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논술에 빠지다

   
김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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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
   
13800
2007�� 03��



>■ 책 소개
누구나 즐겨 읽거나 보아왔던 추리소설,영화, 음악, TV 프로그램으로 보는 즐거운 논술책. 어느 참고서에서나 볼 수 있는 천편일률적인 글쓰기 지침이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떨쳐버릴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논술을 가깝게 느끼도록 풀어간다. 매일경제신문에 알기 쉬운 논술 강의로 6개월 동안 연재했던 글을모은 책이다.


‘미국에서 축구보다 야구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플라톤이 휴대폰을 싫어하는이유는?’, ‘앨리스는 어떤 피자를 먹어야 할까?’ 등의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하고, 흥미진진해 하는 인물과 사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논술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쉽고 친숙하게 풀어낸다. 흥미로운 소재로 엮은 이 책은 재미뿐만 아니라 15개의 주제로 나눠진 각각의 텍스트들로 논리적사고도 끌어내고 있다. 각 텍스트들에 담긴 문제의식을 보여줌으로써 실전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논리적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 저자 김영성
저자는 흔히 말하는 7080 세대이다.저자는 디지털환경에 발 빠르게 적응하면서도 청소년기에 경험했던 감수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7080 세대의 독특한 특성을 인문학적 소양으로확대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물로 한양대학교 국문과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추리소설적 서사구조 연구」로 정한 데 이어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수과정을 밟으면서 문학 뿐 아니라 영화와 게임 같은 모든 서사물로 관심 영역을넓혀갔다. 지금은 한양대학교와 열린 사이버대학 등에서 논리적 글쓰기와 토론의 방법, 문학과 문화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 차례
서문 - 재미있게, 그래서 거침없이, 논술에 빠지다


제1상영관 - 논리 싸움의 기술 
01 홈즈 VS그리섬 : 논술에는 정답이 없다 
02 박지성 VS 박찬호 : 논술에 필요한 기초 체력 축적하기 
03 플라톤 VS 휴대폰 :암기보다는 논리적 사유가 먼저다 
04 호메로스 VS 할리우드 : 모든 논제를 현재화시켜라 


제2상영관 - 두사부일체, 논리과학수학일체 
05앨리스의 시계와 피자 :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 논술에 써먹기 
06 토끼를 따라가는 여행 : 창의적 사고란 새로운 걸 찾는 능력이 아니다
07 살찐 사람을 위한 숫자 놀이 : 논리적 사유에 통계 활용하기 
08 케플러, 셰인, 그리고 서부의 결투 : 과학 이론은 논리적검증의 결과다 


제3상영관 - 글쓰기 작업의 정석 
09 글쓰기 고수의내공 : 감동을 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을 쓴다 
10 투덜이, <상상플러스&&를 보다 : 써보지도 않고 글쓰기에 대해 논하지 말라
11 에로스에게 배우는 활쏘기 : 먼저 제목을 정한 후 글을 써라 
12 지도와 사형수 :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몇 가지 요령


제4상영관 - 미술관 옆 논술 법정 
13 놀부와 함께보는 축구 중계 : TV를 보면서 논술 공부하기 
14 홈즈와 함께하는 미술 품평회 : 자신감이 논리적 사유의 바탕이다 
15 논술법정에 선 명탐정 포와로 : 실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격언 


