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감독열전

   
박용훈 외
ǻ
이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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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9��



■ 책 소개
한국 야구의 과거와 현재를 빛낸 8인의명장, 
그들의 야구 인생과 철학, 그리고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


■ 저자
강정수
 - 야구를 좋아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돼지앙의 잡다구리 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http://blog.daum.net/kajas0524 

김홍석 - 2007년부터 다음 스포츠 야구 담당 칼럼니스트로활동했고, 2009년에는 국내 최초로 순수 블로그 기반 매체인 ‘야구타임스’를 창간했다. 현재 야구 전문 블로그 MLBspecial.net을운영 중이다. 2011년 Daum View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했다. 

남재호 - 프로야구 LG 트윈스 팬으로 LG 트윈스 홈페이지 쌍둥이 마당에서Gehrig이란 아이디로 활동 중이다. 네이버에 LG 야구에 관해 이야기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야구생활’ 제작에도 참여했다. 현재강화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박용훈 - 서울 출생으로 MBC 청룡 어린이회원 출신이지만 지금은 자칭 ‘C급 동네해설가’로 활동중이다. 시즌 중에는 퇴근하면 바로 TV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비시즌에는 야구 책을 뒤적이며 허전함을 달랜다. 지인들과 집 근처에서 생맥주마시며 야구 이야기를 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신희진 - 블로그 미디어 ‘야구타임스’ 필진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마니아리포트’ 객원기자로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야구생활』(공저)이 있다. 

야관중 - 1985년 한밭벌 출생. 골수 한화 팬으로 199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보기시작하였다. 2011년 5월, 한대화 감독이 야왕으로 추앙받으며 댓글 란에서 야왕실록 집필 놀이가 유행하자 이에 동참하여 야왕실록을 작성하다야왕지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현재 야왕지 블로그(http://blog.naver.com/baekjelove1/)를 운영하며 야왕지를 집필하고 있다. 한화의성적이 부진하여 멘탈 붕괴 중. ㅠ.ㅠ 

최형석 - 야구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마야구사랑’ 동호회 시삽을 맡고 있다. 네이버스포츠 부문 파워 블로그로 선정되었다.

황청룡 - 네이버 4년 연속 ‘파워 블로그’에 선정된 ‘삼매의 블로그’ 운영자. 다음 ‘프로야구배틀’에서 삼성라이온즈를 연재했으며, 네이트 ‘프로야구 팀페이지’에 삼성라이온즈를 연재하기도 했다. 저서로『2011 한국 프로야구 만화팬북-삼성라이온즈』가 있다. 

■차례
여는 글 - 한국 야구를 빛낸 명장들의 이야기

김응룡_ 최고의 명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선수 김응룡, 실업야구계를 평정하다 |선수에서 바로 실업야구 감독이 되다 | 미국식 자율 야구를 한국에 도입하다 | 취임 첫해 우승을 일궈내다 | 해태 왕조 건설을 위한 숨 고르기| 해태 왕조의 시작 | 무섭지만 정이 많은 감독 | 여섯 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기까지 |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 우승 청부사로삼성맨이 되다 | 야구인 최초로 구단 사장으로 승진 | 최고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감독 

김재박_ 명감독이 된 명선수
야구 센스, 스타성,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 |현대 피닉스의 등장 | 1년 차 감독의 성공적인 출발 | 2년 차 감독의 시련 | 현대 프런트의 지속적인 지원과 첫 우승 | 부침의 반복 |‘왕자의 난’으로 달라진 환경 | 최강의 위용을 다시 찾다 | 악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력 | 끝없는 선수 이탈로 인한 한계 봉착과 새로운재기 | 프론트와 감독의 성공적인 공생 | ‘그분이 돌아왔어요’ | 구단의 지원과 성적의 상관관계 | LG에서 실패한 이유 하나 | LG에서실패한 이유 둘 | 김재박 감독과 LG 구단의 불편한 진실 | 늦게나마 명감독에게 박수를

