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자처럼
Prologue 왜 프랑스 여자인가?
지금 세계적으로 프랑스 여자라는 키워드가 대세라고 한다. 그녀들의 신경질적인 어투가,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듯한 옷차림이, 맨얼굴 같은 화장법이 모두 프렌치 시크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전 세계 여자들을 매료시킨다.
사실 프랑스 여자 신드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봐도 프랑스 여자들은 단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특혜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잔 다르크는 영국인 작가가 전기를 쓸 정도로 세계적인 구국의 상징이 되었는가 하면 퐁파두르 부인은 수많은 조강지처들에게 집단 테러를 받아야 함에도 어느덧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부흥시킨 문화 수호자로 불린다. 국민들의 혈세로 호의호식했던 철없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에 연민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세계를 정복했던 황제의 권위를 온갖 추문으로 그의 작은 키만큼이나 바닥에 떨어트렸던 조제핀 황후조차 나폴레옹과 애절한 사랑을 나눈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만약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마녀와 요부, 악녀로 불렸을 그녀들이 말이다.
도덕적 손가락을 피할 길 없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절묘하게 바꾸어 때로는 한 남자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여자들도 프랑스에서는 팜므파탈이라 부른다. 미국 영화였다면 그저 그런 포르노 영화가 되었겠지만 프랑스 여자 엠마누엘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자유분방한 성애 행위조차 에로티시즘의 걸작이 되지 않았던가?
프랑스 여자들에게는 대충 입은 것 같은 패션에도 ‘시크하다’라는 찬사를 붙여주고 그녀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조차도 지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게다가 프랑스 여자들은 살도 안 찐다고 하니, 이 ‘프랑스 여자’ 프리미엄은 가히 미국 원정 출산이나 로마 시민권이 부럽지 않은 특혜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파리라는 도시에서 함께 살고 있는 프랑스 여자들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정말 프랑스 여자들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였다. 왜 세상 사람들이 그녀들에게 ‘프랑스 여자’라는 특혜를 줄 수밖에 없는지, 그녀들이 다른 나라 여자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것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 책에는 너무나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다 간 또는 살고 있는 프랑스 여자 서른 명이 등장한다. 시대와 사상, 연령, 신분을 초월한 이 멋진 여자들에겐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던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자아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기에 그녀들은 사람들의 관념이나 자신이 직면한 환경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갈망했다. 그래서 바로 그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지성이나 재능을 향상시켰다. 능동적으로 살았으며 삶의 주인이 된 여자들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여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녀들은 적어도 그것을 콤플렉스나 약점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얼마든지 노력하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 ‘프랑스 여자처럼’ 그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프랑스 여자처럼…… 자신을 사랑하라!’
PART 1 열정으로 창조하라
가브리엘 샤넬, 코코라 불리는 여자
샤넬의 화려한 CC 마크 저편에는 바로 코코라 불린 가브리엘 샤넬이란 여자가 존재한다. 자신의 창조 욕망을 위해 운명과 고정관념에 맞서 싸웠던 당찬 여성이며, 시대를 읽을 줄 알았던 현명한 여성 코코 샤넬. 그녀는 샤넬의 디자이너로 일컬어지기에 앞서, 20세기 여성 해방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샤넬은 그만큼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샤넬은 그녀의 삶 내내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위해, 또 사람들의 인습과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남들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녀는 모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거추장스러웠던 여자들의 옷차림을 간편하고 실용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누구보다도 바로 자신이 그런 옷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남성복이나 군복의 디테일을 도입하고 저지를 써 구겨지지 않는 옷을 만들어냈는가 하면 스포츠웨어적인 발상으로 몸을 짓누르는 코르셋에 괴로워하던 당시 여성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남들과 다른 생각이, 또 자신의 독창성이 패션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차렸던 그녀의 재능 덕분이었다. 서서히 그녀의 팬이 생기면서 1910년 드디어 캉봉 가의 21번지에 샤넬 모드를 오픈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물자를 절약해야 하는 상황과 샤넬의 심플하고 간단하게 그러나 에지를 잃지 않는 패션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녀는 당시 남성복에 쓰던 저지를 과감히 도입, 여성의 허리를 해방시켰으며 복잡한 절개선을 정리한 심플함은 곧 패션이 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짧은 머리 스타일과 심플하고 편안한 옷들은 역동적인 삶을 꿈꾸는 당시 여성들의 이상형이 되어 샤넬은 드디어 파리 최고의 디자이너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시대는 그녀를 전설로 만들기에 완벽했다. 벨 아포크와 아르 누보 시대를 거치며 그녀가 살던 파리는 세계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설적인 인물들과 끊이지 않던 로맨스는 그녀를 여성으로서 성숙시켰으며 또한 예술가로서 창작 활동에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남자들을 통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지워 나갔고 상류 사회의 누구와도 대화가 통할 만큼 교양과 지성을 쌓았다.
