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Barack Obama : Politician - Black Americans of Achievement

   
헤더 레어 와그너(역자: 유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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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출판
   
12000
2008�� 10��



■ 책 소개
출생부터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되기까지‘버락 오바마’(Barack Obama)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자기와의 오랜 싸움을 극복해내고 세계인들에게희망을 상징하는 리더가 된 오바마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소신과 원칙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는열정,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피우는 긍정의 힘. 이 모든 것이 녹아 있는 오바마의 인생 이야기는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희망과자신감을 심어준다. 상처를 극복해내고, 나의 가슴에 희망의 씨앗을 키운다면 그 씨앗은 잘 자라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있게 될 것이다. 


■ 저자 헤더 레어 와그너(Heather LehrWagner)
미국의 인물 평전 전문 작가. 『버락 오바마』를 비롯, 마틴 루터 킹, 무하마드 알리, 서굿 마셜, 콜린파월 등의 인물 이야기를 집필했다. 총 30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그중에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정치와 정부, 의회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제공하는 책들이 여러 권 있다. 듀크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를, 윌리엄메리대학에서 정부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고있다.


■ 역자 유수경
영어교육전문가로 현재 ‘유수경닷컴’의대표다. 호주 퀸스랜드대학에서 아동학을, 본드대학에서 수용언어학, 영어학, 일어학을 전공하고 대중매체학으로 석사과정을, 미국 UCLA대학에서TEFL로 석사, 언어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강남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영어교육전문가 양성과정’ 강의를 맡고 있으며 각방송매체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초등 영어, 어린이 영어교육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어 왕초보 엄마도 따라하는 자신만만영어태교법』『순수 토종 현진이의 조기영어 성공기』『뱃속에서 초등까지 엄마표 영어교육백과』『초등교사를 위한 Song & Chant모음집』『베이비 잉글리시가 평생간다』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상처는 희망의 토양이되기도 합니다
오바마와 그의 가족


Part 1. 소년의 영혼은 낯설고 외로웠다 - 혼란스러웠던유년기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
조금 특별한 오바마의 가족이야기
다시 미국으로


Part 2. 아무도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질문들 - 방황을 거듭했던사춘기
아버지의 실체
나는 누구인가

Part 3. 삶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다 - 성숙과변신의 청년기
새로운 출발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다


Part 4. 아버지의 땅에서 미래를 그리다 - 뿌리를 찾는여행
가족에게 상처 치유법을 배우다
뿌리를 찾아 떠난 여행


Part 5. 자기 앞의 벽을 뛰어넘다 - 희망을 주는사람
원대함을 향한 준비
정치세계에 들어가다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서다


에필로그 - 비쩍 말랐지만 ‘다리’의 힘이 센 그 사람 이야기
오바마가 걸어온길
부록 - 버락 오바마 연설문 - 영한대역
미국의 약속(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수락 연설문 : 2008)
더 나은 미국을위하여(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출마 연설문 : 2007)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소년의 영혼은 낯설고 외로웠다 - 혼란스러웠던 유년기
조금 특별한 오바마의 가족 이야기

버락 오바마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Barack Obama Sr.)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 오바마는 케냐의 루오족 출신으로, 빅토리아 호 주변 알레고리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영국이 세운 학교에 다니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미국 유학생으로 뽑혀 장학금을 지원받게 된 아버지는 스물세 살이던 1959년 하와이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와이대학교 역사상 아프리카에서 온 최초의 흑인 학생인데다, 넘치는 자신감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제학생연합회를 조직해 초대회장까지 맡다 보니, 아버지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어 강의에서 미국 캔자스 출신의 열여덟 살 백인 여성 스탠리 앤 던햄을 만나 기존의 관습과 시선을 무시한 채 결혼했다. 그리고 1961년 8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버락 오바마를 낳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초반에 양가의 걱정과 반대에 부딪히긴 했지만, 결국에는 성사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와이대학교를 졸업한 후 하버드에서 장학금을 제안받았는데, 화려한 경력을 발판 삼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결국 하버드를 선택했다. 그리고 하버드에서 공부를 마친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조국 케냐로 돌아갔다. 그때 오바마는 겨우 두 살이었다.


