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평전 1

An Unfinished Life: John F. Kennedy, 1917-1963

   
로버트 댈럭(역자: 정초능)
ǻ
푸른숲
   
30000
2007�� 09��



■ 책 소개
미국 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일대기를 그려낸 책으로, 인간 케네디와 미국 현대 정치사의 진실을 엿볼 수 있는 케네디의 평전이다. 저자는 수많은 공식·비공식 자료와 비망록,인터뷰를 통해 비범한 동시에 평범한 인간 존 F. 케네디의 미덕과 결함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사후에도 여전히 미국의 긍지이며 새로운 지도자의표상처럼 여겨지는 존 F. 케네디의 깨지지 않는 신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제1권에서는 먼저 가난했던 이민자 신분에서 권력의 부를 축적하기까지 케네디 가문의입지전적 과정을 소개한 다음, 케네디의 반항기 가득한 유년기, 형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청년기, 제2차 세계대전참전 후 국민영웅으로 등극하며 서서히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던 성장기까지를 그렸다. 또한 세기의 명연설이 된 취임연설 작성과정을 포함하여 당시의대통령 선거전을 드라마처럼 치밀하게 되살렸고 케네디가 어떻게 백악관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해 가는지 등을 풍부한 자료와 함께설명하였다.


■ 저자 로버트 댈럭
미국 역대 대통령들에 관한전문적인 연구와 저술로 명성을 얻은 손꼽히는 역사학자이다. 컬럼비아대학교, UCLA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96년부터 보스턴대학교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79년에 출간된 저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미국의 외교정책 Franklin D. Rooseveltand American Foreign Policy』은 1980년도 밴크로프트 상 수상작, 전미도서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으며, 『미국식 외교정책The American Style of Foreign Policy: Cultural Politics and ForeignAffairs』(1983년)은 「뉴욕 타임스」의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특히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된 린든 존슨 대통령 전기 『거인의 흠집Flawed Giant』(1권, 1991년), 『외로이 떠오르는 별 Lone Star Rising』(2권, 1998년)이 격찬을 받으며, 7만5000부 이상 판매되었다. 그는 앞서 출간한 평전에서 보인 성취에 더해 이 책 『케네디 평전』에서도 그 진가를 인정받아 언론으로부터 ‘평전의거장’이란 찬사를 받기도 했다. 


■ 역자 정초능
1957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나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국회에서 의원 보좌진으로 있었으며, (주)서일시스템, 한국브리태니커에서 일했다. 현재 캐나다에 머물며 캐나다번역전문용어통역협의회(Canadian Translators, Terminologists & Interpreters Counci) 산하온타리오 번역가통역가협회 정회원이자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 『콰이터스』 『마틴 루터 킹』 등이있다.

■ 차례
머리말 마법과 주문을 걷어낸 인간 케네디의 초상 


1장 귀공자의 어린 시절 
30세 하원의원의 귀향
외조부 허니 피츠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성공을 향해 돌진하다 
조지프와 보스턴 상류사회의 꽃 로즈의 결혼 
신화의탄생―1917, 존 F. 케네디 세상에 나오다 
자녀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합의 


2장 미국 중산층의 희망, 케네디 가문 
잦은 병치레,독서의 즐거움 깨닫다 
보스턴의 끔찍한 장벽을 넘어 뉴욕으로 
피붙이의 일치단결 
최고 중에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
걷어낼 수 없는 형의 그림자 
인기 최고의 학생, 대단한 플레이보이 
유럽 그랜드 투어 
주영 대사 둘째아들의 유럽 체험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특권 상류층의 아주 특별한 학위논문 
스물셋, 필생의 대업이 필요하다 


3장 생의 신산을 겪어 내다 
“어머니는 날 사랑한다고말해준 적이 없다” 
케네디가의 아픔, 로즈메리 
존 F. 케네디, 진찰과 치료의 역사 
병력을 속이고 해군에 입대 
전투현장에 낭만은 없다 
무인도에 표류, 7일 만에 생환 
태평양의 영웅, 최악의 건강 상태로 귀환 
형 조 주니어의 허망한 전사


4장 정치, 필생의 대업을 선택하다 
타고난 정치가기질 
“조가 죽고 없으니 이제 네 책임이다” 
권력의 책임, 정치의 영향력에 이끌리다 
애송이, 풋내기… 도련님에게 쏟아진끝없는 인신공격 
“안녕하세요. 잭 케네디입니다” 
조지프, 선거운동 자금 수백만 달러 쏟아 부어 
케네디, 대중이 찾고 있던새로운 정치인 


