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조 인물 요람

   
유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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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정보
   
27000
2008�� 05��



■ 책 소개 
시조는 우리 민족 고유의정형시다. 시조의 뿌리를 더욱 튼실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중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고자 집필된책. 시조작가로 이름을 남긴 182명을 실명으로 소개하며 대표 시조들을 함께 실었다. 여러 사료를 통해 전하는 시조작가의 발자취와 작품을중심으로, 작가의 삶과 시대상을 세세히 조명함으로써 작품의 실체적 의미에 다가가려 노력했다.

■ 저자 유권재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계간「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2002년부터 4년간 계간 「시조문학」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2007년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남북문학교류위원및 (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 차례
1. 고려·조선 초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2. 조선 초·중기의 대표적인물과 시조 
3. 조선 중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4.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5. 조선 후기의 대표적 인물과시조 
6. 기녀들과 시조 

부록
색인




옛시조 인물 요람

  

1. 고려·조선 초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이조년(李兆年) : 고려 원종 10년(1269)~충혜왕 복위 4년(1343년)

고려 후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으로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며 본관은 경산(지금의 경북 성주)으로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이속(吏屬)인 장경(長庚)이다.


충렬왕 20년(1294)에 향공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후 안남서기, 예빈내급사, 협주지주사 등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 비서랑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을 당시 왕유소, 송방영의 이간으로 충렬왕과 충선왕 두 부자간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그는 진퇴(進退)를 삼가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다.


상왕이었던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물려받은 고(暠)가 고려 왕위를 넘보고 원나라에 무고함으로서 1321년 연경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5년간 억류당하고 있을 때는 발분하여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으며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 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후 충혜왕이 복위하여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내리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나 충혜왕의 방탕함을 충정으로 간해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경산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졸하였다. 사후에 성산후(星山侯)를 추증하여 충혜왕의 사당에 함께 모셨으며 그의 곧은 성격과 맑은 마음을 대변하듯 시조 다정가(多情歌)가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고 은하수도 삼경이 되어 기울어지니 모든 것이 고요한데 자기는 해소될 수 없는 정감 때문에 두견새와 함께 잠 못 이루는 밤 마당에 나와 밤 깊도록 서성이는 지은이의 모습이 시조 속에 투영된다. 이 시조는 고려의 시조 중 손꼽히는 걸작으로 배꽃과 달빛, 그리고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등 시각과 청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절창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의 심경은 정치를 비판하다 낙향하여 충혜왕의 잘못을 걱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여기에서 현실 참여의지도 읽을 수 있다.


성삼문(成三問) : 태종 18년(1418)~세조 2년(1456)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근보(謹甫),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으로 성승(成勝)의 아들이다. 홍주 노은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나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삼문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천,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을 때 정인지, 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세조의 집권과 즉위에 이르는 과정에서 많이 등용되고 배려를 받았던 그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깔려 있기도 했지만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들로서는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는 등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마침내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 이개, 유성원, 윤영손, 김질 등이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갑자기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삼문은 능지처형을 당했으며 멸문의 참화를 당했다. 그러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 홍섬, 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은 『추강집』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791년(종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綠)에 올랐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후세에 충의가(忠義歌)로 잘 알려진 이 시조는 작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갈 때 불렀다는 노래로 단종에 대한 충성을 읊은 것이다. 이는 비록 죽더라도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 제일 높은 봉우리에 큰 소나무가 되어 "흰 눈이 하늘과 땅을 뒤덮을 때(세상이 온통 수양대군의 권력 하에 들어감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음)"홀로 푸르리라는 작자의 의연하고도 굳은 절개와 꿋꿋한 성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 조선 초중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홍섬(홍섬) : 연산군 10년(1504)~선조 18년(1585)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퇴지(퇴지), 호는 인재(忍齋),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영의정 언필(彦弼)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제자로 중종 23년(1528) 생원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 시절에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어(1535) 3년 만에 풀려났는데 이때 「원분가(怨憤歌)」라는 가사를 지었다. 그 후 수찬, 경백, 대사헌을 지내고 명종 7년(1552)에는 청백리에 녹선된 뒤 벼슬이 누진(累進)하여 영의정에 올라 세 번이나 중임하였고 1579년 병으로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전임했다.