김성근_ 생각하는 야구란 무엇인가
지옥훈련? 그냥 쉬는 게 나아 | 머리가아니라 몸이 반응해야 한다 | 야구는 사람이 하는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다. 지푸라기라도 잡자 | 재미있는 야구가뭐야? | 감독은 엄한 아버지 같아야 한다 | 데이터 야구란 무엇인가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안 지는 야구란 무엇인가 | 노장들이 설자리를 열어줘야 한다 | 김성근 감독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김인식_ 야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 
유일한 ‘국민 감독’ 김인식 | 국가가 있어야야구도 있다 ‘믿음의 야구’를 보여주다 창단 감독에서 수습 감독으로 | 믿음과 인화의 야구를 꽃피우다 | 못다 쓴 ‘리버스 스윕’의 신화 |김응룡과의 대결 | ‘선동열 쇼크’로 물러나다 | 후배 감독들과의 치열한 승부 | 재활공장 공장장 | 노장 우대 vs 신인 육성 실패 | 야구도결국 사람이 하는 것 

선동열_ 국보급투수, 국보급 감독에 도전하다
스타 선수는 스타 감독이 될 수 없다? | 좌절로 더욱 단단해지다 | 선동열 감독을 차지하기위한 쟁탈전 | 선동열의 투수 육성 능력 |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우승을 거머쥐다 | 아직 아쉬움과 의심이 남아 있었다 | 선동열 감독의 빛나는용병술 | 2년 연속 우승, 선동열의 이상적인 야구 구현 | 우승과 맞바꾼 팔꿈치 | 불펜 야구의 후유증? | 삼성 팬들의 실망과 원성 |위기의 순간에 화려하게 부활하다 | 집단 마무리 체제를 성공시키다 | 선동열 감독이 남긴 아쉬움 | 선동열에 대한 오해와 변명 | 다시 타이거즈유니폼을 입다

이광환_ 자율 야구의선구자
선동열을 꺾은 젊은 지도자 | 필생의 라이벌 김성근과의 만남 | 자율 야구의 실패 | 시스템 야구의 정착 |2년간의 한화 감독, 그리고 LG 복귀 | 선동열 쇼크 | 센테니얼? 우리 히어로즈? | 감독 이광환의 야구사적 의미 | 서울대 감독과 또 다른시작 

제리 로이스터_ 롯데 팬들이 사랑한‘검은 갈매기’
국내 최초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 사령탑 | 흑갈매기, 롯데의 암흑기를 청산하다 | 이것이 로이스터의메이저리그식 야구다 | 선발투수 중심의 길게 보는 야구 | 미국식 야구 vs 일본식 야구 | 로이스터의 롯데 vs 김성근의 SK, 풀리지 않는악연 | 미국인 로이스터, 한국식 야구를 습득하다 | 운명공동체였던 카림 가르시아 | 단기전에 특화된 한국 야구 | 3번의 준플레이오프 도전과3번의 실패 | ‘No Fear’ 야구의 한계, 그러나…

한대화_ 야왕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프로야구 감독열전


김응룡_ 최고의 명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12년 한국 프로야구는 30돌을 맞았다.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지난 30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감독을 꼽으라면 통산 최다승(1,476승)과 한국시리즈 최다우승(10번) 기록을 보유한 김응룡 현 삼성 라이온즈 고문(이하 김응룡 감독)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80~90년대에만 6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준우승에 그쳤던 것. 그중 3번은 김응룡 감독의 해태에 당한 패배였다.


김응룡 감독은 1986년(4승 1패)와 97년(4승 무패), 그리고 93년(4승 1무 2패)까지 삼성과 맞붙은 3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승리, 삼성 팬들의 꿈을 좌절시켰다. 출범 이후 11번 중 6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삼성은 93년 이후 7년간이나 한국시리즈와 인연을 맺지 못하면서 지독한 암흑기를 보냈다.


그랬던 김응룡 감독이 2001년 삼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푸른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는 우승 청부사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2001년 준우승을 거쳐 2002년에는 LG트윈스를 4승 2패로 꺾고 마침내 삼성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팬들에게 선물했다. 가장 미웠던 감독이 가장 고마운 감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0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기억이 없었던 팀에 옮겨와서 보란 듯이 우승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이 과연 몇이나 될까?


