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전용복

   
전용복
ǻ
시공사
   
13800
2010�� 05��



■ 책 소개
일본의 자존심,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해낸 한국의 옻칠장이!

옻칠의 나라,일본에서 그것도 국보급 건물인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를 맡아 진행한 한국인 전용복. 3,000명에 달하는 일본 최고의 옻칠 장인들과의 경쟁 끝에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를 맡게 된 그는 한국에서 데려간 장인 300명과 함께 3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는 가난과 슬픔으로얼룩진 유년시절을 거치고 난 뒤 우연히 마주친 옻칠의 세계에 매혹되어 전 생애를 옻칠에 바쳐 왔다.

이 책에는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하고 세계적인 칠예작가로 인정받기까지의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와 옻칠의 세계화를 위한 그의 집념이 담겨 있다. 그의 작업실 대들보에는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있다. 독보적인 기술로 일본으로의 귀화를 간청받기까지 한 그는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새로운것에 도전하고 모험으로 살아가고 있다. 옻칠로 세계를 감동시킨 장인 전용복의 꿈과 집념의 이야기는 도전과 열정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어가는삶의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또한 최근 작품들의 도판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전용복의 이야기와 더불어 화려한 옻칠 작품들을 감상할 수있다.

■ 저자 전용복
항상 조선의 칠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전용복은 국내에서 옻칠작가로 활동하다 일본의 유서 깊은 연회장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냄으로써 세계적인 칠예작가로 우뚝 섰다. 그는 가난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년시절을 거치고 난 뒤우연히 마주친 옻칠의 세계에 매혹되어 전 생애를 옻칠에 바쳐 왔다. 현재 세계 최대의 옻칠 미술관인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의 관장, 전용복칠예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일본 이와데 현의 문화예술진흥심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품 활동과 제자를 양성하고있다. 

■차례
추천의 글 - 어둠의 바닥에서 찾아낸 천 년의 빛 
프롤로그 - 옻칠로 한국의 혼을 깨우다

Part 1 옻칠의 신비에사로잡히다 
창백한 내 영혼의 뿌리 
형의 죽음이 내게 남긴 것 
꿈꾸는 시간조차 사치였던 세월 
꿈의단초가 된 낯선 경험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구 
옻칠의 신비에 빠져들게 한 와태칠 
옻칠의 나라, 일본 
운명적으로나를 찾아온 조그만 밥상 

Part 2 가고자 하는 길에 모든 것을 걸다 
꿈의 연회장메구로가조엔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 
일본의 옻칠 기법을 순례하다 
혼신을 다한 피와 땀의 기록들 
일본의 국보급 장인도포기한 송학도
마지막 승부수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
일본의 자존심, 메구로가조엔에 입성하다
또 다른 복병, 비자 발급
메구로가조엔의 낮과 밤 
천혜의 땅, 가와이무라 
버려진 폐교를 최고의 칠예연구소로 
대한민국 예린칠예연구소 개소식

Part 3 완벽을 향한 열정이 최고를만든다 
칠흑 같은 밤들을 하얗게 지새우다
일본화, 목판화까지 맡게 되다
조선 장인의 혼을살려내다
난파선의 선장 같은 하루하루 
가와이무라의 사계 
자연의 축복으로 태어난 새 생명 
세계 최초의 옻칠 엘리베이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동심으로 만든 황홀한 우주 공간 
전 생애를 걸고 완성한 사계산수화 
철저한 원칙주의가명품을 만든다 
목숨을 건 6개월간의 사투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다 

Part 4 잊혀져 가는 옻칠 문화를 위한 집념 
문화를 사랑할줄 아는 사람들 
신비한 음색을 만들어내다 
우리 문화의 혼불을 만나다 
한국의 혼을 보여줄 옻칠 미술관을세우다
천만금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시계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조선의 신비 
오직 완벽함에만 허락되는 옻칠의 미학

에필로그 - 영혼에 옻을 입혀주고 싶다

 