패션의 역사에서 샤넬이 이룩한 가장 화려한 업적은 바로 그녀가 ‘패션은 예술품이 아닌 팔려야 하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비즈니스 우먼이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동시대를 살았던 바이어스 커팅의 대가 마들렌 비요네나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이끈 장본인 엘자 스키아파렐리와 같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뛰어난 천재성과 예술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이나 복식사에 이름을 남기는 디자이너가 된 것에 비해 샤넬은 사후에도 여전히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명성은 물론 천문학적인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향수 사업에 그녀가 관심을 보인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1921년, 그 유명한 샤넬 No. 5 향수를 발표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향수를 선보인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샤넬의 전설을 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려는 듯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의 삶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 친위대의 장교와 사랑에 빠지며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무엇이든 적극적이었던 그녀의 열정은 완벽했던 자신의 인생에 나치와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다. 종전 후 윈스턴 처칠의 중재로 겨우 법정행을 면할 수 있었던 그녀는 이후 모든 사업을 접고 스위스의 몽트뢰에 정착해 10년 동안의 기나긴 칩거 생활에 들어간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에 맞서 싸워왔던 샤넬의 도전 정신은 71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 그녀의 지우고 싶은 과거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파리의 아틀리에로 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샤넬이 떠난 패션계는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천재 디자이너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뉴 룩은 당시 최고 유행이었다. 뉴 룩이란 결국 그녀가 30년 동안이나 힘들게 해방시켰던 여자들의 어깨와 허리를 다시 꽉 조이는 스타일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교복 같은 어두운 컬러에 남자들의 옷에서 영감을 받은 편한 실루엣의 옷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타고난 독설가이자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던 패션계의 전설 샤넬은 여성의 몸을 조이고 감추는 뉴 룩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심플하고 편안한 스타일의 옷이 역동적인 삶을 꿈꾸는 여성에게 사랑받게 되면서 그녀는 샤넬의 전설을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그 당시의 샤넬이다. 이미 인생의 신산을 겪을 만큼 다 겪은 그녀는 굳이 도덕군자 같은 모습으로 가장하지도 않았으며 입에 항상 담배를 물고 있을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열심히 살았다. 세기말의 혼란함과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몸소 겪으며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현명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리고 인생 자체가 시니컬한 파리지앵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가브리엘 샤넬이란 여자의 존재를 알고 나면 샤넬은 더 이상 화려하기만 한 브랜드가 아니다. 바로 유행을 이끄는 최고의 패션 브랜드이면서도 무엇보다 자신의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적 발상의 브랜드라는 점이 천편일률적인 다른 브랜드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샤넬의 마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또한 샤넬이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이다.
PART 2 지성으로 지배하라
시몬 드 보부아르, 행동하는 지성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 시절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선입견을 깬 대표적인 사람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는 이 논리가 그녀가 살았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그녀는 열렬한 찬반양론을 일으키며 여성 해방의 기수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녀를 사르트르와 나누었던 교감과 평생의 동반자라는 점에서 철학가로서나 작가로서 그의 보조자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사르트르가 분명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가였다면 그녀는 분명 형이상학적이고 문학적인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가로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러 학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문체의 화려함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주의적 실존주의 문학의 지표 같은 존재였다.
뇌이유의 생트 마리 학교에서 문학을, 가톨릭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시몬은 이어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다. 그후 고등 사범대학에서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응시하는 장 폴 사르트르를 만난다. 이 시험에서 1, 2위로 나란히 합격한 두 사람은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한편, 정신적 교감으로 2년간 동반자적 계약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이 계약은 연장되어 사르트르와 사상적 동반자로 평생을 함께하지만 그들은 끝내 결혼이란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기존의 체제에 반기를 든다. 그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필연적 사랑(Amour Necessaire)과 ’우발적 사랑(Amours Contingentes)으로 구별을 했다. 이것은 이후,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나 도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기묘한 관계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자신의 제자였던 올가와 비앙카와의 동성애, 사르트르의 제자였던 보스트와의 열애……. 또 올가를 좋아했던 사르트르와 올가 이렇게 세 사람이 3년을 함께 살았는가 하면 미국 작가 넬슨 앨그렌과 열렬한 사랑을 했고 사르트르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연하의 작가 랑스만과 6년간 동거를 했다. 모두 이 ‘필연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을 오가며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녀와 사르트르의 이러한 연애관은 지금의 도덕 관념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여성의 인권을 도덕적 규범으로 규제하려는 당시의 절대적 사회 가치에 대한 반발이었고 사람들의 결혼, 일부일처제, 모성, 가족 관계 등에 관한 선입견을 뛰어넘는 행동이었다.