홍섬은 『주역』, 『서경』에 밝았고 문장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인재집(忍齋集)』,『인재잡록(忍齋雜錄)』이 있고 시조 1수가 전해진다. 남양의 안곡사(安谷寺)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옥을 돌이라 하니 그래도 애다래라

박물군자는 아는 법 있건마는

알고도 모르는 체하니 그를 슬퍼하노라


"옥을 돌이라 하니 그런 게 애닯구나, 박물군자(온갖 사물에 통달한 사람)는 알 법도 한데 알고도 모른 체 하니 그것을 슬퍼하노라."이것은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고 이를 알 만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눈치만 보는 세태를 탄식하는 내용으로 작자가 이조좌랑 시절에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 그 일당의 무고로 곤장을 얻어맞고 귀양갈 때의 심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3. 조선 중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정철(鄭澈) : 중종 31년(1536)~선조 26년(1593)

조선 선조 때 정치가로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국문학사에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돈녕부판관 유침(惟沉)의 아들이다. 맏누이는 인종의 귀인이며, 둘째 누이가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궁중에 드나들어 뒤에 명종이 된 경원대군과 친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명종 6)에 풀려난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면서 양응정, 임석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 수학하였고 이이, 성혼, 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156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의 처벌 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함으로서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종사관, 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75년에는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일로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쟁에서 서인의 편에 가담했다가 분쟁에 휘말려 고향인 전라도 창평으로 낙향했고 이후 1578년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 직제학, 승지 등을 지냈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행뢰사건(行賂事件)에 대한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탄핵을 입어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 「관동별곡」과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 대사성을 지내다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관찰사를 제수받았고 도승지,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1584년에는 대사헌을 제수 받아 1년 정도 관직에 있었고 이후 4년간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91년 이산해와 함께 세자를 세우려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된 후에 명천, 진주, 강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하였고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졸했다.


그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 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재 너머 성권농 집의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이야 네 勸農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고개 너머 성권농(농사를 장려하는 것이 소임이었던 성혼을 지칭) 집에 술이 익었던 말을 어제 듣고"술 한 잔 하고자 하는 급한 마음에 "누운 소를 발로 박차 일으켜 소잔등에 깔개를 놓고"희희낙락하며 소를 타고 찾아가나 싶었는데 어느새 성권농의 대문 앞에 당도하여 아이를 부르면서 정좌수가 왔다고 이르는 말이 귓전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이는 작자의 호방하고도 급한 성품, 그리고 문학적 역량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당시의 시조 작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구사에 의한 역동적인 이미지와 시상의 빠른 전개로 고도의 영상미를 창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각(술 익단)과 청각(종장의 대화체)의 효과까지 이끌어내 잘 융합시킨 송강 시조의 백미라 할 수 있다. 



4.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이택(李澤) : 효종 2년(1651)~숙종 45년(1719)

조선 숙종 때의 무신으로 자는 운몽(雲夢),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참판 진백(震白)의 아들이다. 숙종 2년(167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고산 첨사를 지냈다. 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대간(臺諫)과의 사이가 나빠 병을 핑계로 석 달 만에 사임했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일반비조니 네오 제오 다르랴


감장새(굴뚝새) 작다고 대붕아 비웃지 마라. 구만리 넓은 하늘을 너도 날고 감장새도 난다. 그러니 다 같은 날짐승인데 대붕이나 감장새나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면서 다 같이 새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감장새와 대붕이라는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대상을 시적 소재로 삼았다.


이는 무관이었던 작자가 처한 당시 사회에서 극단적인 분야인 문무, 즉 문을 숭상하고 무를 멸시하는 풍조를 풍자하고 문관이건 무관이건 그 본질에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강변하며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5. 조선 후기의 대표적 인물과 시조

이세보(李世輔) : 순조 32년(1832)~고종 32년(1895)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 옛시조를 창작한 조선 후기의 마지막 대가 중 한 사람으로 자는 좌보(左甫)로 능원대군의 7대손이며 아버지 단화(端和)와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의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857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김좌근과 김문근을 비난한 탓으로 안동김씨가의 미움을 받아 작호를 빼앗겼으며 1860년 신지도에 유배되어 3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가 고종이 즉위한 해 풀려나서 지종정경,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벼슬을 하였고 1895년(고종 2)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을 얻어 졸했다.