한국인 전용복

프롤로그 - 옻칠로 한국의 혼을 깨우다
23년째로 접어든 일본에서의 생활, 실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언제나 고군분투하고 조급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신명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자연의 수액인 옻칠에 매혹됐고 옻칠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홀한 빛깔에 도취됐다. 옻칠의 신비는 내 평생을 쥐고 흔들었고 나는 기꺼이 내 전 생애를 맡겼다.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야 했으나 그 터널 끝에는 찬란한 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옻칠공예품은 내구성이 강해 보존만 잘하면 만 년을 견딘다. 실제로 일본 홋카이도에서 93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옻칠장신구가 발견되었으며, 고구려 벽화나 팔만대장경도 옻칠로 도장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 년을 견디며 귀중한 것들을 지켜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옻을, 정성을 다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제해 바르면 다른 어떤 도장재도 모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 나타난다. 나는 이런 옻칠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남기신 혼의 정수(精髓)이자 영원불멸의 유산이라고 확신한다. 그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땅에서 깨우칠 수 있었다. 일본 도쿄의 메구로가조엔은 일본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들이 총망라된 문화예술의 집합체이자 온통 옻칠로 뒤덮인 환상의 세계였다.


옻칠은 반만년 동안 유유히 흘러온 우리 민족의 정기였고, 메구로가조엔은 이 땅에서 건너간 옻칠로 일본인들이 피워 올린 옻칠 문화의 불꽃이었다. 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위하여 숱한 조선의 장인들이 나라 잃은 울분을 삭이며 피와 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훼손돼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복원 작업을 해야만 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그 작업을 따냈고, 나와 무명의 한국 장인들은 선배 장인들의 넋을 기리겠다는 일념으로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복원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3년간의 복원 작업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일이었고 처절한 사투였다. 연인원 10만 명이 투입되어야 해낼 수 있다는 방대한 작업량이었고 무려 10톤의 옻칠이 사용되었다.


그동안 우리 조상들에 의해 유용하게 사용되어 온 옻칠의 재건을 다짐하고 수없이 도전해왔다. 그 노력들이 내 나라가 아닌 일본 땅이었기에 수많은 시련에 부딪쳤지만 그 시련의 중심에서 휘청이고 있을 때도 가슴 한구석에는 자긍심과 뿌듯함이 존재했기에 나는 오늘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아직 돌아보기는 이르다. 하지만 옻칠과 함께 한 내 삶의 궤적(軌跡)이 쇠락해가는 이 땅의 옻칠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작은 밑거름이라도 된다면 결코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리라.


Part 1  옻칠의 신비에 사로잡히다
옻칠의 나라, 일본

1980년대 초, 동료들과 함께 일본을 견학할 기회가 생겼다.


과연 일본은 옻칠의 나라였다. 아득한 선사시대 때부터 사용된 옻칠을 대륙을 거쳐 받아들인 후 그들은 자신만의 문화로 정착시켰던 것이다. 일본이 이처럼 대륙에서 받아들인 옻칠을 자신들의 문화로 정착시키고 나아가 세계화시킨 것은 자연지리적인 환경에 기인한다.


일본은 지진이 잦은 섬나라다. 이런 땅에서 석조건축 양식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없다. 수시로 땅이 흔들리니 목조건축이 아니면 생활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무는 세월이 지나면 자연환경에 따라 뒤틀리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발라서 변형을 막아야 오래 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옻은 일본인들에게는 천혜의 재료였다. 옻은 공기 중에 습도가 높으면 수분을 빨아들이고, 습도가 낮으면 수분을 내뿜는다. 이는 나무의 뒤틀림을 막을 뿐 아니라 대기의 환경을 조절하는 기능까지 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옻칠기술이 톡톡히 한몫 했다. 옻칠을 통해 선진문화를 접하고 그 제작기술을 배워와 경제부흥의 기틀로 삼은 것이다. 그후 그들은 옻칠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뻗어나갔다. 우리는 일본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옻칠 산지를 둘러보면서 가장 놀란 것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작업 시스템이었다.


