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 역사

   
원유상
ǻ
좋은날들
   
12800
2013�� 07��



■ 책 소개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못 다한 한국사이야기!

고대에서부터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혹은 역사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움이 될 이야기, 흥미로운 역사 에피소드들을 한 권에 담았다. 삼국시대의 첩보 작전, 당한 만큼 복수한 신라의 실성왕, 몽골 항쟁에 대한 바른역사인식, 동전 던지기로 결정 난 한양 천도, 세도정치와 지역 차별의 역사, 장례식을 두 번 치러야 했던 명성황후 등등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이해와 재미를 더해줄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 저자 원유상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와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으며,현재 남양주시 덕소고등학교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EBS 역사 교재 집필과 EBS 강의 검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등 공교육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또한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 역사넷’ 콘텐츠 제작위원, 역사 관련 각종 시험 출제위원을 맡은 외에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하였다. 한편으로는 교사와 학생 간의 즐거운 교내 생활을 위해 교사 동호회인 개그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자 다방면에서부단히 노력하는 괴짜 선생님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는 『한국사 제대로 읽기 1』(공저) 『눈으로 보는 우리 역사』(공저) 『참역사 이야기한국사』(공저) 『서양 침략에 맞선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이 있으며 「초등 독서평설」에서 ‘라이벌로 읽는 우리 역사’를연재했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대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옛일을 통해 오늘을 바로잡아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라며 서두에서 말한다. 수업 시간에못 다한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어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드높이는 한편, 올바른 역사 인식과 인문 정신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있다.

■차례
머리말 - 수업 시간에 못 다한 우리 역사 이야기

01. 고조선에 대한 오해와 진실
02. 삼국의 첩보 작전, 그가 스파이일 줄이야!
03. 나는 그런 왕이아니라오!
04. 신라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05. 고구려 부흥 운동을 왜 백제 땅에서 했을까?
06. 발해에 한 걸음더 다가가기
07. 이거, 고려에 있었던 것 맞아?
08. 그 건축물은 정말 그때 지어졌을까?
09. 고려 시대에 노비로살아간다는 것
10. 몽골 침입 때만 왕이 개경을 떠난 게 아니다
11. 몽골 항쟁 때의 개경 환도는 과연 굴욕일까?
12.정도전, 그의 영광은 짧았다
13. 한양, 조선의 도읍 되기 참 어렵네
14. 한글을 만든 사람, 그리고 지킨 사람
15. 과거합격은 가문의 영광, 불합격은?
16. 세자가 된다는 것, 세자로 산다는 것
17. 세도정치와 지역 차별의 역사
18. 정조는언제나 개혁 군주였을까?
19. 알면서도 잘 모르는 흥선대원군 이야기
20. 역사 용어를 아무렇게 써서는 안 되는 이유
21.애국과 친일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22.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
23. 제자리를 찾아가는건물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 역사


고조선에 대한 오해와 진실

고조선이나 단군에 대해 우리가 조금은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가만히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역사 상식들이 있습니다. 대개 역사 교과서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 내용이지요.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단군은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908세를 살았고, 『동국통감』에는 1,048세까지 살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둘의 나이 차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단군이 1천 년 이상을 살았다고 표현된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여러 학자들은 단군이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단군이란 말은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조선의 군장(혹은 임금)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라는 의견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1,908세라고 하는 것은 1,908년 동안 단군의 칭호가 이어져 왔다는 의미겠지요.


한편 『동국통감』에는 1,048세를 살았다는 내용에 덧붙여 『동국통감』을 엮은 신하들의 의견이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1,048년이라고 한 것은 곧 단씨(檀氏)가 대(代)로 전하여 지나온 햇수일 뿐이고 단군의 수명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 말이 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_ 『동국통감』


『동국통감』역시 단군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1,048년 동안의 시기를 단씨가 대를 이은 것으로 본 것이지요. 단군을 고조선 최고 지배자의 일반적인 칭호로 보는지, 아니면 단씨 가문을 뜻하는 말로 보는지와 상관없이 이들 주장에 따르면 단군은 더 이상 한 사람이 될 수는 없게 됩니다.