김응룡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야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김성근 감독도, 국민 감독이라 불리는 김인식 감독의 업적도 김응룡 감독이 22년 동안 이룩한 업적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에서 김응룡 감독이야말로 최고 명장인 이유다.


최고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감독

김응룡 감독의 프로야구 개념은 확고했다. 프로는 돈으로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 그래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라고 선수들을 채찍질했다.


김응룡 감독은 프로 최초로 자율 야구를 도입한 감독이었고, 그러한 방식은 먹혀들었다. 그러면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내세워 선수단을 장악했고, 프런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소신껏 김응룡표 야구를 구현했다.


김응룡 감독이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었다. 강하면 부러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경기장 밖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러한 김응룡 감독의 양면성은 더욱 선수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했고 오직 그라운드 안에서 야구만 생각하며 최고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종범과 선동렬이 음반을 내는 외도를 하자 주저 없이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음반을 수십 장 사줄 정도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감독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프로 최초 퇴장 감독이었다. 더그아웃에서 기물을 파손하던 모습마저 미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통산 1467승 1138패 65무의 성적을 남기고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프로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아버지와 함께 평안도에서 내려와 정착하였기 때문에 연고가 전혀 없었으니 스스로 삶을 이겨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야구가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김응룡 감독의 야구는 독단적이고 오직 이기기 위한 야구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프로답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김응룡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최초로 연습생 신화를 쓴 야구선수였다."



김성근_ 생각하는 야구란 무엇인가

2011년 프로야구가 끝나고 SK 팬들이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준우승보다 더 이상 김성근 감독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천은 야구를 제일 처음 받아들였고 아마야구를 이끌었지만 프로에선 꼴찌를 도맡아 해왔다. 그런 인천 팀을 최초로 4강에 올려놓고, 2007년부터 1-1-2-1이라는 성적으로 SK 왕조를 이끈 주역은 김성근 감독이다. 그러고 보면 괜히 인천 예수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한 직종에 20년 이상 종사하면 장인이라고 부른다. 김성근 감독은 50년 이상 야구의 길을 걸었고 야구의 신이 되었다.


야구는 참 특이한 스포츠다. 축구나 농구, 배구와 달리 감독도 선수들과 같이 유니폼을 입는다. 감독이나 코치가 경기장에 들어가서 투수도 교체하고, 항의도 하는 등 경기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감독도 경기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이다.


경기 시간이 3시간이라고 할 때 직접 던지고 치는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감독, 코치, 선수들이 치열하게 사인을 주고받으면서 작전을 짜는 시간이다. 이 작전의 80% 이상은 감독에게서 나온다.


데이터 야구란 무엇인가

사전에서 데이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이론을 세우는 데 기초가 되는 사실. 또는 바탕이 되는 자료.

2. 관찰이나 실험, 조사로 얻은 사실이나 정보. 자료로 순화.


김성근의 야구를 데이터 야구라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 중에 열심히 적는다. 흔히 데스노트라고 불리는 이 노트에는 경기의 모든 상황이 기록된다. 그래서 김성근의 야구는 확률에 기초한 피도 눈물도 없는 야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김성근표 데이터 야구는 조금 다르다. 그냥 그때그때 다르다.


데이터 야구의 시작은 역시 데이터다. 사람들은 좋은 기록을 데이터로 본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최악의 상황을 그 팀의 전력으로 본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찾는 것이 데이터 야구다.


"모든 마이너스의 합이 그 팀의 전력이다."

"위기가 오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중요하다. 2년 전에 스프링캠프 예약을 하는 팀이 SK다. 최악을 상정해서 준비하니 위기가 안 온다."


