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사이클 선수로서 대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뒷받침을다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25살 꽃다운 나이에 생존 가능성 3%의 고환암 말기 진단을 받은 랜스의 비참한 심정,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고환과뇌 일부를 제거하는 대수술과 16개월간의 투병기, 암을 극복한 후 출전한 1999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 그리고 2000년 우승에 이르기까지랜스 암스트롱의 극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가 고환암에서 폐암, 뇌암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고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투르 드 프랑스의 7연승을 이뤄낸 것은 강인한 정신력이 있기 때문이다. 책 곳곳에서는 포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의 강인한 정신력을 찾아볼 수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암과 싸우는 눈물어린 투병기와 승리를 위해 자전거 위에서 그가 보여준 투지는 암환자와운동선수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보여준다.
■ 저자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은 1971년 9월 18일 미국 텍사스주 플레이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철인3종 경기를 하였고, 고등학교 졸업후 본격적으로 사이클 선수로 데뷔하였다. 사이클 선수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1996년 고환암 진단을 받았고 암세포는 가슴과 뇌에까지 침투하여생존확률 3%라는 담당의사의 소견까지 받게 된다. 사망신고와도 같은 진단에도 불구하고 그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쪽 고환을 잘라내고 뇌를절단하는 등의 대수술을 거치고 16개월의 항암치료와 투병의 세월을 이겨낸 그는 1998년 2월 사이클 계로 당당히 복귀한다. 이듬해인1999년, USA 사이클링이 ‘금세기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로 꼽은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을 일궈냈다. 그리고2005년까지 내리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랜스는 암을 극복한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랜스 암스트롱 재단’을 설립하여 암 환자를돕는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재단에서는 ‘강하게 살자(Live Strong)’라는 글자가 새겨진 노란 고무밴드를 1달러에판매하며 절망에 빠진 환자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물론 전 세계의 정계 및 연예계의 많은 인사들이 이 밴드를부착하며 그와 함께 뜻을 나누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 이 ‘리브 스트롱’ 밴드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암 환자들의지원금으로 보태지고 있다.
샐리 젠킨스(Sally Jenkins) - 『맨 윌 비보이스』의 저자이며 팻 서미트와 함께 『정상을 향하여』 『레이즈 더 루프』를, 딘 스미스와 『어 코치스 라이프』를 공동 집필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위민스 스포츠 앤 피트니스」「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하는 스포츠 전문 기자이다.
■ 역자 김지양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를졸업하였고, 같은 대학교의 통역번역대학원 한영과 석사 과정을 이수하였다. 『강물소리 귀에 쟁쟁하니』 『영어 글쓰기의 기본』을 번역하였다.『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를 번역하며 희망의 무한한 힘과 삶을 더욱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 차례
Stage One 불청객
StageTwo 출발선
Stage Three 어머니를 문 밖에 세워둘 수는 없어요
Stage Four 두려움과 희망
StageFive 희망의 씨앗
Stage Six 암과의 사투
Stage Seven 사랑에 빠지다
Stage Eight 새로운 도전
Stage Nine 투르 드 프랑스
Stage Ten 아버지가 되다
Stage Eleven 삶은 계속되다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발선
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다. 28년 동안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나도 똑같이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했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채 아버지와 결혼을 했지만, 내가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혼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겠다는 생각이 정말 확고했기 때문에 베이비 돌 셔츠(허리 부분이 풍성하고 헐렁한 셔츠- 옮긴이)를 입어서 부른 배를 감추고 다녔다. 누가 간섭하거나 낳지 말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난 후 어머니는 가끔 이모와 함께 나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가곤 했다. 어느 날은 이모가 나를 안고 계산대에 갔는데, 점원들이 귀엽다고 나를 어르면서 “아기가 너무 귀여워요”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걔는 내 아이예요.”
우리는 댈러스 근교 오크 클리프의 단칸방 아파트에서 살았다. 빨랫줄엔 셔츠가 펄럭이며 널려 있고 길모퉁이엔 켄터키 프라이드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핑크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서 켄터키 프라이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길 건너편 크로거스 식료품점에서 캐셔 일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는 우체국에서 반송된 편지를 따로 모으는 아르바이트와 서류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공부를 하고 나를 돌보면서 이 모든 걸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월수입은 400달러였는데, 집세가 200달러였고 내 놀이방 비용이 주당 25달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필요한 건 뭐든 다 해 주셨다.
