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무엇일까? 달마란 직관과 관습, 그리고 행동의 규범을 일컫는다. 이를 따를 때 서로이해할 수 있고, 자비와 평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달마란 "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그러므로 달마를 행하는 것은 법을 행하는 것과같다고 할 수 있다.
일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가정에서 가족들의 생활을 살펴볼 필요가있다. 가족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보호하고 치료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마음을 비우는 능력을갖고 있다. 만약 우리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한다면 생명체는 침입자가 침투했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둘 것이다. 그런 다음 침입자에게 저항하기위해 마음을 비우고 항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따라서 면역 체계는 일종의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면역 체계는 항체가충분하지 않으면 병균의 침략에 대비하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항체를 빨리, 많이 생성해 낸다. 이런 식으로 면역 체계는 우리 몸의 마음비우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저자 틱낫한
전 세계인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앙받는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은 시인이자 학자이며 평화운동가다. 열여섯의 나이에 불가에 입문하여 평생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불교평화대표단의 의장으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었으며 평생에 거쳐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활동으로 1967년 마틴 루터 킹목사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었지만, 이후 베트남 정부의 박해를 받아 귀국을 금지당했다.
고국행이 어려워지자 스님은 198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 근교에 "플럼빌리지"를 세웠다.자두 마을이란 뜻의 이곳에서는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걷기 명상"을 통해 마음을 비워 평온을 유지하는 법을 현대인들에게 일깨우고 있다.현재까지도 스님은 미국과 유럽 등을 오가며 흙과 인간, 자연과 사람이 조화되는 명상 센터를 이끌고 있으며, 22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100여권의 저서를 통해 독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 역자 강주영
경북대학교 유전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슈바이처와 동물 친구들』 『교실 밖 상대성 원리』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저자의 말 -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면
들어가면서
1부 우리 안의 행복
바로 지금 여기에
행복기르기
마음을 비워 살기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마음을 비워 걷기
스트레스 없이 일하라
숨쉬기를 즐겨라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기회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온 마음으로 숨쉬기
분노를 다스려라
우리의 분노를 돌아보라
씨앗에 물을 주라
마음을비워라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마음 비우기
2부 일터에서 평온하라
건전한 환경을 조성하라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마음의 씨앗에 물 주기
하나된 마음
강에 던진 돌멩이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나의 두 번째 몸
공동체와 관계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새로 시작하라
도움받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참된 생각과참된 말
3부 온 세상에 평화를
안전한 장소
권위가아니라 동의가 필요합니다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윤리적 규칙
자비심을 키워라
더 나은 무기를 택하라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 자비의눈으로 바라보라
굶주린 영혼을 먹여라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라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깊이 새겨듣고 사랑으로 말하기
다른 사람도 명상하게 하라
고통을 줄이는 법
【하루를 깨우는 죽비 소리】보살이 되라
폭력을 줄여라
깊숙이 들여다보라
분노의 뿌리에게 말을 걸어라
자비심으로 행동하라
마음을 비워 평온하라
마음을 비워 살기
마음 비우기란 에너지의 일종으로 우리를 온전히 현재에 이르게 해주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에너지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낼 수 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몸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공기에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운 숨쉬기다. 물을 마실 때는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신다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운 마시기다. 걸을 때 발걸음에만 마음을 쏟는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운 걷기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마음을 비우는 행동은 휴가 때나 한적한 시골에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만약 경찰관이어서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마음을 비워 걷기 명상을 누구보다 즐겁게 할 수 있다. 안 될 이유가 없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길을 걷고 있는 좋은 사람들과 나무, 새에게도 관심을 둘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마치 친구처럼 여길 수도 있고, 내 일의 대상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경찰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라. 그 사람들은 경찰관을 필요로 한다. 경찰관이 아닌, 일반 사람들도 경찰관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법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리로 나갔을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한 것들만 걱정하지 말라. 좋은 일도 많다. 선생님이든, 도서관 사서든, 사회사업가든 누구든지 일터에서 걸을 수 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볼 때도 가능하고, 아니면 고객의 집을 방문할 때도 가능하다. 걷기 명상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아주 멋진 수행법이다.
만약 건강과 관련된 직업,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테라피스트, 사회사업가, 응급구조사 등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프거나 고통 받는 사람과 항상 대면해야 한다. 그럴 때 걷기 명상을 통해 삶의 경이로움과 만난다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를 걱정하면서 걷지 말라. 걸을 때는 긍정적인 것들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정면으로 맞설 수 있다. 예를 들어 10시까지 공항에 가야 될 일이 있다고 하자. 시간을 보니 여유가 있어서 집에서 천천히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고 보니 차가 막혀서 늦어졌고, 어쩔 수 없이 달려야 했다. 그러나 만약 계획을 잘 세웠다면 공항까지 여유롭게 걸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항상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서 공항에서도 걷기 명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라.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걸어갈 때도 걷기 명상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을 넉넉하게 두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습관이다.