신라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신라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긴 신라 사람들은 깨끗함의 기본으로 목욕을 강조했습니다. 신라 사람들의 목욕에 대한 이야기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건국 설화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한편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의 아내인 알영도 얼굴과 모습이 고왔지만 입에 닭과 같은 부리가 있었는데, 목욕을 하고 나서야 입에서 부리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목욕은 이처럼 아름다움의 완성이자 사람을 더욱 존귀하게 만드는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믿었던 것 같습니다.


목욕에 관련해서 또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신라에 대중목욕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대중목욕탕이 절에 설치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절이었을까요?


신라의 절에 대중목욕탕이 있었던 이유에는 신체적인 깨끗함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세상에서 지은 죄를 씻으려는 신라 사람들의 바람이 담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편 우리의 세시풍속 중에 유두(流頭)가 있습니다. 음력으로 6월 보름인 이날, 조상들은 가족 단위 혹은 이웃들이 함께 깨끗한 시냇가 또는 폭포수 아래에서 목욕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이를 유두 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철에 더위를 이겨낼 수 있고 각종 질병도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두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는데, 이 또한 신라 사람들의 청결함을 잘 알 수 있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한양, 조선의 도읍 되기 참 어렵네

동전 던지기로 결정 난 한양 천도

개경에서 피바람이 불고 태종이 즉위한 뒤에 불길한 일이 또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개경의 수창궁이 불에 탄 것입니다. 그러자 왕실 내에서는 개경으로 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다시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뚜렷하게 결정 난 것은 없었습니다. 그때 이성계가 태종에게 아주 강하게 교지를 내렸습니다. 태종은 늙은 아버지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하자 마음속으로 다시 한양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륜 등의 신하들은 이를 거세게 반대하며 태종을 곤란하게 했지요.


태종의 고민은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디로 가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점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척전법입니다. 태종은 종묘에 가서 어느 곳에 도읍을 정할지 동전으로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해지면 그것이 조상님의 뜻이므로 그 누구도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전으로 어떻게 점을 쳤을까요? 그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길한 곳과 흉한 곳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각 후보지별로 3회 동전을 던지게 되는 것이지요.


결과가 나왔습니다. 개경은 길하다는 동전 면이 1회, 흉하다는 동전 면이 2회가 나왔습니다. 반면에 한양이 길하다는 동전 면은 2회, 흉하다는 동전 면은 1회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이 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결정이 쉽게 나지 않을 경우 동전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한 국가의 도읍을 결정하는 문제가 동전의 앞, 뒷면으로 결정이 났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자가 된다는 것, 세자로 산다는 것

대군인데도 세자가 되지 못한 영창대군

왕이 낳은 아들은 크게 대군(大君)과 군(君)으로 구분이 됩니다. 대군은 왕과 혼례를 한 정부인, 즉 왕비가 낳은 아이들이지요. 그에 비해 군은 왕비가 아니라 왕의 후궁, 즉 빈이 낳은 아들을 지칭합니다. 왕위 계승은 기본적으로 대군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군들 중에서 세자가 책봉되는 것이지요. 만약에 왕비가 대군을 낳지 못했을 경우에는 빈이 낳은 군들 중에서 세자가 책봉됩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굉장히 애매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관계이지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선조의 정부인 의인왕후가 죽고, 선조가 새로운 왕비를 들였습니다. 그녀는 선조보다 34세나 어린 인목왕후였습니다. 인목왕후는 세자인 광해군보다도 9세나 어렸지요. 그리고 인목왕후가 들어온 지 4년째 되던 해,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왕비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당연히 대군이 됩니다. 그가 바로 영창대군입니다.


영창대군은 선조에게 있어 유일한 대군입니다. 따라서 영창대군은 왕위 계승의 영순위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해군이 이미 세자 책봉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옳을까요? 광해군의 세자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대군이 등장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세자에서 내리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단 세자로 책봉되면 반란 혹은 그에 준하는 죄가 있지 않은 이상은 이를 물리는 법이 없습니다. 특히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기 때문에 세자로서의 입지를 잘 구축해 놓은 상황이었지요.


