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가르고 치다

   
김준산
ǻ
네시간
   
15000
2012�� 09��






color=#55555 STRONG>■ 책 소개
교육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고 인간을 치는 것!

color=#55555 size=2 &>‘가르치다’의 어원을 보면 ‘가르다’는말하다, 일컫다 등을 의미하고 ‘치다’는 키우다, 기르다의 의미를 갖는다. 즉 교육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고 인간을 치는 것.

color=#55555 size=2 &>이 책은 1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해온 젊은 교사의 치열한고민과 고민에 따른 행동의 산물이다.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한 학교 교육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학교도 학부모도 아닌 바로 교사자신에게 강도 높은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color=#55555 size=2&>■ 저자 김준산
푸코는 말년에 자신을 일컬어 “나는 그저 교사일 뿐이다”라고 했다. 시대를향한 그의 질주가 교사의 양심으로부터 나온 사명과 책임이었듯, 지은이 김준산도 시대의 교사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책임과 의무라 여기며 가르고-치는 삶에 끝없는 행복을 실천하고 있다. 

color=#55555 size=2&>1996년 강원도 춘천에 있는 교육대학교에 입학한 뒤 2003년 강원도 시골의 한 학교에서 그의 첫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초등학교 현장에서 10여 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표준을 거부한 삶을 실천하고 교육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고군분투 중이다.

color=#55555 size=2 &>학교라는 획일적 공간의 폭력성으로부터 삶과 배움의 창조를꿈꾸며 대안 교육 ‘모색 21’ 모임을 통한 실천적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대안의 시작은 배움으로부터 자신을 혁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해체주의와 교육」이란 석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차례
들어가는 말 - 교사로서 학교에서 배운 것


color=#55555 STRONG>1장 교사를 가르다 
학교 - 어쨌든학교는 굴러간다 
조직 - 비공식 조직의 쓴맛! 
부킹 - 책읽기는 불온하고 위험하다? 
반성 - 교사 스스로 전문성을 상실하다
강박증 - 관리자 선생님, 노동자 아이들 
특수학급 - IQ 신봉주의 
불안 - 순종과 복종이 곧 교육이라는 믿음

color=#55555 STRONG>2장 교육을 가르다
3주체 - 손님이 된 교사, 학부모, 학생 
서비스맨 - 평가와 통제를 위한 교원능력개발평가 
방학 - 쉴 수없는 기계적 시간 
정글리즘 - 제왕적 권력 
창의 - 학교의 기업화, 교육의 시장화 
교육공학 - 교사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color=#55555 STRONG>3장 아이를 치다
밖으로 - 교사가 학교를 나가야 합니다 
미동(微動)혁명 -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전투 - 모두가 기획한자유 
놀이 - 인간은 놀기 위해 삽니다 
사람 - 좋은 교사, 좋은 부모, 좋은 학생 

4장 가르치는 자, 교사 
희망 - 희망을 실천하라!
욕망 - 욕심이 나는 것이 있을 땐 삶의 목표로 삼아라! 
자기찾기 - 교사들이 먼저 공부할 시간입니다 
5.18 - 교사의숙명 
파란 청춘 - 파란 청춘 같은 선생님이 좋아요 

color=#55555 size=2&>나가는 말 - 좋은 교사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부록: 카툰 
-세계교육편 
-교육사상가편

