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리아드, 오디세이, 신곡, 서유기, 홍길동전, 수호지, 성경,자본론 등 길게는 3천년이 넘는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지혜를 찾고자 한다. 고전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고 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적절하고 유용하게 읽어야 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각각 두 편씩의 고전들을 통해 이 고전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며, 그 메시지를통해 고전이 전하는 지혜를 말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는 지혜의 지도를, "신곡과 서유기"에서는 삶과 죽음을, "홍길동전과 서유기"에서는도둑을, "성경과 자본론"에서는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 전쟁, 선과 악, 꿈과 자유, 여성, 이념, 종교 등 다양한 주제를바탕으로 여러 고전들과의 만남이 이어진다.
■ 저자 이서규
한국외국어대학교서반아어과에 입학해서 남들이 하지 않던 스페인어를 배웠고,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Complutense)대학 왕립외교관학교와 서울대학교국제지역대학원 국제협력학과를 졸업했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NGO 단체인 ‘Peace People’에서 활동가로일했으며,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테러가 자행되던 벨파스트 시내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활보하기도 했다.
중앙미디어그룹 산하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nternationalHerald Tribune)과 CBS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세계 곳곳을 누볐고 많은 해외 유명인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중 전 독일 대통령리하르트 폰 바이츠재커(Richard von Weizsaecker)는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에는 CBS문화체육부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일본 도치기현( 木縣) 우쓰노미야(宇都宮)에서 국제분쟁과 인질석방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자는 뒤늦게 언어와 사랑에 빠진 뒤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일본어의 ‘달인(達人)’이 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언어들이 던지는 암시를 알아내는 것이 언어를 배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노컷뉴스」에<이서규의 영어와 맞짱뜨기&&를 연재하기도 했고,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사진으로 본 일제시대의 잔영』『스포츠 리더와성공』『세계적 스포츠 리더 55인의 성공 패스워드』 등의 책을 집필했다.
■ 차례
프롤로그_ 고전은 사실이 아닌지혜를 보여준다
제1장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 지혜의 지도를그리다
호메로스와 영어|아킬레우스 VS 헥토르|마음의 전쟁|오디세우스의 귀환
제2장 신곡과 서유기 : 삶과 죽음의경계에서
개똥밭에서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지옥의 지형도를 그리다|천국행과 지옥행|삼장법사와 세 천덕꾸러기의 여행|인생은여행이다|숫자의 비밀|고전과 범죄
제3장 홍길동전과 수호지 : 도둑 권하는사회
지존파와 막가파|최초의 사회주의 운동가|홍길동과 마르크스|양산박의 영웅들|백정과 성직자|요람에서 읽는 고전
제4장 성경과 자본론 : 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이데올로기
역사를 바꾼 스파이|히틀러가 읽은 『성경』|엠마오로 가는 길|『자본론』은 실패했는가?|이성과 감정사이에서
제5장 삼국지와 난중일기 : 싸움의기술
소설인가, 역사인가|관우를 위한 변명|제갈공명의 적벽대전|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장군
제6장 햄릿과 돈키호테 : 시대를 장식한 두 천재의노래
셰익스피어 VS 세르반테스|돈키호테와 산초의 여행|두려움에 몸을 사린 천재|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불 같은사랑의 결말
제7장 파우스트와 레미제라블 : 선과 악을 바라보는눈
내 안의 악마여, 모습을 드러내라|나는 파우스트인가?|장발장, 빵과 자유 사이에서|악마와 결탁하기
제8장 천일야화와 율리시스 : 시간 여행을떠나다
정복자의 혀가 된 말린체|사랑을 믿지 않는 사나이를 울린 시간 여행|여성이 전하는 지혜|하루를 천 년처럼 살 수있다면|외설 시비와 연애편지
제9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금병매와 사씨남정기 : 여성의,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이 없는 고전|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스칼렛을 본받아라|최초로 성의 해방을 노래한 여성|사씨와 교씨 사이에서
제10장 구운몽과 조신몽 : 꿈과 자유를 향한이중주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꿈에서 얻은 지혜|조신이 꾼 꿈|꿈을 꾸는 한국인, 꿈을 보는 일본인|지혜를 보는 눈
에필로그_ 고전, 그 끝나지 않는 이야기
부록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 고려대 권장도서 100권 | 연세대권장도서 200권 | 동아일보 선정 21세기 신新고전 50권 | 미국 대학위원회 추천도서 101권 | 뉴욕타임스 선정 20세기 최고의 도서100권 | 랜덤하우스 선정 20세기 영문학 100권
고전의 숲에서 지혜를 찾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 지혜의 지도를 그리다
오디세우스의 귀환
호메로스(Homeros, BC 800?-BC 750년?)는 인간이 왜 끊임없는 여행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으니 그 작품이 바로 『오디세이(Odyssey)』다. 『일리아드(Iliad)』의 마지막 부분에 오디세우스는 그 유명한 목마를 만들어 적을 교란시킨 뒤 성에 잠입해서 트로이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이런 간교한 술수에 대한 응징으로 오디세우스는 고향인 이타카(Ithaca)로 돌아가는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고 무려 10년 만에 귀향에 성공한다.
