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책벌레부터 천재 악동까지
10명의 위인을 키워낸 맞춤형 독서교육의 비밀
‘명문가 교육’ 전문가 최효찬의 최신작. 요즘처럼 인간관계의 기본이 무시되고,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꼭 필요한 교육이 기초 중시의 독서교육이다. 이 지점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5백 년 명문가의 독서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이다.
저자 최효찬은 독서를 통해 자녀의 인성과 삶의 자세를 잡아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부모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우리나라 5백 년 명문가 중 10가문의 독서교육에서 핵심 비법만을 뽑아 오늘날 독서교육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 가문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각 가문의 독서비법’을 7개 조항으로 정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여 자녀의 독서교육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명문가의 서재’ 코너를 두어 각 가문별 애독서와 관련서를 밝혀 정신적 뿌리와 사상의 근원을 탐구해 볼 수 있도록 했다.
■ 저자 최효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비교문학) 학위를 받았다. 17년간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다.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원으로 학부대학 우수강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자녀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명문가의 위대한 유산’을 주제로 강의를 하며 우리 사회의 리더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한경비즈니스에 수년간 독서칼럼을 연재한 데 이어 2013년부터 매일경제신문의 매경이코노미에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를 연재 중이다. 독특하고 열정적인 글쓰기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선정한 ‘한국의 저자 300인’에 뽑히는 등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와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과 독서교육 비법을 명쾌하게 분석해 베스트셀러가 된 『5백 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현대 명문가의 자녀교육』(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세계 명문가의 독서교육』(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이 있고, 『잠자기 전 30분 독서』 『마흔, 인문학을 만나라』 『한국의 메모 달인들』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일상과 공간과 미디어』(200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사람의 근본부터 가르치는 ‘기초 중시’의 독서교육을 하라!
1장. 조선 최고의 학자, 이황 가-5백 년을 내려오는 필독서의 저력
좋은 책을 매일 꾸준히 읽고 터득하라
*이황 가의 독서비법 7_책 즐겨 읽는 아이로 키우는 독서법
2장.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 가-기록하는 자가 이긴다
열정적인 독서로 10년 법칙을 실현하라
*이순신 가의 독서비법 7_외향적이고 활발한 아이를 위한 독서법
3장.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가-역사서를 읽어야 명문장이 나온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통섭형 독서를 시켜라
*최치원 가의 독서비법 7_글로벌 인재나 작가가 꿈인 아이를 위한 독서법
4장. 우리나라 ‘스승의 원조’, 김굉필 가-550년 앞서 실천한 ‘독서 10년 법칙’
기초가 튼튼해지는 독서의 길로 이끌어라
*김굉필 가의 독서비법 7_기초와 기본을 중시하는 아이로 키우는 독서법
5장. 조선이 만든 천재 악동, 허균 가-처음 읽는 책이 평생 영향을 미친다
자신만의 색깔 있는 독서와 글쓰기를 추구하라
*허균 가의 독서비법 7_자신만의 스타일과 개성이 강한 아이를 위한 독서법
6장. 딸을 조선 유일 ‘여중군자’로 키운 장흥효 가-여성의 한계를 두지 않고 교육하다
한계를 뛰어넘는 법을 책 속에서 배우게 하라
*장흥효 가의 독서비법 7_딸을 현명한 여성으로 키우는 독서법
7장.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김만중 가-베갯머리교육 원조가 된 ‘구송’의 힘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 자녀의 모범이 돼라
*김만중 가의 독서비법 7_열성적 어머니가 역할 모델로 삼을 만한 독서법
8장. 실학파의 스승, 이익 가-독서하며 생각을 메모하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도록 항상 새로운 책을 사주어라
*이익 가의 독서비법 7_학자를 꿈꾸는 아이에게 적합한 독서법
9장. 조선의 독서왕, 김득신 가-둔재를 이겨낸 반복 읽기의 힘
자신과 기가 통하는 책을 찾아 읽어라
*김득신 가의 독서비법 7_끈기와 도전정신이 필요한 아이에게 적합한 독서법
10장.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 가-베끼기와 독서 일기의 저력
독서내공을 쌓으려면 계산하지 말고 읽어라
*이덕무 가의 독서비법 7_현실을 이겨내고 꿈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독서법
에필로그 독서를 하는 데 늦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지금 읽으면 된다!