오바마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이 흑백혼혈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오바마가 용기와 꿈을 잃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특히 어머니는 오바마에게 친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면서 정신적 지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두 사람은 이혼한 후에도 오바마의 이야기로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재혼한 남편 롤로의 몰락을 지켜보고 그와 갈등을 겪으면서, 어머니 역시 아버지 오바마의 강한 신념과 의지에 기대고 싶었을지 모른다. 사실 친아버지가 가족보다 하버드를 택했을 때도 그를 이해해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친아버지가 품은 꿈이 개인의 출세보다 조국 케냐의 발전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존경과 사랑은 흑인 전체로까지 발전했다. 어머니는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흑인의 장점과 우수성을 가르쳤고, 흑인이라는 사실은 강인한 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영광의 짐이자 위대한 유산이며, 운명의 특혜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오바마의 어머니는 ‘흑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둔 젊은 이혼녀’라는 주변이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아버지의 부재가 아들의 마음에 상처나 분노를 남기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오늘날 오바마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열정을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당당한 리더로 우뚝 설 수 있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힘이었던 것이다.


1971년, 열 살이 된 오바마는 혼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있는 하와이로 4년 만에 돌아왔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다니게 될 학교는 오하우에 있는 하와이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였다. 주로 하와이의 부잣집 백인아이들과 아시아계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오바마 같은 흑인 아이가 쉽게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 살면서도 오바마의 미래를 위해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 오바마를 홀로 하와이로 보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기꺼이 맞아주었다. 그뿐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푸나호우학교 졸업생인 직장 상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오바마를 입학 대기자 명단에 올렸다. 그렇게 해서 오바마는 5학년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7년간 푸나호우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무도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질문들 - 방황을 거듭했던 사춘기
나는 누구인가

친아버지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 이듬해,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동생 마야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와 인류학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오바마와 어머니, 마야, 이렇게 세 식구는 푸나호우학교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인류학과의 현지 작업을 위해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나고, 하와이에 남은 오바마는 더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더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사귀려고 노력했다. 당시 오바마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는 멋진 학생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오바마의 한 담임선생님은 그의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와 유쾌한 웃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10대 오바마가 외적으로 보여준 일부에 불과했다. 푸나호우에 잘 적응해 활달하게 생활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지만 내적으로 오바마는 인종과 정체성으로 심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바마는 내적으로 혼자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부터 백인 중심인 미국에서 흑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으면서 어렵고 복잡하게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의 혼란과 고민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답을 찾지 못한 오바마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와 마리화나를 피우며 그런 고민들로부터 잠시나마 탈출하려고 했다. 가끔 코카인도 손에 댔다.


그 시절 방황하는 오바마를 붙잡아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마약복용으로 변해버린 그를 보며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신, 자주 편지를 보내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일과 그곳의 생활을 들려주며 오바마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의 미래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의 편지는 오바마에게 채찍이자,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였다.


오바마는 기로에 섰다. 불량 청소년이 되어 혼돈의 나락으로 빠지느냐, 세상을 당대로 자신을 단련하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느냐.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선택했다.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워나가기로 말이다.



삶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다 - 성숙과 변신의 청년기
새로운 출발

2년간 다니던 옥시덴탈대학을 떠나 컬럼비아대학교의 교환학생이 되었다. 나쁜 습관과 방종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성실하게, 수업시간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열심히 생활하던 오바마는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오바마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학업에 집중했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반 인종차별 시위와 같은 흑인학생단체 활동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피부색이나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당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오바마는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려면 자신은 물론 나라에도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잘 조직된 지역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역주민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지역공동체가 조직되어 정원처럼 관리되어야 하며, 공동체의 권익은 싸워서라도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지역사회 운동가의 소임이며 이 일을 통해 그가 꿈꾸는 미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오바마는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83년, 대학 졸업을 몇 달 앞둔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카고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연봉 1달러를 받는 지역사회 운동가로 첫 발을 내딛었다.