어찌 됐든 선조가 죽고 난 뒤에 광해군이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선조가 우려하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서양갑, 박응서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지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가 이에 관여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8세에 불과했던 영창대군은 서인(庶人: 어떤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인)으로 강등되고 강화도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물론 실제 반역 모의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서 나온 절차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강화도로 간 영창대군은 이듬해에 광해군의 명에 따라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선조가 죽었고 광해군이 즉위했으므로 왕후에서 대비가 됩니다.) 역시 서인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이처럼 영창대군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그것도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한 대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세도정치와 지역 차별의 역사

홍경래는 왜 서북 지역이 차별받는다고 했을까

세도정치 당시의 농민 항거 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가 농민, 상인, 광산 노동자 등과 합세하여 일으킨 난이지요. 난의 배경은 기본적으로, 세도정치하에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에 대한 반발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서북 지역 사람들에 대한 오랜 차별 대우도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지요. 홍경래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똥과 흙)와 같다고 합니다. 또한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마저도 평안도 놈이라고 하찮게 여기는 현실을 분통해합니다.


평안도만이 아니라 동북쪽에 위치한 함경도 역시 무시와 차별을 받아온 지역입니다. 그러한 무시와 차별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지요.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농업 경제였기 때문에 경기와 삼남 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이 경제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토지를 근간으로 각종 세금이 상당수 이곳에서 나옵니다.


다음은 양반 세력의 결집 측면입니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기본적으로 산악 지형이 많습니다. 게다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북방 유목 민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양반층이 살기를 꺼려했고, 자연스레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양반들의 결집은 경기와 삼남 지방에 비할 것이 못 되었지요.


다음은 북방 유목 민족에 대한 좋지 않은 관념 때문입니다. 고려와 조선은 앞서 말했듯이 약탈과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토를 침탈당하기도 또는 개척하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북방 유목 민족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사는 지역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으로 귀화하는 북방 유목 민족도 많았고요. 조선은 오랑캐를 무시하는 유교 문화가 정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나라입니다. 이 때문에 유목 민족과의 혼혈, 혹은 그들의 후손이 사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혈연적으로 깨끗한 곳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그 밖에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가적으로 큰 반란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 조위총의 난과 묘청의 난 그리고 조선 시대 이시애의 난 등이 대표적인 반란이지요. 이러한 난들이 일어난 것도 이 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홍경래의 난은 관군에 의해 진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도 평안도에 대한 차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정치, 경제면에서 지역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원인을 잘 규명하고 서로를 좀 더 배려한다면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까요?



정조는 언제나 개혁 군주였을까?

개혁 기구 규장각이 개혁 대상이 되다

정조의 개혁 정치를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기구가 규장각(奎章閣)입니다. 규장각은 정조 때 설치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궐(창덕궁) 내에 설치되었지요. 하지만 규장각의 진정한 기능은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규장각이 정조의 개혁 의중에 걸맞은 정책의 명분과 내용을 생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조는 규장각에 속한 사람들을 붕당을 떠나서 능력이 있다면 그 즉시 중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 즉위 이후에는 그동안 노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직 등용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 사람들이 대거 중용되었습니다. 정조는 능력이 출중한 인재들을 규장각에 소속시키고 개혁 정책의 브레인(두뇌)으로 삼았습니다. 정조는 학문과 정책의 친위 기구로 규장각을, 군사적으로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두었습니다. 문무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양 날개를 구축한 것입니다.


규장각은 왕권 강화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세도정치하에서 왕권은 약화되고 세도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번에는 왕이 아니라 세도 가문이 규장각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규장각의 모습은 세도정치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규장각의 학술적 기능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한 채 수많은 국가 기록을 보유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 이름조차 없어졌고,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도서 역시 일제의 의해 관리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게 되었고, 1992년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라는 독립된 기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서울대 규장각은 옛날 규장각 도서의 관리 외에도 국학 연구를 함께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지요.


