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마하트마 간디(엮음: 앨런 제이콥스, 역: 조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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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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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 책 소개


인도인의 바푸, 세계인의 마하트마!
간디,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다


이 시대 위대한 현인들의 감동적인 글과 가르침을 하나의 책으로 묶은 ‘지혜의 씨앗’ 시리즈 2권. 마하트마 간디는 말과 행동을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인권운동가이다. 그는 평화적 시민 불복종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뿐 아니라 전 세계 시민권과 자유운동에 새로운 길을 열면서 활동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책은 간디의 솔직 담백한 자서전을 비롯하여 비폭력, 신뢰, 편견, 성, 채식, 검소, 종교, 금식, 일, 교육에 관한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문집이다. 그의 투쟁과 자기희생, 용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의 영감이 되고 있다. 또한 소박하고 박애주의적인 선을 직접 실천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 저자 마하트마 간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곳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을 접하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고 비폭력운동의 영감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런던 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여정이 시작된 중요한 시기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천대받는 인도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웠고 이후 인도로 돌아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는 바푸(아버지)로 불리며 인도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인도어로 ‘위대한 영혼’을 뜻하는 ‘마하트마’는 외적 생활은 물론 내적으로도 신에게 철저히 복종했던 이 특별한 성인을 가장 잘 표현한 호칭이다. 간디의 투쟁은 정치적이지만 힌두교라는 종교적 가치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혁명적이다. 그는 인도 독립이라는 숙원을 이룬 이듬해 1948년 힌두교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


■ 편자 앨런 제이콥스
일생에 걸쳐 비교 종교학과 신비주의를 연구한 학자이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When Jesus Lived in India』 『유토피아Eutopia』 등을 포함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문집 『영혼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시Poetry for the spirit and peace of mind』를 편집한 뛰어난 편집자이기도 하다. 현재 영국 라마나 마하리쉬 재단의 회장으로 있다.


■ 역자 조계화
조선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잡지 번역 작업을 했으며 현재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확실한 성공: 포드 자동차사 초대 영업부장의 성공 멘토링』이 있다.


■ 차례

머리말


PART1 전기 _ 자서전으로부터
1. 나의 가족
2. 영국 유학길에 오르다
3.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를 시작하다
4. 인도로 돌아와 조국에 봉사하다

 

PART2 활동 _ 전집으로부터
1. 젊은 시절과 남아프리카에서의 투쟁
2. 인도에서의 투쟁
3. 중반기
4. 승리
5. 결말

 

PART3 어록 _ 신문 및 저서로부터


에필로그
감사의 글
참고문헌




간디


전기 - 자서전으로부터

나의 가족

우리 집안

우리 집안은 평민 계급에 속하는 바이샤 출신이다. 구자라트어로 식료품 장수를 뜻하는 간디라는 성으로 보아 선대에는 식료품 파는 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부 대에 이르러서는 카티아와르 지방의 여러 주의 재상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우탐찬드 간디는 일명 오타 간디로 불렸는데, 무척이나 강직한 분이다. 조부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원래 포르반다르 지역의 재상을 지냈으나 정치적 모략에 빠져 주나가드로 피신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을 다스리던 관료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조부께서 불결한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왼손으로 경례했다고 한다. 너무나도 무례한 이 태도에 깜짝 놀란 누군가가 그 연유를 묻자 할아버지는 “내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 바쳤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가문과 집안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으로 용감하며 성실하고 관대했지만, 성격이 급한 편이었다. 마흔이 넘어 네 번째 결혼까지 한 것을 보면 여색도 제법 밝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중과 사회에서 청렴하고 공정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또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변변한 재산 한 푼 넘겨주지 못할 정도로 물욕 없이 청렴하게 생활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는 구자라티 교본 제5권을 간신히 읽는 정도였고, 특히 역사나 지리에는 문외한이었다. 그 대신 인생 경험이나 실무 경험이 풍부해서 복잡한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했고 수백 명을 관리해야 하는 요직도 무리 없이 수행했다. 또 종교적 수행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사원에 자주 찾아갔고 종교 담론도 경청했다. 특히 말년에는 집안과 친분이 있던 브라만 승려의 가르침에 따라 힌두교 경전 『기타』를 읽었으며 매일 예배 시간에 몇 구절씩 소리 내어 읊으시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성스럽고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다. 식사 전에는 항상 기도를 했고, 비슈누 신을 섬기는 사원인 하벨리에 매일 갔다. 넉 달 동안 침묵, 금식,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반금식 등을 통해 속죄를 비는 차투르마스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흔들림 없이 이를 지켰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우 양식 있는 분이었다. 나라의 대소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궁의 부인들도 어머니를 지성이 뛰어난 분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가끔 어린아이의 특권으로 모임에 따라가서 어머니가 타코레 사헤브의 홀어머니와 열띠게 토론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슈라바나의 감동