마음을 비워 걷는 것이 나의 명상법이다. 나는 걸을 때마다 마음을 비워 걷는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프랑스에 있는 플럼빌리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걷기를 최고의 명상으로 삼고 있다. 부엌에 갈 때나 명상 센터에 갈 때, 화장실에 갈 때나 어느 때든 온 마음으로 걸으며, 매일의 순간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의 분노를 돌아보라
분노는 파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마음을 비우는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분노로 인해 자신을 모두 불태우고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당신이 고통을 겪으면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비우기의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행동으로 움직여야 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걷기를 통해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서 우리의 분노를 돌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거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방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엄마들은 틀림없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아기에게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아기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노의 에너지가 생기려고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다. 분노는 우는 아기와 같다. 따라서 달래기 위해서는 분노를 돌보고 살펴야 한다.
명상자는 분노가 적이 아님을 안다. 분노는 고통 받는 아기일 뿐이다. 그래서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로 따스하게 분노를 안아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분노가 내 안에 있음을 안다. 숨을 내쉬며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내 분노를 끌어안는다.”
이렇게 숨을 쉬면 두 종류의 에너지가 생긴다. 분노의 에너지와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가 그것이다. 마음을 비워 숨을 쉬고 마음을 비워 걸으면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가 계속 생겨나 마침내 분노의 에너지 안으로 파고 든다.
여름에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방 안이 너무 더우면 조금이라도 시원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거나 선풍기를 틀거나 에어컨을 켜게 된다. 시원한 공기가 더운 공기를 굳이 쫓아낼 필요는 없다. 그저 시원함이 다가와 열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 되는 것이다.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서늘하게 공기가 바뀐다. 이렇듯 마음 비우기는 우리의 분노를 다스린다. 전혀 다툴 필요가 없다. 분노는 적이 아니다. 적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선이고, 분노는 악이며, 선은 악과 싸워야만 한다고 말하지 말라. 마음 비우기가 나아가는 길에 이겨야 할 싸움이란 없다.
그런데 깊은 분노에 잠겨 있어도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에는 잠시 기다리라. 그리고 마음 비우기 에너지를 계속 만들어 내어 쉼 없이 분노를 안아주라. 그러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도 있다. 마음을 비워 집중한다면 분노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 뿌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음 비우기다.
고통과 슬픔, 분노와 폭력이라는 큰 아픔을 망각하려면 마음 비우기의 명상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왜 텔레비전을 보는 걸까?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전혀 재미가 없는데도 왜 계속해서 보는 걸까? 그 이유는 고통과 슬픔, 분노를 가릴 만한 대체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들이 올라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소모함으로써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외로움과 두려움, 혹은 우울함처럼 원치 않은 감정이 존재하므로 신문을 펼쳐 들거나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켜거나 전화를 걸며, 또는 드라이브를 해서 내면의 소리를 외면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 맞닥뜨리는 일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한다. 이런 식의 소모는 도망치는 것이며, 우리가 열중하는 것들은 계속해서 폭력이나 두려움, 분노의 독소를 우리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또 원치 않는 생각을 억누르고,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막아두기만 한다면 정신에 해를 끼치는 악순환만 반복 될 뿐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걸리기도 한다.
만약 몸에 혈액이 전혀 돌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머리가 욱신거리거나 등이 결리거나 가끔은 몸 구석구석이 아프기도 한다. 그래서 운동을 하거나 마사지를 받으면 혈액이 잘 순환되어 이러한 증상들이 많이 줄어든다. 이것은 정신도 마찬가지다. 만약 다른 일에 열중함으로써 불쾌한 생각을 막아버린다면 정신에 악순환이 생겨 마음의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막아두었던 것을 모두 걷어내고 두려움과 고통, 슬픔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준비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에 휩쓸려 버린다.
명상을 통해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 다음, 그 에너지를 통해 부정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알아차리고 안아주고 변화시키기 위해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명상을 한다면, 그리고 어떻게 앉아서 하는지 방법을 안다면,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와 집중의 에너지가 아주 강력해져서 당신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평온을 줄 것이다. 우리 안에 자라나는 두려움과 분노, 우울함의 에너지가 마음 비우기에 안겨 평온을 찾게 되면 조금씩 힘을 잃게 된다.
강에 던진 돌멩이
마음을 비우는 명상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하나로 결집된 에너지의 힘을 얻어 명상을 하는 것이 한결 쉬워지고 편안해 진다. 우리 모두는 슬픔과 고통,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니 혼자서 그 모든 감정을 껴안으려고 하지 말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고통과 슬픔을 혼자 껴안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의 공동체가 대신 껴안을 수 있게 해주라.