이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통해 호메로스가 말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디세우스를 괴롭힌 것은 가는 곳마다 마수를 뻗치는 신들의 시기와 질투와 저주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신들의 질타를 감수해야 했다. 호메로스는 지덕체를 두루 겸비했지만 신들의 섭리 앞에서는 저항하지 못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동물과는 달리 이성이라는 힘을 가진 인간이지만, 신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억제할 수 없는 감성과 싸워 이기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고 앞날을 예견할 능력도 없는 삼라만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런 나약한 인간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10년의 고생 끝에 고향에 거지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아끼던 사냥개만이 옛 주인을 기억하고 반가워한다. 아내와 아들이 아닌 사냥개만이 자신을 기억하는 상황에서 보통사람은 참담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알아본 사냥개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오디세우스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곧 아내와 자기 왕국을 탐내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족과 왕국을 되찾는 불굴의 의지를 선보인다. 신은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힘을 주었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하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호메로스가 전하고자 했던 말일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접근할 수 없지만 인간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인간이 용기를 갖고 지혜로우며 침착하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을 지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했다. 플라톤은 이데아, 기독교에서는 구원,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로 묘사하고 있다. 과학도에게는 이것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발명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달에 첫발을 내디디며 "이 한 걸음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일지 모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말한 미국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에게는 달나라가 바로 그곳이다.
『오디세이』에서 성숙한 인간상을 찾으라면 어떤 역경이 닥쳐도 침착하게 공포나 분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지목하고 싶다. 천하의 영웅이자 무적의 전사인 아킬레우스도 이런 점에서는 오디세우스를 당할 수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다고 화를 내며 죽어가는 동료를 저버린 아킬레우스가 아니었다. 그는 진정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가기 위해 사이렌들이 부르는 유혹의 노래에 귀를 막았고, 신이 부하들을 모두 수장시킬 때에도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즉, 전쟁과 여행은 한 가지로 요약하면 시련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바뀌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고대에는 체력, 중세에는 부, 현대에는 지식이 주요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복잡한 인간사를 평가하기에는 2퍼센트가 부족하다.
고전이 전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바로 지혜라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 진리는 오디세우스가 찾아나선 고향 이타카라면, 그 과정에서 오디세우스가 보여준 용기와 인내와 자기 절제와 가족을 위한 사랑을 모두 합쳐 지혜라고 봐야 한다.
고대에는 인간의 감성을 악으로, 이성을 사람을 궁극적인 진리로 이끄는 선으로 보고 이 두 가지가 갈등을 벌이고 싸우는 것이 인간의 영원한 싸움이자 여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둘 가운데 좋은 선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모두 마음속에 감춘 불완전한 존재지만, 완벽한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제 고전 속의 진리를 찾아 나와 함께 항해하며 동무가 돼 함께 싸울 준비가 되었을 것으로 믿고 다음 이야기를 향해 노를 저어보자.