마침내 어머니는 연봉 1만2천 달러를 받는 비서 일자리를 얻어, 댈러스 북쪽의 리처드슨이라는 동네로 좀 더 좋은 집을 구해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일하는 회사는 에릭슨이라는 통신회사였는데, 어머니는 열심히 일해서 승진도 하였다. 이젠 더 이상 비서가 아니라 거래처를 상대하는 어카운트 매니저가 된 것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부동산 중개인 자격증도 따셨다. 이것만 봐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예리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다. 또한 내 누나로 보일 만큼 젊어 보였다.
우리집 길 건너편에는 일렬로 늘어선 상가 맨 끄트머리에는 리처드슨 자전거 마트라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반짝이는 눈에 키는 작지만 몸이 딱 바라진 짐 호잇 아저씨가 가게 주인이었다. 짐 아저씨는 가게 소속으로 뛰는 사이클 선수들을 후원했고, 아이들이 운동을 시작하는 걸 항상 돌보곤 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나와 신선하고 따끈따끈한 도넛을 사주곤 하셨는데, 가다 보면 짐 아저씨의 가게를 지나쳐 가게 된다. 짐 아저씨는 어머니가 힘겹게 생활하는데도 언제나 깔끔한 모습이며, 나도 단정하고 잘 자란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를 좋게 보신 아저씨는 내게 자전거를 주겠다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전거를 갖게 되었다. 그 자전거는 슈윈 맥 스크램블러였다. 노란 바퀴가 달린 못생긴 갈색 자전거였지만 난 그 녀석을 너무나 좋아했다. 아이들은 왜 모두 자전거를 좋아할까? 자전거는 해방이고 독립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가져 보는 바퀴 달린 물건이기 때문이다. 규칙도 어른도 없이 맘껏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게 준 것 중에서 내가 별로 원하지 않았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양아버지였다. 내가 세 살 때 어머니는 테리 암스트롱이라는 사람과 재혼을 하셨다. 그는 땅딸막한 키에 콧수염이 길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식료품점에 식품을 납품하는 일을 했는데 어딜 보나 떠돌이 장사꾼이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어 와서 생활비에 일조를 했다. 한편 어머니는 직장에서 월급이 인상되어 좀 더 부자동네인 플레이노에 집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수영 클럽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들어간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회원으로 있는 로스 리오스 컨트리클럽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살짜리에게 수영은 힘든 스포츠였다. 그리고 플레이노의 수영 클럽은 특히 혹독했다. 나는 크리스 맥커디라는 코치 아래서 수영을 했는데, 그는 내가 평생 만나본 최고의 코치 중 하나였다. 1년 안에 크리스는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1,500미터 자유형 경기에 나가 텍사스 주 4위를 차지했다. 그는 우리 팀을 진지하게 훈련시켰다. 우리는 매일 아침 5시 반에서 7시까지 훈련을 했다. 조금 더 자란 후부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어둑어둑한 새벽 거리를 따라 16킬로미터를 달려 수영 클럽에 나갔다. 학교에 가기 전에 4천 미터의 수영을 하고, 오후에 다시 두 시간 동안 또 6천 미터를 했다. 그러니까 하루에 수영으로 10킬로미터, 자전거로 32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다. 그렇게 하도록 어머니가 놓아두신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머니가 출근을 해야 해서 나를 차로 데려다 줄 수 없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내 격한 성미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13살쯤 되던 어느 오후에 나는 리처드슨 자전거 마트 근처에서 아이언키드라는 대회의 전단을 보게 되었다. 사이클, 수영, 달리기가 결합된 주니어 트라이애슬론 경기였다. 나는 트라이애슬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세 종목 모두 내가 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참가신청을 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상점에 가 트라이애슬론 경기복을 사 주셨다. 경기복은 크로스트레이닝 바지와 빨리 마르는 합성 섬유로 만들어진 셔츠여서, 옷을 갈아입을 필요없이 세 종목을 모두 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첫 경주용 사이클도 샀다. 날씬하고 우아한 도로용 사이클 메르시에였다.
나는 큰 점수 차로 우승을 했다. 연습 한 번 안 하고 말이다. 얼마 안 있어 휴스턴에서도 트라이애슬론 경기가 있었다. 난 거기서도 우승했다. 휴스턴에서 돌아올 때,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난 주니어 수영에서는 정상급이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그러나 트라이애슬론에서 나는 플레이노에서 최고였고, 또 텍사스 주 전체에서도 최고였다. 나는 그 최고라는 느낌이 좋았다.