돌멩이를 강에 던지면 아무리 작은 돌멩이라 하더라도 물 속에 가라앉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를 갖고 있다면 무거운 바위도 물 속에 가라앉히지 않고 운반할 수 있다. 우리의 슬픔이나 두려움, 고통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비워 결집된 모두의 에너지가 우리를 감싸 안는다면 더 이상 고통의 바다에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혼자 명상할 수도 있지만 함께 모여 마음 비우기를 명상하다 보면 경이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마음 비우기 명상을 하면 하나로 결집된 에너지가 변화하고 치유되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모인 에너지가 없다면 우리는 명상하는 것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고 몇 달이 지나면 아예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명상을 하고 싶다면 함께 명상할 사람들을 모아서 모임을 만들어라. 그러면 그 모임에서 합쳐진 에너지로 인해 계속 명상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몇 분 동안 함께 걷거나 조용히 앉아 있자고 권해보라. 처음에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단 한 명뿐일지라도 옆에 있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마음 비우기의 작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혹시 함께 명상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면 혼자라도 시작하라.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절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얼마든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비워 합쳐진 에너지에, 당신의 에너지를 더할 수 있다. 당신이 마음을 비워 숨 쉬고 마음을 비워 걷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마음을 비워 숨 쉬고 마음을 비워 걷는 명상을 하면 우리는 모두 마음 비우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워 걸으면서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즐기면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같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된다. 당신이 미소를 지으면, 그 미소가 이웃을 돕게 되며, 나아가 모든 공동체 사람들이 함께 미소지어야겠다는 의지를 북돋워 준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명상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라
우리는 하루 하루의 고민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지 못한다.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고민만 하고 있으면 진정으로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런 셈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고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불교에서는 이런 생각을 참된 생각이라고 한다. 참된 생각이란 무엇인가? 참된 생각이란 깊은 이해와 사랑, 자비심, 자유를 주는 생각이다. 참된 생각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참된 이해는 아무런 편견 없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참되게 생각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화가는 작품을 그린 다음에는 꼭 서명을 한다. 우리도 하루를 살아가면서 생각과 말, 행동을 만들어 간다. 나의 생각이 나의 작품이므로 내 생각은 항상 나의 이름을 지니게 된다. 또 내가 참된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작품이 된다. 만약 이해와 자비심으로 생각한다면, 그 생각이 바로 당신의 작품이자 자산이 될 것이다.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옳은 생각이든 그른 생각이든 서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언제나 옳은 일과 연관된 생각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삶에 있어서 매 순간 참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고르게 존재한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전달해야 하는 가르침이다.
지금 입 밖으로 내뱉은 모든 말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나의 말이 분노와 절망, 비관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거기에는 나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마음을 비운다면 사랑의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이다.
참된 생각을 하고, 우리 안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다면, 모든 것들에게 평화와 행복이 전달되어 다른 이의 마음속에 있는 좋은 씨앗에 물을 주게 된다. 만약 불평과 불만, 절망과 폭력을 표출할 목적으로만 말한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상처 입히게 된다.
마음을 비워 대화를 하라는 것이 오늘의 명상이다. 말할 때, 그 말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비워 말하는 명상을 하면 우리가 나눈 대화가 좋은 씨앗에 물을 주었는지, 아니면 고통의 씨앗에 물을 주었는지 알게 된다. 마음을 비우면 이렇게 중재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친구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거야. 한마디로 전혀 이롭지 않아. 그러니까 희망과 기쁨을 더 많이 가져올 수 있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이런 말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동료와의 관계가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승진이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혹은 상대방이 날 인정해 주지 않아서 동료와 다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경우 흔히 상대방을 탓하기 마련이다.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고, 상대방은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는 이유는 오로지 상대방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개는 서로 잘못했기 때문이다. 관계란 서로 연결된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오해할 때는 나도 분명 뭔가 오해하는 게 있다.
마음 비우기를 명상하면 우리의 생각이 변한다. 마음 비우기를 명상하면 자신을 좀 더 잘 알게 된다. 그래서 화가 날 때면 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비워 숨을 쉬며 이렇게 말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내 안에 분노가 있음을 안다. 숨을 내쉬면서 나는 나의 분노를 돌본다.”