논술노트





거침없이 논술에 빠지다


홈즈 VS 그리섬 : 논술에는 정답이 없다

홈즈도 틀릴 수 있다

셜록 홈즈가 논술 시험을 본다면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물론 주어진 논제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아주 훌륭한 답안을 제출할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탐정의 자질과 논술가의 자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네 개의 서명』이란 작품에서 홈즈는 훌륭한 탐정이 되기 위한 조건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지식, 관찰력, 연역적 추리 능력이 그것이다. 논술에 관한 이런저런 참고서를 읽어본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조건이 논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지식이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고, 관찰력은 지문과 주제에 대한 이해 능력, 연역적 추리 능력은 지식과 관찰력을 결합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 능력과 각각 연결된다. 논술가로서의 이러한 기본적인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홈즈가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 대답은 틀렸다. 범인 찾기에는 정답이 있지만 논술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대답이 틀린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이것만큼 논술에서 중요한 요소는 없다. 홈즈가 지닌 탐정으로서의 능력이 가장 환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라.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여 범인을 찾아낼 때가 아닌가. 『빨간 머리 연맹』에서 빨간 머리 의뢰인의 진술과 단 한 번의 현장답사만으로 사건을 해결해 내는 홈즈의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논술에서는 그런 능력이 아무 쓸모가 없다. 논술을 출제하거나 채점하는 사람 누구도 범인을 색출해내듯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주어진 논제를 해결해 나가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 우선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홈즈의 능력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홈즈가 말한 훌륭한 탐정의 자질은 논술의 독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논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홈즈 이야기에서는 정해진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논리적 비약이나 추측 같은 게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정답에 집착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는데, 이것은 논술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홈즈가 틀릴 수도 있다고?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는 학생은 홈즈 이야기의 한 대목과 포퍼나 쿤과 같은 과학철학자의 글을 나란히 놓고 다음과 같은 논제에 대한 답안을 작성해 보기 바란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홈즈의 추리 방법을 비판하시오. 논술의 경향이 바뀌더라도 충분히 출제가 될 수 있는 논제이다. 이런 논제가 당혹스러운 학생들이 있다면, 우선 함께 홈즈를 만나러 가자. 추리소설 코너로 발길을 돌리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자는 말이다. 홈즈만큼 훌륭한 논술 교사도 없으니 그런 수고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넘치는 것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 논술 참고서를 구입하기 위해 서점의 관련 코너를 찾아가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모두 공감할 말이다. 수없이 많은 참고서를 뒤져보아도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고, 천편일률적인 정답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푸념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명심해 두기 바란다. 바로 그런 투덜거림 내기 비판이 논술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홈즈에게 배운 것도 그런 것이다.


홈즈가 범한 논리적 오류는?

말만 해서는 쉽게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어딜 가든 맛보기란 것이 있게 마련이다. 홈즈가 틀릴 수도 있다고 수십 번 말하는 것보다는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홈즈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다음 지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네 사람의 서명』 중에서 홈즈가 관찰력과 추리력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친구인 왓슨의 행적을 밝혀내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백한 과학적, 논리적 오류가 존재한다. 외화 시리즈 CSI 속 길 그리섬 반장의 해박한 과학 지식이나 과학철학자 포퍼의 글이 없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찾아낼 수 있으니 여러분이 직접 홈즈에게 도전해 보기 바란다. 부탁하건대, 감히 내가 홈즈에게 도전하다니…라는 식의 두려움은 떨쳐버려라.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무언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하는 숨은 그림 찾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각설하고 이제 읽어보자.


홈즈는 느긋하게 안락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그는 담배 연기로 굵고 푸르스름한 동그라미를 연속해서 만들어 보였다. "예를 들면, 나는 관찰을 통해 오늘 아침에 자네가 윅모어 가 우체국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았네. 하지만 추리를 통해 자네가 전보를 쳤다는 걸 알게 됐지." "어떻게 알았지?" 나(왓슨)는 말했다. "둘 다 맞았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걸 알아냈는지 모르겠군. 나는 오늘 아침에 우체국에 다녀왔지만 그건 미리 계획한 일도 아니고 누구한테 얘기를 한 적도 없는데." "그건 아주 간단하지." 홈즈는 내가 놀라는 걸 보고 쿡쿡 웃으며 말했다.


"정말 우스울 정도로 간단해서 설명조차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라네. 하지만 그건 관찰과 추리의 경계를 명확히 가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나는 자네 발등에 황토 흙이 묻어 있는 걸 관찰을 통해 알았네. 그런데 윅모어 가 우체국 건너편에는 도로 공사를 하느라 길을 파헤쳐 놓아서 흙이 드러나 있지. 그 흙을 밟지 않고선 우체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워. 그리고 유난히 붉은 그 황토는 내가 알기로 이 근방에서 거기 말고는 없네. 여기까지가 내가 관찰한 것일세. 나머지는 추리해낸 것이지."


