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ǻ
행성B잎새
   
22000
2014�� 08��



■ 책 소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비교 분석을 통해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비극적인 상황에 많은 이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신을 믿는 형제 종교이자 세계적인 거대 종교의 대표격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내세우는 사랑과 자비, 복음과 구원과는 다르게도, 작금의 현실은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극의 아이러니, 그 끝은 어디인가?

 

『세 종교 이야기』는 전작 『유대인 이야기』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홍익희의 새 저서로, 세 종교ㅡ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ㅡ의 본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밝혀내고 있다. 먼저 세 종교의 시작을 연 인물인 아브라함의 뿌리가 되는 고대 수메르 문명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로마 제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치러진 십자군전쟁과 유대교 박해가 행해진 중세 암흑기를 거쳐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 분쟁까지 전 방위적으로 세계사를 아우른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신학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대신, 세 종교가 다 같이 믿는 하나님의 뜻에 누가 더 ‘합당한’ 길을 갈 수 있는지 살피고, 궁극적으로 그 합당함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임을 전한다. 종교가 가진 본질인 평화와 공존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미 있는 메시지는 세 종교 간 갈등과 대립이 치열한 이 시대에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 저자 홍익희
저자 홍익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1978년 KOTRA에 입사했다. 이후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뉴욕, 파나마, 멕시코, 경남무역관을 거쳐 밀라노 무역관장을 끝으로 2010년 정년퇴직했다. 32년간의 KOTRA 재직 시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유대인을 눈여겨볼 기회를 가졌던 그는 무엇이 그들을 우수하게 만들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에서부터 현대의 월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궤적을 경제사적 관점으로 꿰뚫게 되었다. 그 결과물로 책 10권 분량의 ‘유대인 경제사’ 시리즈를 완성했으며, 그 축약본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른 『유대인 이야기』다. 최근에는 유대인 경제사와 한 민족 경제사 등을 다룬 전자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는 배재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21세기 초 금융위기의 진실』『유대인, 그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유대인 이야기』『유대인 창의성의 비밀』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 세 종교의 기원, 아브라함의 시대
수메르 문명의 특징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수메르 문명 당시의 문란했던 사회상

 

2 유대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신과 맺은 영원한 계약
출애굽기

 

3 유대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예루살렘, 성지가 되다
북이스라엘 왕국, 우상숭배로 멸망하다
1차 이산, 유대인 방랑 시대의 시작
유대교의 변화
유대인의 귀환
유대교를 바로 세우다
유대교 개혁과 복지제도
2차 이산

§1 유대인의 경전, 《모세오경》
§2 현대 유대교의 세 흐름

 

4 기독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예수의 생애와 기독교의 탄생

 

5 기독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열두 제자의 활약
원시 기독교 사상의 변화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초기 기독교
기독교, 로마 제국의 국교로
가톨릭의 분열과 종교 개혁
유대교 입장에서 바라본 예수

 

6 이슬람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이슬람교의 출현
이슬람교 경전

 

7 이슬람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이슬람교의 팽창

§3 이슬람교 종파들

 

8 세 종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같은 점
다른 점

 

9 반목과 갈등의 역사
로마 제국의 유대인 박해
이슬람교의 유대인 박해
가톨릭의 이슬람교와 유대인 박해
유대인이 박해를 많이 받은 이유
나치의 반유대주의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이후의 팔레스타인 분쟁사

§4 세계 종교인 분포

 

맺음말

참고 문헌
찾아보기 

 




세 종교 이야기


세 종교의 기원, 아브라함의 시대

수메르 문명의 특징

수메르 신화, 모든 신화의 근본이 되다

숫자 체계와 도량형은 십이진법을 사용했다.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라 십진법 사용이 훨씬 쉬웠을 텐데 그들은 십이진법을 선택했다. 그 까닭은 12라는 수가 성스러운 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태양이 매년 통과하는 열두 종류의 별자리 곧 십이궁도의 수였다.