5장 하원의원, 공직에 내딛는 첫 발 
의원직은 더 큰정치적 도약 위한 발판일 뿐 
“1946년 한해를 빛낸 청년 10”으로 선정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다 
연방재정으로주택건설 촉진 강력 주창 
정치적 편법과 도덕적 확신 사이에서 
사색가, 선머슴, 호색한 
연방상원 진출 위한 순회 유세 강행군
아메리카니즘─미국은 공산주의 세력이 두렵다 
신생국의 민족주의는 존중돼야 한다 


6장 상원의원, 최고 권력으로 가는 디딤돌 
대통령출마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 
케네디의 아킬레스건, 매카시 징계 표결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부비에의 결혼, 환상의 완성
용기 있는 사람들 
병상에서도 늦추지 않은 대선행보 
비껴갈 수 없는 인종 문제 
동생 바비와 노조의 비리 
정치적이상을 국익으로 삼다 


7장 백악관을 향한 첫 관문 
때가 무르익어 대선 후보지명에 재도전하다 
선거운동 총책 조지프 케네디 
자유주의 개혁 성향과 갈등 
전미 유세 대장정 
케네디風을 일으키다
마침내 따낸 민주당 대통령 후보 


8장 희망의 축제, 대통령 선거 
젊은 케네디의 슬로건‘뉴프런티어’ 
결전에 임하다 
진솔하게 정치적 여망을 피력하다 
텔레비전 토론, 닉슨을 때려눕히다 
첫 가톨릭교도 대통령


9장 횃불을 건네받다 
선결과제를 정하다
뉴프런티어 진용을 꾸리다 
취임연설, 국민의 희망과 미국의 비전을 선포하다 


자료 출처 
주석 





케네디 평전 1


미국 중산층의 희망, 케네디 가문
잦은 병치레,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다

잭의 뇌리에 남아 있던 가장 어릴 적 기억은 1922~1923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이플스 로드에 있던 집에 관한 추억이며 인근의 공립학교 에드워드 디보션에 다니던 기억이 그것이다. 1924년 아홉 살이던 형 조 주니어와 두 살 터울이던 잭은 사립 덱스터로 전학했다. 일과가 짧았던 디보션과 달리 덱스터에서는 아침 8시 15분부터 오후 4시 45분까지 학생들을 맡아주었다. 맏이와 둘째의 길어진 학교 일과 덕분에 모친 로즈는 집에서 로즈메리에게 신경 쓰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첫딸 로즈메리는 지능 발달 지체 장애 때문에 가정의 개별 지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내아이들을 둔 엄마로서 로즈에게 덱스터 학교생활은 ‘터무니없이 망신살이 뻗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엄마의 기억에 그 무렵 조 주니어와 잭 두 형제는 망나니짓을 할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부친 조지프에게 덱스터는 노블그리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징검다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노블그리노는 상급 학교 가운데 명문으로, 본디 하급이던 예비학교가 당시에는 폐교된 상태였기 때문에 덱스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부친은 덱스터를 거쳐야 두 아들이 비로소 스터로나 솔턴스톨, 번디 집안처럼 저명인사 인명록에 등재된 가문의 자제들과 어울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열 살 때까지 잭의 어린 시절은 ‘피츠 외할아버지’에 관한 기억들로 촘촘히 아로새겨져 있다. 조 주니어 형과 자신을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에 데려가기도 했고, 보스턴 퍼블릭 가든에서 함께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보스턴 일대를 순회하는 선거 유세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외손주들까지 동반하며 열성을 쏟은 그 주지사 경선에서 ‘피츠 외할아버지’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병치레에 관한 것들이다. 기관지염?수두?풍진?홍역?볼거리?성홍열?백일해 등 잭은 갖가지 소아 질환을 앓느라 침실에 꼼짝없이 갇혀 있기 일쑤였다. 그 병치레 덕분에 일찍이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는데,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면 대개 모친이 곁을 지키며 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혼자서라도 으레 독서삼매에 빠지곤 했기 때문이다.


어린 잭은 모친 로즈가 규칙적으로 즐기던 아침 산책도 함께 했다. 산책길에는 형제나 누이 가운데 한둘도 따라 나서곤 했다. 행선지는 주로 근린상가나 싸구려 만물시장, 그리고 교구 성당 등지였다. 특히 교회는 주일이나 특별한 축일뿐만 아니라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생활의 당연한 일과처럼 찾아보는 곳이어야 한다는 게 모친의 지론이었다. 여름철에는 보스턴 바깥으로 원행에 나서기도 했다.