성경과 자본론 : 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
이번에는 고전이 그저 고전이 아니라 윤리이자 도덕이고 법인 사람들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외에 20세기 전체를 좌지우지한 인류의 또 하나의 종교를 들라면 나는 주저없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공산주의를 손꼽고 싶다. 공산주의는 중국에서만 10억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으니 한때 세계 인구 거의 절반이 공산주의 신자였다. 또 종교란 인류 역사의 일부분을 좌지우지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이런 차원에서도 기독교나 기타 종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일어난 러시아혁명부터 1990년대 초까지 거의 100년간 인류 절반의 운명을 지배한 것이 공산주의였다.
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는 이후 운명을 달리해서 전자는 아직도 건재한데 비해 후자는 이제 거의 절명했다고 봐야 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이들을 번영과 파멸로 이끌었는지 종교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고전을 만나보자.
엠마오로 가는 길
모든 고전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등장인물의 행동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이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은유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출애굽기에서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과 싸움을 벌일 때 모세는 언덕에서 양손을 들고 승리를 기원하는데 이런 모습은 구원을 상징한다. 모세의 동작은 가톨릭 미사에서 사제가 두 손을 들어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어린 모세가 나일강을 따라 떠내려가다 파라오의 누이를 만나 목숨을 건지는 것은 물이라는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넘어 다른 생을 누린다는 것이고, 예수가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도 같은 이치다. 물은 죽음이자 이 죽음을 넘어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에서 단어 하나하나에 붙는 두 가지 이상의 상징성을 다른 예를 통해 알아보자. 루가복음에 예수가 죽은 뒤 제자 2명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마을은 오늘날 문헌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동원해도 찾을 수 없는 공상 속의 장소이다. 이 구절이 전하려는 진실은 마을의 존재 여부에 있지 않다. 지도에도 없는 나라이자 환상의 나라인 엠마오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를 잃고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증거만 가지고 사실을 논한다면 그 사람은 창조력과 상상력과 논리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독일의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고, 전설처럼 전해지던 도시의 유적을 찾아냈다. 어쩌면 호메로스가 말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천 년 전 그리스와 생사를 건 싸움을 한 도시가 엄연히 존재했던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작은 사실에 연연하면 예수가 전한 말씀의 진리를 보지 못한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감정에만 몰두하면 눈이 먼다. 눈이 먼다는 말은 누구나 두 개씩 가지고 있는 그런 눈이 아니라 제3의 눈인 진리를 보는 마음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눈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에 의해서도 움직인다.
침략과 수탈에 대한 분노만을 주장하는『자본론』은 마치 공부는 잘하면서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이를 보는 것 같다. 분노 이외의 다른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공산주의가 감정을 단순하게만 다루는 이유는 바로 『자본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사의 갈증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갈등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간단하면 나타나는 감정도 단순해진다. 그러나 사람은 증오라는 감정만 가진 것은 아니다.
감성적으로 풍부한 사람의 최대 장점은 바로 상식이나 이성을 동원해서는 알 수 없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도와준다는 점이다. 감정은 이성과는 달리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면 서로 원수로 돌변하는 예도 수없이 많고, 자식을 아끼는 부모일수록 자식들에게 매를 아끼지 않는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만 해도 이처럼 두루 섞여 있는데, 섭섭함이나 서글픔처럼 극단적인 감정이 아닌 미묘한 감정은 오죽 하겠는가? 그런데 『자본론』에서는 오직 자신을 핍박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만이 엿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경험하면서도 이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양한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힘이다. 『자본론』은 아킬레우스가 그토록 눌러 이기려고 한 분노만을 담고 있다.
햄릿과 돈키호테 : 시대를 장식한 두 천재의 노래
셰익스피어 VS 세르반테스
같은 시대를 살아갔으면서 태양이 지는 제국과 이제 막 태양이 떠오르는 제국에 살며 서로의 존재를 모든 두 명의 천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 받은 처우는 너무나 상반되었다. 한 사람은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나날이 성장하는 국력의 혜택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재주가 타고났지만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서 인정받을 때 다른 사람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눌려 걸작을 남기고도 귀족들의 연애편지나 대필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은 바로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이다.
