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구의 북한 수학 여행기

   
임홍균
ǻ
신서&생명의숲
   
9000
2005�� 06��



>■ 책 소개
북한 이야기를 담은 창작동화.저자 임홍군은 북한에서 태어나 평양영화연극대학 창작과를 졸업하고, 북한군에서 오랫동안 군속작가로 근무하다 탈북했다. 이 작품은 그가 살아온북한을, 짱구라는 인물이 수학 여행을 하는 것으로 "북한의 실생활"을 엿보도록 꾸몄다. 개성, 평양, 함흥, 청진의 곳곳을 살피며 북한의 문화와사회를 둘러본다. 


※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는 논픽션 성격이 강하지만 문학의 형식상현실과 다르게 설정된 부분도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한다. 

&>■ 저자 임홍균
저자 임홍군은 북한에서 태어나 평양영화연극대학 창작과를 졸업하고, 북한군에서 오랫동안 군속작가로 근무하다탈북했다.


■ 차례
짱구가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떠나요


[개성에서 평양으로] 
봉순이와의 만남
남한 부자학생이다레! 
패널티킥이 11미터 벌차기? 
키 작은 북한군 
의무적으로 농사짓는 학생들 
용돈이 뭐가?
평양노랭이 
큰일 나려고 소파에 앉아? 
개성 평양간 급행열차 안에서 


[평양에서의 뜻깊은 나날들] 
평양은 공원속의 도시 
하루 세 기 쌀밥 먹는 게 소원! 
봉순이네 집은 평양 노래방 
북한에서 외국인은 구경거리 
오염이 안 된자연 관광지들 
"이메이"가 아니라 이메일 
남남북녀 
맛좋은 평양 옥류관 냉면 
평양 학생들의 환송회의 
학원이없는 천국 
공짜치료하는 병원 
태권도보다 격술이 인기 


[공업도시 함흥으로] 
"아바이"들은 살기힘들어 
숨 막히는 연기 냄새 
샹들리에가 무리등? 
평양과 함경도의 말다툼 
북한의 식당은 포장마차 
보상 대신사과하면 끝 


[국경도시 청진] 
괜찮은 자전거 타면 간부자녀 
뜻밖에 받은 응원 특별상 
북한의 불량배들 
청진시의 대학거리 
아! 두만강, 압록강


[긴 수학여행을 마치며] 
평양에서 열린통일 파티 
다음 수학여행을 약속하다




짱구의 북한 수학 여행기


개성에서 평양으로 - 평양 노랭이

평양으로 떠나기 전 장구와 봉순이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개성의 문화유산들을 돌아보기로 하였어요. 시원하게 트인 넓은 공터에 규모 있게 문화유적들을 복원한 유적지에는 관광 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어요. 그런데 여럿이 아니고 단 둘이 여행 중이 짱구와 봉순이가 유독 눈에 띄었는지, 유심히 바라보던 안내원 누나가 다가와서는 어디서 온 학생들이냐고 물었어요. 봉순이가 남한에서 온 학생이라며 짱구를 소개하자, 깜짝 놀란 안내원 누나는 남한 학생이 온 것은 처음이라며,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앞장섰어요. 예의바르고 인정이 풋풋한 한민족의 따뜻함이 다시 한번 느껴졌어요.


개성시 내성동 공원 안에 있는 높이가 7.94미터나 되는 돌로 만들어진 탑은 고려 초기의 국보급 석탑으로 웅장하기도 하면서 소박한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또 개성에는 단군릉이 세워져 있었는데, 정말 크고 웅장하며 부지도 넓었어요. 참관하러 온 학생들과 어른들도 많은 것이, 북한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전하는 데 적극적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어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한참 사찰을 돌아보는데, 학생들 무리 속에서 우리를 향해 문득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어요.


"야, 평양노랭이들이다래."


짱구는 분명 자신과 봉순이를 보고 하는 말은 줄 알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요.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봉순이는 그 학생들을 보고 눈을 흘겼어요. 평양시 학생들의 옷차림은 지방 학생들의 옷차림과 다르게 보이기에 그런다고 하네요. 정말 그 학생들과 우리는 옷 색깔이나 질에서 대번에 차이가 있어 보였어요. 봉순이만 해도 짱구와 동행하려고 특별히 맞춘 예쁜 학생복을 입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 학생들 옷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던 거죠.


"그럼 내가 평양학생이란 말이지? 그런데 노랭이는 무슨 말이야?" 그제야 영문을 알아차린 짱구는 싱긋 웃으며 물었어요.