같은 시기에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나는 교과서 외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선생님을 속이는 것만큼이나 야단을 맞는 것도 싫어서 수업에는 빠지지 않았지만 열심히 듣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데 다른 책을 읽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책에 눈길이 갔다. 슈라바나의 효심을 그린 희곡 『슈라바나 피트리바크티 나타카』였다. 때마침 슈라바나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 순회 전시회가 마을에서 열렸다. 슈라바나가 앞이 보이지 않는 부모를 업고 순례를 떠나는 그림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때 읽고 보았던 책과 그림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이런 효심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슈라바나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부모의 곡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나는 그 애달픈 선율에 감동하여 아버지가 사준 콘서티나(아코디언과 비슷하나 건반 대신 버튼이 달린 악기)로 자주 연주했다.


하리시찬드라

그 당시 아버지가 한 극단의 연극을 볼 수 있게 허락해주셨는데, 그때 본 「하리시찬드라」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 연극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공연장에 가는 것을 여러 번 허락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연극에 완전히 사로잡힌 나는 하리시찬드라 역을 수없이 연기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종일 ‘왜 모든 사람이 하리시찬드라처럼 진실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하리시찬드라처럼 진실을 따르고, 그가 겪은 시련을 나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리시찬드라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고,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물론 지금은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 하리시찬드라와 슈라바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실체이고, 지금 다시 이들에 관한 희곡을 읽어도 그때처럼 감동할 것이다.


나의 아내 카스투르바이

카스투르바이에게 그런 욕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글을 몰랐다. 천성적으로 단순하고, 자립심과 인내심이 강했으며, 적어도 내 옆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아내가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거나 내가 공부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나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한 여성에게 모든 열정을 바쳤고, 그에 보답받기를 바랐다. 비록 주고받는 사랑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한쪽의 적극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항상 비참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기의 위험

나는 놀라고 화가 났다. 많은 사람이 고기를 먹는 이유가 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약한 이유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야. 영국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도 고기를 먹기 때문이고. 내가 얼마나 튼튼하고 잘 달리는지 너도 알지. 다 내가 고기를 먹기 때문이야. 고기를 먹으면 종기나 종양이 생기지 않고, 생겨도 금방 없어져. 고기를 먹는 선생님이나 다른 유명인들이 바보는 아니잖아. 고기의 장점을 알고 있는 거지. 너도 먹어봐. 직접 해보는 것보다 좋은 건 없지. 직접 먹어보면 너도 알게 될거야.”


실험

구자라트의 자이나교와 비슈누파교는 인도의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강력하게 육식을 반대하고 혐오했다. 나는 이런 전통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모님을 지극히 섬겼기 때문에, 내가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안다면 충격으로 돌아가실지도 몰랐다. 또한 나는 진실을 사랑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고기를 먹는 것이 부모님을 속이는 것임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개혁’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맛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고기가 특별히 맛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바람은 나와 우리 동포들이 강하고 대담해져서 영국을 무찌르고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스와라지(자치를 뜻하는 힌디어)라는 말을 몰랐지만, 자유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나는 ‘개혁’을 향한 열정에 눈이 멀어 부모님께 사실을 숨기고 비밀로 한다고 해서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비밀 잔치

내가 거짓말을, 그것도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기를 먹는 것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을 받으실 것도 알았다.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결국에는 ‘고기를 먹는 것이 중요하고, 인도에 음식 개혁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앞으로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지면 자유롭게 고기를 먹겠지만 그때까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힘사와 브라마차리아

나는 불살생, 비폭력을 뜻하는 아힘사를 완전히 이해한 후에야 아내를 의심하는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아힘사의 모든 면을 이해하자 신과 가까워지기 위한 자기 억제와 금욕, 즉 브라마차리아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닌 동반자이자 협력자이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로 아내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의심과 불신으로 물들었던 당시를 생각할 때마다 아내를 학대하고 친구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어리석은 나 자신의 모습에 혐오감이 일고 개탄을 금하지 못한다.