2007년 이후 별다른 전력 보강은커녕 전력 이탈만 있었던 SK가 1-1-2-1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준비에 있다. 김성근 감독은 시즌 전에 승부를 본다. 자신들의 선발 로테이션과 상대팀의 투수 로테이션을 가상으로 돌려본다. 거기서 일주일에 2승, 5승…. 이런 식으로 승수를 계산한다. 거기서 투수 로테이션을 미리 짜고 시즌을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예상처럼 시즌이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맞아 들어간다. 김성근 야구의 전력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계산한 전력이기 때문이다.


시즌 전에 승수를 계산한다는 것은 많은 장점이 있다. SK는 이길 경기에는 총력전을 하고, 분위기가 기울었다면 다음 수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포기는 아니다. 승부가 결정된 상황에서 투수 교체를 한다는 것은 내일을 보는 것이다. SK는 항상 다음을 준비한다.


김성근 감독은 항상 선수들을 유심히 살핀다. 야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거기서 나온 데이터니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수들의 강, 약점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당연히 작전도 그때마다 다르다.


"미국에선 초구든 쓰리 볼이든 무조건 치라고 해요. 하지만 이건 3할을 치는 타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1할을 치는 선수는 쓰리 볼이면 걸어 나가는 게 좋아요. 초구 공략이 유리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투수에 따라 달라요. 제구가 좋고 초구를 스트라이크 던진다면 당연히 초구 공략이 좋아요. 하지만 제구가 나쁘다면?"


그런데 이런 데이터는 무시하고 그냥 확률이 이렇다고 하면서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롯데가 많이 보여준 장면이다. 찬스마다 초구를 공략한 롯데는 결국 득점과 연결시키지 못하면서 SK에게 패했다. SK 선수들은 롯데 선수들이 초구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유인구성 변화구로 유인했다. 여기에 롯데 선수들이 걸려든 것이다.


야구에서 데이터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기계와 다르다. 실수도 하고 편차도 심하다. 그렇기에 데이터라는 것도 당연히 상황마다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 지는 야구란 무엇인가

SK 야구는 탄탄하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방어율 1위, 2011년 시즌에는 2위를 기록했다. 방어율이 낮다는 것은 투수력이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SK는 볼넷이 많다. 실제 경기를 보면 불안할 때가 많다. SK의 진정한 강함은 투수력도 투수력이지만 수비에서 나온다. 수비에서 안타가 되는 것을 아웃으로 잡아내는 것보다 실수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야구에서 완성은 있을 수 없어요. 그냥 완성을 위해 나가는 거예요. 2007년에 SK에 갔을 때 이길 수 있는 팀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게 되니까 2년 후부터는 지지 않는 팀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지지 않는 팀은 완전해야 해요. 그런데 SK는 빈틈 투성이예요. 그래서 결과는 믿으면 안 돼요. 3대 0으로 이겨도 어떻게 이겼느냐가 중요해요. 우리가 못해도 상대가 더 못해서 이길 수 있어요. 1년에 우리가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경기가 몇 경기가 되나 싶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해요. 현재 SK는 50%도 안 돼요."


그러면서 선수들에게 정신무장을 강조한다.


"선수들에게 자만하지 말고, 착각하지 말라고 해요. 자신감은 노력에서 나오지만 자만은 태만에서 나와요.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 자신을 낮춰야 해요. 승부란 건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승부라고 하는 건 냉혹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마음을 약하게 먹는다면 SK만큼 약한 팀도 없다. 하지만 강한 마음으로 단결한다면 SK가 가장 강하다. 이게 SK 야구다."



김인식_ 야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

믿음의 야구를 보여주다

보통 김인식 야구를 말할 때 믿음의 야구를 가장 먼저 말한다. 믿음의 야구는 선수를 믿지 못하고 인내력과 배짱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야구다. 페넌트레이스 같은 장기전이 아닌 WBC 같은 단기전에서는 더더욱 하기 어려운 야구가 믿음의 야구다. 그러나 김인식은 2회 WBC에서도 어김없이 그만의 믿음의 야구를 보여줬다. 대표팀의 유일한 메이저리거 추신수가 대표적이었다.


