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보는 칭찬 이야기

   
김진국
ǻ
21세기북스
   
10000
2004�� 09��



■ 책 소개
성경은 "칭찬"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칭찬거리들로 가득찬 책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첫째날 궁창을 나눈 이래, 창조 작업이 끝날 때마다 하신 말씀. “보시기에좋았더라.” 현직 목사(춘천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인 저자는, 성경 속 칭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아의 기다림,욥의 인내, 개미의 지혜, 다윗의 정직, 세례 요한의 겸손, 삭개오의 열정까지, 성경 신구약 속에는 하나님께 칭찬 받은 수많은 이들의 면모가소개되고 있으며, 성경은 이들을 통해, 우리 삶이 진정 추구해야 할 덕목은 물론, 사람은 서로 칭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 저자 김진국
어릴 적에는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것이 글짓기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글쟁이가 되었다. 역시 세상만사는 뜻대로 안 되나 보다. 청년 때는 연극이 좋아서 혜화동을 많이 기웃거렸다.하지만 연기나 연출을 꿈꾸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다 하지 않고도 극작가가 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가능할 것 같았기때문이다. 무대를 상정해 놓고 혼자서 모든 상상을 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극작가가 제격이었다. 하지만 생각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기독교교육협회에서 실시한 문예 현상모집에 희곡 ‘꿈을 이룬 어린나귀’를 출품했는데 운 좋게 당선이 되었다. 그때부터 글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애초 희곡을 써 봐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출판사들의요구에 따라 글을 쓰다 보니 에세이, 우화, 단편소설 등 여러 장르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몇 권의 책도 나오게 되었다. 결국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도 내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책들이 『목사님 한잔 받으시죠』『예수님은 못 말려』『성경 속의라이벌』『안녕하세요? 예수님』 등이 있다. 


지금은 춘천에 둥지를 틀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하와이‘크리스챤신문’ 등에 연재를 하면서 두루 글 작업도 하고 있다. 


■ 차례
목차 
서문 
프롤로그 - 태초에칭찬을 창조하시니라 


1부 성경 속 칭찬 파노라마 
개미 그들의 사는법
욥 끝까지 참다
노아 120년의 기다림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
다니엘 사자와 놀다
다윗 정직했던살인자
에바브로디도 죽도록 충성하다
장군 나아만 일곱 번 목욕하다
모세 지옥에 가더라도…
백부장 고넬료의 경건
솔로몬천 번의 제사로 지혜를 구하다
요셉 꿈은 이루어졌다 


2부 예수의 칭찬이야기 
까마귀와 백합화꽃
동심,어린이의 마음
두 여인 이야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삭개오의 열정
요나의 표적
백부장의 믿음
가나안 여인이야기 


3부 성경에서 배우는 칭찬법 
인정하고받아들여라
반기고 기뻐하라
누군지 몰라도 칭찬하라
칭찬할 땐 칭찬으로 책망할 땐 책망으로
작은 것을 칭찬하라
약점을칭찬하라
칭찬의 선순환
대중의 칭찬을 조심하라
라이벌을 칭찬하라
깨닫고 감탄하라
족보의 칭찬을 기억하라
미래를칭찬하라
가르침과 칭찬
기록되었으되… 




성경으로 보는 칭찬 이야기


성경 속 칭찬 파노라마
개미 그들의 사는 법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 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둔다.(잠언 6:6-8)


- 개미와 싸우다
인도의 한 철학 학파에서는 길을 다닐 때 마스크를 끼고 바닥을 쓸 수 있는 술을 달고 다닌다고 한다.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물을 살해할까 염려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힘없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고귀한 시각이다. 작은 생명체로부터 경외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한다.


오래 전에 동원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의 일이다. 사격장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모래 위로 개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개미들을 보면서 성경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유심히 개미를 관찰해 보기 시작했다.


개미를 관찰한 결과 나는 위대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개미들의 걸음걸이가 거의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천적이 나타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평상시에는 보폭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개미가 더 부지런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빨리 걷는 것이 지혜로워지는 비결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도대체 개미가 왜 지혜롭다는 것인지 정말 모를 일이다.