“편안하고 유복한 생활이었죠. 수발을 들어주는 가정부와 간호사가 따로 있었고, 손아래 줄줄이 늘어선 어린 누이들을 거느리고 대장 노릇을 하며 실컷 데리고 놀았으니까요.” 잭이 1960년 대통령 선거전 당시 전기작가였던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에게 들려준 회고담이다. 뒷날 잭은 어린 시절 정말 마음 다친 일이 혹시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형 조 주니어한테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던 일밖에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두 형제는 앞뜰 포치에서 함께 놀며 겨루며 야단법석을 떨곤 했는데, 때로는 티격태격하던 다툼이 본격적인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서로 사이가 틀어지면 평상시 그토록 두텁던 형제간 우애가 파탄에 이르기도 했다. “성정이 싸움을 좋아했거든요.” 잭은 형을 그렇게 평했다. “좀 지나면 뒤끝 없이 풀어지곤 했지만 아무튼 어릴 적에 나로선 무척 속상한 일이었지요.” 기회만 생기면 마치 앙숙인 양 서로 악착같이 각축을 벌이는 사이였지만 잭에게 형 조 주니어는 ‘곁에 없으면 사뭇 그립고 아쉬운’ 존재였다.


인기 최고의 학생, 대단한 플레이보이
하버드 1, 2학년 시절 잭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바로 친구를 실컷 사귀었다는 점, 그리고 ‘레이디스 맨(ladys man), 즉 여자들에게 ’끼 있는 남자‘로서 그 자질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점이다. 잭은 만나는 사람에게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약간 들창코에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앳된 친구가 어색한 몸짓으로 <하버드 크림슨> 사무실이 있는 건물 층계를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몇 계단씩 접어 올라가더군요.” 한 동급생의 뇌리에 선연히 아로새긴 잭의 인상이 그랬다.


또 교수 한 분은 “수업 시간에 좌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던 그 총명하고 앳된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37년 잭이 웰드 홀(하버드대학교 신입생 기숙사. 매튜스 홀과 함께 하버드 야드 내에서 가장 매력 있는 기숙사로 꼽힌다)에서 존 윈스럽 하우스로 옮기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을 당시 학장으로서 잭을 면담하고 수락 여부를 검토했던 이의 메모에 따르면, “훌륭한 학생”으로 “웰드에서 인기 최고” “자기 학년에서 인기 최고”를 다투던 학생이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기억에도 잭은 “잘 생기고…… 붙임성 있고 다양한 오락과 취미 활동에 열심이면서 자나깨나 사교 생활에, 그리고 연애며 이런저런 온갖 구실로 여자들한테 골몰해 있던” 학생이었다.


특히 안하무인에 가까우리만치 거침없는 태도가 동급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비결’이었다. 그들 자신이 ‘성골’ ‘진골’ 식으로 분류되는 미국의 사회적 신분 위계의 최상층이었음에도 그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한통속이 되어 일정 부분 혐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자기한테 여자를 ‘꼬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잭은 그 점을 유달리 흡족해했다. 열일곱 살이던 1934년에 일찌감치 책은 또래 여자애들이 자기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친구 빌링스에게 코드곶의 자기네 별장 바로 이웃집 여학생이 멀리 클리블랜드에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더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의기양양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잭은 이렇게 단정을 내렸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미남이라서 그런 게 아닐 거야. 내가 남들보다 별로 더 잘생긴 것도 아니거든. 내 인간성 때문일 거야.”


그때 이후 몇 년에 걸쳐 빌링스는 잭으로부터 섹스 공략의 혁혁한 전과를 자랑스레 기록한 편지를 수도 없이 받았다. 특히 하버드대학 2학년 때 편지는 1년 동안 한결같이 그 내용이었다. 개중에는 다분히 치기어린 허풍도 없지 않았다. 빌링스는 그 시절 주고받은 편지들을 몇 년 후 다시 들추어 읽어보면서 세 등급, 즉 ‘아주 지저분함’ ‘지저분함’ ‘그다지 지저분하지 않음’으로 분류했다. 물론 성욕이 왕성한 한창때 새파란 청춘이라면 으레 거칠 법도 한 모종의 통과의례 따위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잭의 경우에는 거기에 그 이상의 무엇이 함축되어 있음을 빌링스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애들한테 관심이 있었어요. 관심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런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성공의 쾌감을 맛보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 점이 잭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자기 형 조 주니어나 친구 빌링스나 또래 동급생들을 능가해 우위를 확보한 분야가 바로 그 방면이었던 것이다.



