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재 이상설 평전

   
이창호
ǻ
벗나래
   
15000
2018�� 01��



■ 책 소개

 

보재 이상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독립운동가

 

2018년은 보재 이상설이 순국한 지 101년 되는 해이다. 벌써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의 존재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겨우 헤이그특사의 한 사람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선구자이다.

 

보재 이상설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는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애국심을 지녔던 독립지사로 25세 되던 해인 1895년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해 자신만의 부귀영화를 꾀했다면 아마 일생을 평안하게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정도를 지키며 끝까지 치열하게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저 먼 이국땅에서 스러졌다. 그런 그를 다시 소환해 우리 가슴 깊이 기억하는 것은 이 땅에 살아 있는 우리 후손의 책무다.

 

■ 저자 이창호
저자 이창호는 대한명인(연설학), 대한민국 신지식인(교육학)이며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로 있다. 스피치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연간 300회 이상의 강의, 강연을 통해 개인의 고유 브랜드인 ‘이창호 스피치’를 구축해왔다. 국정교과서 초등학교 6학년 읽기 도서 및 고등학교 국어(下) 교사용 지도서 등에 글이 수록되었다. 다양한 칼럼과 ‘MBC-TV 인생은 아름다워’, KBS 라디오의 고정 방송활동을 비롯해 한중연합일보 발행인, 중국 헤이룽장성 목릉시 한국특별고문, 중국 성원국제 명예회장,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 부총재를 역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중근 평전』,  『시진핑 리더십』, 『이순신 리더십』 등 30여 권이 있고, 자원봉사 지도로 대통령 표창, 나눔봉사로 대한적십자 총재 대상을 받은 바 있다. 

 

■ 차례
· 머리글_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재 이상설
· 추천사_우리의 정신 속에 살아 있는 독립지사, 이상설

 

1장. 출생과 학문 연구
1.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다
2. 학문에 힘쓰다
3. 한학과 전통 유학사상
4. 신학문을 접하다
5. 구국 독립운동 사상

 

2장.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1. 과거 급제와 출사
2. 일제 황무지개척권 반대상소
3. 을사늑약을 막고자
4. 이상설이 펼친 늑약 저지 활동
5. 고종에게 ‘죽음으로 비준 거부하라’ 상소
6. 이상설이 기록한 을사늑약

 

3장. 구국운동에 앞장서다
1. 벼슬을 던지다
2. 을사늑약 파기운동 주도
3. 민족교육 효시인 ‘서전서숙’ 설립
4. 서전서숙의 설립과 무상교육 실시
5. 일제의 ‘서전서숙’ 관련 정보보고
6. 독립정신의 요람
7. 서전서숙의 폐숙 후 활동

 

4장.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선정되다
1. 헤이그특사를 준비하다
2. 헤이그특사들의 밀회
3. 헤이그에 도착하다

 

5장. 만국평회회의의 참석이 가로막힘
1. 만국평화회의 문건의 준비
2.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못 함
3. 각국 언론을 통한 활동
4. 동지 이준의 순국

 

6장. 구미를 순방하며 활동을 펼침
1. 루즈벨트와의 면담 실패
2. 조선의 영세중립화 주장
3. 광무황제의 퇴위 강요
4. 사형선고를 받다

 

7장. 연해주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1.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틀다
2. 신흥촌 건설
3. 문화계몽사업을 펼침
4. 안중근과의 만남
5. ‘13도의군’을 편성함

 

8장. 국권회복투쟁의 선봉에 서다
1. 고종의 연해주 망명을 꾀하다
2. 불합리한 ‘합병조약’
3. 한일합병의 경과와 체결
4. 성명회 조직과 항일투쟁
5. 병탄반대 조약무효 선언
6. 니콜리스크에 유폐당해

 

9장. 권업회 창설과 《권업신문》 발행
1. 권업회 창설
2. 《권업신문》의 창간
3. 내부갈등과 사이비 애국자들

 

10장.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다
1.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2. 임시정부의 해산
3. 신한혁명당의 창설
4. 신한혁명당의 좌절

 

11장. 애통한 서거
1. 망명지에서 순국함
2. 각계의 추모 물결
3. 이상설의 한계
4. 독립유공자 추서, 향리에 추모비
5. 이상설의 혼백을 부르다

 