예비군 교육 시간이 끝나갈 무렵, 불쑥 장난기가 발동했다. ‘관찰은 그만두고 개미지옥을 만들자.’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개미귀신’이라는 벌레가 있다. 개미귀신은 사막지대에 사는데 모래를 원추형으로 파서 꼭짓점에 깊숙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개미가 함정에 걸려들면 여지없이 잡아 먹어 버린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그와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기에 비록 개미귀신은 없지만 개미지옥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몇 마리의 개미가 지나갔지만 좀처럼 함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개미 한 마리를 잡아 억지로 개미지옥에 집어넣었다. 개미는 살아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마침내 개미는 올라오는 방법을 터득해 냈는데, 그 방법이란 것이 별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올라가는 것이 방법이었다. 미끄러지면 다시 도전하고 또 미끄러지면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기필코 올라가게 될 것이다. 개미의 지칠 줄 모르는 투지는 훌륭했지만 나는 그 녀석을 또다시 개미지옥 속으로 밀어넣고 또 밀어넣었다. 하지만 개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 개미의 지혜
이 땅에는 어려움과 맞닥뜨려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심과 끈기를 갖고 살아가는 동물이나 또 다른 존재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 개미일까? 조물주는 끝도 없는 광활한 우주를 창조했다. 그 가운데에는 거대한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신은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작은 존재인 개미에게 지혜를 담아두셨다. 그리고 그 작은 존재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존재들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잠언은 겨울을 대비해 여름에 먹이를 미리 저장하는 개미의 준비성과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미의 지혜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끈기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살펴보건대 언제나 차가운 겨울만 맞이하는 사람은 없다. 겨울 뒤에는 반드시 봄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기필코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봄을 차지하는 행운아가 될 수 있다. 여름 한가운데에서도 겨울을 볼 줄 아는 지혜와 겨울 한복판에서도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볼 줄 아는 지혜를 개미에게서 배우는 사람은 틀림없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칭찬 이야기
삭개오의 열정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누가복음서 19:9)

- 인정받지 못하는 괴로움


인생에 열망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그렇다고 모든 열망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선한 열망이어야만 자신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 삭오개의 순수한 열망은 예수의 칭찬과 관심을 끌어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동기가 되었다.


예전에 역사가 오래된 춘천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한 적이 있었다. 사택은 교회 옆 골목에 담임목사의 사택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래서 대문을 통하지 않고도 옆집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집에서 무심코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편에서 대뜸 “나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는 선배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전화 매너 좀 고치지,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구먼’ 하고 생각하면서 “응, ??형이야?” 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그쪽에서 “넌 내 목소리도 잊어버렸냐?” 하고 응답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난감해졌다. 도무지 누군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그럼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답답하다는 투로 “옆집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전화 잘못 거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무지무지하게 답답하다는 말투로 비로소, “나, 누구다” 하고 알려오는 것이었다.


담임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몰랐을까? 사후 수습이 잘 안 되어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담임목사 또한 얼마나 황당했을까?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섭섭하고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 외로웠던 세리장 삭개오
신약성경에 보면 삭개오라는 인물이 나온다. 성경은 그를 ‘부자’와 ‘세리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삭개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가 인정받는 부분은 재물과 권력 두 가지 뿐이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물과 권력, 이 두b가지를 차지하기 위해 생사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표면적으로는 이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듯한데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문제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타민족과 상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를 지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삭개오는 주변 사람들이 죄인 취급하는 세리였고, 스스로도 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요 가장 큰 문젯거리였다.


- 삭개오의 열정
그러던 어느 날 삭개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인생에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는지 예수의 주변에는 얼씬도 못할 지경이었다. 짐작하건대 삭개오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예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자신이 그토록 힘겨워하던 문제, 즉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의 부귀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배신자요, 죄인의 괴수로 인정하고 질시했다. 언제나 군중들로부터 소외되었던 그의 삶은 늘 고독했다.


삭개오는 그런 점 때문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인의 장벽을 감히 헤쳐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예수를 직접 만나보겠다는 소망은 접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뽕나무 위에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 올라가 마침내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왔다. 예수의 행렬이 서서히 다가오더니 삭개오가 오른 나무 아래까지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삭개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하고는 “오늘은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했다. 예수의 그 말씀은 삭개오에게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사건이었다. 예수는 그의 집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만인 중에 선포했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는 행운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에게는 어떻게든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마음속에 있었다. 예수를 만난 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예수 앞에서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며 자신이 세금을 걷을 때 강탈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하며 회개한다. 참다운 삶을 지향하는 열망과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그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다.