주요 참고문헌
5백 년 명문가의 독서교육
조선의 최고의 학자, 이황 가
좋은 책을 매일 꾸준히 읽고 터득하라
반복해서 외우고 중요한 문구를 베껴라
퇴계는 12세 때 『논어』를 작은아버지에게 배웠는데, 그날 배운 것은 반드시 모두 암기했다. 또 그다음 날에는 그 전날과 그저께 배운 것까지 모두 암기했다. 『논어』를 끝낼 때에는 전부를 다 외울 수 있었다. 외우고 또 외우다보면 절로 뜻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퇴계는 공부 습관을 이렇게 말했다.
"글을 읽는 방법은 익숙하도록 읽는 것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을 이해하더라도 익숙하지 못한다면, 읽으면 곧 잊어버려서 마음에 간직할 수 없다. 배우면 반드시 다시 복습하는 습관을 들여야 마음속에 지닐 수 있다."
책을 읽은 후에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책을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외우고 또 외워서 문장이 입에서 절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퇴계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퇴계는 글을 읽으면서 중요한 문구를 필사했고, 이것이 축적되자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주희의 『주자대전』을 읽으면서 펴낸 『주자서절요』이다. 『주자대전』은 121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데 현재 한글로 번역된 것은 13권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때인 1543년에 간행되었는데, 이때 퇴계는 『주자대전』을 처음 접하고 평생 자신의 학문을 이끌어줄 등대로 삼았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한 1549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48권에 달하는 서간문들이었다. 여기에는 주희가 친구나 제자들과 나눈 학문에 대한 의견들, 국가와 시대에 대한 고민 등이 폭넓게 담겨 있다. 퇴계는 이를 통하여 주자학의 큰 줄기를 파악했다. 그리하여 퇴계는 48권의 서간문 중에서 긴요한 부분만을 뽑아 14권으로 재편집했는데, 이것이 『주자서절요』이다. 말하자면 『주자대전』을 읽으면서 자신이 생각한 핵심적인 내용을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책을 좋아해 호학군주로 불리고 독서를 할 때마다 책을 펴낼 정도였던 정조가 바로 이 책의 애독자였다. 그는 『주자서절요』를 읽으면서 한 편을 반드시 수십 번씩 읽었고, 한 권이 끝날 때마다 반드시 중요한 문장을 뽑아 필사를 했다. 그런 정조는 이황의 『주자서절요』14권을 다시 3권의 『자양자회영』이라는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송강 정철은 56세 때 평북 강계로 유배를 가 『주자서절요』를 읽었다. 정철이 책을 읽을 때마다 그 횟수를 동그랗게 표시한 페이지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이황의 『주자서절요』는 방대한 『주자대전』에 입문하거나 그 책이 너무 방대해 읽기 어려운 이들의 필독서였던 것이다.
퇴계의 독서법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일이든 노력 없이 순간적인 도약을 할 수 없다. 독서 또한 마치 한 땀 한 땀 옷을 짜듯이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또 적다 보면 마음에 젖어드는 것이다. 퇴계의 학문은 이런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거치면서 비로소 무르익은 것이다.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 가
열정적인 독서로 10년 법칙을 실현하라
전공불문하고 외국어 공부에 힘써라
지금은 영어와 중국어가 가장 활용 가치가 높은 외국어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단연 중국어였다. 조선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두 나라 사이를 수시로 사신이 오고 갔다.
이순신의 선조 중에서 5대조인 이변은 중국어에 능통해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했고, 이순신 집안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더욱이 이변은 역관이 아닌데도 한어, 즉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가 얼마나 중국어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세종실록』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변은 그 사람됨이 둔했는데, 30세가 넘어서 문과에 합격해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를 배웠다. 성공하고야 말리라 다짐하고 밤새워 공부하고 중국어를 잘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 질문하고 도움을 받았다. 집안사람들과 말할 때에도 언제나 중국어를 썼다. 친구를 만나도 반드시 먼저 중국어로 말을 접한 후에야 우리말로 말하곤 했는데, 이를 말미암아 중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어느 아버지가 행한 효과적인 외국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480년 전인 1533년에 프랑스 남서 지방 보르도에 사는 피에르 에켐은 아들 미셸을 얻었다. 아버지는 많은 학자들과 권위자들에게 아동교육에 대해 문의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아이에게 최소한의 강제를 가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싶어지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언에 따라 아버지 피에르는 당시 유럽 교양층의 언어였던 라틴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미셸이 있는 데서는 누구라도 라틴어만 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미셸은 6세가 되기까지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전혀 배우지 못했지만 라틴어 실력은 최고 수준에 올랐다. 이렇게 자란 어린아이는 훗날 보르도 시장에 선임되었고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바로 오늘날 산문 문학 형식의 전형이 된 『수상록』의 저자 미셸 에켐 드 몽테뉴(1533~1592)이다.