"북한은 해방 이후 지역주의를 없애려고 노력해왔지. 그 정책으로 황해도 사람들을 함경도로, 평안도 사람들을 황해도나 자강도로, 또 함경도를 황해도나 평안도로 옮겨 섞여 살도록 하는 집단 이주 방식이었지. 그러니 북한에는 1970년부터 어느 지방이나 본 주민이란 말이 없어질 정도로, 각 지방은 각 도의 주민들이 혼합되어 사는 것으로 변했지 뭐야. 그런데 서로 거주나 여행의 자유를 제한 받다보니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간의 유대가 끊겨 타지방에서 외롭게 사는 주민들이 많게 되었지."


안내원 누나는 도중에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어요.


"그러니 어린 학생들은 잦은 이사로 지방 말씨에 익숙하지 못하고, 풍습이나 습관에도 차이가 있어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하지. 평양 학생이 함경도에 오면 약은 수를 잘 쓰는 평양노랭이가 왔다고 놀려대고, 함경도 학생이 평안도에 가면 함경도얄개가 왔다고 좀처럼 곁을 두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어. 개성을 비롯한 최남단 지방학생들에 대해서는 부채질을 해도 옆 사람에게 가는 것이 싫어서 부채를 세워서 자기 머리를 흔드는 천하깍쟁이라고 놀려댄다지 뭐야."


짱구는 안내원 누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아까 그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평양노랭이라 놀려대던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남한에서는 부자냐, 아니냐 하는 면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방이라고 서울학생들이 입는 옷을 못 입거나 하는 경우는 없는데, 북한에서는 한눈에도 평양과 지방의 차이가 옷을 통해서도 쉽게 구분이 간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짱구가 봉순이에게 그럼 지방학생들은 왜 평양학생들처럼 옷을 입을 수 없느냐고 물으니, 북한은 아직 물품이 부족해 우선 평양시에 먼저 공급하다보니 그렇다고 말합니다. 짱구는 북한도 어서 빨리 남한처럼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북한학생들이 질 좋은 옷을 입게 되길 간절히 빌었어요.



평양에서의 뜻깊은 나날들 - 어매이가 아니라 이메일

짱구는 집을 떠난 지가 벌써 10여 일이나 되었어요.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외지 생활을 해보니 집 식구들과 친구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지요. 남한 같으면 컴퓨터가 있는 곳에 가서 인터넷을 통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매일 소식을 전할 수도 있을 텐데, 북한은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웠어요.


짱구는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봉순이에게 말했지만, 봉순이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해 답답하기만 했어요. 짱구가 컴퓨터의 세계에 대해 대충 설명해주며, 어느 곳이건 이메일을 이용하면 쉽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했더니, 봉순이는 엉뚱한 말만 하네요.


"뭐, 어매이?"

"어매이가 아니라 이메일!"


짱구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말해도 봉순이는 그저 눈만 깜빡거릴 뿐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어쩌면 봉순이는 컴퓨터를 구경만 해봤지 직접 다루어보진 못했다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요. 짱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디서 컴퓨터를 보았느냐고 물었어요. 봉순이의 말로는 평양학생궁전에는 컴퓨터가 있다고 해요. 짱구는 평양학생궁전도 구경할 겸 가보기로 했어요.


봉순이와 같이 찾아간 평양학생소년궁전은 1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오래되어 낡기는 했지만, 그 크기가 웅장하고 시설이 대단한 건물이었어요. 또한 평양 학생궁전보다 더 현대적인 만경대학생소년궁전도 있다는데, 아쉽게도 짱구는 가보지 못했어요. 아무튼 오래 전부터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런 큰 건물들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감격적이었어요. 이 학생소년궁전에서는 평양시의 소학교와 고등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가운데, 각 분야의 인재를 뽑아 소조(과외클럽)를 운영한다고 봉순이가 설명을 하네요.


짱구는 여러 학습실과 연습실들을 돌아보며, 북한 어린이들 중에도 정말 우수한 인재들이 엄청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물리나 화학 실험실에서는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이 아주 진지한 게, 꼭 뭔가를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어요. 그들의 눈망울에서는 배움을 향한 불타는 듯한 열망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짱구의 눈에도 보였어요.


특히 감명을 받은 성악이나, 무용, 악기 연습실에서 열심히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었어요. 성악을 하는 학생은 목청이 대단히 좋은 것  같았고, 악기를 다루는 학생도 기량이 매우 뛰어나 보였어요. 북한 어린이들이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많다는 말이 사실이 것 같았어요.


