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자녀교육

   
방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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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
   
12800
2007�� 09��



>■ 책 소개
‘부자들은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자녀들을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경제 전문 기자의 자녀교육서.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이건희 등 세계적인 부자들의 자녀교육법을"부자의 공식"에 대입해서 명쾌하게 설명한다. 


책은 현재 세계 1, 2위의 부자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과거 세계 1위의 부자였던 존록펠러와 폴 게티, 세계 1위의 부자 집안인 월마트 창업주 샘 월턴의 가족, 동아시아 1위의 부자인 리카싱, 한국 1위의 부자인 이건희, 그리고CEO로 부자가 된 잭 웰치, 우리에겐 영화배우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유명하지만 억만장자이기도 한 아널드 슈워제네거, ‘해리 포터’ 시리즈의작가이자 책 인세 수입만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조앤 롤링 등의 자녀 교육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0명의 이야기가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재산을 모은부자들의 이야기라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부자들이 자녀교육에 대해서 갖는 고민은 평범한 일반인들의 고민과 그다지 다르지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민에 그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철학과 구체적인 해법을 가지고 자녀교육에 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자들의 자녀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부자 10명의, 부자가 되는 단순하지만 아주 특별한자녀교육법을 만나보자.


■ 저자 방현철 
조선일보 기자. 서울에서 태어나광성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 은행감독원(현 금융감독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글쓰기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한국은행을 그만두고 중국 베이징 대외경제무역대학에서 1년간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을 유람했다. 그후 말레이시아에서 1년간 벤처기업에서 일하면서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둘러봤다. 서울에 돌아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조선일보에서는 편집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조선부 등을 거쳤다. 경제부와 주간조선부에서는 주로 재테크와 비즈니스 분야를 담당했다. 지난 1년간개인 연수를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UCLA 한국학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일했다.


■ 차례
감사의 글
추천사 
머리말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부자 아빠’
[빌 게이츠의 부자 공식] 정보 수집광이돼라
록펠러 2세의 ‘짠돌이’ 경제 교육
[록펠러 집안의 부자 공식] 용돈 교육을 철저히 시켜라
‘부자론’을 가르친 미국 최초의억만장자 폴 게티
[폴 게티의 부자 공식]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라
기부 가족을 만든 워런 버핏의 자녀교육
[워런 버핏의부자 공식]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라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스스로 부자의 꿈 키우기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부자 공식] 자기 훈련의습관을 들여라
일벌레 부자의 근성을 길러준 잭 웰치의 부모
[잭 웰치의 부자 공식] 일벌레 근성을 키워라
돈 있는 티를 내지마라 : 세계 최대의 갑부 집안 월튼 가족
[샘 월튼의 부자 공식] 절약의 가치를 가르쳐라
장사꾼 마인드를 갖춰라 : 리카싱의 자녀교육
[리카싱의 부자 공식]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해라
자식을 ‘퓨전 인재’로 키우는 이건희 집안
[이건희의 부자 공식]비빔밥(퓨전)형 인재가 돼라
위기 극복 비결과 상상력을 가르친 조앤 롤링의 부모
[조앤 롤링의 부자 공식] 문제 해결 능력을키워라


맺음말





부자들의 자녀교육



1.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부자 아빠"

빌 게이츠의 부자공식 _정보 수집광이 돼라

■ 지식 속에 부자가 되는 성공의 길이 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역할 모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서슴없이 "부모님"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워싱턴 대학에서 열렸던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 훌륭한 부모님을 뒀습니다. 두 분 모두 여러 가지 활동에 관여하셨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 오셔서는 비즈니스, 법률, 정치, 자선 활동 등 밖에서 경험한 것을 우리(빌과 두 여자 형제)에게 고스란히 전해주셨습니다. 여동생과 제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는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빌 게이츠가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된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게 그의 똑똑함이다. 단순한 똑똑함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쌓은 지식을 기초로 한 똑똑함이다. 빌 게이츠의 똑똑함은 어릴 적 부모와 함께 복잡한 사안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았다면 쉽게 계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독서를 통해서 대부분의 지식을 습득한다. 주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을 책 읽는 시간으로 할애해놓고 주말이면 책 읽는 시간을 늘린다. "생각 주간"에는 회사를 벗어나 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책을 읽는다. 신문을 매일 읽고 있으며 이코노미스트 등 잡지도 여러 종 구독하고 있다. 워싱턴 호숫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저택에는 그의 개인 도서관이 있다. 이곳에 그는 1만 4,000여 권 이상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다. 컴퓨터 황제로 불리는 그이지만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줄 것"이라고 말한다.