근래에 개인 시조집 『풍아(風雅)』, 『시가(詩歌)』 등이 발견되어 남긴 작품이 459수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언어를 다듬지 않고 쉽게 썼기에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으며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경우에 마지막 음절을 생략한 것으로 보아 시조창을 전제로 창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조를 풍류로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사대부의 시조가 관념적인 수사에서 벗어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참신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관리들의 부정부패 및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시조(61수)와 애정을 주제로 한 시조(104수)가 많고, 그밖에도 유배생활(78수), 도덕(24수), 기행(16수), 회고(35수), 유흥(41수), 농사(10수), 월령체(19수) 등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사물이나 경험을 시조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시계(視界)는 다양했다. 또한 월령체(月令體)의 시조를 새롭게 시도하는 등 기존의 전통적인 평시조의 형식과 내용에도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옛 선비들이 생활 속에서 많은 양의 한시(漢詩)를 남긴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나 사대부로서 국문시가인 시조를 이렇게 많이 남긴 경우는 그가 유일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는 시조창작을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했음이 틀림없으며 시조사적으로도 시조창작의 주체가 사대부에서 평민으로 옮겨진 조선 후기에 사대부로서 현실의 다양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백성을 알려하면 아전이 야속이요

아전을 알려하면 백성이 원망이라

어쩌다 인간의 생애가 다 각각


"수령의 자리에서 백성을 두둔하자니 아전이 야속하다 할 것이고 아전의 편에 서면 백성이 원망하니 어쩌다 인간의 생애가 이렇게 각각 다르게 되었는가”라고 읊은 이 시조는 현실비판류의 작품 중에서 감사(監司)라든가 수령(首領), 또는 아전(衙前)과 같이 어느 특정 벼슬아치를 지칭하지 않고 인간관계로부터 발생되는 심적 갈등구조를 풍자한 작품이다.


억울한 백성의 편은 정의의 편이요, 아전의 편은 부정 불의의 편이라는 기본 개념 하에서 비록 수령의 위치에 있지만 아전의 도움 없이는 수령으로서의 임무수행에 어려움이 수반되므로 어쩔 수 없이 아전의 편에서 정사를 펼칠 수밖에 없음을 강변하는 듯이 당시의 세정(世情)을 풍자해서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못 보는 님을 잊어 무방하것마는

든 정이 병이 되어 사르느니 간장이라

어쩌다 유족이 무족같이 상사불견


이것은 "그리워만 하고 만나보지 못하는 임을 잊어도 무방하겠지만 깊이 든 정으로 인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마치 불사르는 것 같이 애태우는 것은 오직 간장뿐이니 어쩌다 발은 있으되 발 없는 사람처럼 서로 생각만 하면서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가"하는 내용의 애정시다. 작자의 애정시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애정에서 오는 희열이나 쾌락을 읊은 것이 아니라 애정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어려움이나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이다.



6. 기녀들과 시조

매창(梅窓) : 선조 6년(1573)~광해군 2년(1610)

전북 부안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쌍벽을 이뤘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호는 매창(梅窓)이다. 하급관리의 서녀로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癸生), 계랑(癸娘)이라고도 했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 허균, 이귀 등과 교유가 깊었다. 촌은(村隱) 유희경과 20세에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었으나 짧은 만남으로 끝났고, 교산 허균과는 문학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며 시조 여러 수와 한시 70여 수가 전해진다. 사후 58년 만에 생전 그녀가 자주 놀러갔다는 개암사(開岩寺)에서 목판본 『매창집』을 펴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1974년 부안 서림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봄에 헤어져 가을이 다 저물도록 만나지 못한 천리 멀리 떨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시공(時空)에 시각적 요소(이화우, 추풍낙엽)를 가미하여 영상미를 극대화시키면서 작자의 감정을 적절하게 이입한 절창이다.


이 시조는 매창이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작품으로 유희경은 중인 신분이었지만 한시에 능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들의 인연은 촌은이 부안을 지나다가 그녀를 처음 찾았을 때로 그녀의 나이 20세였으며 촌은은 48세였으나 서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가까워졌고 정분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길지 못했다. 임진왜란의 의병으로 출전하기 위해 촌은은 열흘 정도를 머물다 서울로 올라가버렸고 그 후 그녀는 서울로 그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촌은이 다시 부안으로 내려와 짧은 재회를 나눈 후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유희경은 그보다 26년을 더 살다가 91세로 자택에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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