짱구는 봉순이의 안내에 따라 컴퓨터가 있는 소조방(클럽방)으로 갔어요. 컴퓨터 방에는 십여 대의 컴퓨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학생들은 컴퓨터로 워드나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짱구는 비어 있는 한 대로 다가가 얼른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어요. 그런데 모니터에 인터넷이란 아이콘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짱구는 혹시나 해서 옆에 앉아 있는 학생의 모니터를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인터넷 아이콘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이상하여 짱구는 모두에게 물어 보았지만, 학생들은 인터넷이란 말 자체를 모르는 듯 했어요. 짱구의 물음에 답변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학생들을 보는 봉순이도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 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보고 있던 봉순이가 답답했는지 어느 결에 컴퓨터 소조를 담당하신다는 남자 선생님을 모시고 왔어요. 남한에서 온 짱구라고 인사드리자, 선생님은 반갑게 인사를 받으셨지만, 사연을 들으시고는 헛기침만 하셨어요. 그리고는 이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짱구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어요.


"북한은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지 뭐야. 그래서 거의 모든 북한 아이들은 인터넷이란 말 자체도 잘 모르고 더욱이 이메일이란 것은 이용해 본 적도 없단다."


선생님은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을 이으셨어요.


"북한의 통신수단은 아직 극히 전문화된 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음성통신에만 의존하고 있지. 그러니 통신 방법은 주로 편지를 많이 이용하지 뭐야. 그러나 전화란 것도 정부의 정책이나 지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만 쓰고 있다 보니, 주민들의 생활엔 큰 의미가 없지. 그래서 주민들은 전화를 긴급연락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단 말야. 여기서는 전화도 그나마 군수 정도 되는 간부들 집에만 설치되어 있고, 일반가정에는 아예 없어. 그러니 주민들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밖에 없지. 우리가 언제나 남한처럼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정말 우리도 그 날이 기대된단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오늘날 세계1위로 인정받는 남한의 인터넷 통신을 북에서 수용한다면, 단숨에 북한 주민들에게 활용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았어요. 짱구는 자신이 서운해 할까봐 근심하는 봉순이에게 북한도 남한처럼 인터넷망이 구축되어 서로 교류하는 날도 멀지 않았을 거라고 위로하며, 평양학생궁전을 나섰어요.



공업도시 함흥으로 - 아바이들은 살기 힘들어

이제 짱구는 평양 견학을 끝내고, 함흥시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마침, 봉순이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는 직장에서 함흥시로 이른 새벽에 물고기를 실으러 가는 차가 있어, 짱구와 봉순이는 그 화물차를 얻어 타기로 했어요. 평양에서 함흥까지는 트럭으로 무려 15기간이나 가야 하는 먼 거리였지요.


짱구와 봉순이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어요. 북한의 도로들은 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방도로들이 비포장도로였기 때문이지요. 먼지 날리는 트럭 짐칸에서 더위와 함께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래도 짱구는 남자라 꾹 참았지만, 봉순이는 멀미까지 심하게 했어요. 그러나 파김치가 되긴 짱구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저녁 7시 무렵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도착한 목적지는 함흥시 내의 봉순이 할아버지 댁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어요.


북한에서 제일 큰 공업도시인 함흥은 말 그대로 정말 큰 도시 같았어요. 사방이 온통 커다란 굴뚝 공장이고. 거리에도 평양과는 달리 노동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어요. 특징이라면 북쪽 지방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억양에서 여기가 TV에서 보던 함경도로구나 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함흥사람들은 첫마디부터 힘을 주어 어딜 갔댔소?, 여기옵소!하며 마지막 끝머리엔 꼭 소를 붙였어요. 또 아바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할아버지를 존대해 부르는 함경도 사투리였지요. 아바이라는 말이 남한 사람들이 알고 있기는 평안도가 아닌 함경도의 사투리였다는 사실을 아마도 잘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또 함경도 사람들은 할머니를 아매라고 하네요. 평양 쪽이나 개성 쪽에서는 할아버지를 할아바지로, 할머니는 할마니로 발음하는데, 평양 쪽과 달리 함흥에서는 너무 사투리가 진하고 아바이, 아매하니 짱구는 꼭 무슨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동차에서 내리니 봉순이의 할아버지께서 마중 나와 계셨어요. 봉순이가 달려가 인사를 드리곤 짱구를 소개했어요.


"할아버지, 남한에서 온 짱구예요."

"잉? 짱구? 남한에서 왔소? 반갑소!"


할아버지께서는 짱구가 남한에서 왔다는 소리에 부담이 가시는지 말씀을 놓지 못하시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함흥시에는 버스도 없고, 무궤도 전차만 다니고 있어 일행은 전차를 타고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60세가 좀 넘으셨다고 하는데, 짱구가 보기에는 연세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어요.