두려움과 희망
나는 두려움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암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육체의 통증과 함께 그 동안 알고 있던 두려움은 두려움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온 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내가 느꼈던 두려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비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돈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모든 두려움은 갑자기 두려움이 아니라 사소한 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타이어의 펑크, 실직, 교통 체증 같은 모든 삶의 걱정거리들은 말 그대로 사소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 요동치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해도 그건 그저 요동치는 비행기일 뿐이지 암은 아닌 것이었다.
암에 걸렸다는 걸 어머니께 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리브스 박사의 사무실에서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릭 파커 박사가 집으로 왔다. 나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하겠다고 박사에게 말했다. 박사는 나 대신 전화를 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말할 방법은 없었다. 릭 박사가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는 방금 퇴근을 해서, 정원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다.
“린다, 랜스가 직접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제가 대신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랜스가 고환암 진단을 받았어요. 내일 아침 7시에 수술할 예정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유감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리로 좀 오셔야겠어요.”
어머니는 울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박사는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어머니를 최대한 빨리 오스틴으로 오시게 했다. 어머니는 곧 태도를 바꾸셨다. “알았어요. 곧 갈게요.” 어머니는 나와 대화를 나눌 사이도 없이 전화를 끊으시고는 작은 가방에 생각나는 대로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공항으로 달려가셨다.
진단을 받고 24시간 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고환암이 세 단계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기에는 암세포가 고환에서만 발견되고, 중기에는 암이 복부의 림프절로 이동한다. 말기에는 폐 등 중요한 기관으로 전이된다. 검사 결과 나는 말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내 몸에 3개의 서로 다른 암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융모암은 악성이었다. 아주 공격적이고 혈액을 타고 전이되는, 통제하기 어려운 암이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첫 주에 어머니는 병원에서 내 처방전을 모두 가져오시고, 진료 기록을 모두 모으시고, 암에 대한 자료를 구하러 서점을 뛰어 다니시고, 내 스케줄을 짜셨다. 어머니는 메모를 할 수 있는 노트와 누가 나를 보러 왔는지 기록할 방명록도 가져다 주셨다. 어머니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내 친구들의 방문 일정을 잡으셨다. 내가 혼자 너무 외로워하는 시간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걸 ‘공동체 달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겐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한꺼번에 많이 와서 번잡한 날도 없었고, 너무 적게 와서 내가 심심해지는 일도 없었다.
어머니는 항암치료 일지를 쓰기 위해 3개월짜리 달력을 그리셨고, 거기에 약의 목록과 약 먹을 날짜를 기록해 놓으셨다. 어머니는 마치 암이 무슨 프로젝트인 것처럼 관리를 하셨고, 스스로 그 프로젝트의 매니저가 되셨다. 어머니는 색연필과 차트, 시간표를 갖고 암 치료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짜임새 있게 조직화하셨다.
어머니는 영양사와 약속을 잡으셨다. 나는 절뚝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차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영양사를 만나러 갔고, 영양사는 암 퇴치 지침을 주고 항암치료 약과 잘 어울리는 음식의 리스트를 만들어 주었다. 놓아기른 닭과 브로콜리는 많이 먹고 치즈나 지방이 많은 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화학약물의 독성과 싸우려면 비타민 C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즉시 어머니는 브로콜리를 잔뜩 삶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정신없이 하는 모습 뒤에서 어머니는 사실 힘들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 가족들과 통화를 할 때는 목소리가 떨리면서 울먹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면 전화를 끊곤 하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감정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나는 밤에 어머니가 방에 홀로 들어가 우시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암에 걸렸으며, 사이클을 타지 않을 거라고 발표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다. 빌, 리사, 어머니, 스폰서, 그리고 심지어 유럽 기자들을 위해 전화회견까지 있었다. 그 회견에는 내가 다음 시즌에 합류할 예정이었던 프랑스의 코피디스 팀도 있었다. 기자회견장은 카메라로 가득했고, 나는 준비한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암’이라는 말을 하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와 카메라맨들은 충격적이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코피디스의 한 담당자가 전화로 내게 말했다. 그들은 내가 암을 이겨내고 다시 사이클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저는 암과 싸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싸워 이길 겁니다.”
