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십대의 소셜 미디어 이용을 둘러싼 고정관념을 파헤치는 책!
청소년 문화와 기술 전문가 다나 보이드가 십대의 소셜 미디어 이용을 둘러싼 주요 미신들을 파헤친다. 네트워크화된 세상에서 태어난 십대에게 소셜 네트워크는 예전 어른들의 사교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어린 시절 동네 공원이나 전자오락실, 빵집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었듯이, 지금 아이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만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십대의 소셜 네트워크 사용이 일반적으로 ‘괜찮’으며 예전 십대가 그랬듯이, 지금의 십대 역시 어른이 자신의 아지트(소셜 네트워크)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하더라도 지켜볼 수는 있다. 저자는 이렇게 십대들을 보살펴 줄 기회가 더 늘었다는 점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십대의 네트워크화 된 영역을 설명하면서 사회학자의 통찰력과 기자의 눈, 기술자의 능숙함을 드러낸다. 자녀들이 온라인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부모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 저자 다나 보이드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책임 연구원, 뉴욕대학교에서 연구교수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의 인터넷과 사회를 위한 버크만 센터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녀의 연구는 십대가 어떻게 기술을 일상생활 속으로 통합하는지 그리고 기술과 사회 간 또 다른 의사소통에 집중한다.
■ 역자 지하늘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재학 중이며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차례
Ⅰ. 서문
Ⅱ. 들어가며
1. 정체성 : 왜 십대는 온라인에서 이상해 보이는가?
2. 사생활 : 왜 십대는 그토록 공개적으로 공유하는가?
3. 중독 : 십대는 무엇때문에 소셜 미디어에 집착하는가?
4. 위험 : 성범죄자는 모든 곳에 숨어 있는가?
5. 왕따 : 소셜 미디어가 비열함과 잔인함을 증폭시키는가?
6. 불평등 : 소셜 미디어가 사회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가?
7. 해독능력 : 오늘날의 십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인가?
8. 그들만의 대중을 찾아
소셜시대 십대는 소통한다
들어가며
지난 십 년간, 소셜 미디어는 소수만이 즐기는 뒤죽박죽 섞인 기술 모음에서 현대 문화의 중심에 있는 사이트와 서비스의 집합체로 진화했다. 십대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잡담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어울리기 위해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인기 서비스로 눈을 돌린다. 비록 이 책에서는 인터넷 전반과 문자 메시지와 같은 특정 서비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네트워킹 기술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소셜 미디어로 알려진 서비스에 집중되어 있다.
내가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라는 용어는 2000년대 초반에 나타난 SNS, 영상 공유 사이트, 블로그 플랫폼, 개인이 저작물을 창작하고 공유하는 데 사용되는 각종 관련 도구를 포함한 사이트와 서비스 전반을 지칭한다. 다양한 통신 기술과 기반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는 2000년대 중반에 웹 2.0으로 지칭되는 기술적 비즈니스 현상의 일환으로 나타난 문화적 태도라는 개념도 포함한다.
소셜 미디어로 알려진 이 서비스들이 중요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보완하거나, 십대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로 연결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한 최초의 도구도, 유일한 도구도 아니다. 이메일이나 인스턴트 메시지, 온라인 포럼과 같은 채널도 예전에 비해서는 그 인기가 덜하지만, 여전히 십대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 현상으로 봤을 때, 소셜 미디어는 정보와 통신의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정체성 : 왜 십대는 온라인에서 이상해 보이는가?
2005년에 한 아이비리그 대학은 로스앤젤레스 중남부에서 온 한 젊은 흑인 남성의 입학지원서를 숙고하고 있었다. 이 지원자는 자신이 사는 곳의 범죄조직으로부터 멀어져 존경받는 학교에 다니고 싶은 이유에 대한 경이로운 에세이를 썼던 것이다. 입학사정관들은 감탄했다.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학생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위원회는 구글에 그를 검색했다. 위원회는 그의 마이스페이스 프로필을 발견했다. 프로필은 범죄조직의 상징과 특유의 무신경한 언어들, 그리고 범죄 활동에 대한 인용들로 가득했다. 위원회는 재고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입학처의 한 대표로부터 들었다. 이 대표자는 간단한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온라인으로 진실을 찾기가 그렇게 쉬운데 왜 학생은 입학처에 거짓말을 할까요? 나는 맥락을 물었고 그 지원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색하게 나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 친구는 생존 기술의 일환으로 마이스페이스 프로필에 갱 상징들을 올린 것일지도 몰라요.