개혁을 위해 정조가 만든 규장각.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약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독이 되었을까요? 오늘날에도 정조의 규장각 설치에 대한 평가는 학자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보이곤 합니다. 어느 의견이 옳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규장각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다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교훈 하나만큼은 분명히 있습니다. 개혁 자체도 나중에는 개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개혁을 할 때에는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줄 수 있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요.



알면서도 잘 모르는 흥선대원군 이야기

명성황후와의 대립, 그 속사정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를 역사의 라이벌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개화 정책에 대한 상반된 입장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접근을 차단하려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반해 명성황후는 외세를 적절히 활용하려는 개화 정책을 폈지요. 그러면서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초반에는 흥선대원군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하야(下野) 과정에 명성황후가 개입하면서 그 주도권이 바뀝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로서 고종의 개화 정책을 이끌어 나갑니다.


하지만 또다시 반전의 상황이 왔습니다. 1882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구식 군인들과 도시 빈민층 등이 임오군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결국 실종되고 말지요.


바로 이때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아마 시신도 없이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른 왕비는 명성황후가 유일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을미사변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을미사변은 1895년에 일어났지만 장례식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뒤인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나서 명성황후에 대한 복권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명성황후의 시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태워져 뿌려졌다고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장례식이 명성황후의 두 번째 장례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다시 집권을 합니다. 위기에 몰린 고종이 모든 권한을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위임한 것이지요. 흥선대원군은 군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실종된 명성황후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녀의 장례를 주도했습니다. 시신 없이 그녀의 옷을 관에 넣고 장례식을 치른 것이지요. 이때 무덤은 물론 인성왕후라는 시호까지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습니다. 몸을 피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청은 군대를 조선에 보냅니다. 청의 군대가 오자 군란 세력은 금방 진압되었고 흥선대원군은 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명성황후가 보란 듯이 등장했습니다. 임오군란은 결과적으로 명성황후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습니다. 명성황후를 청이 지지해 주는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종도 왕비인 그녀의 처세술과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882년에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은 바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인 1885년에야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조선 정부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접촉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니까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이 명성황후의 정치적 라이벌인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그 뒤로도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정치적으로 계속 부딪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역사 용어를 아무렇게 써서는 안 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길목, 합방과 병합과 병탄의 차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일본이 급속하게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아 갑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놓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에서 불법성이 강했던지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는 과정에 신중을 기합니다. 순종의 확실한 재가를 받겠다는 것이지요. 결국 순종이 한일병합 조약안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를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에게 재가 후 넘겨줍니다. 이를 가지고 이완용이 데라우치 통감 관저에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이 분야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서울 소재 모 대학교의 어느 교수님은 병탄을 가장 적절한 용어로 보았습니다. 병탄(倂呑)은 용어의 정의가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을 뜻합니다. 아주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는 이 사건은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으로 명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건물들

창경궁에는 코끼리가 있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창경원에는 볼거리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코끼리를 비롯해 여러 동물들이 있었고, 놀이 기구들도 있었지요. 당시 아이들에게 창경원은 요즘의 그 어떤 놀이공원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최고의 인기 장소였습니다. 어린이날에는 물론 주말에도 늘 사람들로 북적댔으니까요.


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창경원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청소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창경원은 바로 오늘날의 창경궁을 이르던 말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창경궁이었다가 창경원으로 바뀌었고,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1909년, 우리나라 황실의 궁궐인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버립니다. 일제강점기로 들어간 1911년에는 아예 창경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꿨습니다. 궁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명칭에서도 아예 없애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창경궁은 창경원이란 이름과 모습으로 오랜 세월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식민지 잔재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창경궁 복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정부 역시 이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고, 결국 1980년대에 들어서 창경궁을 복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물원만이 아니었습니다. 놀이 기구도 모두 철거하고, 심지어는 일제가 심은 수천 그루의 벚나무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지요. 이렇게 해서 창경궁은 드디어 그 이름과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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