color=#55555 size=2 &>참고문헌 & 함께 읽으면 좋은책들





교사, 가르고 치다


교사를 가르다

반성 - 교사 스스로 전문성을 상실하다

반성은 그 자체로 가르치는 행위의 본질입니다. 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교육자의 표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교사들은 반성을 나른한 오후쯤으로 여기곤 합니다. 자신은 반성하지 않고 반성을 강요하는 재미 같은 것이지요. 이는 나꼼수에서 유행시킨 일종의 육체 이탈 화법입니다. 자기와는 무관하고 남과는 관계 깊은 지나친 자기 합리화의 논리. 육체 이탈 화법이 체화된 교사에겐 자기반성은 사라지고 "반성하라!"는 명령권만 남습니다. 습관적으로 강요하는 행위. "반성하라" 말해야 자기 직분을 다하는 것 같은 교사들의 심리. 반성합니다. 그 반성의 단초를 묻기 위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교사 스스로 전문성을 상실하다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제게 교사로서의 전문적 지식이나 식견이 있었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국민의 정부 때 원로 교사들이 대거 물러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퇴직금을 곱절로 주고 능력 부재한 교사를 자발적으로 은퇴시켰지요. 교직 정년도 제한했습니다. 65세에서 62세로 낮추고, 교육 현장에 젊은 교사들을 대거 임용했지요. 학창시절, 무모한 국가 정책을 교권 침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열심히 데모도 했습니다. 하지만 데모는 나약했고 정책을 바꿀 수 없었지요. 많은 교사들이 물러났습니다. 재밌는 사실은 데모했던 그 정책 덕분에 저는 아주 쉽게 임용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교사의 수가 갑자기 부족해졌으니까요. 주류 언론에선 교사가 없어 교실이 붕괴된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모자란 교사를 위해 6개월 교육시키고 교원 자격증을 주기도 했지요. 많은 분들이 전공과 관련 없이 들어왔습니다. 장롱에 30년 묵혀둔 자격증을 꺼내 시험을 보는 50대 아주머니도 계셨지요.


하지만 제가 그분들보다 낫다고 할 자격은 없었습니다. 외려 보수교육생이란 낙인이 실려 더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았지요. 진실로 열정을 다해 교육하셨습니다. 반면 교대를 나온 이들은 어떨까요? 교대라는 팻말 덕분에 오히려 느슨한 교직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교직 안에선 교직을 전문적으로 대접하지 않는다고 푸념합니다. 교직 바깥에서 교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시대의 전문성은 억대의 연봉과 고급 수입차를 타고 청바지를 입어주는 쿨한 욘족(Yawns) 정도는 돼야 합니다. 하지만 의사나 판사를 포기하고 교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직이 전문직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권의 의미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떤 직업을 전문적이라고 본다는 것은 그 직업에 권위를 인정해주는 시선이 뒷받침된다는 것입니다. 솔직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문직이란 특권적 직업을 말합니다.


교직이 귀했던 20년 전 한국 사회에서 교사는 곧 신이었습니다. 교사들은 대단한 전문직이었고, 특권적이었습니다. 중등의 경우 자격증이 많아지면서 교직은 전문직으로서의 권위를 잃었고, 초등의 경우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학교 덕분에 전문적 특성을 잃었습니다.


교사의 자질을 다시 묻자!

시대가 많은 것을 흔들어놓았다고 합니다. 진일보 또는 퇴보를 거치면서 옛것은 지워지고 새것을 담은 디테일한 키치들이 넘쳐납니다. 이 시대에 중요한 건 진짜와 가짜를 규명하는 역사적 숙고가 아니라 무엇이 더 잘 팔리는지 경쟁하는 것이지요. 교사가 전문직임을 애써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사 또한 잘 팔려야 좋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교대 경쟁률이 올라가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어려운 경제에서 전문성은 안정이지요. 초등학교 교사의 전문성도 경제가 어려워진 만큼 조금 올라갔다지요. 희망 직업 1,2위 안에 초등학교 교사가 있다는 것은 참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교사의 자질이 잘나가는 다른 직업과 비교되는 현실은 아쉽습니다. 과연 의사나 판사의 최강 권한을 교사가 누릴 수 있을까요? 그들만큼 전문적 혹은 특권적으로 발전하면 교육 사회가 나아질까요? 엄청나게 전문적인 의사와 법조계 분들은 왜 우리 사회를 위한 분들로 보이지 않을까요? 이 시대의 전문성이란 혹 특권층이 되려는 욕망은 아닐까요?