두려움에 몸을 사린 천재
세르반테스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매매춘을 하며 먹고 사는 자신의 누이에게 평생 신세를 지며 살아간 변변치 못한 사내였다. 기록에는 세르반테스가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왼팔을 잃은 상이용사로 나오는데, 그 이전부터 왼팔은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레판토 해전에 그나마 다친 팔에 다시 부상을 입어 완전히 불구가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항상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채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고향사람만 만나면 기가 죽는 심약한 남자였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스스로 원해서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아니니 항상 종교재판소의 눈치를 살피고 마음에도 없이 다른 신앙을 믿으려니 마음의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세르반테스는 영광의 상처를 얻고 자신의 신앙을 가톨릭이라는 대다수 사람들이 믿는 신앙 밑에 감추고 평생을 살아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누가 내 과거를 알까 두려운 마음과 함께 항상 나 자신을 속인다는 양심의 가책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깨끗한 정치를 한다고 선전하지만 부정부패를 저지른 치부가 있고 간혹은 이런 것이 폭로되어 망신을 당하고 정치 생명이 끝나는 우리의 정치인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돈키호테이다. 아무리 옳은 행동이라고 공감을 해도 평생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선행을 하기도 어렵다. 돈키호테는 입으로는 정의와 양심을 부르짖지만, 실성한 사람은 세르반테스 자신이 아닐까? 아니 오늘날을 살아가는 수많은 세르반테스들도 같은 처지라고 본다.
마음의 자유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려도 황금 새장에 갇힌 새이다. 돈키호테는 상상 속에서는 자유를 만끽하지만 자신이 기사가 아닌 시골노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후에 와서야 자신의 잘못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세르반테스가 찾으려고 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히트작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과 신뢰이다. 사람은 살다 보면 다른 사람과 다툼을 벌일 수도 있다. 아니 자기 자신과의 다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믿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않으면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셰익스피어가 들려주는 메시지다.
『햄릿』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불안하고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 누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지 모르는 마당에 햄릿은 어머니마저 믿지 않았다. 햄릿이 결정적으로 자신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진리는 보지 못했다. 만일 햄릿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에 몰두하지 않고, 볼 수 없지만 아버지가 왜 그리고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면 적어도 자신마저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수수께끼에 지친 햄릿이 남긴 말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오셀로』는 어떤가?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아끼던 부하 카시오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아내를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다. 오셀로는 아내와 카시오가 급히 방에서 나온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이들이 방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투시력이 없는 한 알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이 볼 수 없는 사실에 집착해서 왜 아내가 잘 나가는 자신을 버리고 자기보다 못한 부하와 사랑에 빠졌는지 의심한다. 또한 카시오는 출세길을 보장해준 오셀로를 배반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을 왜 하는 것일지 생각하지 못한다.
이는 주인공들이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어 생긴 사건이다. 햄릿은 내가 과연 진실을 볼 수 있을지라는 의문에 괴로워했고, 오셀로는 피부색이 다른 흑인인 자신이 남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러니 불안한 마음에 눈에 보이는 사실만 보고 더 큰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그 속에서 눈물과 한탄을 읽는다. 가톨릭이 아니면 다 죽는다, 신대륙은 우리의 이샹향이라는 식의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반기를 들 수 없었던 세르반테스가 자신을 비웃는 이야기가 『돈키호테』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웃자고 만든 바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이렇게 암담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비극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세르반테스보다는 좀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스페인이 가톨릭에 미쳐 날뛸 때 영국은 성공회를 만들어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눌러 잡았다. 그러나 스페인과 영국의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스페인의 왕이나 귀족들이 다양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끼를 발산하는 것을 위험한 일탈행위로 보았다. 이들은 개성보다는 일관성을, 자유보다는 모두 같은 신앙을 누려 함께 천국에 가자고 하는 평등에 치중했다. 이에 비해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목소리를 평등보다는 우선으로 여겼다.