정치, 필생의 대업을 선택하다
타고난 정치가 기질

잭의 경우 해군 복무 기간에는 장래에 관한 구상에서 일단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전쟁의 와중에도 정치와 국제 관계에 대한 생각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의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던 1941년 가을에는 미국 국내 고립주의 진영과 국제주의 진영의 균열에 관한 책을 써볼 작정으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비록 이데올로기를 주창하거나 옹호하는 쪽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그 자신은 현실주의?실용주의라는 소신에 자부심이 있었다. 찰스턴에서 열외 방관자 신세로 묶인 동안 지독한 비관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나 일단 남태평양으로 전보 배속되어 전투에 뛰어들자마자 한결 희망을 품게 되었다. 1942년 초에 말끝마다 내비치던 패배주의 정서가 실전이라는 능동적 실천 속에서 많이 누그러진 것이다.


1942년 5월의 산호해 전투와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각각 해군이 승리를 거둔 것도 그가 전망을 바꾼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망이야 어떻든 제반 정치 현안에 큰 관심을 가지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사적 긴급 상황의 후속 요건으로 전후 처리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조만간 정치적 사안들이 주목을 끌게 될 터였다. 잭이 교전 지역에서 근 9개월을 복무하는 동안 주변의 대다수 동료 장교는 위안거리로 카드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잭은 달랐다. 솔로몬 제도에서 잭의 직속상관이던 이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그런 놀이 따위에 끼지 않는 장교들을 짬짬이 찾아다녔습니다. 나한테도 찾아왔지요. 우리는 외진 구석에서 호젓하게 자리를 함께 하곤 했습니다. 나는 내 고향 롱아일랜드와 뉴저지 주에서 정치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들을 화제로 끄집어내곤 했지요. 그는 어울렸다 하면 누구하고나 으레 정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태평양 해군 시절 잭과 가까이 지내던 친구 하나는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치 기질을 아예 타고났더라고요. 그 시절 우리는 틈만 나면 잭을 놀려먹었어요. 내 농담은 으레 이런 식이었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 나 말이야, 잭. 죽어라 하고 일해서 루이지애나는 우리가 책임지고 너한테 줄 작정이야.” 또 한 친구도 잭이 본토로 귀국하기 직전에 ‘거의 날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나와서 싸울 것 같으면, 우리를 이곳에 보낸 사람들한테 도로 데려가라고 할 양이면, 도대체 우리가 어째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냐, 아니면 전투를 치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같은 데 관심을 가지는 게 좋을 거라는 그런 사실을 우리는 그 친구 덕분에 자나깨나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우리는 미합중국 국민으로서 우리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을, 그 일련의 과정에 관여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1945년 4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고하기 직전이었다. 잭에게 허스트 계열 신문사 「시카고 헤럴드 아메리칸」이 샌프란시스코 특파원으로 UN 회의를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은 부친 조지프의 청탁에 따른 것이었다. 잭은 이 뜻밖의 기회에 쾌재를 불렀다. 언론계에서의 활동 경력이 정치권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러나 「시카고 헤럴드 아메리칸」과 「뉴욕 저널 아메리칸」 등의 허스트 계열 신문에 기사를 기고할 경우 고향인 매사추세츠에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데는 별로 실효성이 없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그 무렵 그가 얼마만큼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게다가 1945년 5월, 조지프가 캐슬린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새로 들어선 해리 트루먼 행정부에 기용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조지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한테 한자리 줄 작정이면 차라리 잭한테 주도록 하는 편이 낫겠지. 어느 나라 공사나 국무부 차관보나 해군부 차관보 자리를 맡길 수도 있지 않을까.” 잭 자신도 공직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을 뿐더러 부친도 아들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샌프란시스코 특파원 기용을 허스트 계열 신문사들이 케네디 부자에게 턱없이 베푼 호의로 간주할 수는 없다. 신문사는 샌프란시스코발 특전 한 건당 250달러를 지급했는데, 절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잭은 대외 문제에 관해 성공작을 집필한 저자로 미국?영국의 정부 요인들, 이를테면 당시 소련 주재 미국대사 에이브럴 해리먼, 소련 관계 권위자인 찰스 E. 볼런,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 등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아울러 해군 영웅으로서 “현역 복부 군인의 관점으로” 말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런 만큼 잭은 독자들과 편집자들에게 전후 국제 정세에 관한 전문가로서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잭이 정작 그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해주었느냐 하는 데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에 묶고 있던 잭의 객실에 저명한 저널리스트 아서 크록이 들른 적이 있다. “저고리랑 구두 말고는 정장에 준하는 야회복 차림이었는데 베개 세 개를 겹쳐 등에 받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한 손에는 하이볼(위스키에 소다수 따위를 섞은 음료), 한 손에는 전화를 들고 있었다. ”「시카고 헤럴드 아메리칸」 편집장과 통화하고 싶은데요.“ 교환원한테 그러더니, 한참을 기다리다 이랬다. ”안 나온다고요? 그럼 누구, 적당한 사람 대줘요. 말 좀 전해야겠으니.“ 또 한참 기다리다 이랬다. ”좋아요. 그 양반과 연락이 닿는 대로 잊지 말고 내 말 꼭 전해줄래요? 고맙군요. 이렇게 전하세요. ‘케네디가 오늘밤에는 송고하지 않을 거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사교계의 총아 노릇을 얼마나 요란하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4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 용케도 건당 300단어 분량의 기사 17건을 송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련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관한 사실 보도, 그리고 갓 탄생한 세계 기구의 실효성과 성과에 대한 기대치를 설정할 때 현실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역점 해설 등이 기사의 주종을 이뤘다. 기사 중에는 미국?영국의 대표단이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고압적 태도로 자국의 국가 안보를 보장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잭은 이 대목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우호 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가로놓인 22년이라는 불신의 세월은 “여러 해 걸려도 말끔히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잭은 영국에 한 달간 머물면서 처칠의 전국 유세를 취재했다. 한 달의 취재 끝에 잭은 선뜻 내키지 않는 결론에 다다랐다. 전시에 보여준 백절불굴의 지도력에도 처칠과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쪽에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승산은커녕 좌파의 거센 상승세에 풍비박산이 날 조짐마저 보였다. 잭은 처칠이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세계무대에서 가장 비범한 지도자라 우러르며 간직해온 흠모와 존경심 탓에 외눈박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선거전이 마무리될 즈음 잭이 내놓은 예측은 “보수당의 아슬아슬한 승리”, 다만 보수당 집권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는 것이었다. 잭은 런던발 기사에서 미국의 독자들에게 “앞으로 노동당이 집권 내각 구성의 기회를 확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토를 달았다. 보수당의 신승을 점쳤던 잭의 예측은 빗나갔다. 노동당이 예상보다 빨리 기회를 손에 넣은 것이다.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압도적으로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처칠은 실각했다.