『구약성서』에는 열두 지파가 등장하고, 예수에게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지만 올림포스의 원탁회의에는 열두 명의 신들만이 참석했다. 인도와 이집트의 신들도 주요한 신들만을 간추리면 항상 열두 명이다. 우리 동양의 십이간지 역시 열두 종류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연구한 결과, 이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신들의 계보와 관계가 결국은 수메르 점토판에 기록된 신들의 계보와 정확히 일치했다.


수메르 문명 당시의 문란했던 사회상

새로운 세상이 준비되다

수메르 문명 당시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은 타락과 부패와 음란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모든 여성이 상품화되어 신부조차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또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우상숭배와 음란이 그 도를 지나쳐 영적으로 회복되기에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다신교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 결과 하느님이 타락한 세상에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의 땅 광야로 보내게 된다.



유대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신과 맺은 영원한 계약

노아의 큰아들에게서 셈족이 나오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아담으로부터 10대가 흐르자 세상은 타락했다. 하느님은 그 무렵 타락한 세상을 물로 씻어 내면서 노아를 선택해 그 가족을 구해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다시 인류의 조상이 된다. 큰아들 셈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가 이들로부터 중동아시아계가 나왔다. 히브라, 시리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그리고 몽골 족 등이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셈 족이다. 이후 10대가 지나가 이들 자손들이 건설한 세상은 또다시 타락했다. 특히 수메르 문명이 너무 물질적으로 발달하다 보니 우상숭배와 음란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하느님은 예전에 노아를 선택해 구했듯이 아브라함을 선택해 순수한 광야로 보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우상숭배와 음란의 도시를 떠나 순수한 광야 가나안으로 감으로써 아브라함의 유일신 역사는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 75세였다. 이 시대에 다른 민족들은 다신교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4천여 년 전 한 노인의 결단이 오늘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낳았다.


이스라엘의 유래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이때 꿈에 하느님이 나타났다. 야곱은 꿈에 하느님과 씨름했다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씨름하다는 듯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국호는 여기서 유래했다. 이것이 유대인 개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다.


파라오의 유대인 말살정책

테베의 왕 아모스는 기원전 1580년경에 마침내 힉소스 족을 무찌르고 새로운 왕조를 연다. 그리고 남아 있던 힉소스 족과 그들이 불러들인 다른 민족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이집트 노예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대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예루살렘, 성지가 되다

가나안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P>이집트에서 돌아온 유대 민족은 그 무렵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던 이방 족속들을 힘겹게 정복한 후 약 8백여 년간 문명의 교차로이자 교통 요충지인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그 결과 유동 인구가 증가하면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게 되었다. 여러 민족과 함께 사는 과정에서 인종이 섞이기도 했으나 하느님과의 약속을 믿으며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누구나 유대교를 믿으면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1차 이산, 유대인 방랑 시대의 시작

기나긴 유대인 방랑 시대의 시작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으며 사는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적 갈등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더욱 참기 어려워했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성 밖으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때 지중해 권역의 페니키아 식민지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이산이다.


유대교를 바로 세우다

유대교의 아버지, 에스라

바빌론 유대인들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에스라와 함께 온 유대인들은 1천 8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금 100달란트와 은 750달란트 등 큰돈을 갖고 돌아왔다. 기원전 444년경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돌아왔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실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마디로 종교 생활이 엉망이었다. 그는 뒤에 온 느헤미야와 힘을 합쳐 유대 사회의 개혁에 앞장선다.


개혁의 핵심은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 『토라』의 편집 완성, 모세 율법의 준수였다. 먼저 유대인의 정체성 확립과 유대교 부흥을 위해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인을 모두 파기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조치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이나 당시 상황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다지려는 의도는 다시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지켜감으로써 시련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 은혜를 받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낯선 땅에서 낯선 존재로 박해를 받는다는 주제는 유대인에게 시대를 초월해 되풀이된다. 이는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거쳐야 할 일종의 사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고난과 수치의 역사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영광을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


2차 이산

알렉산더, 유다 왕국을 점령하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한다. 유다 왕국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위협과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충절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해 환대를 받았다. 이로써 에스라와 느헤미야 체제가 이끌었던 유다 왕국은 이 일대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유대는 그리스의 속국이 된다.