새로운 도전
암 치료를 하면서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다시는 욕도 안 하고, 맥주도 안 마시고, 화도 안 내겠다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상황은 변하면서 다짐도 약해진다. 맥주를 또 한잔 마시게 되고, 욕도 내뱉게 된다. 매일을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말이 있는데, 내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별 효과가 없다. 내가 만약 그 순간만을 위해 산다면 나는 수염도 제대로 안 깎은 지저분한 모습에, 아주 착하지만 무능력한 인간이 될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정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사이클에 복귀한 것이 승리라고 한다. 하지만 처음에 그건 재앙이었다. 1년을 꼬박 죽음에 대한 공포에 갇혀 지내고 나면, 남은 여생을 영원한 휴가처럼 보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직장에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암 극복 이후의 삶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사이클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심리적 갈등을 겪으리라는 것을 몰랐다. 훈련이 잘 안 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3개월간 화학치료를 받고, 1년 동안 지옥에 있었잖아. 그래서 사이클이 잘 안 되는 거야. 내 몸은 절대로 예전과 똑같아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정말 해야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에이, 오늘은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야.”
18개월 만에 처음 나간 프로 경주는 스페인에서 5일간 열리는 루타 델 솔이었다. 거기서 14위를 했는데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우울하고 불편했다. 나는 14위가 아니라 우승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또, 그 첫 경주에서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너무 싫었다. 나는 경기성적에 대한 불안으로 부담을 느꼈고 기자들의 호들갑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소리 없이 나타나 아무 말도 없이 경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에 대한 회의도 없고 이름도 없이 싸우면서 말이다. 나는 그저 펠로톤에서 달리고 싶었고 내 무쇠 같은 다리를 되찾고 싶었다.
“사이클 타는 게 행복하지가 않아요.”
“왜요?”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사이클을 타며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사이클을 타야 하는 환경과 조건이 싫고,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게 싫어요. 여기서의 이 생활이 싫어요. 유럽에 있고 싶지도 않아요. 루타 델 솔 경주에서 이미 복귀할 수 있다는 걸 보였고, 해냈어요. 이제 나 자신에게 암 공동체에 더 증명할 게 없어요. 그러니 사이클은 이제 끝내는 게 좋겠어요.”
나는 킥이 “그럼 내 학교는 어떡해요? 내 직장은요? 왜 이리로 이사하게 만든 거예요?”라고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캡 페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할리데이비슨 광고를 보았다. 그 광고는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 나는…….”이라고 해 놓고는 “일몰을 더 많이 본다.” 등 몇 가지를 써놓았다. 나는 잡지에서 그 광고를 뜯어서 갖고 왔다. 그리고 킥에게 내 마음을 설명하면서 그 광고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바로 나의 문제에요. 내 인생은 그래서는 안 되거든.” “음, 우리 푹 자요. 그리고 며칠 기다리면서 결정을 내려보죠.” 그녀가 말했다.
킥, 빌, 크리스, 오크는 함께 공모를 했다. 나 모르게 어떻게 내가 다시 사이클을 하게 할지를 계속 논의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은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빌은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릴 미 프로 챔피언십 경주에 마지막으로 출전하라고 나를 설득했다.
크리스가 오스틴으로 날아왔다. 그는 차고에서 내 자전거가 아직도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는 킥과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사이클을 정말 다시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이성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네는 다시 살아났어. 그리고 이제는 생활로 돌아가야지.”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다시 복귀전을 완벽하게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오스틴에 온 표면적인 이유는 전미 챔피언십 경주를 위해 트레이닝 계획을 짠다는 것이었다. 또, 제2회 ‘장미를 향한 경주’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장미를 향한 경주’는 최소한의 체력이 있으면 되는, 오스틴 시내를 도는 간단한 경주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나갈 수는 없어.” 크리스가 내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단을 부끄럽게 만들지는 말아야지.”
크리스는 은퇴를 하건 말건 상관없이, 원래 몸을 회복하기 위해 8일에서 10일 동안 집중 훈련 캠프를 가자고 했다. 오스틴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오스틴에서 벗어나세. 여기서는 집중이 안 돼. 골프장도 너무 많고, 주의를 흐리는 게 너무 많아.”
첫 방문지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이었다. 크리스는 대학 트레이닝 센터에 예약을 했고, 나는 그곳에서 고정 자전거를 타고 검사를 받았다. 내 체력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였다. 크리스는 내 VO2 맥스와 젖산 역치를 측정했다. 수치는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나는 뚱뚱해져 있었고 체력도 형편없었다. 원래 내 신체조건은 최상급 중 최상급이었다. 보통은 85였던 내 VO2 맥스 수치는 이제 64가 되어 있었다.