지역사회 운동가가 되다
당시 시카고는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흑인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얼마 전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해럴드 워싱턴이 시장으로 뽑히면서 시카고에 살고 있는 흑인들은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오바마는 훈련생으로, 베테랑 활동가와 함께 ‘개발공동체 프로젝트’라는 단체와 위스콘신 철강공장의 폐업으로 타격받은 흑인 거주 지역을 관리하는 일을 맨 먼저 맡았다. 오바마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불만을 행동으로 이끌어내어 더 나은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불만만 가득할 뿐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해나갔다.


오바마가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지녀야 할 안목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직사업의 성과가 늘어날수록 오바마도 함께 성장했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오바마를 헌신적이고, 열심히 일하며, 총명하고 영감을 주는, 남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개발공동체 프로젝트 이사회에 소속된 한 사람은 오바마를 ‘주어진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해내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오바마는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문제점들에 대해 폭 넓게 생각하세요. 지역사회에서 벗어나지 말고, 지역사회 안에서 생활하세요. 사람들과 힘을 모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사람들을 제외시킨다면, 당신의 힘만 약해질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그들을 위한 일이라고 결정내린다면, 그들은 그 문제점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땅에서 미래를 그리다 - 뿌리를 찾는 여행
뿌리를 찾아 떠난 여행

오바마는 한창 몰두하던 지역사회 활동을 잠시 멈추고 케냐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신의 뿌리를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러면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해보니 그의 짐은 착오가 생겨 다른 지역으로 가 있었다. 공항직원이 미안해하면서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름과 기타 필요한 사항을 기록해주면 짐이 들어오는 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오바마가 서류를 작성해 돌려주자 그의 이름을 본 공항직원이 물었다. “혹시 오바마 박사님 가족이신가요?”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직원은 자신의 아버지와 오바마의 아버지가 친구였고, 집에 놀러왔을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이름을 보고 그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주었다. 그는 난생 처음 ‘오바마’라는 이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편안함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졌다는 것도 느꼈다. 이곳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자부심 같은 것도 생겼고, 이름으로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의 이름이 바로 그의 뿌리이고, 그의 이름이 곧 그의 소속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길을 헤매다가 드디어 목적지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오바마와 가족들은 함께 기차를 타고 키수무라는 곳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살던 땅이자,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묻혀 있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오바마가 도착하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집안에서 뛰어나와 만날 날을 오랫동안 꿈꿔왔다며 눈물을 훔쳤다. 오바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품을 보고 싶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수첩과 편지묶음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편지묶음을 풀어보니 모두 아버지가 미국의 각 대학에 보낸 것으로, 서른 통이 넘었다. 그리고 추천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오바마는 조국의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열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최소한 1년이라도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부르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불만,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참 울고 난 후 오바마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아버지가 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케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왜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면서 케냐 정부와 맞섰는지. 아버지는 모두 함께 잘사는 조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자신의 손으로 그 꿈을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바마가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려고 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오바마는 케냐여행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고, 아버지의 선택을 인정하며 마음으로나마 화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오바마가 미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자기 앞의 벽을 뛰어넘다 - 희망을 주는 사람
정치세계에 뛰어들다