이변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에 중국어 공부에 집중했다. 당시 문과 시험에는 중국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중국어 능통자는 역과 시험을 거쳐 역관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변은 중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그렇게 익힌 결과 중국어의 일인자로 알려지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 외교 문서를 담당한 관서로 승문원이, 통역관을 교육하는 관서로 사역원이 있었다. 중국어에 능통한 그는 중국어 통역관을 교육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 가서 명나라 학자들을 만나 조선에서 만든 『소학직해언해』를 설명한 일도 있다. 당시 빼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이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이변은 명나라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다. 또 세종에 이어 문종 임금 시절에도 차관급인 예조참판직에 있으면서 명나라 사절들 접대를 도맡았다. 세조 임금 시절에는 장관급인 형조판서(법무부 장관)에 올랐고, 외교관 업무도 계속 맡았다.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과거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후 무려 50년 동안 6명의 임금을 섬기며 외교관으로 화려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만약 과거 시험에 합격한 기분에 도취해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관리로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관의 영역인 중국어 공부에 뛰어들어 외교관으로 크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요즘에 비유하면 장관급 공무원 가운데 중국어를 최고로 능통하게 구사하는 공무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공무원보다 뛰어난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중국어에 능통했던 선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이순신은 외국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하들 중에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숙한 사람을 적극 활용해 임진왜란에 임했다. 그중 손문욱은 거북선에 승선해 명군과의 연합 작전을 수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가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통섭형 독서를 시켜라
재능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하라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신분제가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골품제가 위력을 발휘하던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이런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최치원 가의 가풍은 개방적이었다. 한 집안에서 형은 불제자로 이름이 높았고, 동생은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는 두 형제를 키우면서 자율성을 중시한 교육을 한 것이다. 당시 신분제로 인해 벼슬살이가 제약을 받았던 육두품 집안들은 대체로 가풍이 개방적이었고, 공부도 자녀의 의사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집안에서 형제가 가는 길이 다른 것은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이때 부모가 자녀의 적성과 재능을 면밀히 파악하고 적성에 맞는 길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자식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도록 이끌기란 굉장히 힘들다. 어릴 때에는 자식이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일에 적성이 맞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다 무작정 남들이 좋다는 분야를 택하면 평생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때그때 선택을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아이가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들을 잘 다룬다면 기계치가 아닌 셈이다. 책을 읽거나 글쓰기가 끔찍하게 싫어한다면 문과로 가면 안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독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아이는 자신이 관심 가는 분야의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으면 그 책을 통해 또 다른 책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관심 분야에 맞게 책을 읽다 보면 책이 재미있을 것이다. 관심 분야라고 생각하고 책을 골랐는데 영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분야일 수 있다. 반면에 책이 재미있고 눈에 쏙쏙 들어온다면 그 책이 속한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맞다는 신호다. 그러면 더욱더 책을 찾아 읽게 되고, 그게 쌓이고 쌓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적성과 재능이 맞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그만큼 쉽고 재미있을 것이다. 반면 적성과 재능이 맞지 않은 분야를 공부한다면 재미도 없고 공부가 지겨울 것이고 전문가는 결코 되지 못하고 늘 겉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녀의 적성과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급하게 서둘 필요가 없다. 천천히 찾아도 된다. 30세가 넘어서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도 된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면 더 빨리 그 기회가 올 것이다. 관심 갖는 것만큼 눈에 들어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상반된 지식을 융합하는 독서를 하라
최치원은 불교에도 남달리 해박했는데 형인 현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였다. 형 현준은 당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로 해인사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훗날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은거하게 된 데에는 형의 영향이 컸다.
현준은 일찍이 당나라에서 『화엄경』뿐만 아니라 도교도 배워 와서 동생 치원에게 전수했다. 이런 연유로 최치원은 유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정통했다.