셰익스피어 역시 세르반테스와 마찬가지로 숨겨진 신앙의 비밀이 있다. 가톨릭이 금지되고 가톨릭 수도원이나 귀족들의 재산이 몰수당해서 국고로 환수될 때에도 셰익스피어는 비밀리에 가톨릭 신앙을 지켰다. 이런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영국이나 북유럽이 아닌 르네상스가 절정에 다다른 이탈리아가 무대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작 북유럽이 배경인 곳은 무겁고 음침한 덴마크 왕실의 이야기인 『햄릿』정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셰익스피어가 자신이 반대하는 가톨릭에서 귀화하지 않았지만, 그가 영국을 위해 필요하므로 그의 끼를 발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한 사람이 평생을 불우하게 지낸 데 비해 다른 사람이 출세가도와 인기를 한 몸에 받은 것도 자유라는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사람들이 몸으로는 복종하겠지만, 마음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예술은 죽은 것이고 영적으로 죽은 셰익스피어를 곁에 두느니 영혼이 살아 있는 셰익스피어를 위해 자신의 고집을 접은 것이다.
구운몽과 조신몽 : 꿈과 자유를 향한 이중주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어 미국 내에서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한 것으로 유명한 테네시주 멤피스의 가장 부유한 동네인 저먼 타운에 사는 한 백인은 "우리 동네는 흑인이 올 수 없어요. 흑인이 집을 사려고 하면 터무니없이 집값을 올리기로 이미 주민들 사이에 담합이 되어 있거든요"라며 이곳이 안전한 지역임을 강조한다.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며 흑인과 백인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이야기한 것은 21세기 미국에서는 아직도 꿈일 뿐이다. 킹 목사가 자신이 이루고 싶은 세상을 하필 꿈에서 보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정당하고 옳은 인간의 길이지만 인간들이 외면하는 그런 삶의 방법을 아직은 경험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처럼 꿈이 허황되고 아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고전이다. 아직도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몽상쯤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생각을 달리하기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꿈은 허황된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고전에서 꿈은 인간이 살아가야 할 진실된 길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조신이 꾼 꿈
주인공 성진이 꿈에서 교훈을 얻는 이야기인 『구운몽』이전에도 이와 아주 유사한 꿈 이야기는 우리 역사서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3권 탑상(塔像) 제4 <조신조>에 나오는 조신의 이야기이다. 출가한 승려였던 조신은 오늘날 강릉인 명주 세달사에 있는 절 소유 농장의 관리인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 태수 김흔의 딸 김랑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 후 조신은 매일 관음상 앞에서 김랑의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지만, 그녀가 딴 사람에게 출가해 버리자 울면서 김랑을 못내 그리워하며 부처를 원망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김랑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여 혼인은 했으나 당신을 사랑하여 이렇게 돌아왔노라"라고 했다.
조신은 기쁨을 가누지 못한 채 그녀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같이 사는 동안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으나 살림은 몹시 가난하여 나물죽조차 넉넉지 못하고 입을 옷도 없었으며 15세 된 큰 아이는 굶어 죽고 말았다. 도리없이 남은 네 자식을 둘씩 서로 나누고 막 헤어지려는 찰나에 꿈을 깨고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달은 조신은 그 뒤로 김랑에게 반했던 마음을 깨끗이 씻고 불도에만 힘썼다.
이와 같은 꿈을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은 주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정착한 문학 장르인데, 결론은 바로 꿈 깨고 정신 차리고 살라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이다. 꿈에서 겪은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고 현실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이니 꿈을 다루는 소설치고는 아주 현실적인 말이다.
『구운몽』에서 주인공인 양소유와 팔선녀는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물이다. 마치 모든 가족들이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 같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김만중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로 그리는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운몽』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동시에 소설의 격조를 한층 높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양소유가 원하던 행복이 눈에 보였을까? 양소유가 본 것은 진나라 시황제의 아방궁, 한무제의 무릉도원, 당현종의 화천궁이었지 행복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은 자기 주변에 있고 이를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 것이 김만중의 진짜 속내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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