"그러면 내가 전보를 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추리했지?" "나는 자네가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나는 오늘 아침 내내 여기 앉아 있었거든. 또 지금 자네 책상에는 우표와 두툼한 엽서 뭉치가 놓여 있네. 그러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요소를 다 제거해 버렸을 때 남는 것 하나가 진실임에 틀림없네." "이 경우에는 그렇군." 나는 잠깐 생각해본 다음 대답했다.

- 『네 사람의 서명』, A.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황금가지, 2002


CSI 그리섬 반장의 조사 : 도대체 홈즈가 뭘 틀렸다는 거지?

숨은 그림 찾기에 실패했다면 우리의 친절한 그리섬 반장을 따라 차근차근 찾아보도록 하자. 모르긴 몰라도 그리섬 반장이라면 홈즈가 말한 관찰, 즉 증거가 무엇인지 정리부터 할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도 어렵지 않다. 번거롭게 예문을 다시 읽을 필요도 없이 홈즈가 찾아낸 유일한 증거가 왓슨의 구두에 묻은 유난히 붉은 황토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홈즈의 능력이 놀랍지 않은가. 황토 하나만으로 왓슨이 우체국에 전보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내다니.


하지만 우리의 그리섬 반장은 전혀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홈즈에게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흔한 황토 하나만 갖고 당신의 답이 맞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거죠? 그 황토가 당신이 며칠 전에 본 우체국 앞 공사 현장의 흙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나요?" 그렇게 질문하고 나서 분명 그는 흙의 표본을 채취해서 그 화학적 성분을 분석하러 갈 것이다.


그렇다. 가장 결정적 단서인 흙이 문제다. 우리는 답을 맞혔다는 이유 때문에 홈즈가 흙에 대해 범하고 있는 몇 가지 과학적 오류와 논리적 비약을 간과하고 있다. 우선 유난히 붉은 흙이 반드시 윅모어 가 우체국 앞 공사 현장에 있는 흙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흙의 조건에 들어맞으려면 흙 속에서 특이한 화학적 성분을 추출하는 절차가 반드시 선행되었어야 한다(홈즈 시대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고? 첫 부분에 현대 과학의 관점이라는 조건이 제시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다른 공사 현장에서 그와 유사한 흙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그리섬 반장이 지적할 수 있는 홈즈의 두 번째 오류는 바로 현장 확인 부재, 곧 새로운 공사의 가능성에 대한 확인 부재이다. 홈즈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공사 현장은 분명 한 곳뿐이었다. 그러나 홈즈가 확인한 시간과 왓슨이 외출한 시간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존재한다. 그 공사 현장 근처에서 새로운 공사를 시작했다면 어떤 흙이 나올 확률이 높을까? 당연히 유난히 붉은 흙이다. 홈즈는 그런 사실을 내가 알기로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관심 밖으로 밀어낸다. 우리에게는 홈즈가 알고 난 후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땅을 파는 공사 정도라면 홈즈가 집에 머물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얼마든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현장에 대한 답사는 답을 말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이다.


화학적 분석과 현장 확인을 통해 그리섬 반장이 제기한 두 개의 의문이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홈즈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실제로 왓슨이 우체국 앞에 갔다고 하자. 구두에 황토 흙이 묻었다는 사실 말고는 우체국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왓슨이 다른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 실수로 흙을 밟았거나, 다른 사람의 실수로 왓슨의 구두에 흙이 튀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참 양보해서 우체국에 들른 것이 맞는다고 하자. 그럼 무슨 방법으로 왓슨이 전보를 보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가. 우체국에 우편물을 보내러 가야만 한다는 법률이라도 제정되어 있다면 혹 모를까. 왓슨은 우체국에 근무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갔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낮지만 그냥 잠시 우체국 안의 의자에 앉아 있기 위해 들렀을 수도 있다. 이 정도쯤 되면 이제 여러분도 그리섬 반장의 다른 질문이 없더라도 홈즈가 명백하게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홈즈에게는 왓슨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쳤을 거라는 심증만 있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홈즈가 말한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답을 심정적으로 추측하는 것과 거기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과학적 수사로 명성을 쌓은 그리섬 반장이라면 핀셋을 들고 왓슨 주머니를 뒤져서라도 전보를 보냈다는 걸 명명백백하게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를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우체국 소인이 찍힌 영수증 조각 같은 것 말이다. 그리섬 반장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범인가가 하는 답이 아니라 왜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증거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이젠 여러분은 본격적으로 논술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글쓰기 고수의 내공 : 감동을 할 수 있어야 좋은 글을 쓴다