최치원은 유학과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유학과 불교, 도교 등 당시 유행하는 학문들을 폭넓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요즘은 이런 인재를 통섭형 인재, 융합형 인재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인재상이다. 이들은 하나의 학문, 하나의 분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까지 해박하므로 서로 연관시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를 내놓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이 서로 절과 성당을 방문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뜻깊은 방문이었다. 이처럼 요즘 가장 필요한 인재는 자신의 것만 주장하는 인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을 포용하는 인재, 서로 상반된 지식을 융화시키고 그 속에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이다. 최치원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요구되는 핵심 인재상인 융합형 인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학을 기본으로 도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융합형 인재의 면모는 아버지가 이끈 조기유학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여유 있는 경제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당나라에 유학보내 형은 불교를, 동생은 유교를 공부해 그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로 키워낸 아버지의 공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조기유학은 1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의 열성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이 만든 천재 악동, 허균 가
자신만의 색깔 있는 독서와 글쓰기를 추구하라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어라
중국에서 4천여 권의 책을 사올 정도로 열성이었던 허균의 삶에서 책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불우한 일을 당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에도 책이 위로가 되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반드시 책방에 들렀다. 새로운 세상을 먼저 구경하려면 서점에 가라는 말이 있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그냥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책의 제목을 유심히 보기만 해도 지금 사회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허균은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 강렬했다. 그는 과거 시험에 수차례 실패한 장인이 서원을 짓고 책 1천 권을 진열한 뒤 그 안에서 노닐면서 시를 짓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29세 때 북경에서 4천여 권의 책을 사온 것도 이런 장인의 영향이 컸다.
허균은 책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사상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미처 접할 수 없었던 내용과 주장을 책을 통해 접하고선 책을 통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균에게는 독서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였다. 허균의 방대한 독서량은 세상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사람들이 어떤 내용이 어느 책에 나오는지를 문의해 오는 일도 있었다.
허균은 노불(老佛)의 글을 좋아했다. 노불은 노자와 장자, 불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의 학문은 공자의 학문과 노선이 달라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는 금기의 학문이었다. 노자와 장자의 학문을 공부하고 책을 내면 이단으로 몰리고, 심지어 그 책을 불태우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 후기 학자인 박세당이 그랬고 윤휴가 그랬다. 불경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율곡 이이는 19세 때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공부했는데, 평생 이 사실로 전전긍긍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누구나 불경을 공부할 수 있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 시대에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리고 과거 시험에도 낙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율곡은 이일을 크게 후회하며 평생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요즘 신상털이를 당하면 누구나 큰 상처를 입게 되듯이 조선 시대에도 사회적으로 불경을 공부했다고 신상털이를 당하면 이단으로 낙인 찍혀 매장되었던 것이다.
허균은 사명당에게 불경을 배운 것이 화근이 되어 삼척부사로 부임하자마자 파직당했다. 말하자면 학문의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허균은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된 것도 아니고 단지 학문적으로 공부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조선 조정과 신하들은 허균을 탄핵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허균은 이단으로 몰리고 파직을 당해도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사상을 흡수했다. 율곡 이이는 불경을 공부한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허균은 이를 당당하게 드러냈고 사회로부터의 불이익도 감수했다. 몸은 감옥에 가둘 수 있어도 혼은 가둘 수 없다는 말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자신만의 관점을 글로 남겨라
허균은 당시 성리학 등 주류 학문에도 통달했지만 노자와 장자 등 도교, 불교, 민간신앙 등 비주류로 취급한 영역으로 관심을 넓힘으로써 사유의 폭을 확대해 나간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문필가였기 때문이다. 서자라는 신분에 한계를 느낀 홍길동이 율도국을 만들어 모두가 평등한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내용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이런 내용은 그가 심취했던 『수호전』에서 일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명나라 때 시내암이 쓴 『수호전』에는 무려 108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대개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거나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다. 하나같이 기존의 불합리한 사회 질서에 반항하는 용감한 싸움꾼들인 것이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수호전』에서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후의 사회 제도의 결함, 특히 본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의 신분 차이를 타파하고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이 혁명 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결국『홍길동전』은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허균은 목숨을 건 창작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고발한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수호전』과 같은 다양한 독서였고, 그 결과는 글쓰기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그의 주류와 비주류를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허균은 책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책을 펴냈다.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면서 은둔과 한정에 관한 부분만 뽑아 새롭게 분류해서 『한정록』을 엮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문집을 읽고 자신만의 시문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허균의 문학은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문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몸짓이었다. 말하자면 허균은 『홍길동전』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을 열망했던 것이다.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김만중 가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 자녀의 모범이 돼라
어머니가 책을 읽어 주는 구송으로 가르쳐라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신 중이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김만중의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분신 자결했다. 그 시각 김만중의 어머니 윤씨 부인은 강화도를 빠져나오며 엄동설한에 배 위에서 아들을 낳았다. 윤씨 부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어린 형제에게 책을 얻어다 읽혔다. 그뿐만 아니라 두 아들이 책 읽기를 게을리할까 경계하여 부인 자신이 더 열심히 독서에 매진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인 것이다. 또한 부인은 아들이 젖먹이일 때부터 책을 읽어 주며 글의 뜻을 들려주는 구송 방식으로 교육했다.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김만기와 김만중 형제는 훗날 대제학 자리까지 오른다.