차라리 교사의 자질을 다음과 같이 논하면 어떨까요? 전문직이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교사의 즐거움이란 어떤 권위나 권능과 관련되지 않습니다. 교직은 전문직과 관계없습니다. 시대의 주류가 되고자 하는 전문성보다 시대의 비주류로 애써 남고자 하는 소수성이야말로 교사 자질의 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보수교육을 받았다고 나쁜 교사가 아니듯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시대에 교사의 자질로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반성문을 쓰듯, 고뇌하며 적어보았습니다.


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세계관을 다듬고 연구하는 자체를 즐기는 선생님

나. 돈보다 가치를 중요시하는 비전문가

다. 누구보다 건강한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건강 이기주의자

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 바깥을 보고 소수자들을 걱정하는 애민가

마. 정치의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판에 과감히 뛰어들어 현실 정치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교육정치가

바. 아직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사상에 대한 높은 탐구심으로 자유를 열망하는 자

사. 시대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집중하며 스스로 소수성을 배우고 가르치는 자


반성은 다음의 새로움을 준비하는 영속한 인내입니다. 그 자체가 교육적입니다. 완성보다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열정이 바로 반성의 기초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에게도 반성문이 필요합니다. 잘못했을 때 쓰는 참회의 반성도 반성이지만, 앞날의 매진을 위한 단절적 고뇌 또한 반성입니다. 단절적 사고가 창조적 연속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자신에게 강요해야 할 교사의 자질 속에서 새로운 교사상을 꿈꿔봅니다. 물론 시대를 거역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를 먼저 불태워야 하겠지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매일 가르치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필경 참교사란, 전문이나 특권을 바라지 않고 그 반대로 꿋꿋하게 걸어가는 반시대적 사람입니다.



교육을 가르다

창의 - 학교의 기업화, 교육의 시장화

새로운 창의성을 위해 학교를 분할하라!

21세기에 칭송받는 인재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학교가 자기실현의 배움터라고 고백한 위인은 귀합니다. 학교, 병원, 감옥이 특정 관점에서 유사한 이유는 이 기관들이 창의성을 무시하고 개인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관의 구조 혁신을 통해 기관을 창의적으로 변신시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구조가 바뀐다고 감옥이 변하는 건 아니며 병원 건물이나 시스템이 바뀐다고 병원이 따뜻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학교도 비슷합니다. 따라서 기관을 기관답게 유지하는 개혁으론 창의도 혁신도 없습니다. 기관을 기관답지 않게 만드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요. 관점을 창의적으로 재밌게 바꾸는 것입니다. 학교를 학교답지 않게, 병원을 병원답지 않게, 감옥을 감옥답지 않게 만들 때 창의도 개혁도 가능하다는 주장이지요. 학교다운 학교가 아니라 학교답지 않은 학교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회사는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회사이며, 우리가 바라는 병원은 집을 닮은 병원이고, 우리가 바라는 학교는 가정을 닮은 스위트홈입니다. 21세기의 창의적 학교는 효율적인 학교도 아니고, 기업을 닮은 스마트한 집단도 아닙니다. 학교 같은 학교에 다들 진력이 났지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매우 창의적인 생각이 필요하지요.