직감적으로 나는 이 청소년이 고향의 범죄조직과 다른 사람들 간의 역학에 대해 무척 신경 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목표물이 되지 않기 위해 지역적 사정에 따라 자신을 위치시켜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를 알지 못했다면 그의 에세이는 훌륭했다. 동시에 나는 그가 동네에선 물리적으로 공격당하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존중받는 학교에 가고 싶은 욕망을 감히 이야기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80년대에 영국의 사회학자 폴 월리스가 주장했듯, 청소년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바꾸고자 시도할 때에는 출신 집단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부담한다.
입학사정관은 나의 분석에 꽤나 놀란 듯 보였고, 우리는 네트워크화 된 시대에서 자기 표상(self-representation)에 가해지는 위협들에 대해 긴 대화를 가졌다. 그 학생이 입학 허가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어른들이 십대가 온라인에서 하는 자기표현을 오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만남이 떠올랐다. 나는 맥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십대가 소셜 미디어에서 하는 행동과 말은 노골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기이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어른들은 때때로 십대가 특정 사진이나 댓글을 올릴 때 상상했던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온라인에서 보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맥락과 관중, 그리고 정체성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이해하는 능력은 소셜 미디어를 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서 사람들이 마주하는 주요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어른들이 저지를 수도, 실제로 저지르기도 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십대는 맥락과 상상 속 관중이 뒤섞인 것이 당연한 네트워크화 된 세상 속에서 방향을 잡는 방법을 앞서 안내하곤 한다.
네트워크화 된 대중 속에서의 정체성 형성
오늘날 많은 십대는 실제 환경에서 이미 알고 있는 친구들과 소통하고, 온라인 맥락상에서 자신을 묘사하기 위해 온라인에 접속한다. 그건 온라인 외의 커뮤니티에게 더욱 결속하게 한다. 십대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더욱 연결하여 양쪽 모두에 존재하는 이러한 활동은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온라인 활동에 다 같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관계와 맥락을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 SNS를 사용한다. 각 플랫폼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그들의 활동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소셜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정체성 형성의 종류를 순진하게 분석한 데에 그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소녀는 스카이프(Skype) 같은 영상 서비스에서는 본명을 사용하는 반면, 인스타그램 같은 사진 앱에서는 만들어낸 닉네임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텀블러와 같은 블로그 사이트에 로그인을 할 때에는 특정 관심사를 공유하는 집단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나타내는 이름을 고를지도 모른다.
꽤 자주, 십대는 특정 서비스의 관습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소녀가 페이스북에서는 제시카 스미스로, 트위터에서는 리틀몬스터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여러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서로 다른 사이트에서 서로 다른 관중과 관습을 예상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뿐이다.
때로 이러한 선택이 자기를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시도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각 사이트가 요구하는 로그인 방식에 대한 기발한 대응이다. 비록 어떤 십대는 여러 사이트에서 같은 아이디를 사용하기로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십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별명이 이미 사용 중이거나, 기존 별명을 만들 때보다 더 성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유 불문하고 나오는 결과물은 해석할 여지가 많은 온갖 정체성의 혼란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십대는 그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적 맥락을 해석함과 동시에 생산한다.
특정 사이트의 맥락은 그 사이트의 기술적 특성들보다 십대와 사이트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소셜 미디어 사이트의 맥락은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십대는 어떤 활동을 하기에 특정 사이트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다른 사이트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는 사람들과 연결하고, 그 사람들이 이 사이트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한 뒤, 직접 사용해 봄으로써 그 관습을 강화하거나 반박한다. 결국, 소셜 미디어의 관습은 그들끼리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또래 간 특정 사이트를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영향을 미치고 집단적 시도를 통해 그 사이트의 관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사생활 : 왜 십대는 그토록 공개적으로 공유하는가?