사실 김만중의 집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나온 집안이다. 학문으로는 다른 어느 가문에 비해 손색이 없다. 김만중의 집안은 그런 내로라하는 집안이지만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살이를 했다. 김만중의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었는데, 외손자가 아들이자 손자 역할을 해 근심걱정을 잊었다고 한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두 아들을 키우면서 손에서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친정살이를 하는 틈틈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책을 펴고 읽으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윤씨 부인의 할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손녀가 아들이었다면 우리 집안에서 대제학이 나오지 않았겠느냐."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윤씨 부인은 할머니 정혜옹주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을 실천하며 두 아들을 키워냈다. 먼저 아들들이 8세, 3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외손자들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듬해에 시아버지와 친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두 아들은 졸지에 스승을 잃고 말았다. 이때부터 윤씨 부인은 두 아들에게 『소학』과 『십팔사략』, 『당시』등을 직접 가르쳤다. 어머니의 입장이자 스승의 입장에서 아들을 가르치면서도 결코 학업 과정을 독촉하지 않았다.
윤씨 부인은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아비 없이 외롭게 크는 아들을 제대로 세우기 위함이니, 만일 어려서 가르침을 잃어서 마침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 되면 비록 장성한다 해도 자식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윤씨 부인 자신이 더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모가 먼저 역할 모델을 가져라
윤씨 부인은 두 아들 김만기와 김만중, 손자 김진규를 대제학으로 키워냈다. 이어 증손자 김양택도 대제학이 되어 김만중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해낸 가문이 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 통틀어 서너 가문에 불과하다. 대제학은 학문이 높아야 오를 수 있는 벼슬이다. 윤씨 부인이 두 아들 김만기와 김만중을 대제학으로 키우고 손자도 대제학으로 키운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윤씨 부인 자신이 먼저 방대한 독서로 무장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윤씨 부인은 어릴 때부터 "남자로 태어났다면 대제학 재목감"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자랐다. 여성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도 수많은 책을 섭렵했기에 들을 수 있는 칭찬이었다. 윤씨 부인은 자신이 들었던 "대제학 감이야."라는 칭찬을 두 아들과 손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었다. 자신은 결코 이룰 수 없던 대제학의 꿈을 자식들이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선 자식들 앞에서 솔선해서 글 읽는 모습을 보여 주기로 다짐했다.
윤씨 부인은 두 자식에게 인자한 모친인 한편 엄하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춘 스승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씨 부인의 학문에 대한 지식은 이미 남자들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
한번은 윤씨 부인의 삼촌인 당시 경기도 관찰사 홍명원이 방문해 아들 만기에게 "나무 목자를 성씨로 가진 사람을 알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큰 아들은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씨 부인은 "원나라 태조의 공신에 목화녀가 있다."고 했다. 이에 삼촌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독서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목화녀가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이 드문데 하물며 능히 그 성이며 이름을 이렇게 분별하다니."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윤씨 부인은 독서를 하면서 접한 송나라 문장가 구양수의 모친처럼 예절을 지키면서 아들을 가르치고, 시로 유명한 소동파 형제처럼 키우려고 했다. 어머니는 두 아들이 성장하자 자신이 모두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큰 아버지인 김익희에게 가르침을 받게 했다. 그다음에는 당대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에게 가르침을 받게 했다. 윤씨 부인은 두 아들을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단계별로 그 수준에 맞춰 교육받게 이끌어주었다. 이러한 윤씨 부인의 교육열에 힘입어 두 아들이 모두 대제학이 되었고, 손자 김진규와 증손자 김양택까지 3대에 걸쳐 네 명의 대제학을 배출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으로 보면 이들 네 명은 엄친아로 회자되는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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