얼른. 빨리빨리! 삐뽀삐뽀!”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삐뽀삐뽀 불났어요’ 상황극으로 최근 바당이의 단골 에피소드다. 스크립트 짜는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25개월 바당이는 틈만 나면 매트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가장 좋아하는 소방차와 사다리차, 구급차로 1인 3역을 소화한다. 사실 바당이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로보카 폴리>나 <타요>같이 ‘탈것’이 주인공인 콘텐츠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린이집도 다니지 않던 때였고, 남편과 나 역시 자동차에 특별히 가중치를 둔 적이 없었다. 아이의 자동차 사랑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일이다. 바당이에게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바당이는 빠방이 왜 그렇게 좋아요?”

“빠방 좋아요. 바당이가 좋아서요.”


우문현답이었다. 덕통사고란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좋아서 좋은 거지. 이유 같은 게 왜 필요하담. 나는 바당이에게 취향이 생겼다는 게 기뻤다. 존재를 기르는 기쁨은 여러 갈래였지만 외출할 때마다 꼬박꼬박 트럭 장난감을 꼭 안고는 “나 함미네 집 갔다 올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안녕, 빠빠이!” 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진정한 소확행을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남자애라 그래

하지만 이 별일 아닌 일을 별일로 만드는 건 이번에도 어른들이었다. 아이가 자동차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는 걸 지켜본 이들은 “역시 남자애라 그렇다”는 말을 꼬박꼬박 덧붙였다. 아이는 주방놀이와 장보기놀이도 여전히 좋아했고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도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모르겠다는 건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통계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인다. 여자아이들 대부분은 공주놀이와 인형놀이를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탈것과 공룡을 유독 좋아한다. 어쩌면 정말로 타고난 호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 추론일까? 여자아이는 공주를, 남자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기 전에 한 번쯤 돌이켜보자. 아이들이 신생아 때부터 어떤 색깔과 장난감에 둘러싸이게 되는지 말이다.


*스몰토크의 생활화

좋은 질문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사람들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들이 대부분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가령 여행을 다녀온 후라면 “여행 좋았어?”라는 질문보다는 “여행 어땠어?”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좋은 대화는 대답이 단답형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은 피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바당이에게도 최대한 “아까 은우 형 집에 갔던 거 어땠어?” 혹은 “오늘 송편 처음 먹어봤지. 어땠어?”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아이의 반응에 맞춰서 “뭐가 제일 재밌었어?”라든가 “노란색 송편도 있더라?” “아까 떡 안에 들어 있던 건 뭔지 봤어?” 같은 식의 구체적인 질문들로 대답을 유도하곤 했다.


대화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다

대화의 흐름을 아이에게 맡기다 보면 사실 8할은 ‘아무 말 대잔치’가 되고 만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맥락이나 인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마치 꿈 같달까? 공룡이 어느새 다람쥐가 되고 놀이터 얘기가 어제 읽었던 동화책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런데 그러면 뭐 어떤가! 스몰토크가 괜히 스몰토크겠는가? 나도 처음엔 아이와 뭔가 ‘결론이 있고 유익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즐거울 수가 없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든가, 뭔가 가르쳐줘야 한다든가, 재밌게 해줘야 한다든가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맡겼을 때 나는 종종 상상도 못했던 행복을 경험하곤 했다.


“바당아.” 산책길에 손을 꼭 잡고 아이를 불렀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다 안다는 표정이다. 그러고는 코를 찡긋거리며 말한다. “사랑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을 느낀다. 아이가 대화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말이 통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려 깊은 대화 상대가 되기를,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대화 상대로 남기를.



아이로 키우고 있습니다

핑크는 죄가 없다

오랜만에 바당이의 동네 친구 지윤이네와 키즈카페를 간 날이었다. 10월 중순이라 키즈카페도 한껏 핼러윈 파티 분위기였다. 한쪽에는 코스튬이 마련되어 있었고 바당이와 지윤이도 입고 싶다며 들어가자마자 옷을 골랐다. 바당이는 망토를 두르고 커다란 고깔모자를 쓰겠다고 했다. 포토존에서 사진까지 찍고 돌아보니 지윤이는 아직 옷도 고르지 못한 채 지윤엄마와 한창 실랑이 중이었다. 지윤이가 사이즈가 너무 큰 핑크색 공주 드레스만을 고집하는 게 사건의 발단인 듯 했다.