많은 십대가 온라인 정보 공유에는 답이 없다고 느낀다. 공공 공간에 개인 정보를 올려도 망하고, 부모님이 볼 수 없는 사적인 공간을 만들어도 망한다. 부모와 십대 간 사생활에 대한 전쟁은 몇십 년째 지속되어 왔다. 십대가 방에서 나가달라고 부탁하거나, 통화를 엿듣지 말아달라고 하거나, 감시받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달라며 사생활 보장을 요구할 때 부모는 불평한다. 또 곧바로 십대가 지나치게 크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짜증을 낸다. 오랜 시간 동안 부모들은 노출적인 의상은 십대가 참견을 거부하는 의미라고 봐왔다. 즉, 오랫동안 흔하게 해왔던 십대의 행동은 역사적으로 사생활에 대한 십대의 적절하지 못한 집착이나 거부의 확실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사회 상황 통제를 통한 사생활 지키기
사생활은 확실한 정의 없이는 복잡한 개념이다. 대법관 루이스 브란디스는 사생활을 혼자일 권리라고 설명한 반면, 법학자 루스 개비슨은 정보, 관심, 물리적 거리를 통해 남들이 갖는 나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법학자 알란 웨스턴은 사생활을 "언제 어떻게 어떤 개임 정보가 남들에게 전해질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개인, 집단 그리고 단체의 주장"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서로 다르지만 관련된 정의들은 접근성과 가시성에 대한 통제를 강조한다. 비록 사생활을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한 게 실망스러울지 모르지만, 법학자 다니엘 솔로브는 사생활에 대한 각각의 접근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생활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준다고 주장한다.
사생활에 관한 공공의 토의는 공공 환경에서 숨기거나 보여지는 데 집중하는 반면, 학자와 기술자는 정보의 흐름을 조절하는 데 더 집중한다. 이들 모두는 사생활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철학자 렐렌 니센바움이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지적하듯 사생활은 항상 맥락에서 비롯된다. 사생활에 대한 학문적 논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사생활을 유지하는지 잃었는지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내가 인터뷰한 십대에게 사생활은 갖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구조적, 사회적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
사생활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정보나 접근성, 가시성을 제어할 힘을 가지는 것 그 이상이다. 사생활을 지키려면 복잡한 맥락적 단서와 기술이 허용하는 정도, 그리고 사회 역학을 탐색해서 상황을 제어할 능력이 필요하다. 사생활을 지키는 것은 사회의 상황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속적인 과정이다.
감시 속에 살기
워싱턴에서 동료 앨리스 마윅은 열여덟 살 흑인 소녀 미칼라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녀는 어른들의 감시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서로 다른 위탁 가정을 거치며, 미칼라는 정부 기관과 다양한 보호자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그녀를 감시하는 데 익숙했다. 페이스북에 그녀가 무엇을 올렸는지 알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가 짜증나 미칼라는 계정을 삭제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페이스북을 떠나지 말라는 메시지에 맞닥뜨렸다. 친구의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고, 그녀를 보고 싶어 할 것이란 메시지도 함께 등장했다. 페이스북은 비활성화하면 된다며 다른 방안도 제시했다. 이 대안을 받아들이면, 그녀의 프로필은 사라지겠지만, 언제든 다시 로그인해서 활성화시키고 프로필이 다시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올렸던 내용과 친구들, 댓글들, 그리고 설정까지 계정의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대안을 보자 미칼라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계정을 비활성화시켰다. 다음날, 접속해서 활성화시키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그날의 밀린 대화를 나누었다. 볼 일이 끝난 후 그녀는 계정을 다시 비활성화시켰다. 다음날 밤, 그녀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반복적으로 계정을 비활성화시켰다 재활성화함으로써, 그녀는 페이스북을 실시간 도구로 바꾸었다. 그녀가 접속해 있는 동안 그녀를 찾는 사람은 계정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꺼진 동안 검색하면 그녀는 없었다.
미칼라의 입장에서 이는 사생활을 보호하는 행위였다. 그녀가 만난 어른들은 낮에만 접속하는 반면 그녀는 밤에만 접속했기 때문이다. 비활성화 기능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설정함으로써 미칼라는 최선의 방식으로 사회 상황을 제어할 방법을 발견했다.
미칼라의 접근은 극단적이지만, 어떤 십대들은 진행 중인 감시를 이용해 사생활을 지키고자 하는 방법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감시에 대한 십대의 경험은 천차만별로 다르다.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소외된 이들은 특권층에 비해 정부의 감시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특권층 청소년이라도 부모님의 감시는 받을 수밖에 없다.
사생활이 아이들이 가질 수 있거나 없는 권리이건 십대가 노력을 통해 벌어야만 하는 특권이건, 어른의 감시는 사생활에 대한 십대의 이해와 경험을 좌우한다. 저서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에서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가 제어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수감자들은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감옥의 관습과 간수의 기대를 따른다. 감시는 강력한 단체가 약한 개인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기제이다. 부모가 서성대고, 잠복하고, 추적하기로 결정할 때 그들은 암묵적으로 십대의 활동을 규제하고자 노력한다. 부모는 자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보이지만 감시가 십대의 결정 능력을 저해하는 억압의 한 유형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실패한다.