■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주라

빌 게이츠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경쟁을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그는 집 근처의 뷰리지(View Ridge)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똑똑한 남자 아이들은 소위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왕따를 피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자기가 좋아하는 수학과 과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에는 흥미를 표현하지 않았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적절한 경쟁 환경에 빌 게이츠를 넣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공부하는 걸 격려해주는 분위기의 학교를 찾기로 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레이크사이드(Lakeside)라는 시애틀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적절한 경쟁에 노출되자 빌 게이츠의 능력은 빛을 발한다. 수학과 과학뿐 아니라 다른 과목들의 성적도 올랐다. 고등학교 때는 워싱턴 대학의 정규 수학 강의를 듣고 대학생들과 경쟁해서 학점을 딸 정도였다. 또한 컴퓨터를 다루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 빌 게이츠는 레이크사이드 중고등학교의 수업시간표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해 5,000달러를 벌기도 하고, 시애틀의 한 회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시간당 4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자녀에게 평생을 살아갈 무기를 어릴 적에 쥐어줬다. 그 무기는 학교의 명패가 아니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능력,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의지와 끈기, 정보를 습득하는 습관, 비즈니스 마인드 등이었다.



2. 록펠러 2세의 "짠돌이" 경제 교육

록펠러 집안의 부자 공식_용돈 교육을 철저히 시켜라

■ 재산은 모으는 것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

록펠러 2세는 20세기 초 세계 최고 부자였던 존 D. 록펠러의 외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용돈 교육을 잊지 않고 그대로 여섯 자녀에게 전수했다. 그는 여섯 자녀들에게 일주일 단위로 용돈을 주면서 사용처를 정확하게 장부에 적도록 하고 용돈 쓴 곳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자세히 물어봤다. 록펠러 2세는 자신의 자녀들이 흥청망청 돈을 허비하는 부잣집 아들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로 키우고 싶었다. 그 노력으로 록펠러 가문은 미국에서 3대 넘게 부자로 남는 거의 유일한 부자 가문이 되었다.

  

■ 돈은 노력을 통해서 벌어야 한다

록펠러 2세의 집에는 아이들의 거의 모든 행동에 대해 마치 가격표가 붙어 있듯이 정해진 가격이 매겨져 있다. 노력을 기울여 한 일에 대한 대가로 용돈을 늘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예컨대 아이들이 다락방에서 쥐를 잡으면 한 마리당 5센트를 받을 수 있었다. 파리를 잡으면 100마리당 10센트의 대가가 주어졌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거나 잔디 깎기를 해도 대가가 있었다.


부부는 수요일 저녁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이들끼리만 한 끼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 날이 되면 아이들은 식모나 급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밀가루를 체질하고 야채를 썰어서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록펠러 2세 부부는 아이들에게 용돈 교육을 하고 집안일을 시키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부자가 되는 길"을 깨닫게 만들었다. 록펠러 2세의 자녀들은 나중에 커서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고 회상한다.



3. "부자론"을 가르친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 폴 게티

폴 게티의 부자 공식_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라

■ 돈은 스스로 일해서 버는 것이다

 폴 게티는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유전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 유전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 폴 게티가 "미국 최고의 부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57년 경제 잡지인 포천(Fortune)지가 미국의 400대 부자 순위를 처음으로 집계해서 발표하면서 1위로 폴 게티를 올렸을 때였다. 당시 그는 최초로 빌리언에어(billionaire)란 호칭으로 불렸다.