학교의 기업화를 막는 것이 미래의 창의적인 학교라고 주장해 봅니다. 효율성을 무시하고 성과주의를 타파하는 모습으로 변신했으면 좋겠습니다. 분할하고 쪼개어 소형화하는 것이지요. 가정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식구처럼 구성원을 꾸립니다. 중소기업이 많은 일자리를 만들듯, 학교의 소형화가 우리 교육의 혁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해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학교는 특수한 한 명의 위인을 키워내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대형화된 학교는 몇몇 아이들에게만 유리합니다. 한 사람을 위해 99명이 희생되는 구조보다 100명이 고루 행복한 학교가 우리들이 원하는 창의적인 학교입니다. 분할된 작은 학교에선 경영 자체가 필요 없고 불편합니다. 작은 학교들이 자신만의 빛깔로 반짝거립니다. 세속의 아픈 때를 정화하고 치료하기도 합니다. 따뜻한 바람을 쐬고,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이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학급당 인원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학교당 인원수를 대폭 줄여 작은 학교를 양성하는 창의적인 발상. 인간성의 회복이란 모토로 추진되는 21세기의 시대성과 어울리는 창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진지한 창의 학교의 모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의를 빙자한 기업가들의 탐욕과 근대주의의 이기적 욕망이 더 이상 학교를 물들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깊은 하루입니다.


학교가 학원이 되면, 시골 분교에도 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들은 어두워지겠지요. 시험을 위해 다니는 학교는 우리가 소망하는 학교가 아닙니다. 부디 효율성이란 잣대로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을 빼앗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조금 못살더라도 따뜻한 세상이니까요.



아이를 치다

미동(微動)혁명 -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물총새가 도란도란 노닌다는 시골의 작은 마을 원주시 문막읍 취병리(취병리의 취 자는 물총새 翠 자다). 나의 벗이며 스승인 마을만큼 소담한 아이들이 웃고 우는 취병분교가 있는 곳입니다. 아이들의 소란은 마을의 크기만큼 조용하고 늘 간지럽습니다. 조용한 울림은 마치 달팽이를 닮았습니다. 때문에 작은 움직임을 감상하며 배울 수 있습니다.


이미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오늘도 아이들의 대화는 소란하지 않습니다. 식구가 적은 탓에 서로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도 깊습니다. 아침부터 5학년 재훈이가 딴에는 장난기 어린 소란을 계획합니다. 실내화 감추기입니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은 소란입니다. 외려 재훈이의 장난이 조금 더 과감했으면 하는 다른 아이들의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재훈이를 뺀 모든 아이들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 교정을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양말도 벗어 던졌습니다. 자기 실내화의 위치는 관심도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에게 추위는 공부를 방해하는 나쁜 조건이지만, 취병분교 아이들에게 추위는 새로운 손님이며 놀잇감입니다. 우리에게 변화는 곧 재미입니다.


해서 미세한 변화(미동)에 집중하라는 21세기 거창한 창의성 교육은 취병분교에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달팽이를 닮은 우리에게 미동(微動)은 그 자체로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미동 예찬은 인공적으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시골의 풍경 속에서 저절로 깨달은 지혜입니다. 인연은 필연이란 불교의 연기설처럼 작은 것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운명입니다. 마치 모든 것들이 이미 계획된 듯 소중히 엮이고 고귀하게 만나는 공동체. 그곳이 우리들의 배움터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인 배움터