감시에 대한 대응 반응과는 상관없이 십대는 감시를 당한다고 느끼는지 여부에 의해 설정된다. 감시는 사회 맥락을 이해하는 십대의 이해력을 구성하고, 그들의 힘을 억제하며, 사회 상황을 유의미하게 제어하는 그들의 능력을 저해한다. 결국, 십대가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은 대부분의 어른이 적절한 전략이라고 예상하는 것과는 꽤 다르다. 십대는 그들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공공성에 대항하기보다 공공 속에서 사생활을 찾고자 한다.
불평등 : 소셜 미디어가 사회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가?
미국 대법원에서 공립 고등학교의 분리가 위헌이라고 판결한 지 거의 60년이 지났지만 내가 방문한 대부분 미국 고등학교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힘을 통해 인종과 계층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교 구역의 경계는 인근 거주 구역이 실질적으로 분리된 영향으로 격리된 학교들을 남기곤 한다.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특정 교실, 또는 특정 학업 트랙에 배정되는데 이러한 시험 결과는 종종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관계가 있다. 친구 집단 안에서 인종이나 경제 수준이 모두 비슷한 경우가 꽤 많고, 이는 곧 분리된 교내 식당과 분리된 온라인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새로운 기술 속 편견
사회는 종종 사회 분열을 끝낼 도구로서의 기술을 예고했다. 1858년, 애틀린택 전신회사는 첫 대서양 횡단 케이블을 설치했고, 많은 이들은 이 새로운 통신 기구가 적대감을 다루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상상했다. 작가 찰스 브릭스와 오거스투스 메이버릭이 전신에 대해 말했듯, "이는 지구의 모든 국가를 하나의 생명선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지구상 모든 국가 간에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러한 기구가 있는 한, 오래된 편견과 적대감이 더 이상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통신 매체는 종종 문화적 차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하리라는 희망을 불어넣곤 했다. 이 희망은 새로운 기술에도 반영이 되었는데, 마치 기술 자체가 사회 분열을 직접 다룬다는 식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기술의 존재 그 자체는 문화적 문제를 만들거나 마술처럼 해결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의 구성은 존재하는 사회 분열을 더욱 강화하곤 한다. 이는 때로 설계자들이 의도적으로 편협한 방향으로 도구를 만들 때 일어난다. 제작자가 자신의 편견이 설계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지 못하거나 설계자가 혁신을 추구하는 더 넓은 구조적 생태계에 편견을 부산물로 만드는 규제가 걸렸을 때 이런 현상은 우연히 일어난다.
인터넷은 기존 기술과 달라야 한다. 기술 전문가들과 얼리 어댑터들은 인터넷이 인식 가능한 시각 단서가 없기 때문에 인종과 계층이 무의미해지게 만드는 대단한 조정자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기술 유토피아 주의자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바로 그 편견이 인터넷으로 중개된 경험들도 구성했던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인종』이라는 그들의 저서를 소개하며 학자 베스 콜코, 리사 나카무라, 그리고 길버트 로드먼은 "인종이 사이버 공간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 중 대부분이 이미 오프라인에서 인종을 중요시하는 그 방향으로 영향을 받았고 로그인 할 때 우리의 지식과 경험, 가치를 함께 가져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문화적 편견은 소셜 미디어에 스며든다. 드러난 편견은 댓글이나 선동적인 웹사이트에서 악의 담긴 욕설의 디지털 버전으로 번영하는 한편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 분열의 온라인 복제판을 생산한다. 어떤 십대는 자신의 경험이 문화적 차이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구조적 카테고리를 굳힌다.
인터넷이 오래 지속되어 온 사회의 병을 없던 때로 돌릴 힘은 가지고 있지 않을지언정, 이를 새롭고 어쩌면 보다 생산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할 가능성은 갖고 있다. 십대가 온라인에 접속하면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함께 갖고 온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와 태도, 희망과 편견을 가시화한다. 사회 분열이 두드러진 네트워크 세상에서 산 그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더욱 해로운 착각과 편견을 보고 다를 수 있다.
네트워크의 중요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제한되고 낯선 사람과 연관되지 말라고 그들이 받는 압력은 비특권층 청소년에게 특히 더욱 결정적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를 발달시키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지만, 특권층 청소년은 더욱 특권층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자원과 기회, 정보의 종류에 높은 접근성을 가질 확률이 높다.
정보 기회가 소셜 네트워크에 묶이면, 사회 평등의 모든 부분에서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 분열이 강화되고 소셜 네트워크에 걸친 불평등이 재생산되면 물질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결과로 이어진다. 불평등의 문제는 정보가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흐르도록 구조화되어 있을 때 현실화된다.