애초 김인식 감독은 하와이 전지훈련 때부터 메이저리그 경험이 있는 추신수를 3번 타자에 기용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추신수의 상태. 추신수는 갑자기 찾아온 팔꿈치 통증으로 대회 직전까지 타격 컨디션이 최악인 상황이었다. 거기에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관계자들이 틈만 나면 이것저것 간섭을 해서 훈련도 마음껏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도 배트 스피드는 좀처럼 올라오지 못했고 추신수 본인의 부담감도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쳐줄 것이다라는 김인식 감독의 믿음은 확고했다. 일부 언론과 팬들은 지나친 낙관이라며 경계하고 비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실은 드디어 강호 베네수엘라와의 준결승전에서 나타났다. 이전까지 10타수 1안타 1할대 타율이었던 추신수는 선발 우익수로 출장한 베네수엘라와의 경기에서 1회 상대 투구 실바에게 큼직한 중월 쓰리런 홈런을 뽑아냈다. 이 한 방으로 경기는 사실상 한국팀으로 기울어졌다. 평정심을 잃은 선발투수 실바는 자멸했고 메이저리그 올스타급 선수들로 구성된 베네수엘라 선수들은 졸전 끝에 대패하고 말았다.


추신수의 활약은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이어져 0대 1로 뒤진 5회 상대투수 이와쿠마에게 솔로 홈런을 터트려 동점을 만들기도 했다. 김인식 감독의 믿음에 결정적 홈런 2방으로 보답을 한 셈이었다.


선수에 대한 믿음에 더해 수많은 경험, 특히 1회 대회 경험에 기반한 김인식만의 노련하고도 과감한 용병술도 준우승의 밑거름이었다. 압권은 2라운드 첫 경기인 멕시코전, 김인식 감독은 부진한 이종욱을 대신해 이용규를 톱타자로, 고영민을 대수비로 기용했고 이 두 선수는 보란 듯이 2개의 안타와 홈런으로 맹활약을 했다. 이대호 대신 스타팅으로 나온 이범호도 안정된 수비와 홈런포로 승리를 거들었다. 여기에 곳곳에서 보내기 번트, 딜레이드 스틸 등 현란한 작전을 구사하며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보던 멕시코 벤치를 농락했다.


투수 운용도 마찬가지. 류현진·정현욱·정대현·김광현·윤석민으로 이어진 이날의 계투는 각기 다른 스타일의 좌완-우완-언더핸드-좌완-우완으로 이어지며 멕시코 타선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홈런으로 상징되는 빅볼, 번트나 도루로 상징되는 스몰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토털 베이스볼의 전형을 보여주는 경기가 멕시코와의 일전이었다.


일본과 맞선 운명의 결승전, 통한의 사인 미스로 최정상에 서지는 못했지만, 김인식 감독은 2회 WBC를 통해 한국 야구의 다이나믹함을 보여줬다. 또한 베네수엘라 전에 앞서 말했던 위대한 도전, 출정식에서 했던  국가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라는 말을 통해 야구로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다. 국민 감독은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선동열_ 국보급 투수, 국보급 감독에 도전하다

스타 선수는 스타 감독이 될 수 없다?

흔히 스타 선수는 성공한 감독이 될 수 없다고들 말한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아 기량 면에서 완성되지 못한 선수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종목은 다르지만, 축구에서 으뜸가는 명장으로 손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선수 시절 단 한 번도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호세 무링요 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프로 선수로 뛴 경력조차 없다. 반면, 최고의 선수로 꼽힌 선수들 중 감독으로도 성공한 케이스를 찾기는 쉽지 않다.


선동열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슈퍼스타다. 국내에서는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고교무대를 평정한 선동열은 고려대에 진학했고, 이후 국제무대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려대 1학년이던 1981년에는 청소년 대표로 뽑혀 제1회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장해, 3승 무패 방어율 0.38의 놀라운 성적(24이닝 1실점 36탈삼진)으로 대회 MVP를 수상했다. 이듬해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도 0.31의 방어율로 3승(29이닝 1자책 30탈삼진)을 거둬 또다시 MVP를 거머쥐었다.