· 참고문헌




보재 이상설 평전


출생과 학문 연구

한학과 전통 유학사상

이상설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이상설의 학문은 신구 학문을 겸수한 것이었으며 또 학문 분야도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상설은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학을 공부했는데 이미 20세를 넘으면서부터는 유학계에서 큰 학자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덕분에 이상설은 약관 27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이 되엇다. 비록 갑오개혁 후에 개편된 성균관이지만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은 예전의 대사성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상설은 과거급제를 계기로 한림학사에 제수되었고 세자의 시독관이 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을사늑약을 막고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 / 대한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 /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1905년 11월 1일 이상설이 36세이던 무렵, 그는 다시 의정부참찬에 발탁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상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다시 관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매국조약은 유약한 군주와 이미 일제에 포섭된 매국대신들에 의해 사전에 마련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 이상설은 이런 사태 속에 의정부 참찬에 취임하여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 저지에 힘썼다. 그 방법이란 ‘위로는 황제가 순사직의 결심으로 반대하는 것이요, 이를 이어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이 순국의 결정을 내려 어떠한 사태가 닥쳐도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각 대신을 찾아다니면서 조약체결이 곧 ‘국망’이고, 민족이 ‘왜적의 노예’가 되는 바임을 역설하면서 순국 반대의 결의를 촉구하였다.


이상설이 펼친 늑약 저지 운동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행하기 위해 10월 하순 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조선수비대라는 명목으로 한국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시켰다. 특히 어전회의가 열리는 경복궁은 중무장한 일본군이 완전 포위하였고, 서울 시내 각 성문과 중요 지점도 무장 군인과 헌병을 배치하여 물샐틈없는 공포, 감시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 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 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 / 미국 / 청국 / 독일 / 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같이 체결된 을사오조약에 대해 이상설의 유한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는 그동안 그와 결사반대하기로 했던 각 대신이 막상 최후에 가서 한 사람의 자결순국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수상인 한규설마저 최후까지 부자만 고집하였을 뿐 순국할 기회를 잃고 일본 병사에게 감금되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과감하고 충성심이 큰 충정공 민영환이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후에 민영환은 이상설과의 구국약속을 지키려 했음인지 결국 자결 순국하여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구국운동에 앞장서다

민족교육 효시인 ‘서전서숙’ 설립

구한말부터 일제강점 초기 선각자들은 개인 혹은 단체로 각급 학교를 세웠다. 우리가 왜적의 침략을 받고 국권을 상실한 것은 국민이 깨어나지 못한 까닭이란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공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각종 계몽운동과 함께 신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반대 후 자택에 은거하면서 이회영, 이동녕, 장유순, 이시영 등과 은밀히 만나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어렵다는 점을 간파하고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서전서숙의 설립과 무상교육 실시

간도 이주 조선인은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항일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이민자가 급증하였다.


이상설이 간도에 자리 잡고 이주 동포들을 상대로 민족교육을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용정은 북간도의 중심지이고 특히 한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용정에 도착한 이상설은 이 지방에서 가장 큰 집인 천주교당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 학교 건물로 개축하였다. 건물이 완공되자 ‘서전서숙’이란 간판을 걸었다. ‘서전’이란 이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이다.


처음 학생 수는 22명이었고 학과목은 역사 / 지리 / 정치학 / 수학 / 국제법 / 헌법 등이었으며, 철저한 항일 / 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07년 3월 이상설이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신병인도 요구 때문에 용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간도 보통학교를 개교하고 각지의 서당을 매수하는 한편 서전서숙 측에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서전서숙 측은 이를 거절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혼춘 방면으로 떠나 탑두구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했으나, 1908년 8월 20일 졸업식과 동시에 폐교하고 말았다.


독립정신의 요람

이상설과 우국충정으로 똘똘 뭉친 애국지사들이 함께 세운 서전서숙의 존속 기간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전서숙은 독립운동은 물론 민족문화운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이후 용정촌은 북만주 지역 조선족 사회의 교육, 사상, 문화의 중심지로서 독립정신의 요람이 되었다.


서전서숙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에 세운 근대학교 교육기관이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서전서숙에서는 이러한 근대학교 교육을 실시해서 근대적인 새로운 문화지식으로서 후대를 교육하는 신학교육이 낡은 봉건윤리교육을 대체하였다.


한편, 서전서숙은 북간도 조선족 사회에 반일정신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크나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각종 항일무장투쟁의 독립운동가 중에 간도 지역 출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선정되다

헤이그특사를 준비하다

이상설이 북간도에서 서전서숙을 개설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을 무렵, 일제는 서울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국권을 농단하는 한편 한국인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전국에 일본 경찰을 배치하고 의병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한편 이회영과 전덕기 등은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특사를 파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국제사회에 일제가 무력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겁박하여 외교권을 강탈했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진덕기와 이회영이 구상한 방안을 내시 안호영을 통해 황제에게 전하는 한편, 특사로 적합한 인물을 골라 추천하였다. 특사의 정사에는 이상설, 부사는 이준과 이위종을 천거하였다.