 

성경에서 배우는 칭찬법
누군지 몰라도 칭찬하라

잔치를 맡은이는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두었구려!” 하였다.(요한복음서 2:9, 10)


- 가나 혼인 잔치에서 생긴 일
‘익명성’은 현대 도시문명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불특정인에 대한 윤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특정인을 칭찬하는 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성경에 보면 칭찬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인 줄 모르고 예수가 행한 일을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스라엘의 ‘가나’라는 지역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는데, 잔칫집의 책임을 맡은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족이 혼인을 하면 사흘 동안 남녀노소 구분 없이 친지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잔치가 끝나는 날까지 음식과 술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염려하던 문제가 생겼다.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잔칫집과 친분이 있는지 예수와 함께 들렀다가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가 아들인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자, 예수는 하인들을 시켜서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붓게 하고는, 그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책임자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하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물잔을 받아 마시는 순간 여섯 항아리의 물이 모두 포도주가 되었다. 이것이 예수가 첫 번째로 일으킨 기적의 이야기다.


- 누군지 몰라도 잘 된 것은 칭찬하라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두었구려!”(요한복음서 2:10)라고 말했다. 정작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예수인데 신랑이 대신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 칭찬은 특정인을 두고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잔치를 연 집안 전체를 향한 칭찬이었다.


그런데 ‘대상을 모르고 하는 칭찬’은 단지 칭찬 기술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칭찬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남을 칭찬하지 못한다. 특히 칭찬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대상을 모르고 하는 칭찬’을 잘할 수 없다. 자기도 모르게 칭찬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만이 가능하다. 역시 칭찬 습관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칭찬하는 것’과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접하는 것’은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근원적인 출발점은 같다.


마태복음서 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최후 심판의 날에 모든 민족이 양과 염소로 구분되어 양은 목자의 오른편에, 염소는 목자의 왼편에 놓이게 된다. 이 비유에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양은 의인들을, 염소는 악인들을 상징한다. 그때 예수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한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복음서 25:35, 36)


의인들이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자신들의 선행을 감추면, 예수가 다시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서 25:40)라고 말할 것이라 한다. 의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위해 산 것이다.


이 비유에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곧 예수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는 일은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결국 같은 의미의 이야기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 곧 예수께 하는 것이라면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곧 예수를 칭찬하는 것 아닐까? 마치 가나의 혼인 잔칫집의 총지배인이 좋은 포도주를 내온 잔칫집을 칭찬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 포도주를 만든 예수를 칭찬한 것이듯이…….


약점을 칭찬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린도후서 12:9)


- 나의 치명적인 약점
소크라테스는 악처를 두었고, 루스벨트는 소아마비였다. 영혼이 담긴 목소리를 가진 안드레아 보첼리는 시각 장애자이며, 나폴레옹은 키가 아주 작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약점은 그들을 약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약점을 약점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고양시키는 요소로 삼았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은 약점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약점도 칭찬의 내용이 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박자 감각이 엉망이어서 못갖춘마디로 시작하는 노래를 제일 싫어한다.


박자 감각이 없다는 것은 목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목사뿐만 아니라 다른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신교는 찬양이라고 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많이 부른다. 그리고 목사쯤 되면 대부분 기타를 치거나 피아노를 치는 등 한 가지 이상의 악기는 다룰 줄 안다. 그만큼 예배에서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박자 감각이 모자라 실수도 여러 번 했으니…….


- 바울, 약점을 자랑하다
성경에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사도 바울은 육체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눈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학자는 간질병이라고도 한다. 어느 것이든 간에 바울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는 병이었고, 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출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교인들이 자신의 약점까지 사랑해 준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용납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다행히 갈라디아 교회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받아주었고,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용납해 준 갈라디아 교회를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갈라디아 교회를 칭찬하는 바울을 칭찬하고 싶다. 자신의 약점을 사랑하고 노출할 수 있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며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약점을 칭찬하는 성경
바울 역시 자신의 병으로 인해 너무 고통스럽고 창피하여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에서 오나전하게 된다”(고린도후서 12:9)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사랑하고 자랑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자랑한다고 할 때 그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랑할 수 없다. 약점을 자랑한다는 것은 약점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이 곧 주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과 주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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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칭찬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데, 장점을 칭찬한 이야기도 많지만 대체로 약점을 칭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장점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세상을 강함이 아닌 약함으로 구원하셨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