관서지방의 다카오카는 대표적인 옻칠의 도시다. 훌륭한 공예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재료, 디자인, 기술의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다카오카에서는 옻이나 목재 등 양질의 재료가 구비된 데다가 내로라하는 예술대학 교수들의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기술이 어우러져 마음껏 솜씨를 뽐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탄복을 거듭하는 동료들 속에서 나는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항아리에서 필요한 부분은 정작 빈 공간이듯이, 그처럼 최상의 작업 시스템에서 빚어내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나는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들의 작품은 분명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예쁘게만 보이려고 애쓴 흔적 뒤에는 정작 창작자의 혼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강렬한 도전의식을 느꼈다. 내가 가진 혼, 나만의 힘을 이곳에서 펼쳐 보인다면 분명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간의 창작활동으로 내 독특한 작품세계를 꽤 인정받던 때였고, 스스로도 회화적 요소를 비롯한 예술적 감각을 풍부하게 지녔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분명히 그들의 작품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작품들에는 삶에서 무르익은 혼과 철학이 있다. 민화만 보더라도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풍자정신, 샤머니즘이 녹아 있다.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모티브는 바로 ??민족??이었다. 내가 특별한 애국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만 표현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본인들의 극도의 장식적인 아름다움에 싫증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언젠가는 뭔가 새로운 세계에 목말라 할 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당시 한국에는 옻칠 예술시장이 없었다. 결국 내가 헤쳐나가야 할 곳은 일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밤에 호텔로 돌아와 나의 이런 뜻을 일행들에게 넌지시 얘기해봤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비자 문제도 까다로울 것이다.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몇 년간 서너 번 일본을 오가면서 나는 일본으로 진출하기 위한 구상에 골몰했다.


Part 2  가고자 하는 길에 모든 것을 걸다
꿈의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메구로가조엔(目黑雅?園)은 1931년에 건립된 대규모 연회장이다. 아서원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특유의 미학으로 조성된 정원 안에 요정건물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가조엔을 창업한 호소카와 리키조는 소화 3년이던 1928년 봄, 도쿄 시바우라에 있던 자신의 웅장한 저택을 개조하여 독특한 순일본식 요정을 건립했다. 그러다 1931년 가을, 현재의 메구로 지역에 방대한 부지를 넓혀나간 끝에 연건평 8천여 평, 객실 200여 호에 바닥 길이만도 2킬로미터에 이르는 대규모 호화 연회장으로 꾸몄다.


격조 있는 명목을 사용한 건물의 설계와 공사에는 당시 일본 건축계 최고의 기술진을 투입했다. 그 결과 메구로가조엔은 화려한 실내 디자인, 정교한 옻칠 가공, 나전과 목재의 섬세한 세공 등 일본의 독특한 기술이 모두 발휘된 우아한 예술품으로 탄생되었다.


메구로가조엔 현관 입구에는 대형 나전 작품인 ‘천마도’가 장식되어 있다. 이 천마도만 보더라도 호소카와 리키조가 조선식 나전 기법을 얼마나 선호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전의 흐름을 적절하게 살려 말의 근육이나 구름에 운동감을 주는 기법은 완벽한 조선식이다. 이러한 호소카와 리키조의 미술적 취향은 메구로가조엔 작품들에 많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숱한 조선의 장인들이 동원됐을 것임을 짐작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 
나는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시회를 통해 내 작품을 먼저 알리는 것이었다. 여러 곳에다 수소문을 해본 끝에 도쿄 이케부쿠로의 선샤인시티 빌딩 5층 한국문화원에 전시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문화원 윤택 원장은 내 작품을 보자마자 전시를 결정했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멋지고 화려한 전시회였다. 100평이 넘는 전시실에는 연일 사람들로 들끓었다. 전시회가 끝날 무렵, 메구로가조엔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


나는 제일 먼저 현관에 걸린 천마도를 보는 순간부터 무릎이 굳어져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번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 작가의 작품은 접했지만 이처럼 거대한 작품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게 한 것은 말의 탄력 있는 근육과 은은한 구름을 표현한 나전 기법이었다. 자개의 결을 살려 꿈틀대는 듯한 운동감을 드러내는 기법이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던 우리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아니,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가!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닌가?"


탄식도 잠깐, 현관을 들어서니 온통 환상과 경이의 세계가 펼쳐졌다. 모든 벽과 천장 전체가 옻칠로 되어 있었다. 200여 개나 되는 방 하나하나가 모두 옻칠로 이루어진 별세계였다. 옻칠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이들이 만든 성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 같았다. 특히 ??나가도??라는 방에서 나는 숨이 콱 막혔다. 한쪽 벽면 전체를 장식한 송학도에는 어른 키보다 큰 학들이 나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길이는 어림잡아 7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작품 속의 학들은 주름질, 꺾음질 같은 조선 나전 기법의 세례를 듬뿍 받아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비록 세월에 부대껴 낡고 초라해졌지만 그 솜씨는 오롯하게 살아 있었다. 한국 선배 장인들의 땀과 정열, 칠 예술이 이 방에 모두 녹아 있었다.