1996년 오바마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측근들이 일리노이주 의회의 공석에 출마할 것을 권한 것이다. 그때 오바마의 나이는 35세로,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지도 몇 년이 지났고, 결혼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흑인을 포함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뭔가 더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활동은 하버드 로스쿨 재학시절부터 염두에 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바마는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오바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반상회와 교회 친목회, 미용실, 이발소를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길가에 두 사람만 서 있어도 선거홍보물을 건네주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바마의 진정성과 젊은이다운 패기를 느꼈고, 덕분에 그는 마침내 일리노이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입법과정에 참여했다. 그는 사법위원회, 지방자치위원회, 복지위원회의 회원이었고,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오바마가 해낸 일 중 가장 혁신적인 일이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일은 2003년에 ‘범죄자 취조과정에서의 비디오 녹화 필수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일리노이주 경찰에게 사형이 가능한 모든 중죄 사건을 심문할 때는 그 과정을 반드시 녹화하도록 한 것이다. 아무리 범죄자라 하더라도 다른 죄를 더 많이 뒤집어쓰거나 부당한 폭행을 당해서는 안 되며, 그 누구도 억울하게 사형수가 되거나 흉악범이 무죄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당시에 굉장히 혁신적이었고 그만큼 논란도 많았다. 특히 경찰과 검찰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일리노이주 주지사, 양당의 상원의원들, 심지어 사형 반대 단체들까지도 오바마가 내놓은 법안을 완고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물러서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설득시켜 나갔고, 결국 이 법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오바마가 언제나 성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실패의 경험들이 많았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오바마가 속해 있던 민주당이 그가 주 상원의원으로 일한 8년 중 무려 6년 동안이나 소수당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오바마의 정책들이 소수였던 민주당 내에서조차 자주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그에 대해서는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에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 진영 모두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마지막 임기 2년 동안 수많은 의원들 가운데 중요한 일을 맡아 하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오바마는 미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다. 그는 적극적인 자세, 호소력 짙은 설득, 돈으로 살 수 없는 열정으로 선거기간 동안 총 1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마련하여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비록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지만, 그가 살아온 삶과 정치철학에 대한 배경을 들으면 누구나 그를 좋아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4년 3월, 예비선거에서 오바마는 52퍼센트 이상의 지지율을 얻어 승리의 기쁨을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11월, 투표율 70퍼센트를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며 두 개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자리 중 하나를 차지했다. 그는 연방 하원의원을 거치지도 않은 채, 곧장 상원의원에 입성한 것이다.


- 영혼을 흔드는 말솜씨
2004년 7월, 오바마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연설이 하나 탄생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존 케리(John Kerry)를 위한 전당대회 기조연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바마는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자, 연방 상원의원 후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자, 공화당 대선 후보 조지 부시의 적수인 존 케리의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한 것이다. 오바마의 연설 제목은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이었다.


“우리는 냉소적인 정치에 참여합니까? 희망적인 정치에 참여합니까? 눈먼 낙관론자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고질적인 무지에 빠져 있습니다. 실업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해결될 거야. 건강보험, 그것도 신경 안 써도 저절로 해결되겠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좀 더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노예들이 화롯불 주위에 둘러앉아 불렀던 ’자유의 노래‘입니다. 고향에서 천만 리 떨어진 곳을 찾아 자신들의 터전을 일군 이민자들의 희망입니다. 젊은 해군 중위들이 용감하게 메콩강 삼각주를 순회하며 가졌던 희망입니다.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 불평등에 도전할 때 지녔던 희망입니다. 미국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믿었던 어느 이상한 이름을 가진 말라깽이 아이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담대한 희망‘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자, 우리 조국의 초석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갈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중산층에게는 안정감을, 노동자 가족들에게는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자들에게는 일할 수 있는 곳을, 살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살 집을, 그리고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인종차별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을 폭력과 절망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직면한 도전들과 반드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하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아버지. 제2차 세계대전 때 육군 병사였던 외할아버지와 폭격기 조립공장에서 일했던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곳은 꿈이 실현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고 이런 미국에서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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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전당대회 시작 전 18분 동안 진행된 그 연설로 오바마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미국의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라고 평가받았다. 그때부터 민주당 후보들은 선거자금 조성을 위한 연설이나 선거운동 지원 연설이 필요할 경우 오바마를 찾았고, 오바마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민주당의 경쟁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날은 3년 후인 2007년, 역사적인 그의 대통령 선거 활동의 첫 출발점이 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