“지윤아, 근데 이모가 보니까 여기 이 하늘색 드레스도 엄청 예쁘다. 이거 앨사 드레스 같은데!”

(아무 말 없는 지윤)

“소용없어요. 지윤이 요즘 분홍색만 입겠다고 난리예요.”

“지윤이 공룡 진짜 좋아했잖아요.”

“그러니까요. 이제 초록색은 오빠 거리고. 자기는 무조건 핑크로 사달래요. 어휴.”


결국 지윤엄마는 지윤이의 뜻대로 했다. 옷이 너무 큰 나머지 어깨가 계속 흘러내렸지만 지윤이는 두 시간 내내 그 옷을 벗지 않았다. 지윤엄마는 당혹스럽다고 했다. 위에 오빠가 있기도 하거니와 이 집 역시 딸이라고 해서 공주와 인형만 쥐여 주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지윤이는 말이 트인 이후부터는 공룡을 좋아해서 공룡 나오는 극장판 만화영화도 진작에 보러 간 친구였다. 겁도 없는 편이고 또래 중에서도 유독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라 오빠와 공을 차고 뛰어노는 걸 제일 좋아했었다.


그런데 조금씩 달라졌다는 거다. 치마를 입지 않으면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현관에서 말씨름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란다. 어린이 채널에서 광고하는 아동용 화장품 장난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네일 스티커를 받고 싶어 한다고 했다.


참 뾰족한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이가 좋다는데 그걸 어떡하겠나. 나도 종종 상상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가 언제까지 내가 은근슬쩍 자기 전에 읽어주는 책에 한 권씩 끼워 넣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책들을 좋아해줄까. 잘 입고 다니는 핑크색 패딩이 싫다고 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세상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지금도 바당이는 나갈 때 신을 신발만큼은 꼭 자기가 고른다. 한겨울 여름 샌들을 신고 쨍쨍하고 무더운 날에 장화를 신고 나간 게 벌써 여러 번이다. 처음에는 설득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고 다른 데로 관심을 끌어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는 확고했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자아가 발달하는 시기인 두 돌 전후부터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후로 ‘신발 선택권’만큼은 바당이에게 일임했다. 이 시기의 양육자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위험하지도 않고 중대하지도 않은 일이라면 웬만한 것은 아이의 뜻대로 하게 두라”였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상황을 충분히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긍정적인 자아상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려웠다. 당연히 아이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나는 내 아이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것과 남자의 것이 늘 따로 있지 않다는 걸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가 나의 제안들을 거부한다면? 그 좋고 싫음이 어떤 바탕에서 어떻게 생겨났든 간에 ‘싫다’고 의사 표현을 하는 아이에게 내 의견을 내세우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아무리 바람직한 것이어도 말이다.


아이가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를 밝혔을 때 그것이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어온 고정관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막거나 아이의 선택지에서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아이의 의견을 그렇게 간단히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지윤엄마는 지윤이가 여자, 남자를 나눠서 얘기할 때마다 염불 외는 심정으로 “봐봐, 엄마는 핑크색 별로 안 어울리는데 아빠는 잘 어울리잖아. 그냥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걸 고르면 돼” 같은 말을 계속 해준다고 했다. 하긴 정말 핑크가 무슨 잘못이람! 은근슬쩍 누구는 그걸 반드시 좋아하는 것처럼, 누구는 좋아하면 좀 이상한 것처럼 얘기하는 거야말로 잘못된 일이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뿐일지도 모른다. 반대쪽 저울에 추를 올리는 일. 양육자가 먼저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례가 되어주고, 아이가 편견을 접할 때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꼼꼼한 주석을 달아주는 것. 이런 토대를 쌓아가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의문을 갖고 대화할 준비가 되면 우리는 좀 더 커다란 말들을 나눌 수 있을 거다. 그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일단 오늘의 땅을 다진다.