그런데 작품의 한쪽에 죽파(竹波)라는 일본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그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광신(光信)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광신이라는 이름은 죽파라는 일본 화가가 도안한 그림에 자개를 새겨 넣은 조선의 무명 장인임에 틀림없었다.


나에게 호소카와 도시로 상무가 넌지시 귀띔을 했다. “3년쯤 후에는 이곳을 철거해야 합니다. 전통식으로 복원할지, 현대식 오피스타운으로 지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되면 전 선생도 참여할 준비를 해보시지요.”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자리에 아파트나 빌딩을 짓게 된다면 기대감은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그들의 정서로 볼 때 반드시 복원 쪽으로 결정이 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 승부수
드디어 마지막 날, 그동안 현장을 조사한 결과에 대한 최종 평가회의가 열렸다. 시작부터 매서운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 선생, 정말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이젠 이판사판인 심정이었고 거칠 것이 없었다.


"당신들의 신중한 면은 높이 평가하지만 나 역시 쉽게 대답한 것이 아니오. 나는 내 말에 목숨을 걸고 책임질 것이오. 이 일에 목숨을 건 사람 있으면 누구든 나와보시오." 무슨 혈기였을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내가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1조 원대의 엄청난 공사, 국보급의 값진 미술품 복원, 더구나 선대의 유업을 훼손하지 않고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그리 녹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2년 동안 메구로가조엔을 다니며 떼어낸 옻칠 작품 조각을 주머니에서 하나 꺼내 비장의 카드처럼 그들 눈앞에 들이댔다.


“이 조각은 벽 자체에 바른 칠이라서 어차피 건물이 헐릴 때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제 작업실에서 밤 새워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재료의 성분을 분석하고 공정을 따져보는 일을 무려 2년간 해온 것입니다. 제가 준비한 자료는 머릿속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발로 뛴 땀의 결실입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맡게 된다면 60년 전에 했던 그 방식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할 것이며 가장 품질이 좋은 옻칠만을 사용할 것입니다.”


나는 일주일 만에 메구로가조엔 미술품의 복원에 관한 브리핑을 마쳤다. 만약 2년간의 치밀한 준비가 없었으면 몇 달이 가도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아니 지금부터가 시작일지도 몰랐다.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
부산의 공방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계절은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마음은 휑한 겨울이었다. 전기도 끊겼고 차가운 공기를 데워줄 석유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작업장 문을 열면 차가운 모래바람이 훅 하고 얼굴을 덮쳤다. 한 달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그처럼 큰 공사를 쉽게 결정할 수는 없겠지.’ 이렇게 자위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미 신용은 바닥난 상태였다. 다시 공방을 운영할 여력도, 사람도 없었다. 다시 나만의 작업을 시작할 의욕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말라갔다.


“따르릉…….” 느닷없는 전화벨소리가 지친 상념을 깨웠다. “메구로가조엔의 신축공사에서 옻칠에 관계된 모든 일을 전 선생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입이 얼어붙은 듯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메구로가조엔을 처음 가보고 운명적인 예감을 느꼈던 순간부터 열병을 앓듯 보내온 지난 시간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작업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마음껏 소리쳤다. “나는 해냈다! 전용복이 드디어 해내고야 말았다!”


Part 3  완벽을 향한 열정이 최고를 만든다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다

개관을 앞둔 메구로가조엔은 흡사 전장을 방불케 했다. 직원들은 퀭한 얼굴에 눈빛은 광채를 내뿜으며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고용된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들이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옻칠을 하고 금을 붙이다보니 얼굴에 떨어지는 옻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 생칠은 직접 피부에 닿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독하다. 더구나 아무리 옻에 면역된 사람도 피곤이 쌓이면 견딜 재간이 없다. 우리 모두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벗겨진 살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자네 얼굴이 꼭 문둥이 같네.”