폴 게티의 아버지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유전 개발 사업자였지만 아들에게 "노동 윤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애썼다. 10대 때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직접 유정을 뚫는 작업을 보조하도록 했다. 폴 게티는 다른 노동자들과 같이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3달러를 받았다. 사장 아들이라고 농땡이 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폴 게티의 아버지는 아들이 부잣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는 아이로 자라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하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동시에 미래의 유전 개발자로 클 수 있도록 노하우를 현장에서 직접 익히게 한 것이다.


■ 폴 게티의 부자가 되는 방법

폴 게티는 『부자가 되는 법』이란 책에서 사업가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정리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정리해놓은 것 같지만 결국 진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내용이다.


첫째, 사업을 시작할 때는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하라.

둘째, 현재 시장에 있는 상품보다 더 싼값에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라.

셋째, 절약의 정신이 필요하다.

넷째, 사업 확장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다섯째, "내 사업"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져라.

여섯째, 자신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를 향상시킬 수 있는 정보가 수시로 들어오도록 하라.

일곱째,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여덟째, 항상 개척되지 않은 시장을 찾아야 한다.

아홉째, 자신의 노력과 상품에 대한 평판을 유지해야 한다.

열 번째, 자신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삼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



4. 기부 가족을 만든 워런 버핏의 자녀 교육

워런 버핏의 부자 공식_독립적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라

■ 부모의 돈은 자녀의 돈이 아니다

워런 버핏은 자신이 죽을 때 많은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부자 중의 한 명이다. 세 자녀에게 기부 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쓰던 어느 날, 워런 버핏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편지 한 통을 더 썼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세계 최대의 갑부 빌 게이츠였다. 빌 게이츠가 세운 세계 최대의 자선 단체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매년 자신이 소유한 주식의 5%를 기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액수로 따지면 연간 15억 달러로, 20년간 기부한다고 가정하면 300억 달러에 해당한다. 보통 부자들은 자신이 세운 자선단체나 재단에 기부하는 데 반해 워런 버핏은 기부 약정액의 80% 이상을 빌 게이츠가 세운 재단에 보내기로 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 놀라워했다.


워런 버핏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재산 기부 계획을 세상에 알린 지 사흘이 지난 6월 29일 텔레비전 아침 뉴스쇼에 나와 미소를 띠며 농담까지 섞어가며 아버지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진행자가 "내 돈은 어디 있냐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묻자 오히려 큰딸 수잔 버핏은 자녀들을 대표해서 "정말로 그렇게 많은 돈(워런 버핏의 전 재산)을 우리에게 남겨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신 나간 행동일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아들 피터 버핏은 "아버지는 돈으로 사람이 만들어지거나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며 "아버지는 돈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평가해주기를 원했고, 우리에게도 돈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항상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 돈 버는 "액션 플랜"을 세우고 실천하라

워런 버핏을 다른 아이들과 구별 짓게 한 가장 큰 차이는 "실행 계획(액션 플랜)"이 있느냐 없느냐 였다. 워런 버핏이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본 것은 다섯 살 때가 처음이다. 집 앞에 판매대를 세워놓고 껌과 레모네이드를 팔았다. 아홉 살 때는 친구 러셀과 같이 주유소에 있는 음료수 자동판매기 옆 쓰레기통을 뒤져 사람들이 버리고 간 병 뚜껑을 세기도 했다. 어떤 브랜드의 음료수를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파악해서 팔기 위해서였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라"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판단하라" "경쟁력 있는 상품을 팔아라" "브랜드의 가치를 파악하라" 등 훗날 자신의 투자 원칙이 될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익힌 것이다.


열한 살 때 처음 주식에 투자하여 얻은 이익금은 고작 5달러였는데 주식 첫 거래에서 투자에는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워런 버핏은 "부자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나섰다. 결국 대학 졸업 때까지 1만 달러 가까운 돈을 모았고 그것을 종자돈으로 해서 투자 전문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세계 2위의 부자이지만 1958년 3만 1,500달러에 구입한 네브래스카 오마하의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고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가서 동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사 먹는다.