황제는 이와 같이 특사 3인의 천거를 받은 후, 4월 20일자로 국새와 황제의 수결이 찍힌 백지위임장을 미국인 측근 헐버트를 통해 보내왔다. 황제가 ‘백지위임장’을 보낼 만큼 만국평화회의의 특사 파견은 절실한 과제였고, 한편 이회영과 전덕기가 천거한 인물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헤이그에 도착하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년 동안 열리지 못했다. 황제의 신임장을 지닌 이준은 1907년 4월 21일 한국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상설을 만나 합류하였다.


6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들은 전 러시아주재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마침내 세 사람의 특사는 그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상설, 이위종, 이준 특사 세 사람은 전 러시아공사를 역임했던 베베르와 바파로프 등의 주선으로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를 만나 한국의 입장과 주장을 협의하고자 하였다. 이때 세 특사는 고종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까지 가지고 있었다.


고종황제는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서 3명의 특사를 보내게 된 경위와 러일전쟁 직전에 자신이 대외중립을 선언했던 것을 강조하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특사들을 참석케 하여 그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받아보고는 “일본이 전쟁 중에 대한제국에서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회답 친서를 보내 광무황제에게 지원을 약속하였다.


프랑스 한국주재 공사였던 풍트네를 통해 폐하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친서를 받았다. 짐에게 대한제국의 장래(독립)는 전과 같이 귀중하며 항상 짐은 진실한 우방국가로 대한제국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증한다 (박효종, 「러일전쟁과 한국」,『신동아』).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가로막힘

만국평화회의 문건의 준비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헤이그의 빈넨호프 궁에서 45개국의 대표 239명이 모인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는 1회 때보다 19개국이 늘어난 수치로 대한제국정부는 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초 1906년에 열리기로 했을 때는 대한제국도 초청국에 포함되어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을 통하여 대한제국정부에 알렸으나, 회의가 1년간 순연되는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과 영국 등의 방해로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은 제1회 때와 같은 러시아 수석대표 넬리포프가 맡았다. 이상설은 고종황제의 친서를 러시에 황제에게 전달하려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신경 쓰느라 황제의 면담은 물론 친서의 접수도 거절하였다.


일본 대표들은 대한제국이 사절단을 파견하고 또 그 사절단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일본 대표는 깜짝 놀라, 그들 본국의 외무대신 및 총리대신과 서울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의 특사들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한국 대표들의 회의 참석과 활동을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방해했다.


헤이그에 도착하기 전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사람의 한국 대표들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렀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사항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기 위해 중비한 <공고사>와, 이상설이 직접 지켜보았던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박에 의해 맺어지게 된 과정을 소상히 적은 장문의 <부속문서>를 불어로 인쇄하였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못 함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사람의 대한제국 특사들은 <공고사>와 <부속문서>를 평화회의 사무국에 접수시켰다. 또한 6월 30일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고종황제의 신입장을 제시하면서 대한제국 특사단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는 대한제국 특사단의 참석 여부는 네덜란드 정부의 소관이라고 에둘러 말하며 특사단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여기서 좌절할 수만은 없었다. 세 사람의 특사단은 네덜란드 외상에게 면담을 요구했으나 그 역시 접견을 거부했고, 미국 대표에 대한 접견 요청도 거부당하였다. 이는 뒤에서 모든 방해공작을 조장하고 있던 일제의 만행임과 동시에 냉정한 국제권력정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6월 25일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직접 방문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킨 일본의 비합법성과 파렴치한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의제로 다루어지도록 요청하는 한편, 품속에 고이 품고 있던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결국 대한제국 특사단의 회의참석은 허가되지 않았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의 특사단은 회의참석이 거부되자 이번에는 다른 전략을 전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회의가 열리는 평화회의장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위종이 유창한 불어로 일제의 야만적 한국침략과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공고사>와 <부속문서>를 배포했다. 이 문건은 만국평화회의 기관지 《평화회의보》 6월 30일자에 실리고 기자회견 내용은 7월 5일자 현지 신문에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이위종이 간곡하게 호소하자 마침내 각국 언론에서는 관심과 함께 대한제국의 상황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는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특사의 열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열강들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했다. 이미 일제는 영국과 러시아의 동진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1902년 영일동맹에 이어 1905년 공수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또한 일제는 미국과는 1905년 러일전쟁 종전 직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양해하기로 한 뒤였다.