일반적인 학교에선 주인공이 늘 존재합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이 있고, 학급마다 반장이 있으며 심지어 모둠별로 리더가 있습니다. 청소할 땐 청소반장이 있고 시험 볼 땐 시험지를 관리하는 시험 반장까지 있습니다. 학교는 리더들의 결정으로 움직입니다. 0.1퍼센트가 99.9퍼센트를 먹여 살린다는 어느 대기업 회장의 연설은 학교 교육에서도 오롯이 작동합니다. 엘리트를 위한 배려가 깊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취병분교엔 따로 주인공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이고 모두가 사랑스런 존재들입니다. 전교 어린이 회장이 존재하지만 그의 권리는 책임을 앞서지 않습니다. 권리 없는 리더입니다. 따라서 회장에겐 명령권이 없습니다. 회의 소집을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이 유일합니다. 전교 어린이 회의엔 1학년부터 모두가 참석합니다. 어리다고 놀리지 않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의 적극적인 회의 참여가 회의의 진행을 돕는 촉수가 되기까지 합니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자리라도 비워지면 바로 분위기가 이상해집니다. 저 또한 결석하는 아이가 있는 날에는 심심함을 참기 어려워 학교가 싫어질 정도입니다. 때론 옆 반 아이의 결석 때문에 흐느껴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구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실례로 지난 주말엔 4학년 선호와 1학년 하은이 자매가 학교를 오지 못해 우리 모두 종일 재미없는 긴긴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유난히 밥맛도 없었습니다. 우린 단지 동창생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이며 또 하나의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밥상은 집에서 먹는 따뜻함을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밥솥의 크기만 봐도 저희 집과 비슷합니다. 밥상을 책임지는 조리사님의 솜씨는 할머니의 손맛입니다. 식판도 없애고 싶었지만, 설거지하는 조리사님의 노고가 더해질까 시도하진 못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전교생이 함께하는 시간도 많습니다. 점심시간엔 매일 무에타이 운동을 같이 합니다. 6학년 누나는 1학년 동생을 가르치고, 3학년은 4학년 언니와 짝 지어 운동을 돕습니다. 6학년 언니는 줄넘기를 하지 못하는 1학년 동생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2학년 동생이라도 자세가 어정쩡한 5학년 누나에겐 서슴없이 충고해줍니다. 저는 그 아이들 곁에서 조금 더 좋은 기술과 무에타이 정신에 대해 간혹 이야기해줄 뿐입니다. 일명 잔소리꾼입니다. 다른 역할은 없습니다.


전교생이 식사 후 줄넘기를 들고 몸을 풉니다. 스스로 샌드백을 치고 서로서로 몸풀기를 돕고 난 다음 천천히 저를 부릅니다. 오늘의 운동량을 확인해달라는 것입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저는 원샷으로 커피를 쏟아넣고 아이들 곁으로 달려갑니다. 쉼을 버리고 아이들과 운동을 즐깁니다. 저보다 이단 뛰기를 잘하는 아이들도 생겼습니다. 매일 하는 운동이고 모두가 참여하는 운동이라 서로의 일상까지 공유합니다. 점심시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여유가 깁니다. 실컷 놀고 운동까지 해도 다음 공부시간을 준비할 여유가 생깁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은 취미별로 묶여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쉼 없이 놉니다.


모두가 주인공인 학교의 풍경은 나남의 구별이 없습니다. 학년간의 구분이나 반별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시간은 느리게 가고 즐거운 일상이 깁니다.



가르치는 자, 교사

교육열 - 교사들이 먼저 공부할 시간입니다

1950년대 이 땅엔 무수히 많은 작은 엄마가 있었고, 또 무수한 작은 아빠가 있었습니다. 6.25의 후유증입니다. 딱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던 과거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시급한 문제가 없었던 당시, 최고의 가치는 당연 생존이었지요. 생존, 그 이상을 상상하는 사치는 생존이란 아픔 곁에서 무기력했습니다. 때문에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문제들은 별로 가까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면 독재라도 좋고 차별이라도 괜찮았습니다. 군사 독재 정부는 국민의 이러한 정서를 잘 알았습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면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세뇌했지요.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국가 주도로 추진된 교육열은 많은 계층의 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집보다 가난했던 옆집 똘이는 대학 졸업 후 번듯한 직장을 얻어 부자가 되어 귀향하고, 어렸을 적 같이 코 흘리고 놀던 노마는 빛깔 나는 양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어깨 힘주고 동네를 순회하기도 했지요. 한국의 교육열의 첫 단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매우 자발적이었지요. 배부르고 등 따숩게 살고 싶었던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은 목숨 걸고 아이들을 교육했습니다.