5.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스스로 부자의 꿈 키우기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부자 공식_ 자기 훈련의 습관을 들여라

■ 슈워제네거는 할리우드에 오기 전에 백만장자였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 아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웬만한 사람들은 "영화로 큰돈을 번 것 아니냐"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 이미 백만장자가 돼 있었다.


스물 한 살에 미국에 건너왔을 때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1967년 세계 3대 보디빌딩 대회 중 하나인 "미스터 유니버스"에서 우승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에 도착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당시 미국 보디빌딩계의 거물이었던 조 웨이더와 전속 계약을 맺고 보디빌딩 잡지의 전속 사진 모델이 되고 종자돈 마련을 위해 굴뚝이나 벽난로 등을 만드는 벽돌 공사 사업을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벽돌 공사로 미래의 종자돈을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현대 보디빌딩의 백과사전』『아널드의 남성을 위한 보디빌딩』과 같은 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통신 판매 사업도 번창하게 된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부동산에 투자해서 다시 돈을 불리는 "재테크" 솜씨를 발휘한다. 할리우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이미 부자가 돼 있었다. 그는 1982년 <코난>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출연하는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돈방석에 앉게 됐다. 2007년 현재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재산 추정액은 8~9억 달러(7,600-8,550억원)이다. 액수로 보면 빌리언에어(재산 10억 달러 이상인 부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슈워제네거는 2003년 주지사에 취임한 이후 주정부에서 나오는 월급은 한 푼도 안 받고 있다. 이미 충분한 수입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 아버지가 길러준 훈련의 기초, 스스로 터득한 자기계발법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아버지는 운동뿐만 아니라 책 읽기와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통금 시간을 정해놓고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이렇듯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부모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훈련"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훈련"의 기초를 길러줬다. 하지만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10대가 되자 부모가 짜준 훈련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나가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보디빌딩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잡지에 나오는 많은 보디빌더 중에서 자신의 역할 모델을 찾았다. 영국 출신의 남아프리카 보디빌더인 레그 파크였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모든 레그 파크의 사진을 구해서는 축적을 계산해서 그의 가슴, 팔, 등, 배, 허벅다리 등에 붙어 있는 근육의 크기를 쟀다. 그리고 레그 파크의 근육 크기를 목표로 세우고 근육을 키워가기로 했다.

 

그는 보디빌딩 훈련 과정에서 인생에서 스스로 계속 적용해나갔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얻었다. 자신감, 긍정적인 마음의 태도, 정직한 노력이 그것이다. 또 비즈니스 마인드를 키우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서도 영어 발음을 고치기 위해 여러 학교에서 학교당 두 과목씩 수업을 들었고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까지 도전해 당선됐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재능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재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얻었고, 끊임없는 동기 부여를 통해 어릴 적부터 자기 훈련의 습관을 들인 것이다.



6. 일벌레 부자의 근성을 길러준 잭 웰치의 부모

잭 웰치의 부자 공식_일벌레 근성을 키워라

■ 아버지가 가르쳐준 일벌레 근성

잭 웰치는 2001년 GE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일벌레처럼 일하고 있다. 2007년으로 72살을 맞는 잭 웰치는 여전히 자신이 회사에서 일할 때의 경험과 노하우를 이용해서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컨설팅을 하고 있다. 통상 엄청난 퇴직금을 챙긴 미국 대기업 CEO들이 퇴임 후에 골프를 즐기면서 자선 행사에나 얼굴을 비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잭 웰치가 퇴임 후에도 일벌레처럼 일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배운 일하는 습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잭 웰치의 아버지 존 프랜시스 웰치는 보스턴과 근교를 오가는 열차의 차장이었다. 잭 웰치의 아버지는 조용한 성격이고 집에서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노동 윤리"가 무엇인가를 직접 행동으로 아들에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가 출근을 했고, 하루 종일 열차의 좁은 통로를 걸어다니면서 승객들의 차표를 검사하는 일을 했었다. 잭 웰치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가면 잭 웰치를 깨워서는 새벽 6시에 있는 성당의 새벽 미사를 나가게 했다. 잭 웰치는 아버지가 하루도 일을 쉬지 않는 모습, 날씨가 나쁜 날이면 하루 전에 준비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회사에서 자신이 하기로 약속한 일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커서도 가질 수 있었다.