아힘사(비폭력)의 힘

이 일은 나에게 아힘사의 힘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였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아힘사가 모두를 아우르면 주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힘사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아버지로서는 이렇게 숭고하게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화를 내고 꾸짖고 당신의 이마를 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내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자백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을 솔직히 자백하고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회개이다. 나의 이러한 자백은 아버지를 안심시켰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무한히 키워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유학길에 오르다

착한 기독교인을 만나다

하지만 신약은 달랐다. 특히 예수의 설교 내용을 담은 산상설교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예수의 설교를 『기타』와 비교해보았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주고, 너의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내어주어라”라는 문구는 내게 더 없는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훌륭한 식사로 한 잔의 물을 갚고”라는 샤말 바트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기타』와 『아시아의 빛』,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고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최고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정 변호사가 되다

정식 변호사가 되려면 두 가지를 해내야 했다. 하나는 12학기를 수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여기서 학기를 수료한다는 것은 매 학기 제공하는 스물네 번의 만찬 가운데 적어도 여섯 번은 참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찬에는 음식과 술이 차려졌고 모든 참석자가 일을 즐겼다. 사실 만찬의 진정한 의미는 저녁을 먹는 것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데 있었다. 식사 요금은 2실링 6펜스에서 3실링 6펜스로 인도 통화로 환산하면 2~3루피 정도였다. 호텔에서 마시는 와인 값이 저 정도였으니 비교적 저렴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인도인들은 ‘문명화’되지 않아서 그런지 음식보다 술값이 더 비싸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려고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만찬이 변호사가 되는 데 진정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예전에는 만찬에 참석하는 학생 수가 적어서 다른 학생들이나 교수님들과 대화하고 발표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교류는 학생들이 지식을 쌓고 능력을 키우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다닐 때는 교수들 식탁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상호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만찬은 그 의미를 잃었지만 보수적인 영국은 그래도 전통을 이어갔다.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를 시작하다

남아프리카행 제의

인도에서 변호사 일자리를 알아보는 동안 포르반다르의 메몬회사에서 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저희는 남아프리카에서 사업하는 대기업으로 현재 4만 파운드 상당의 장기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저희는 최고의 인도인 변호사 및 법정 변호사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동생분이 여기 와서 도와준다면 저희 변호인단과 더욱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리고 이는 동생 분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프리토리아에서

이 모임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공개 연설을 했다. 정직하게 장사하자는 내용을 주제로 열심히 연설을 준비했다. 상인들은 언제나 정직하게 장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왔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사와 정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상인들은 “장사란 현실이고, 정직은 종교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현실과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장사를 할 때는 완전히 진실할 수가 없으며 장사에 방해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진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연설에서 이러한 사고에 강력히 반대하고 몇 명의 행동이 조국에 있는 수천만 인도인을 대변할 수 있으므로 외국에서는 특히 정직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변호사업

변호사 일은 안정적으로 성장했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생활을 더욱 간소화하고 동포에게 실직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3년 후에

남아프리카에서 3년을 지내면서 나는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다. 1896년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물렀으니 6개월 정도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동안 변호사 일을 꽤 잘해왔고 그곳 사람들도 내가 더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예 고향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와 정착하기로 했다. 또 인도에 가면 여론을 이용하여 남아프리카 인도인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인도인에게 3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고 있었고 이것이 폐지되지 않는 한 평화는 올 수 없었다.


인도로 돌아와 조국에 봉사하다

인도에서

나는 봄베이에 들르지 않고 바로 라지코트로 가서 남아프리카의 상황을 설명하는 팸플릿을 준비했다. 을 쓰고 인쇄하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팸플릿은 표지가 녹색으로 되어 있어서 후에 녹색 팸플릿으로 불렸다. 말하려는 대상과 거리가 있을 경우에는 실제보다 과장되어 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전의 두 팸플릿보다 온건한 어조를 사용해 남아프리카 인도인의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1만 부를 인쇄하여 인도의 모든 신문사와 당과 대표에게 보냈다. 「파이어니어」에서 사설로 이를 가장 먼저 다뤘다. 로이터 통신이 이 기사를 요약해 영국에 보냈고 런던 로이터가 다시 이를 요약해 나탈에 보냈다. 그래서 나탈에서 받은 기사는 3줄이 채 넘지 않았다. 기사는 나탈 인도인의 처우를 설명한 내 글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었고 나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 글이 나탈에 미친 영향을 보다 나중에 나타난다. 그 사이에 주요 신문에서 일제히 이 문제를 자세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결의안