유대인, 헬레니즘 문화에 빠지다

이산 유대인은 생업 때문에 그리스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유대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을 수가 없어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최고 업적, 70인 역 『성경』

그리스어로 출간된 『성경』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평상시에 유대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던 이교도들까지 흡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이교도 개종자가 나와 유대교인이 되었다.



기독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예수의 생애와 기독교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

기원전 4세기 예수가 탄생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예수라 하며 야훼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다

성장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설교를 하며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하느님 가르침의 본질인 사랑과 박애와 평등을 부르짖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느님의 축복은 유대인에게만 유효했다. 그리고 사람이 병들고 어려운 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뒤집었다. 그가 말한 복음은 유대인이건 아니건,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신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종교는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죄 진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나 죄진 사람도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했다.



기독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열두 제자의 활약

성령 강림

예수는 부활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하다 승천했다. 그리고 승천한 뒤 열흘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다. 이때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각국에 퍼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들어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세례를 받고 제자로 합류했다. 이들은 사유 재산을 처분하고 이를 모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 신앙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이 공동체가 점점 커져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가 성립되었다.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초기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진 이유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에 오랜 기간 사이좋게 예배를 같이 보았다. 초기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존재했다. 하지만 로마와 3차에 걸친 전쟁 막바지에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인들이 집단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탈출로 목숨을 연명한 이들의 행동은 유대인들에게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나사렛파를 비겁한 배신자들로 여겼다.


기독교,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황제, 직접 교회를 다스리다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호의 아래 세력을 키워 나갔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후원하면서 한편으로 교회의 문제에 최고 권위를 가진 자로 자처했다. 급기야 황제 자신이 교회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교회에 보내는 모든 공문서에는 가톨릭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2세기부터 이단이나 분열되어 떨어져 나간 무리와 구분해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가톨릭이라 불렀다.


유대교 박해의 본격 시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대교가 해롭다고 판단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이제 예수의 죽음에 대해 로마인들을 비난하기 어렵게 되어 그 화살이 너무나도 쉽게 유대인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리스도교 후손들은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가톨릭의 분열과 종교 개혁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열

730년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며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성상을 게르만 족에 대한 포교에 이용했던 로마 교황청은 이에 반발했다. 그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했고, 그것이 성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로마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해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1054년 교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로마 가톨릭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분리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특히 로마 교회가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정교회는 이를 반대한다. 이로써 하나의 교회에서 정교회와 로마 교회로 분리된 것이다. 정교회는 자신들이야말로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정통 기독교라는 뜻이다.


종교개혁의 발생

종교개혁은 1517년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독일의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 시작됐다. 그는 돈을 주고 사는 면죄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했다. 루터는 신부가 결혼할 것을 권장했으며, 그 자신도 결혼했다. 종교개혁운동 결과, 기독교는 개신교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구분되어 발전해 오고 있다.



이슬람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이슬람교의 출현

알라의 계시

무함마드는 40세인 610년 9월 히라 산 동굴에서 사색하며 진리를 찾고 있을 때 알라의 첫 계시를 받는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읽어라, 창조주인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라는 말씀이었다. 문맹이던 그가 하느님의 메시지인 『코란』을 받아서 외웠다. 그 뒤 그는 쉰두 살이 될 때까지 계속 환상을 보며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가 외운 것을 그의 제자들이 기록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코란』이다.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마지막 성경인 『코란』을 계시받아 이슬람교를 인류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선택된 최후의 예언자였다.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을 모두 예언자로서 존경하는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무함마드는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알려진 것뿐이라는 것이 이슬람교의 주장이다.


이슬람, 정교일치의 강력한 국가로

이슬람 사회는 근원적으로 정교일치의 신정체제 사회다. 종교가 곧 사회와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코란』은 신에 대한 복종과 현세의 통치자에 대한 복종을 동시에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보다는 이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라는 말보다 무슬림이라 불리기를 바란다.