■ 어머니가 길러준 자신감과 리더십

지금은 대중들 앞에서 거침없는 말솜씨를 자랑하는 잭 웰치이지만 실상 그는 어릴 적에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말 더듬는 버릇 때문에 그는 엉뚱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학교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종업원은 항상 참치 샌드위치 두 개를 줬다고 한다.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잭 웰치는 "튜-튜나"라고 발음해서 종업원이 "투 튜나(two tuna)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잭 웰치가 말 더듬는 버릇에 크게 신경을 썼더라면 GE라는 거대한 회사에서 CEO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는 강연자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잭 웰치는 어린 시절에 말을 더듬는다고 남에게 놀림감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잭 웰치는 자신감을 잃고 인생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잭 웰치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가 말을 더듬을 때면 그에게 "너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너처럼 똑똑한 아이의 머리를 너의 혀가 따라 오지 못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해줬다. 너무 생각이 빠르기 때문에 말이 쫓아오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때문에 웰치는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 그의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잭 웰치가 학교에서 가장 말이 많고 시끄러웠던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7. 세계 최대의 갑부 집안 월턴 가족

샘 월턴의 부자 공식_절약의 가치를 가르쳐라

■ 2.8평짜리 회장실의 비밀

세계 최대의 유통 기업 월마트의 회장인 롭 월턴의 사무실은 가로 10피트(약 3m), 세로 10피트의 정사각형 모양의 방이다. 면적은 100제곱피트다. 평수로 따지면 2.8평 정도 된다. 큰 책상 하나 들어가면 사무실이 꽉 찰 정도의 크기다. 면적이 작은 것뿐만 아니라 출입문 외에는 사방이 막혀 있어 창문도 없다.


롭 월턴이 회사에서 가장 작은 사무실을 고집하는 것은 아버지 샘 월턴(Sam Walton)이 강조한 "절약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월마트의 창업자인 샘 월턴의 절약 정신은 미국인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하다. 샘 월턴은 허름한 픽업트럭을 손수 몰고 다녔으며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모습이 사진기자들에게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샘 월턴은 자녀들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빈둥거리는 "유한계급(idle rich)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철저한 가정교육과 경제교육을 시켰다. 샘 월턴이 자녀들에게 가르친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부자라는 특권의식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 어떻게 자녀를 가르칠지 부부가 생각을 공유하다

자녀들을 독립적이고 특권 의식 없이 키우기 위해서는 아버지 샘 월튼 뿐 아니라 어머니 헬렌 월턴의 역할이 중요했다. 부부는 결혼 후에 자녀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둘은 헬렌 월턴이 서른이 되기 전에 네 자녀를 갖기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릴 적에 배웠던 돈에 대한 가치, 일에 대한 가치를 자녀들에게 똑같이 심어주기로 약속했다. 자녀들을 아버지 상점에 나와서 일하게 하고 신문 배달을 시킨 것도 부부가 합의해서 나온 교육 방식이었다.


샘 월턴은 1992년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자서전에서 이 외에도 자신의 성공 비결을 열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비즈니스에 충실해라.

둘째, 이익이 나면 직원들과 나누고 그들을 파트너로 대해야 한다.

셋째, 이익을 나누는 방식 등을 통해 파트너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줘야 한다.

넷째, 가능한 한 파트너들과 모든 이슈에 대해 의견 교환을 해야 한다.

다섯째, 파트너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을 존중해야 한다.

여섯째,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고 실패했을 때는 웃음으로 넘겨야 한다.

일곱째, 회사에 있는 누구의 의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여덟째, 고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아홉째, 경쟁자보다 비용을 더 잘 통제해야 한다.