북한에 와보니 일반적으로 북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연세가 남한보다 10년 정도는 더 들어 보이셨어요. 그러니 평균 수명도 남한보다 7년 정도는 짧다고 하는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과도한 육체 노동으로 인한 조로 현상(빨리 늙은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궤도 전차에 오르니 평양에서도 그랬지만 이상하게도 남한과는 달리 노인이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다로 지정해 놓은 좌석이 없었어요. 짱구는 비단 전차에서뿐만 아니라 공공장소를 비롯한 북한 어디에서도, 따로 노인좌석을 지정해 놓은 것은 본 적이 없었어요. 국가가 노인들을 공경하도록 사회적으로 보호를 하지 않고 있는 점이 조금 섭섭했어요.


그러니 전차 안에 꽉 들어찬 사람들 가운데는 서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적잖게 보였어요. 그런데도 앉아있는 학생들은 노인 분들을 외면하고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들도 분명 나름대로 도덕과 교양교육을 받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자마자 봉순이에게 그 까닭을 물었어요. 물론 남한에서도 경로석이 지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이 뻔뻔하게 차지하고 앉아 양보를 하지 않는 것을 몇 번 보아온 짱구이지만 말입니다.


봉순이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어요.


"지금 북한은 먹고살기가 힘들다 보니 인심이 더욱 각박해져서 도덕 같은 것은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지 뭐야. 돌아가는 유행말로 도덕은 팔아먹었다 하가든."


그러자 곁에서 짱구와 봉순이의 말을 듣고 계시던 봉순이 할아버지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이제는 짱구가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괜찮다. 우리 노인들은 전에는 참 대접받으며 살아왔지. 그러나 지금은 사회분위기가 그러하니 대접받을 생각은 이미 다 버렸어."


그러시면서 허허 웃으시는데, 짱구가 보기에 그 웃음 속에는 왠지 씁쓸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시면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어요.


"90년대 중반부터 경제사정이 더 어려워지다 보니 나라에서는 노인들에게 베풀던 사회보장체계를 중단하다시피 하였지. 그 바람에 많은 노인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고 말았어. 이젠 노인들도 일을 하거나, 아니면 각자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하는 실정이야. 그런데 기운이 모자라니 그냥 앉아서 속구무책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


짱구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니 북한의 노인 분들이 참 힘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 한민족의 품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북한사람들임을 느껴본 짱구이기에,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예의바른 한민족으로 거듭날 것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국경도시 청진- 청진시의 대학거리

짱구 일행은 다시 기분을 전환하며 대학거리를 구경하기로 했어요. 청진시에는 아시아에 하나밖에 없다는 광산금속대학을 비롯해 각종 대학들이 많다고 안내원 누나들이 말했거든요. 민가에는 서울의 신촌 대학거리처럼 그런 모양일까 하고 궁금했어요. 하지만, 막상 당도해보니 짱구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틀렸어요. 남한처럼 대학거리다운 활기찬 모습이나 음식점과 문화시설들이 하나도 없는 게 별 특징도 없이 그냥 일반주민들이 사는 거리와 비슷했습니다. 짱구는 내색은 안했지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대학생들이 뭘 사먹을 곳도, 담소를 나눌만한 문화공간도 없이 보였거든요.


북한 대학생 형, 누나들의 복장 형태는 모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짱구가 보기엔 그게 참 어색해 보였어요. 지나가는 대학생들을 쳐다보던 한 안내원 누나는 자신도 여기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곳 대학 부근 주민들이 대학생들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내원 누나가 말을 이었어요.


"이곳 대학생들은 불쌍하지. 자신들의 먹을거리와 난방을 위해 인근에서 어쩔 수 없이 음식이나 땔감을 도둑질 할 수밖에 없가든. 아마 지금도 이곳 대학생들에게 대학생활 중 제일 힘든 게 뭐냐고 물으면 모두 배고픔이라고 할 기야. 이것은 대학 기숙사에서 배식하는 식사의 양이 아주 형편없이 적기 때문이지. 허기로 오랜 시간 책을 읽다보면 눈앞이 흐려져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공부를 포기하기 일쑤지. 나 역시 그 당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그 안내원 누나는 힘들었던 대학생활을 회고하는 듯 했어요. 그 누나의 계속된 말로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학생들은 당번을 정해서 교대로 주변 민가로 먹을거리 사냥(?)을 나선다고 해요. 하기야 한참 먹을 나이인 대학생 형, 누나들이 겪는 배고픔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짱구로선 헤아릴 수 없었지만 대충 이해는 갔어요. 대학생들은 주민들이 애써 담가 당에 파묻어 놓은 김치까지도 찾아내어 몰래 꺼내어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치만 쭉쭉 찢어먹는 김치추렴 맛을 모르는 학생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아니다라는 웃지 못할 말이 돌 정도라고 하네요.