1943년 그녀는 자신과 제자였던 올가, 사르트르 세 사람이 동거한 경험을 소설로 쓴 『초대받은 여자』로 문단에 데뷔하기 전 마르세유, 루앙, 파리 등지에서 철학 교수로 14년간 근무한다. 이후 실존주의에 입각한 소설, 연극, 평론 등 다방면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글쓰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1944년에는 『피뤼스와 시네아스』라는 에세이집을 발간하고 1945년에는 『타인의 피』를 발표한다. 또 사르트르를 비롯한 당시의 좌파 지도자들과 함께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했고 이후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잡지를 떠난 사람들에 반해 그녀는 평생 동안 편집자로 남는다. 원래는 현대 문학에 있어서 실존주의를 표방한 잡지였으나 이후 문학을 넘어서 세계 정세와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평하는 잡지로 발전한다. 또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해 진정한 정의와 지성인의 자세를 촉구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가해졌던 비인륜적 행동에 대한 자성과 베트남 전쟁, 쿠바 독립 문제 등이 주제로 다루어져 많은 찬반양론을 일으켰고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1949년 출간된 『제2의 성』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주제로 유사 이래 남성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복종하게 했으며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의해 유린당했는지를 상세히 분석한다. 이 책에서 그녀는 복종을 강요하는 남성 우월적 신화의 허구성, 결혼과 가족 제도의 억압, 본성으로 강요된 모성, 금기시되어 있는 성에 대한 모순 등을 그녀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 역사적,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문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한 프랑스 내에서 그녀의 주장은 너무나 앞선 것이어서 보수적인 지식인 집단에 의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면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던 미국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급기야 가족 제도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바티칸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는 사회 현상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 책은 이후 미국의 여권운동가 베티 프리단, 케이트 밀렛, 수잔 손탁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1970년대 이후,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는 여권 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정작 프랑스 국내에서는 68혁명 이후에서야 비로소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그녀는 활발한 집필 운동과 더불어 여권 신장 운동에 전념한다.
그녀는 몽파르나스의 사르트르 묘지 옆에 묻히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행동하는 지성인의 모습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 착취와 부조리에 대응하고 자신의 명성을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무기로 썼으며 사회의 피지배자 계층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PART 3 사랑으로 도약하라
카트린 드뇌브, 영원한 마드무아젤
가장 프랑스적인 여성이면서 환갑을 넘은 여배우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카트린 드뇌브. 여배우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자신을 퇴물 취급하는 감독들과 작가를 원망하고 그들은 늙은 여배우가 주인공인 영화를 외면하는 대중을 탓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는 중년 여배우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이미 환갑의 나이를 훨씬 넘긴 카트린 드뇌브가 여전히 주연 배우로 활동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여배우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20대에는 너무나 뛰어난 미모 때문에 스타로서의 카트린 드뇌브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생의 많은 것을 경험한 관록의 여배우로서 젊은 시절보다 더욱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그녀와 젊은 시절을 공유한 대가들이 요즘도 그녀를 위해 작품을 쓰고 제작을 하기 때문이다.