열째,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8. 장사꾼 마인드를 갖춰라

리카싱의 부자 공식 _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시켜라

■ 아들에게 비즈니스의 험한 맛을 미리 맛보게 하다

동아시아 최고의 갑부 리카싱은 두 아들을 마치 사자가 어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듯 독하게 키우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2007년 현재 40대 초반인 리카싱의 두 아들은 사업가로서는 젊은 나이인 20대 후반부터 홍콩뿐만 아니라 세계 비즈니스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리카싱은 두 아들에게 초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회사인 청쿵실업의 이사회를 참관하도록 했다.


어느날 두 아들은 이사회에서 논쟁이 격화되는 것을 보고 이사들이 서로 싸운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리카싱은 울먹이는 두 아들에게 "울지 마라. 우리가 논쟁하는 것은 사업을 위한 거야. 아주 정상적인 것이지. 나무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물이 통과할 수 없듯이 사리는 논쟁을 하지 않으면 명확해지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리카싱은 훗날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이사회에 참석시킨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이들이 회사의 공개회의를 참관하도록 한 것은 단순히 비즈니스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즈니스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고 얼마나 많은 회의를 거쳐서 이뤄지는 것인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다."


■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시켜라

리카싱의 둘째 아들 리쩌카이는 "아버지는 어떻게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떻게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아버지의 말의 기준이 되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었다"고 회상했다.


한 번은 유학 가 있는 아들들이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면서 용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리카싱은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부인, 정말 잘 됐구려.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자라난다면 앞으로 좋은 소식이 반드시 있을 것 같소."라고 말했다. 둘째 아들 리쩌카이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이 있는데도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그는 골프장 캐디뿐만이 아니라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 돈을 아끼기 위해서 주로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다.  부자들이 말하는 "젊어서 고생"의 핵심은 자녀에게 독립심을 키우고 자기 절제의 힘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자녀에게 적절한 "고생"을 찾아서 체험하게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9. 자식을 "퓨전 인재"로 키우는 이건희 집안

이건희의 부자 공식_비빔밥형 인재가 돼라

■ 자식을 "퓨전(비빔밥형)인재"로 만들어라

이건희 회장은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재를 중시한다. 아들 이재용 상무를 유학시키면서 세계 경제를 대표하는 두 나라인 미국과 일본을 두루 돌아보게 했다. 전공도 학부 과정은 역사를 전공하고 석사 과정에선 경영학을 전공하게 해서 다양한 학문에도 접하도록 했다. 자식이 세상과 학문을 두루 돌아보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희의 이런 생각은 삼성에서 자기 전문 분야는 물론이고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T자형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전략으로 구체화된다. "T자형 인재"는 한 가지 분야에만 정통한 "I자형 인재"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융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비빔밥형 인재"니 "퓨전 인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건희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기술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웬만한 엔지니어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이다. 또 골프, 승마, 개 기르기, 영화 관람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공부에만 매달린 전문가와는 달리 여러 분야의 경험을 종합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판단할 수 있는 "퓨전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건희의 이같은 스타일은 실제 경영에 있어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삼성의 경영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전체 조직을 자극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했다.


■ 궁금한 것은 철저하게 파고들어라

궁금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은 이건희 집안의 전통이기도 하다. 이건희의 아버지 이병철은 한 번 연구해야 할 사안이 발생하면 먼저 관련 서적을 최대한 수집해서 꼼꼼하게 읽고 나서 해당 분야에 정통한 기자나 교수를 초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그것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만났다. 그 후에 그 분야에서 직접 일하는 사업가를 만나 실제 사정을 들은 후에 사업 구상을 했다.