만약 이 가르침에 따라 명상을 한다면 날 화나게 만든 사람에게 곧장 무슨 말을 한다거나 행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한 말과 행동은 오로지 파괴를 부를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비워 숨을 쉬고 마음을 비워 걷는다. 그리고 분노를 끌어안고, 분노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의 분노에 편안함을 준다. 그런 다음 자신이 분노를 깊이 들여다보고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본다.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우리 안에 있는 분노의 씨앗이 아주 커져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좋지 않은 무언가를 듣거나 보면 그 순간 분노의 씨앗이 물을 만나 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조금 덜 화가 날 것이다. 우리의 분노를 깊이 들여다보면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시각, 오해 때문에 이 모든 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분노는 변화한다.
권위가 아니라 동의가 필요합니다
젊은 경찰관이 “나는 경찰이라서 너무 좋다”라고 말했을 때는, 대부분 경찰관으로서의 일이 즐겁고 사람들을 돕는 게 행복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일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권위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를 경찰관으로서 존중해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명상을 하지 않으면 그 경찰관은 나중에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경찰관이 해야 하는 훈련에는 경찰관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자기, 즉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는 훈련도 포함된다. 경찰관이나 선생님, 혹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여타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처음 시작할 때부터 권위란 함부로 사용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특히 불교 국가에서 승려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심지어는 절까지 받는다. 그러나 만약 지금 입고 있는 승복이 자신이 아니며, 권위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아의 노예가 되고, 그 결과 나는 물론이고 우리의 공동체까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결국 승려로서의 삶은 실패한다. 승려의 승복은 달마를 뜻한다. 승려가 되면 달마를 실현하며 달마를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겠다고 맹세한다. 만약 누군가 내게 절을 하고 최고의 존경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를 경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실패할 것이다.
내게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최고의 존경을 담아 절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는 수련을 했으므로 나는 그 사람들이 달마를 향해 절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선함과 진실, 아름다움을 향해 경배한 것이지 나의 자아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다. 나는 마음 비우기의 에너지로 나를 보호한다. 만약 내가 명예욕에 사로잡히고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이 보내는 경배를 잘못 이해하여 승려로서의 나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젊은이가 승려나 비구니가 되어 승복을 내줄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자아를 바라보는 명상을 하라고 이야기한다. 만약 당신이 승복을 입는다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경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당신, 즉 당신의 자아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아직도 많은 분노와 무지, 증오를 안고 있다. 즉 그들은 당신의 자아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타내고 있는 진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니요, 이러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당신에게는 그들의 존경을 거절할 권리 또한 없다. 승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앉아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들이 진리와 아름다움, 즉 달마를 향해 절을 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자아는 영원히 자유를 얻는다.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라
만약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서로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두 편이 모여 고요하게 서로의 고통과 슬픔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모여 앉아서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서둘러 행복한 결말로 이끌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상대방 역시 우리처럼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들의 아이들도 의심과 분노, 두려움과 죽음의 희생양임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분쟁에 의한 희생양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게 된다. 상대편에게 벌을 주는 행동을 계속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해가 시작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편견도 사라진다. 그러면 상대편을 올바른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플럼빌리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눈 뒤, 그들은 다시 중동으로 돌아가 명상 공동체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초청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작은 변화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만약 정부가 사람들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돕고, 함께 앉아서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에 협조한다면, 전쟁이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테러와 전쟁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한 달 동안 미국이 이라크에 쓴 돈이 무려 40억 달러라고 한다. 모임을 개최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든다. 또한 무종파적인 모임을 만드는 일이라면 우리들처럼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많다. 그런 모임이라면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도 안전하게 모여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직장에서나 동료들 사이의 긴장 상태가 오래갈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 긴장의 끈이 너무 팽팽해져서 일터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화해와 평화의 시작점이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보살이, 부처가 될 수 있다.
자비심으로 행동하라
계속해서 명상을 하면 우리의 분노와 폭력에 평온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이 명상을 언제 어디서든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정신이 더 많은 폭력을 받아들인다면, 명상은 일시적인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폭넓게 생각해야 하며, 문제의 뿌리를 보기 위해서는 이해와 계획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사회의 폭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면, 단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온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현재 사회 폭력의 정도는 경악할 수준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폭력을 줄이는 일에 동참한다는 자각만 있다면, 그러한 자각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그러한 믿음에서 치유는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거대한 상황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지 않는다. 사회 폭력을 줄이기 위해 매일 한 가지씩을 실천할 수 있으며, 오늘부터 당장 시작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평화의 첫발을 내딛고 분노를 가라앉히게 된다면,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마음을 비워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쉴 때마다 분노를 다스려, 분노의 말과 분노의 생각, 분노의 행동이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하라. 그것이 바로 자비의 행동이자 폭력의 수위를 낮추는 행동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보다 침착해지도록 친절한 말을 건네라. 상대방의 얼굴에 미소가 스미고, 그가 사물을 보다 명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라. 그것이 바로 폭력을 줄이는 첫걸음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