크리스는 우리를 도와주던 대학의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봐요. 돌아올 땐 74가 될 거요. 일주일 만에 그렇게 만들 겁니다.” 크리스는 내 몸이 아주 짧은 기간에 새로운 역치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며칠 만에 전성기 때의 체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도전의식을 심어주려는 마음으로 그는 내 와트 수를 일주일 만에 올릴 수 있을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자네가 500을 못 넘긴다는 데 100달러 걸지.” 그가 말했다. 나는 내기를 받아 들였다.
그때부터 우리가 한 일은 먹고 잠자고 사이클 타는 것뿐이었다. 봄기운은 이제 막 산으로 올라오기 시작해, 안개가 산과 숲을 감싸듯 이슬비가 내렸다. 우리는 매일 빗속을 달렸다. 추위가 내 폐를 무감각하게 만들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서리가 나왔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덕분에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뒷길을 달렸다. 포장도 안 되어 있고 지도에도 없는 길도 많았다. 우리는 자갈밭과 돌길, 솔잎이 깔린 길과 튼 나뭇가지 아래를 달렸다.
나는 매일 밤 집에 전화를 했고, 크리스틴은 내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미있게 지냈고 다시 농담도 하고 있었다. 우울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춥고 비 오는 날씨 이야기나 자전거를 얼마나 많이 탔는지를 이야기하면서도 웃곤 했다. “나 정말 기분 좋아.” 그게 왜 기분이 좋은지 나도 당황스러웠다.
캠프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자 우리는 비치 마운틴을 오르기로 했다. 크리스가 그 제안을 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 산을 정복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으로 덮인 900미터의 험한 오르막을 달리면 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간은 내가 투어 듀퐁을 두 번 우승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 나는 길을 따라 관중들이 줄지어 서있는 가운데로 열심히 페달을 밟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암스트롱 파이팅”이라고 내 이름을 도로에 페인트로 써 놓기도 했었다.
우리는 또 한 번 춥고, 비 오고, 안개 긴 날씨 속으로 나섰다. 환상도로를 따라 160킬로미터를 달리고는 마지막 피날레로 비치 마운틴을 오르자는 계획을 갖고서. 크리스는 차를 타고 따라올 것이었다. 정상에 도착하고 나서는 자전거와 우리를 차에 태우고 오두막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오르막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도로에 아직도 내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내 자전거는 노란색과 흰색 페인트로 오래 전에 써 놓은, 퇴색한 글씨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내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랜스 만세!”라고 써 있었다. 계속 올라갔다. 산은 경사가 더 험해졌다.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땀과 함께 만족감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술이라도 마신 듯 몸이 달아올랐다. 내 몸은 오르막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안장에서 일어서서 속도를 냈다. 갑자기 크리스가 차를 몰로 내 뒤를 따라와 창문을 내리고는 나를 격려했다. “고, 고, 고!” 그를 흘끗 보았다. “알레(프랑스어로 ‘가자’라는 뜻_옮긴이), 랜스! 알레, 알레!” 그가 또 소리쳤다. 나는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내 호흡이 빨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달렸다. 자전거 바퀴가 빗물을 튀기고 쌩쌩 돌아가며 달리는 동안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색이 바래고 희미하게 쓰여 있는 내 이름이 다시 보였다. ‘암스트롱 파이팅!’
드디어 정상 가까이에 왔다. 내 뒤에서는 크리스가 자전거 위의 나를 보며 내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는 걸 말이다. 가볍게 산 정상에 올랐다. 서서히 자전거를 멈추었고, 크리스는 공원에 주차를 하고 나왔다. 우리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그저 나를 보고 말했다.
“자네 자전거를 차 위에 올릴게.”
“아뇨.” 내가 말했다. “제 비옷 주세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갈래요.”
나는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사이클 선수가 된 것이다. 크리스는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면서 아름답고 평화롭고 영적인 느낌을 주는 그 산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 그날의 훈련은 힘들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날의 훈련으로 자전거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되살아났다.
이틀이 지난 후 우리는 대학 트레이닝 센터에 가서 내 와트 수를 다시 검사했다. 내가 페달을 너무 세게 밟은 탓에 주행 기록계가 망가져 버렸다. 기계를 너무 빨리 돌리는 바람에 크리스가 숫자를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웃으며 100달러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날 밤 저녁식사 때, 나는 크리스에게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내가 애틀랜타 올림픽에 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 한번 해 보자.”
크리스가 말했다.
?
그날 저녁, 우리는 내 복귀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내가 쓸 새 경주용 바퀴를 물색했다. 그리고 그는 빌에게 전화를 해서 말했다. “준비해. 랜스가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가니까. 우리가 전에 알던 그 사람으로 말이야.”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