아이는 한 뼘씩, 엄마는 반 뼘씩 자란다

엄마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라는 인간의 바닥과 마주하게 된다. 내 좁디좁은 그릇을 실감하는 일이 잦은데 바당이가 두 돌을 갓 넘긴 시점에는 거의 매일같이 그런 일이 있었다. 그맘때 바당이는 약간 헐크 같았다. 거의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달까? 지나고 나서야 이것이 바로 ‘미운 세 살’이자 전 세계적으로는 ‘공포의 두 살’로 불리는 시기라는 것을 알았다. 블록을 쌓다가 자기 맘대로 안 된다고 울면서 다 때려 부수고 그러다 다 부서졌다고 또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졸리거나 피곤해서 짜증이 날 때면 나와 남편을 때리기도 했다. 몇 번을 얘기해도 듣는 법이 없었다. 던지지 말라고 얘기하는 와중에도 던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막무가내인 아이에게 매번 다정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다 한번씩 참지 못하고 불쑥 화를 내뱉고 나면 또 내가 너무 못난 사람 같아서 그 말들을 도로 다 주워 담고 싶었다.


훈육이라는 착각

아이에게 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에게 가닿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훈육’을 다룬 양육서들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는데 그간 내가 훈육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아직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또 괜찮고 괜찮지 않은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도 일부러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모델이 없으니 일단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란다. 여태껏 나는 ‘훈육’을 잘못한 아이를 혼내고 다그쳐 수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부터가 잘못됐던 셈이다. 훈육이란 아이가 아직 모르는 규칙들에 관해 설명을 하고,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범주를 나눠주는 작업에 가까웠다. 새로 산 전자기기의 사용설명서처럼 말이다. 필요한 건 타박이나 야단이 아니라 건조하고 핵심만 담은 말이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무조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아이의 태도는 나에겐 ‘고집’이었지만 아이 입장에선 ‘의사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이를 존중한다고 말해왔으면서도 사실은 그저 아이가 내 말을 잘 듣고 얌전히 내가 하자는 대로만 따라오기를, 그렇게 해서 우리의 안온한 일상이 유지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양육자의 공부엔 끝이 없어라

아이만큼이나 나 역시 완전히 새롭게 배워야 했다. 작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법에 대해서. 내가 떠올리는 익숙한, 그래서 괜찮다고 여겼던 말들은 이미 낡은 지 오래였다. 아이에게 양육자의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지만 “엄마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해” “자꾸 떼쓰면 망태 할아버지가(혹은 저기 경찰 아저씨가) 이놈! 한다” “빨리 와, 안 오면 너 두고 간다”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


그보단 “네가 계속 짜증을 부려서 엄마도 기분이 안 좋아” “엄마 먼저 가 있을게. 얘기할 준비되면 와” 같은 식이 바람직했다. 무엇보다 상상 속의 인물이나 제3자를 끌어들여 아이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건 피해야 할 화법이었다. 아이의 언어 발달 정도에 따라 가정 표현을 사용하는 건 괜찮았지만 긍정적인 상황을 심어두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했다. “자, 엄마는 뛰어갈 건데 한번 같이 가볼까? 네가 먼저 도착하면 간식 먹는 거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사실 양육의 모든 순간에 그래야 한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여하튼 원칙이라는 건 그랬다. 원래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다르지 않나.


사실 나도 처음에는 ‘아이에게 하기 쉬운 말실수’ 같은 가이드들을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싶기도 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불안해한다 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바람직한 예시로 나온 문장들을 살펴보면서 알게 됐다. 물론 아주 큰 인내심과 배려심을 요구하는 일이긴 했지만 아이를 대화 상대로 존중하되 아이의 말 높이에 맞추는 세심하한 대화자가 되면 됐다.

아이를 키울수록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지만, 늘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양육자로서 아이를 배려하고 지도한다는 게 제일 어렵다. 훈육은 그 정점에 있다.