이건희가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웬만한 취미에 대해서는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유는 어릴 적부터 궁금한 것은 철저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 관람의 경우 초등학교 때 일본에 유학을 가 있으면서 가진 취미인데, 당시 3년 동안 1200-1300편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하루에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영화를 볼 때 한 번은 주연, 한 번은 조연, 감독, 카메라맨 등의 위치에서 영화 한 편도 철저하게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 애견 전문가 중에선 손꼽을 정도이고 직접 진돗개의 순종을 가려내서 세계견종협회에 공식 등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건희는 이병철의 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돌아온 후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게 된다. 이병철이 당시 아들에게 준 선물은 "경청(傾廳)"이라는 글귀였다. 이건희는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친(이병철)께선 제가 부회장이 되자마자 직접 붓으로 쓰신 "경청"이라는 글귀를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 후엔 회의할 때나 현장에 갈 때 가능하면 한 마디도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희는 말을 못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 짧은 생각에도 참으로 좋은 가르침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말없이 지내는 동안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고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남의 말을 들어라"라는 게 이건희가 아버지에게서 핵심적으로 배운 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중요한 태도 중의 하나이다. 이건희의 큰 아들 이재용도 "경청"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희의 말을 빌면 이재용은 "훌륭한 분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은 누구한테나 배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건희는 아버지가 가르친 경청의 자세를 갖고 있고 말투도 어눌해서 말을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혼자서 몇 시간 동안 말을 하는 사람이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할 당시 프랑크푸르트, 로스앤젤레스, 오사카, 도쿄, 런던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신들린 듯이 말을 쏟아냈다. 하루 평균 여덟 시간, 최장 열 여섯 시간 회의를 잇달아 열면서 3개월 동안 쏟아낸 말이 A4 용지로 85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다.

 

이건희에게 있어 승리한 사람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했을 때 부자가 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류란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을 줄 때는 사정없이 벌을 주고, 상을 줄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준다는 것이다."



10. 위기 극복 비결과 상상력을 가르친 조앤 롤링의 부모

조앤 롤링의 부자 공식_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라

■ 싱글맘, 글쓰기로 억만장자가 되다

"해리포터"시리즈로 돈방석에 앉게 된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 1편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싱글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 역정은 1997년 해리포터 1탄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나오면서 180도로 바뀌게 된다.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인세가 눈덩이처럼 굴러 해리포터 시리즈가 나오기만 하면 일주일에 200만 파운드(약 37억원) 이상의 돈을 벌게 된 것이다. 또한 영화, 비디오, 게임 등의 판권으로도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조앤 롤링이 인생의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성공의 길로 나서게 된 데는 부모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녀를 참담한 경험 속에서도 버티게 하고 나중에 세계의 갑부로 성장하게 된 것은 부모가 길러준 글쓰기 "재능"과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의지"라는 두 개의 무기였다. 


■ 불치병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어머니

조앤 롤링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의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불치병의 진단을 받았지만 농담을 좋아하고 항상 활기에 차 있는 기본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조앤 롤링은 불치병에 걸렸어도 전혀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병에 걸렸다고 집이나 병원에 누워 지내지 않고 오히려 일을 더 하려고 했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조앤 롤링의 어머니가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조앤 롤링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폭력 남편을 피해 한 살배기 어린 딸을 안고 집을 뛰쳐나와 단칸방에 살면서 정부 보조금을 타서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잠든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카페에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해리포터" 원고의 집필에 매진할 수 있었다.


■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라

조앤 롤링이 어릴 때부터 글쓰기의 재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부모가 키워주지 않고서는 글쓰기의 재능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재주가 좋다고 하더라도 다듬어주지 않으면 쓸모없는 단순한 기교에 불과하다. 조앤 롤링의 글쓰기는 독자들에게 독특한 재미를 주는 방식이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어린이고 어른이고 책을 한 번 잡으면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조앤 롤링이 이야기 진행의 완급을 조절하면서도 적절한 양의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조앤 롤링의 글쓰기 방법은 어릴 적 책 읽기부터 시작된다. 조앤 롤링의 부모는 특히나 이웃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모로 유명했다. 조앤 롤링의 부모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 둘 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였고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책을 읽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앤 롤링의 부모는 딸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기에 애썼다. 그들은 런던 근교에서 자랐지만 딸들이 도회지의 어수선함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뛰어 놀면서 자라기를 원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기숙학교, 숲, 묘지 등은 대부분 조앤 롤링이 자랐던 동네인 투츠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로 성공하지 못했어도 삶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 계획을 갖고 있었다. 책을 쓰면서 동시에 프랑스어 교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다녔던 것이다. 그녀는 인생의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도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았던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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