1983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15 1/3이닝 2자책점)와 대륙칸컵 대회(31이닝 4실점)에서 모두 좋은 피칭을 선보였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16이닝 동안 1실점, 같은 해 쿠바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17 1/3이닝을 던지는 동안 방어율 제로를 기록했다.


프로에 입단한 1985년 이후에도 선동열의 성공신화는 계속됐다. 1995년까지 11시즌 동안 소속팀에 6차례의 우승을 안겨주었고, MVP 3회, 올스타 9회, 골든글러브 6회 등 각종 타이틀을 휩쓸었다. 특히 선동열은 투수 최고의 영광인 트리플 크라운(평균자책점, 다승, 탈삼진 1위)을 4차례나 달성했는데, 그를 제외하면 2006년의 류현진(한화)와 2011년의 윤석민(KIA)만이 그 고지를 밟을 수 있었다.


선동열의 국내 프로야구 커리어 동안 최악의 시기는 건초염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1992년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이듬해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재차 거듭나면서 부상의 후유증도 오래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야구를 시작한 이래 선동열의 선수 시절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화려함을 보여줬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선동열 감독이 남긴 아쉬움

6년감 삼성의 사령탑으로 있는 동안 선동열 감독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삼성 역사상 최장수 감독이었으며, 유일하게 2번의 우승을 이끈 사령탑이었다. 그러나 밝은 면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은 12년에서 멈췄고, 6년간 선동열 감독이 삼성에서 기록한 .551의 정규시즌 승률은 삼성의 통산 승률(.562)에 살짝 못 미친다. 삼성 역사상 가장 공격력이 빈약했던 시기도 선동열 감독의 재임 시기와 겹친다. 여기에 불펜투수 쪽에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6년 동안 키워낸 선발 투수는 차우찬과 윤성환 정도를 제외하면 확실한 선수가 없다는 것도 선 감독의 단점으로 꼽힌다.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다

선동열은 삼성에서 해임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고향팀 KIA에서 그를 불러준 것이다. 해태 유니폼을 벗은 지 16년 만에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오매불망 선동열 감독을 원하던 호남의 야구팬들은 선동열이 정말로 KIA 감독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간 LG, 두산 등 수도권 구단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했던 팬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동열 감독 역시 고향팀으로 돌아와 기쁘다는 심정을 밝혔다. 과거 해태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포부도 감추지 않았다. 선동열 감독 이전에 조범현 감독 체제에서 KIA는 근성 있는 플레이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범현 감독도 2시즌 전인 2009년에 팀에 열 번째 우승을 안겨주었지만, 2010년과 2011년의 모습은 실망스러웠으며, 무엇보다도 불펜 운용에서 나쁜 평가를 받은 상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투수 운용 능력만큼은 이미 수년간 검증된 선동열이 야인으로 있었기에 교체 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선동열의 타이거즈는 2012년 새 시즌을 맞이했다. 타이거즈 팬들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타이거즈의 레전드이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였던 선수였던 선동열이 팀을 이끄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팬들은 그 누구보다 냉정하다. 선동열이라는 이름 석 자가 타이거즈 역사의 한 페이지, 아니 수백 페이지 이상을 장식하고 있지만 감독으로서 성과가 좋지 못하면 선수 시절의 명성까지 해가 갈 수 있다.


선동열의 타이거즈 감독 부임은, 국보급 투수 선동열 감독의 또다른 도전인 셈이다, 삼성에서 6년간 감독생활을 하면서 선동열 감독은 영광도 맛봤고 부침도 겪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경질되는 씁쓸함도 맛봤다. KIA 타이거즈에서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경험은 충분히 한 셈이다.


80~90년대부터 타이거즈의 야구를 본 야구팬들은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고 마운드에서 선동열이 환하게 웃으며 포수 장채근과 포옹하며 감격에 겨워하던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타이거즈 품에 돌아온 선동열 감독이 선수 시절 일구어낸 여섯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보다 더 많은 트로피를 안겨주길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으며, 그라운드에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과 팬들에 둘러싸여 하늘 높이 헹가래 쳐질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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