나름대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 공부를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세워본 기준을 이렇다. ‘이 말과 행동을 성인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나?’라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내가 내 친구랑 의견 충돌이 좀 있다고 “됐어, 나 갈 거야”라고 하던가? 남편과 서로 주말을 보내고 싶은 방식이 다르다고 “넌 진짜 왜 그렇게 내 말을 안 듣니?”라고 얘기하나? 그러면 효과가 있나? 문제가 해결되던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한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아이에 비해 언제나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늘 잊지 않으려고 한다.


훈육을 넘어 칭찬까지

훈육에 관해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제대로 칭찬하는 법’이었다. 훈육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의 그른 행동을 지적하는 것부터 긍정적인 피드백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칭찬 역시 중요한 파트였다. 타고난 것을 칭찬하고 결과를 부각시키는 것보다, 아이의 노력과 성취 과정에 중점을 두라는 조언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도움이 된 건 그냥 “사실을 말하라”라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바당이가 블록을 높게 쌓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을 때면 “와, 우리 바당이 블록을 정말 높게 쌓았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잘했다’ ‘좋다’ 같은 가치판단 대신 ‘꼼꼼하다’ ‘기발하다’ ‘재밌었겠다’ ‘즐거워 보인다’ 같이 구체적인 묘사가 더욱 바람직하다고 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걸 아이가 느낄 수 있으면 충분했다.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아

아이에게 여행은 언제나 지금이다

임신 중에 한 독립서점에서 진행하는 독립출판 워크숍을 수강했었다. 12주에 걸쳐 기획부터 시작해서 한 권의 출판 및 인쇄, 서점 입고까지의 과정을 배우는 커리큘럼이었다. 열 명 정도 되는 수강생 중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임신 중이었던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그분의 아이는 초등학생이었다. 각자의 기획안을 발표하던 자리에서 그분은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갔던 여행 이야기들을 모아 사진에세이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 제목이 참 인상 깊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여행.’


그때도 그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했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이따금씩 그 제목이 떠오르곤 했다. 아이는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내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다섯 살 부근인 것 같고 사실 이 기억의 정확도도 매우 떨어진다. 단일 기억이 아니라 어떤 기억들의 총합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가족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해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대체로 우리는 각자의 아주 어린 시절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는 작년에 다녀온 가평이며 평창 이야기를 아직도 재잘거린다. 어디를 가보고 싶냐는 질문에는 꼬박꼬박 더 둘 중 하나를 대며 “너무너무 좋았어” “또 가고 싶어” “농장도 가고 고기 치익~도 또 하자!”라고 얘기한다. 그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여기서 우리 오리 봤었잖아!” 하는 식이다. 그런 말을 할 때의 아이 표정은, 행복이다.


무엇보다 기억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아이에게도 언제나 늘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카르페 디엠’부터 ‘욜로’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정언명령은 ‘순간을 즐겨라’ 아니던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지속될 추억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 잠깐 좋자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오늘의 날씨를 즐기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제일 중요한 건 나중까지 남을 ‘좋은 기억’이 아니라 그저 ‘지금 즐거울 것’이라는 단순한 명제다.


아이에게는 더 큰 마을이 필요하다

나의 가족, 나의 동료

너도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걷기를

바당이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길 바란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부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비병을 지르는 상대의 목소리를 틀어막고는 무턱대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을 꺼내지 말기를, ‘너무 예민하다’며 그들의 경험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도 모르게 누리게 될 특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염치를 가졌으면 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은 것은 부당한 일임을 알고 그것에 대해 맞서 싸워나가는 용기 역시 가지길 바란다. 무언가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으면 그 말들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기를, 설사 본인의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그런 마음은 무엇일까 헤아려보는 사람이기를 말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 성별 따위를 이유로 자신의 행동이나 삶에 제약을 두지 않기를,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차근차근 펼쳐나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남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반려자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함께 살아나가는 믿음직한 동료인 것처럼 아이 역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는 아직, 그리고 아마 한동안은 나의 보호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많은 역할을 스스로 맡게 되겠지. 바당이는 나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20년쯤은 나와 한집에서 살아갈 동거인이고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의 친구이자 연인이며 이웃이자 선배이고 또 후배이며 동료가 될 것이다. 가끔 그 무렵의 바당이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곤 한다. 누군가의 불편한 얘기도 꺼리지 않는, 그 누군가와 함께 걷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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