글쓰기 무림계의 전설

무협소설은 절대 고수의 경지에 이른 자가 강호를 떠나 초야에 은거했다는 오래된 전설들로부터 출발한다. 한 시대가 지나면 영웅은 사라지는 법. 그러나 영웅은 사라졌어도 그가 남긴 무림비급의 존재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 무림비급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김용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 등장하는 양과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영웅이다. 그는 전설의 무림비급을 간직한 신조(神雕)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은 후 온갖 역정을 헤치고 마침내 강호를 호령하는 영웅이 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무림비급이 아니라 새로 탄생한 영우에 모아지게 마련. 밤새워 책을 읽고 나면 양과의 흥미진진한 모험과 사랑에 대한 기억은 남아도 신조가 전수해준 무림비급이 예전의 영웅 독고구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기억하시라. 때로는 잊어버린 것, 혹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것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무협소설 마니아가 되어서 기억 속에 사라진 영웅 독고구패 이야기를 되살려보자. 특히 주의해서 떠올려야 하는 것은 검마 독고구패가 만들었다는 검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강호에 더 이상의 적수가 없게 되자 우리의 영웅은 자신이 사용했던 검 네 자루를 땅에 묻게 된다. 스무 살 이전에 사용했던 강하고 예리한 검, 서른 살 이전에 사용했던 자미연검(紫薇軟劍), 마흔 살 이전에 사용했던 날이 없고 무거운 중검(重劍), 마지막으로 날아갈 듯 가벼운 목검(木劍). 그가 이룬 검의 경지에 따라 사용하는 검의 종류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독고구패가 사용한 검의 순서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검의 수련 절차(죽도-목검-가검-진검)와는 정반대라는 점이다. 하지만 독고구패가 마흔 이후 도달한 궁극의 검을 알게 된다면 그런 역전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바로 검이 없이도(無劍) 검을 가진(有劍) 자를 이길 수 있는 경지가 그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술 연마가 아니라 내공 연마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무검의 경지야말로 최고의 무공이었던 것이다.


글쓰기에도 무검의 경지라는 것이 있다. 이인성의 『식물성의 저항』 같은 글을 읽다 보면 논리적 사유의 깊이나 문학적 감성의 넓이에 앞서 우선적으로 글쓴이의 심오한 내공이 느껴진다. 독특한 어휘나 특별한 지식이 동원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 안에는 읽는 자로 하여금 감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 그 감동의 정체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냥 그것을 무협소설의 용어를 빌어, 글쓰기 고수의 내공이 느껴진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훌륭한 글이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몇 해 동안 글쓰기를 가르치면서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기에 늘 엉뚱한 무협소설 이야기로 답을 대신한다. 무검의 경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달하고자 한 속뜻은 글을 쓰는 데 있어 재료나 기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고수의 친구 감동의 정체는?

사람이란 원래 아름다운 것을 봐야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맛있는 것을 먹어봐야 맛있음을 알게 되는 법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글쓰기 고수가 써놓은 감동적인 글과 친해지지 않는다면 감동이 뭔지를 깨달을 수 없고, 감동스러운 글을 쓸 수도 없다. 그러니 감칠맛 나게라도 감동과 교류를 해본 후에 다음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다음 글은 한 문학평론가가 문학에 대해 말한 감동적인 글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자신의 추억과 고뇌, 그리고 믿음을 절묘하게 배합시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거기에는 글쓰기 무림계의 최고수가 뿜어내는 절대 경지의 감동이 숨겨져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훌훌 털어버리시라. 그리고 감동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만 궁금해하면서 다 함께 글 속으로 한 번 빠져봅시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이 대목을 쓰려니까 갑자기 내 의식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음성으로 향한다. 겨울밤엔 고구마나 감, 그것이 아니면 하다 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벨과 카인의 얘기를,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수절 과부의 얘기를, 도적질하다가 벌을 받은 그녀의 친지 중의 한 사람 얘기를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하신다. 그때에 내가 느낀 공포와 아픔, 고통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아픔이나 고통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 『한국문학의 위상』, 김현, 문학과지성사, 1977