교육열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도 달라진다

배고픔 또한 향수가 되어버린 21세기 교육열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닙니다. 배고픔이 달래진 후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은 생존보다 신분상승을 욕망하게 됩니다. 흔히 교육열 하면 교육 이민, 기러기 아빠, 입시지옥, 고액 과외와 8학군 등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지요. 21세기에 들어와 이 땅의 부모들은 교육을 통해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상대적 빈곤으로의 변화 같은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교육열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때문에 교육열은 다분히 부정적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과잉은 결핍보다 나쁘다는 동양적 관점이 해석을 뒷받침하기도 하지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을 풀어내는 김훈의 말처럼 "어떤 논리든 나에게는 옳지만 타인에겐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맹자 엄마나 마르크스 아빠의 자식 사랑은 긍정적 교육열이고, 작금의 기러기 아빠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교육열은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해석과 입장을 달라지게 하지요. 따라서 모든 교육 문제의 원인을 교육열 자체로 보는 시각은 너무 단순한 시각입니다.


교육열의 부정적 시각과는 달리 강원대 이종각 교수는 교육열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한국교육을 해석하는 근저라고 주장합니다. 학습 동기 체제나 자식의 성공을 위한 어머니의 열의 같은 교육열이 한국교육을 이끈 주인공이라는 해석이지요. 교육열에 대한 긍정적 분석이 미래의 한국교육의 기초공사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주장은 교육에 대한 관심 자체가 교육열이고, 과열이란 나쁜 개념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뿌리 정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 주장 또한 틀리지 않을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해석은 아 맞고 어 맞다는 해석과 별반 차이가 없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매우 날카로운 개념 분석과 사회상에 대한 치열한 판단이 교육열에 대해서도 해석돼야 합니다. 이는 교육열이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이며, 교육이 추구하는 중심에도 개념의 창조적 생산이 자리해야 하는 문제라는 시각입니다.


교육열은 오늘날의 여러 교육문제를 해석하는 데 단초가 되는 매우 야릇한 그릇입니다. 1950년대 작은 아빠와 엄마가 교훈하듯 가난한 시대의 교육열은 생존 고투를 원활하게 중화해준 윤활유였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소비의 시대의 교육열을 두고서는 부정적 해석이 많습니다. 절제를 요구하지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시대와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공시태(공간의 시간성)의 변화는 개념의 변화입니다.


기실 세상엔 참 다양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교육문제도 학생들의 여건에 따라 다양하지요. 따라서 교육열에도 찬반을 넘어 매우 세밀한 판단이 요구됩니다. 교육열을 바라보는 거시적이고 이론적인 긍정과 부정의 싸움보다 교육열이 학교의 학생 개인에게 작동되는 미시적 문제가 우선시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1950년대 가난을 탈출하고 신분을 상승하고자 했던 원초적 힘으로써 교육열은 다분히 긍정적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념보다 존재는 늘 앞서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은 다릅니다. 교육열이 준 성공신화에 대한 향수 때문에 교육열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념화할 필요는 없지요. 교육열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생존이란 다급한 상황 속에 놓인 과거 속에서만 유용한 개념입니다. 단언컨대 교육열의 긍정적 개념화는 낡은 개념입니다.


이론이 곧 교육적 실천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스승"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실천하는 존재이지요. 그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개념의 유행에 따라 쉽게 중립을 선언해버리는 용기 없는 스승이 아닙니다. 비정치 논리에 기대어 콩고물을 얻어먹는 전문화된 스승 또한 아닙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당당하게 정치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의지의 존재여야 합니다. 때문에 현상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이론은 참스승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당찬 이론으로 무장이 되지 않은 교사는 쉽게 흔들립니다. 유행에 따라 자신의 관점을 바꾸기도 하고, 20대 혈기에 가진 신념만으로 나머지 교육 인생을 이어가기도 하지요. 이론은 하나의 실천이고 교육입니다. 이론에 대한 명민한 공부가 없는 교사는 진정한 스승이라 볼 수 없지요.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그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 그것은 바로 이론이 주는 고마운 혜택입니다. 이제 교사들이 먼저 공부할 시간입니다. 이론의 이론을 학습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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