카트린 드뇌브가 본격적으로 스타의 길에 접어든 것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로제 바딤을 만나고부터이다. “로제 바딤은 나를 진정한 여자로 만들어주었고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찾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나를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해주었다”라고 카트린은 바딤을 회상한다. 정작 바딤과 찍은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로제 바딤이 브리지트 바르도 이후 선택한 여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스타로 군림하기 시작한 그녀는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캐스팅되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청초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더욱이 새로운 장르의 뮤지컬 영화라는 호평과 함께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이제까지 바딤의 새로운 연인이나 프랑수아즈 돌레악의 여동생으로만 불렸던 그녀가 드디어 배우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그녀를 진정한 연기자로 만들어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반발>, 그리고 루이스 뷔뉘엘 감독의 <낮의 여인, 세브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
하지만 여배우로서 카트린 드뇌브가 전성기를 맞이한 때는 20대가 아닌 30대 후반, 1980년대 이후이다. 바로 최고의 걸작으로 여기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그녀를 위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는 영화 <마지막 메트로>. 나치가 점령한 파리에서 극단의 지하 창고에 숨어 있는 유태인 극작가 남편과 정의와 열정이 넘치는 연하의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 사이에서 방황하는 카트린 드뇌브의 원숙한 연기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생애 최초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언론과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여배우의 아름다움은 필수 조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배우로 평가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바로 드뇌브가 그 경우이다. 아름다운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는 세월과 함께 최고의 훌륭한 배우가 되었다. 현실감 없이 아름다워 제대로 그녀를 보지 못하게 했던 요소들이 이제는 바로 그녀의 카리스마가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여성의 가치를 그저 아름다움이나 나이로 계산하지 않는 프랑스라는 토양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에펠 탑과 함께 프랑스의 우아함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된다는 카트린 드뇌브. 환갑이 훨씬 넘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불리는 것은 그녀의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번 에이즈 방지 기금 모금에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사형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한다.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는 노골적으로 성차별을 받았던 세골렌 루아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요즘은 제인 버킨과 더불어 미얀마의 군정 하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아웅 산 수 치 여사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30년이나 넘게 전설적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소중한 자신의 삶을 아주 열정적으로 사는 가장 이상적인 프랑스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PART 4 스타일로 사로잡아라
제인 버킨, 끝나지 않는 노래
1960년대 이후의 프랑스 대중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되는 커플이 있다. 바로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이다. 작곡가이자 영화감독이고 배우이자 화가, 음유 시인이었던 세르주 갱스부르는 분명 위대한 예술가이며 기인이었다. 항상 술에 취한 것처럼 잠꼬대하듯 물질 만능에 젖은 세상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만의 언어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노래나 영화에서는 그만의 언어가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 뒤에 얼마나 맑고 깨끗한 시인의 영혼이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아내였던 제인에게 주옥 같은 그의 시를 노래하게 했다. 제인 버킨이 특유의 영어 악센트와 함께 흐느끼듯, 속삭이듯 부르는 그의 노래들은 샹송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제인과 세르주는 1968년 영화 <슬로건>을 촬영하면서 만난다. 처음에 제인은 그의 무례함을 참을 수 없어했고 그는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스무 살의 영국 아가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커플이 된다. 그녀는 가수로서 갱스부르의 노래를 꾸준히 부르면서도 배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수영장>에서는 단역으로도 출연을 한다. 하지만 1970년대 그녀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는 사람들의 선입관을 만족시켜주는 유약하고 시니컬한 금발 미녀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심한 영국식 악센트는 배우로서 입지를 좁게 하는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했다. 적어도 세르주 갱스부르가 동명의 노래를 제작 감독한 영화 <쥬 템 므아 농플뤼>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는 갱스부르의 영화에서 완벽한 미소년으로 변신했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로 생활을 하는 두 동성애자 사이에 끼어든 미소년 같은 여성을 연기했던 것이다. 물론 주제의 파격성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제인 버킨은 금발의 멍청한 역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요즘도 이 영화는 파리의 여러 소극장에서 상영될 만큼 ‘컬트 무비’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에 이르러 이들 부부는 이별을 한다. 갱스부르의 알코올과 마약 중독 또 기인적인 행동을 제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인과 세르주 부부는 갈라섰지만 그들 사이에는 소중한 딸 샤를로트가 있었으며 갱스부르는 제인을 위해 계속 노래를 만들었다.
1991년 3월 2일, 위대한 시인이자 영원한 정신적 보헤미안이었던 세르주 갱스부르는 세상과 이별한다. 나는 지금도 몽파르나스 묘지에 그가 묻히던 날, 관 앞에 망연자실 앉아 있던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제인 버킨은 세르주가 떠나고 불과 5일 만에 자신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는다.
그녀는 요즘도 가수로서 갱스부르 생전 만큼이나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영화와 연극 등에서도 맹활약 중이다. 그녀의 프랑스 데뷔 시절, 항상 문제가 되었던 영국식 악센트는 이미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였다면 당장 교정이나 틀니를 했을 그녀의 벌어진 앞니 모습조차 앨범 사진으로 쓸 만큼 그녀는 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 바로 내가 그녀에 대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대중에게서 사랑을 받는 예술가로서 사회 참여 운동도 그녀를 수식하는 형용사의 일부이다. 요즘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석방을 적극 지지하며 프랑스인들에게 호소 중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프랑스에서는 가장 영국스러운 여자가 전 세계인들에게는 가장 프렌치 시크를 대변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