글쓰기 고수로 가는 길 : 왜 이 글이 감동적이라는 거지?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서 보니 아직도 감동의 바다에 빠지지 못한 사람이 여럿 눈에 띈다. 그 사람들의 얼굴 가득 담겨 있는 근심. 왜 나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첫술에 배부르기를 원하는 것이 오히려 욕심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김현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도 과연 이걸 읽고 감동을 체험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를 했더랬다. 문학이 어쩌고 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일단 고개부터 젓는 게 요즘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써먹지 못하는 문학을 써먹는다는 말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겠다. 억지로 먹은 음식은 체력 향상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현의 글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주는지에 대해서는 글쓰기 내공이 어느 정도 쌓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일단 여기서는 왜라는 질문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왜 사람들은 김현의 글이 감동적이라고 말을 할까?


쉬운 예부터 시작하자. 어느 TV 프로그램에 10년 넘게 남몰래 불우한 청소년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던 조순해 씨가 출연했다. 당연히 사회자는 언제부터 그 일을 시작했고, 왜 하게 되었는지를 물어볼 터. 질문을 받고 조순해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특별한 동기는 없었습니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 일을 시작하게 됐고, 일을 하다 보니 마음도 넉넉해지는 것 같아 지금까지 하게 된 거죠." 사회자 왈, "그러셨군요. 자기 한 몸 추스르며 살기도 힘겨운 세상인데,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쯤 되면 사회자나 방청객 모두 박수를 치게 된다. 짝! 짝! 짝!


몇 주 뒤 같은 프로그램에 비슷한 선행을 한 김착해 씨가 출연했다. 김착해 씨는 8년 넘게 남몰래 무의탁 노인들의 뒷바라지를 해왔다고 한다. 사회자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런데 김착해 씨는 조순해 씨와는 좀 다르다. 사회자가 질문을 하자 잠시 무너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 사회자 왈, "뭔가 사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머뭇거리던 김착해 씨가 드디어 말문을 연다. "제가 나쁜 놈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됐죠." 엥! 이건 또 무슨 소리. 나쁜 놈이라서 착한 일을 하게 되었다니. 사회자와 방청객 모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인다.


사연인즉, 젊은 시절 힘깨나 썼던 김착해 씨는 조직 생활을 하면서 나쁜 짓을 셀 수 없이 많이 했던 사람이었다. 감옥에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 일을 관둬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10년 전 감옥에 있을 때 일이다. 출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그에게 혼자 외로이 지내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서야 김착해 씨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김착해 씨의 마지막 말, "출소를 해서 알아보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시고 화장을 해서 보내드렸다고 하더군요. 어머니 유골을 뿌렸다는 강가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돌아가신 분께 아무리 죄송하다고 말해도 다 소용없죠. 8년이 아니라 80년 동안 이 일을 한다고 해도 저는 절대 용서를 받지 못할 놈입니다." 김착해 씨가 이 말을 하면서 어떤 표정이었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일. 사회자와 방청객 모두 숙연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는 김착해 씨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도 있다. 김착해 씨의 말을 듣고 감동을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조순해 씨와 김착해 씨의 차이를 알겠는가?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일을 했고 아름다운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순해 씨의 경우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에 반해 김착해 씨의 사연에는 사람들의 혼을 울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일러 감동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감동적이라는 것이지 김착해 씨가 조순해 씨보다 더 훌륭한 일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김현의 글로 돌아가 보자. 이제 그의 글이 왜 감동적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의 글에는 현학적 허세가 없다. 나 너희들보다 많이 아니까 내 말이 무조건 맞는 거야 하는 식의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지식의 전람 대신 김현은 자신의 어릴 적 경험과 문학에 대한 신념을 결합하는 글쓰기 전략을 선택했다. 어머니의 질문과 그 어머니에 대한 오래된 추억 사이에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절하게 오버랩시켰던 것이다.


그럼 정리해 보자. 김현의 글이 감동적인 것은 거기에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과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감동은 정반대에 숨겨져 있었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어릴 적 추억을 이용해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논리적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감동적인 글이란 그런 것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쳐 보일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앞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료나 기교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여러분도 틀림없이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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