십대가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로 스스로를 나누고 있던 시기인 2006~2007학년도에 많은 대학 입시 관계자들은 신입생 모집을 위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라인 프로필을 만들고, 퍼뜨리기 좋은 영상을 제작하며, 자신들과 학교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고등학생들을 초대했다. 비록 수백만 십대가 마이스페이스에서만 활동을 했으나, 대부분의 대학들은 모집 전략을 페이스북에만 맞췄다.
입시 관계자들에게 페이스북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묻자, 그들은 항상 자원의 부족과 우선순위의 필요를 강조했다. 보편적으로, 흑인과 라틴계 청소년은 마이스페이스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들의 결정이 백인과 아시아계 학생들만 주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삼는다고 지적하면 그들은 멈칫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선택에 따르는 문화적 결과에 대해 고려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쓰던 시기에는, 기업들이 전문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인 링크드인을 통해 대학 인턴들과 새로운 졸업생들을 모집하는 것이 꽤 흔한 일이었다. 인사 관계자들은 이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기업과 관계가 있는 후보자들을 주로 우선시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대놓고 지원자에게 그 회사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 중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을 대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이들은 후보자로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사람들의 소셜 네트워크가 다양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비슷함을 더욱 강화하는 경향을 만든다. 이는 또한 잘 드러나지 않는 소수 집단, 즉 불리한 배경이 있거나 일반적으로 사회적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 추가적인 장애물이 된다.
해독능력 : 오늘날의 십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인가?
십대는 인터넷이 항상 존재해 온 세상에서 자랐기 때문에 많은 어른들은 십대가 자동으로 새로운 기술을 이해한다고 추정한다. 이 관점에서 십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이며, 기술에 대해 보다 적게 알고 이러한 능력을 개발하는 데 보다 덜 유능하다고 알려진 어른들은 디지털 이민자다.
십대는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거나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지만 이는 그들이 스스로 소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평가할 지식이나 관점을 타고났다는 뜻은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다 심상에 노출되고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는 행위는 사용자를 이러한 산물들 너머의 의미를 요령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진 않는다. 기술은 사회정보적 체계를 지속적으로 바꿔나가고 있지만 십대는 단순히 이러한 기술들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생태계에 중요한 기여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
십대가 자동으로 잘 알게 되었다고 예측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소위 디지털 이민자들이 아무것도 제공할 게 없다고 예측하는 것도 순진한 일이다. 기술을 두려워하는 이들조차 가치 있는 비판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십대도, 어른들도 획일적이지 않으며, 기량과 나이에는 마술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든, 비공식 설정에서든 십대는 현대 기술과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지식을 개발할 기회가 필요하다. 네트워크화 된 시대에서 능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지식 생산 사이트로서의 위키피디아
비록 내가 만난 인터넷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십대들은 위키피디아를 알고 있었고 사이트에 방문해본 이들의 대부분은 편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그 누구도 논의 페이지나 편집 기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위키피디아를 사람들이 어떻게 지식을 생산하는지 드러내는 진화하는 문서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는 참여하는 청소년이 정보원을 파헤치고 어떻게 정보가 생산되는지 이해하기에 이상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위키피디아는 선천적으로 또 후천적으로 진행 중인 작업이다. 콘텐츠는 사용자가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고 새로운 문제를 인식할 때마다 시간에 걸쳐 변화한다. 사이트는 분명히 부정확성에 노출되어 있지만 위키피디아를 둘러싼 커뮤니티는 이를 수정하기 위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갖고 있다.
많은 디지털 기술들은 권위와 전문성을 침해하거나 와해시키며 콘텐츠를 생산하고 전시하는 대체적 방안들을 드러낸다. 위키피디아에 제공된 것과 같은 크라우드 소싱에 의한 콘텐츠는 전문가가 작성한 콘텐츠에 비해 반드시 더 낫거나, 정확하거나, 포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보를 접근 가능하게 하고 지식의 생산에 있어 반성해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어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종종 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의 가치는 사람들이 항목을 만들 때 사용할 수많은 정보원들이 아니었다면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의 많은 역사 항목들은 역사가들이 저술한 콘텐츠에 매우 의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가 잘하는 것은 바로 여러 정보원에서 온 정보들을 무료이고 대중에 공개되어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합하여 제공하는 한편 그 콘텐츠의 제작에 포함된 편견들과 논의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위키피디아와 같은 프로젝트는 지식의 생산을 더욱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노력에서 중요하다. 그들은 또한 향상된 디지털 독해능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방법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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