“소장님은 어떻고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이네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허리가 끊어지고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다 얼굴은 생채기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쓰렸지만 가끔 여유를 찾던 순간이었다.


1991년 11월 13일. 오픈식은 오전 10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말끔히 단장한 메구로가조엔 아트리움은 고대의 신전처럼 장엄하고 화려해 보였다. 매일 보던 모습이었지만 그날따라 확연히 달라보였다.


‘이 곳을 정말 우리 손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60년 전 조선의 이름 모를 장인들이 피땀으로 완성한 메구로가조엔을 이제 그 후예인 우리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대역사를 완성한 것이다. 미술관 엘리베이터나 사계산수화 등 내 창작품 옆에는 금으로 된 기념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전용복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현관에 휘날린 태극기나 기념판 등은 호소카와 도시로 사장의 배려였다. 한국 장인들이 아니었으면 결코 메구로가조엔을 제때에 개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깊이 새긴 것이었다.


내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광이고 승리였다. 나아가 우리를 선택해서 끝까지 믿고 기다려 준 메구로가조엔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는 문화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문화는 만드는 자의 것이 아니라 쓰는 자의 것이다.


Part 4  잊혀져 가는 옻칠 문화를 위한 집념
우리 문화의 혼불을 만나다
 
나는 옻칠의 무한한 표현력을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풍요로운 색감에 날렵한 붓질을 더하면 현대 회화작품보다 더 현란한 색채가 뿜어져 나온다. 패널 작업은 내가 단순한 칠장이가 아니라 옻칠로 새로운 예술장르를 개척하는 칠예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내 의지의 산물이다. 나는 독학으로 옻칠을 배운 뒤 늘 나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 보이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왔다.


작품의 모티브는 고향, 기다림, 갈대, 바람소리 등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겨 있던 풍경들이다. 이 같은 내면의 사색에다 생명력과 운동감을 부여하는 것이 주된 테마다. 선조들의 전통적인 방식에 이 시대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요소를 결합하는 것이다. 고향이나 그리움을 주제로 한 내 일련의 작품들은 전통과 생명을 상징하는 소재들로 가득 차 있다. 


몇 년 전 친지의 소개로 메구로가조엔과 그 복원 장소인 가와이무라에 가보고 싶다는 분들을 안내한 적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방송 작가 이금림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그 분에게서 소설가 최명희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다. 어렸을 때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두 분은 끊임없이 격려와 자극을 주고받는 문학적인 도반(道伴)이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명희 선생님은 당시 무려 17년 동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린 끝에 필생의 역작인 대하소설 『혼불』을 막 탈고한 직후였다. 이금림 선생님은 내가 추구하는 세계와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며 내게 『혼불』을 꼭 읽어보길 권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떨리는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10권이나 되는 소설을 세 번이나 읽었다. 읽을수록 감탄할 만한 필체로 묘사된 우리 문화의 정수가 새록새록 살아났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최명희 선생님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최명희 선생님도 TV 프로그램에서 나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 대역사를 이루어 낸 우리 장인들의 피와 땀이 생각나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 놓았다. 우리는 오랜 시간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서로의 작품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최명희 선생님은 이따금 글이 막힐 때면 ‘글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탄식을 하며 엎드려 울 때가 있다고 했다.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야 하는 창작인의 고뇌가 내 가슴에 예리하게 꽂히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메구로가조엔 복원 작업 중 ‘내가 왜 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선택했던가’ 하는 회한에 얼마나 스스로 끌탕을 쳤던가. 그러나 광풍처럼 저주와 탄식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도 창작에의 열망은 꺼지지 않은 불씨였다. 우리는 금세 동지가 된 느낌이었다.


그분에 대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떠난 후의 그리움은 평생 가시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나약해지거나 게을러질 때마다 나를 질타하는 준엄한 죽비(竹?)로 살아 있다. 그분이 큰 배로 우리 민족문화를 실어 날랐다면 나는 작은 나룻배로나마 부지런히 담아야 할 일이다.

살아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메구로가조엔의 작품들과 가와이무라의 풍광을 결국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내게는 못내 한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분이 먼 곳에서나마 둘러보셨으리라 믿는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의 혼불은 영원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