이 때문에 대학주변 마을들은 김치를 지키느라 밤에 김치움에 열쇠를 두세 개씩 달고도 합심해 경비를 서느라 야단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열 명이 한 명 도둑 못 지킨다고 대학생들 때문에 주민들이 김치를 많이 담그고도 거의 먹어보지를 못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그 누나는 남의 말하듯 덤덤하게 이야기하네요.


또 추운 겨울에는 기숙사에 불을 지필 나무나 석탄 때문에 민가옥을 자주 침범하기도 한 대요. 그래서 북한에서 제일 살기가 안 좋은 구역은 예외 없이 대학가 주변들이라 소문이 났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 짱구로서는 참으로 슬픈 일들이 아닐 수 없었어요. 안내원 누나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짱구에게 남한의 대학생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합니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어요. 북한에서는 주위의 여론과 시선을 피한 남몰래 이성교제가 위주라는 것이었어요.


짱구는 자기가 아는 만큼 남한에 있는 대학가의 풍요롭고 화려한 대학생 형, 누나들의 거침없는 연애하는 모습에 대해 나름대로 상세하게 말해주었어요. 그러자 부러운 듯 안내원 누나들은 물론이고, 봉순이까지도 그런 세상이 있네? 해가며 짱구의 말 한마디에 놀라다가, 웃다가 아주 재미있게 듣고는 아직 모자란 듯 더 이야기 해달라고 짱구를 조릅니다. 그러나 짱구는 더 이상 자기가 아는 지식이 없어 그냥 웃기만 하고 있자, 불쑥 한 안내원 누나가 물었어요.


"짱구야, 남한에서는 누가 일등 신랑감이래?" 어린 짱구가 그런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어요.


"북한에서는 누가 일등 신랑감이래요?" 오히려 짱구가 안내원 누나에게 물었어요.


이에 안내원 누나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북한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어요. 북한은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이 1.3배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지방을 가보아도 남자 장애인은 거의가 장가를 가지만, 멀쩡한 여자들은 시집가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하네요. 이처럼 북한에서는 노처녀는 많지만, 노총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짱구가 듣기에 놀라운 것은 북한여성들도 남자 권위주의가 우선시 되는 북한 사회풍조에서 시집살이가 힘이 들어 결혼을 기피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외로 독신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하네요. 북한에서 일등 신랑감으로는 전에는 예술인, 대학 졸업생, 공무원들을 꼽았지만, 지금은 농촌 종사자, 무역일꾼, 식료품 다루는 회사원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슬프게도 식량난을 이겨 낼 먹을거리 해결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예쁘게 생긴 안내원 누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듯 말을 이었어요.


"전에는 예쁘게 생긴 도시 처녀들이 인기였는데 지금은 농촌 여자, 아니면 그 연고자들이 남자들의 선호대상으로 되고 있어. 전 같으면 처녀들이 선을 볼 때 총각들이 대학에 다닌다면 전도가 유망하다며 예 하던 것을 지금은 아니요!라고 거부하지. 미쳤어?,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앉아서 공부나 하고 있단 말이야. 오늘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라고 말들을 하지. 그러다보니 학생들도 대학에 가기를 희망하지 않고 공부할 생각을 도통 안 해." "……."


짱구는 그 안내원 누나의 말에 말문이 막혔어요.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북한주민들이 어린 짱구가 보기에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을 쌓아야 할 학생들이 먹을거리 문제로 공부를 기피한다는 게 또한 더욱 가슴이 아팠고요.


"통일이,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할 텐데…!" 짱구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어요.



긴 수학여행을 마치며 - 다음 여행을 약속하다

남북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앞에 짱구와 봉순이가 마주섰습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봉순이는 벌써부터 흐느껴 울었고, 짱구도 그것은 마찬가지랍니다. 지금 이 순간, 남북 분단이 짱구와 봉순이의 어린 가슴에 너무나 큰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한민족, 같은 동포이면서도 이렇게 나라가 갈라져 우리 세대에까지 이런 비극을 주는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짱구와 봉순이에겐 앞날의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도 마냥 울고 있는 봉순이를 짱구는 어깨로 감싸 안고, 꼭 다시 올게! 꼭 다시 올께!를 다짐하고 다짐하며 이를 악 물고 다시 돌아섭니다.


"봉순아, 건강하게 열심히 공부해 다시 만나자!"


혼자 중얼거리며 판문점을 넘어오는 짱구의 시야에 남한의 풍경들이 새롭게 비쳐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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