무함마드, 유대교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변하다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무함마드를 거부했다. 그들의 신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경』에 관한 무함마드의 무지를 비웃었다. 유대교에 근거를 둔 무함마드의 종교를 바로 그 유대인들이 무시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의 냉대에 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교에 대한 종교적 반격을 시작했다. 우선 예루살렘이 아닌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624년 바드르 전투 후에는 1월 10일에 하던 단식을 라마단(9월) 금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대교의 종교적 역사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나 기독교인이 아닌 순수한 유일신을 믿는 성도였으며,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앙이 바로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만이 원래의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를 복원했다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이슬람교를 아랍의 민족감정과 전통 위에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교는 어떻게 종교로 자리 잡았나?

이슬람교 종파들

종파 분열의 역사

서기 632년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이슬람 세계는 위기에 직면한다.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데다 후계자 선정도 하지 않은 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이라는 화두가 이후 이슬람교 역사를 지배하게 된다. 무함마드 사후 후계 구도는 피로 얼룩졌고, 그에 따른 갈등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수니파는 무함마드 이후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트만, 알리 이븐 아비의 4대 칼리프와 이후 칼리프들의 정통성을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시아파의 경우 그들 가운데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만을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한다. 칼리프의 자격 요건에서도 서로 견해 차이가 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어도 그의 부족인 쿠라이시 족 출신이라면 칼리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 반면, 시아파는 칼리프의 정통성은 무함마드의 혈통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종파 간 견해 차이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알리가 암살당하고, 이후 후세인 알 리가 공격당해 그 일가가 괴멸되었다. 이때 무함마드의 외가 혈통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시아파는 정식으로 수니파로부터 분파했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이다.



세 종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같은 점

유일신

세 종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라는 점이다. 원래 이 세 종교는 하나다. 인류 최초로 유일신을 믿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세 종교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다른 점

예수에 대한 관점

기독교는 예수를 삼위일체설에 입각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라고 믿는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단지 하느님이 보낸 선지자(예언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유대교의 일파를 이끌다 순교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예수를 이샤라고 부르는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과 기적을 행한 사실은 믿는다. 무슬림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해 신이 보낸 중요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다만 이슬람교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 종교를 계승했으며 이스라엘의 자손인 무함마드만이 참 선지자라 믿는다.


구원에 대한 견해

기독교는 우리 대신 십자가의 피로 속죄하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대교는 하느님이 준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이교도들과의 싸움에서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정리하면,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세 종교의 선교 활동

유대교에는 선교 활동이 없다. 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유대교를 믿게 하려고 이방인에게 선교 활동은 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민족 종교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자기 종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한다.


서양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이슬람교를 전파했다고 선전해 왔다. 오랫동안 이슬람교를 호전적인 종교인양 묘사하면서 이슬람교의 폭력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1천 4백 년의 이슬람교 역사에서 이슬람교 공동체는 대부분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 왔다. 십자군 원정에서처럼 서방과의 충돌에서 침략자는 거의 서양이었다.



반복과 갈등의 역사

나치의 반유대주의

히틀러, 유대인은 곧 좌익이라는 등식 만들어

히틀러 집권 시기 교황 비오 11세는 공산주의 혁명과 확산 뒤에는 이를 조종하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보았다. 히틀러에게 이론상 빌미는 레닌과 독일 내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이 제공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 독일혁명은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점에 착안해 히틀러는 이를 아예 유대인은 좌익이라는 공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전쟁

영국의 이중 플레이

1차 대전 중 영국은 아랍 국가들을 끌어들여 독일의 공격력을 분산시키려고 아랍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맥마흔 선언을 발표했다. 문제는 영국이 유대인의 힘도 필요해 유대인들이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옛 유대인의 땅에 이스라엘 건국도 약속하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아랍과 유대인들과 체결한 이중 약속으로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런 와중에 결국 1948년 이스라엘은 국가를 선포한다.


1차 중동 전쟁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건국 선언한 그날 밤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아랍 군의 침입이 시작된다. 이로써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다섯 개국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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