미국과 영국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평화회담 전까지는 한국을 적극 지원하다가 태도를 돌변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1905년 8월 10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중재로 미국 포스머스에서 러일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렸는데, 이를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지도, 보호, 감리권이 인정되는 등 암묵적으로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하였다.



구미를 순방하며 활동을 펼침

루즈벨트와의 면담 실패

결국 이상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와 열강들의 온갖 권모술수로 대한제국 특사단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설과 이위종 이들 대한제국의 특사들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성과가 없을 경우 구미 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한국이 일제로부터 침략을 받고 있는 사실과 을사늑약의 강요, 고종황제가 이 조약을 재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열강의 지원과 한국은 자주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설명’하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미국 정부의 대한제국 특사단에 대한 반응은 냉랭했으나 반면에 미국 언론들은 한국특사들의 활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일부 언론들은 이상설과 이위종을 ‘조선의 왕자’라고 표기하기까지 하였다.


8월 1일 이상설과 이위종이 뉴욕에 도착하여 브로드웨이 센트럴 호텔의 열람실에서 조선에 대한 학대, 자신의 희망, 장래의 포부 등에 관한 견해를 발표했을 때에도, 그 다음 날 《뉴욕타임즈》는 ‘한국 왕자, 사형 선고에 대해 당지에서 말하다-이상설과 이위종, 모국에 대한 학대를 시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협조 요청: 생명은 몰수되었다고 말하다. 일본은 그들의 암살을 노린다고 황제의 친족이 말하다-루즈벨트와 회견을 시도할 예정’이란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사형선고를 받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8월 통감부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 세 사람의 헤이그특사에 대한 궐석재판을 열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재판에서 이상설에게는 교살,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게 하였다. 일제로부터 교살형을 선고받은 이상설은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만리타국을 떠돌며 국권회복 투쟁에 여생을 바쳐야 했다.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다

신한혁명당의 창설

러일동맹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시체제가 된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상설은 전략을 바꾸었다.


비교적 활동이 자유롭고 교통의 요충지인 상해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택한 이상설은 1915년 3월경 상해로 건너왔다. 이곳에서는 이미 박은식과 신규식 등이 영국조계에서 배달학원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중국 성도에서 조성환, 북경에서 성낙형, 시베리아에서 유동열, 국내에서 유홍열과 이춘일 등 민족운동가들이 속속 상해로 모였다. 사전에 비밀리에 연통한 것이다. 뜻을 같이한 이들은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이상설, 감독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종전 뒤 독일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일본과 원한이 깊은 중국은 독일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향후의 세계정세를 전망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를 조선이 독립할 기회로 보았다.


이들은 두 가지 활동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안봉선 철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이라는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구상은 중국의 원세개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락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구상도 성낙형이 1915년 7월 서울에 들어와 변석붕 등 수 명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두 가지 구상이 모두 무산된 이후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활동이 쉽게 중단되었던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들의 분석이 중국의 일본에 대한 굴복으로 빗나가 버린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애통한 서거

망명지에서 순국함

신한혁명당의 좌절을 겪으며 이상설은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는 10년이 넘는 해외망명 생활과 국치의 아픔 그리고 거듭되는 국권회복 투쟁의 좌절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상처는 건강의 악화로 나타났다. 1916년부터 토혈이 거듭되면서 북경을 떠나 지인들이 많은 러시아령 하바로프스크로 거처를 옮겼다.


부인의 지극한 간호에도 이상설의 병환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17년 3월 2일, 망명 10년, 국치 7년 만에 이상설은 부인과 아직 어린 아들, 그리고 이동녕, 조완구, 백순, 이민복 등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상설은 동지들의 손을 잡으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는 간절한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이상설이 죽음을 맞은 뒤, 동지들은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수이푼 강에 그 재를 뿌렸다. 그러고는 유품도 화장하여 함께 뿌렸다.


선생은 명목하실 때 유언으로 선생의 유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태우고, 선생의 유해마저 다비에 부치라고 하셨다. 이때 동지들의 비통은 지필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러시아의 헌병들도 화장 장소 주변을 경호하면서 동지들의 애통을 보고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 가셨다고 탄식하더라는 이야기를 고 조완구 선생이 어느 때엔가 필자에게 말씀한 일이 있었다(권오돈, 「보재 선생과 독립운동」, 『나라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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