내 차례가 되자 와차 의장이 이름을 호명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결의안은 어떻게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 해외 이주를 옹호하는 자작시를 인쇄해 대의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그 시를 읽고 남아프리카 이주민의 고통을 토로했다. … 당시에는 방청객과 대의원 간에 거의 구분이 거의 없었고 결의안마다 모두 손을 들어 모든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내 결의안 역시 그렇게 통과되어 이 결의안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결의안이 국민회의에서 통과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기에는 충분했다. 국민회의의 승인은 곧 국가 전체가 승인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시람 설립

사티아그라하 아시람은 1915년 5월 25일 설립되었다. 슈라다난지는 내가 하드바르에 정착하기를 바랐고 캘커타의 친구 몇몇은 바이댜나서덤을 추천했다. 라지코트에 정착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베다바드 지역을 지나다가 친구들이 이곳에 정착할 것을 권했고 자발적으로 아시람[힌두교도 수련시설] 설립 비용과 살 집을 마련해주기까지 했다. … 우리는 진리에 헌신한다는 신념하에 진리를 추구하고 주장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시도했던 방법을 인도에 알리고 인도에서도 일을 최대한 적용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상의하여 봉사 목적과 방법을 모두 보여주는 ‘사티아그라하 아시람’[사티아는 진리, 그라하는 노력을 뜻함]을 새로운 아시람 이름으로 선택했다.


아시람 운영

아시람을 운영하려면 규칙과 계율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의견을 물었다. 많은 의견이 채택됐는데 그중 구루다스 바네르지 경의 의견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초안이 맘에 들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겸손하지 않은 것 같으니 겸손도 계율에 포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도 그 문제는 알고 있었지만 겸손을 맹세하게 하면 더 이상 겸손이 아니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진정한 겸손은 나서지 않고 삼가는 자기 억제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곧 모크샤(구원)로, 일을 직접 계율로 삼을 수는 없으며 다른 계율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구원을 바라는 이가 겸손하지 못하고 사심에 행동한다면 인은 더 이상 구원이나 봉사가 아니다. 겸손하지 않은 봉사는 이기심과 자만일 뿐이다.


진리만이 신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진리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자서전에서 아힘사, 즉 비폭력만이 진리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면 자서전을 집필하는 데 들인 나의 모든 노력은 허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더라도 이는 전달자의 잘못일 뿐 그 위대한 원칙이 잘못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비폭력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완전하지도 충분하지도 못하다. 아주 잠깐 진리를 본 것만으로는 우리가 매일 보는 태양보다 백만 배는 강력한 진리의 빛을 제대로 전달하기는 어렵게 때문이다. 사실 내가 본 진리도 그 거대한 빛의 가장 희미한 한 자락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실험 결과에 따라 진리는 완전한 비폭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진리의 정신과 대면하려면 가장 미천한 생명체마저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생에서 그 무엇도 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내가 정치에 뛰어들게 된 이유이다. 나는 종교와 정치는 서로 무관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자기 정화

자기 정화가 없다면 살아 있는 생명체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 또한 자기 정화 없이 비폭력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절대 신을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자기 정화란 삶의 모든 면을 순수하게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전파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자기를 정화하면 결국 주변까지 정화된다.


그러나 자기 정화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완벽하게 순수해지려면 생각과 말, 행동에서 욕정을 모두 버리고 사랑과 증오, 애착과 혐오 같은 감정적 대립을 초월해야 한다. 나도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아직 생각과 말, 행동 면에서 순수하지 못하다. 그래서 세상의 찬사를 들을 때면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나는 간사한 욕정을 극복하는 것이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인도로 돌아온 후 나는 내면에 숨어 있는 욕정을 경험했다. 비록 욕정에 지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 욕정이 숨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경험과 실험은 나를 붙잡아주고 큰 기쁨을 주었다. 물론 아직도 험난한 길을 더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을 비우고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서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아힘사는 겸손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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