잭은 영국 총선 결과를 잘못 예측한 덕분에 홀가분한 신분으로 유럽 대륙 방문길에 나섰다. 미국 해군부 제임스 포레스털 장관 일행의 객원 자격이었다. 해군장관은 조지프 P. 케네디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그의 스물여덟 살 난 둘째아들 잭에게 무척 호감이 있었다. 그는 잭을 해군장관 직속 보좌진에 합류시키고 싶었으나 그에 앞서 먼저 유럽 대륙 방문길에 동행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잭은 여로 중간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클레먼트 애틀리 총리와 어니스트 베빈 외무장관 등 갓 출범한 영국 새 내각의 지도자들 그리고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과 안드레이 그로미코 대사 등 당시 최고 요직에 있는 지도자 여럿을 직접 만나거나 가까운 발치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당대를 주름잡던 유력 인사들이지만 그들도 한편으로는 결정하고 행동함에 있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잭은 이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자신도 그들처럼 세계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만해서였을까? 내심 자신은 그런 잘못을 저지를 리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기라면 당시의 많은 정부 고관 따위는 반드시 능가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막후실세들 틈에서 자라난 사람들, 주위의 격려 속에 스스로 천부적인 지도자 자질이 있다고 믿게 된 사람들에게 이따금 엿볼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의 발로였다. 잭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들이 눈앞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동서 진영의 고위 관리들에게 필적할 만하다고 믿었다. 어쩌면 처칠만은 예외로 제쳐두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다만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느냐였다.



상원의원, 최고 권력으로 가는 디딤돌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부비에의 결혼, 환상의 완성

두 사람은 1951년에 찰스 바틀릿이 주최한 만찬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바틀릿은 저널리스트로서 둘 다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첫눈에도 재키는 이상적인 배필감으로 보였다. 적어도 잭의 사정거리 안에서는 거기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는 뜻이다. 매력적인 몸매에 총명하면서도 사려 깊고 수줍음을 타지만 황홀한 마력을 지닌 여성, 더구나 저명인사 인명록에 오른 저명한 가톨릭 가문의 규수였던 것이다. 재키는 잭의 정치적 오라(aura)에도 보탬이 되었고, 따라서 얼마간 정략성 결혼의 측면도 충족시키는 셈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왕족과 특권 상류층 귀족이 결합하는 모양새로, 잭 자신이 엄연히 ‘미국 브라민’ 신분임을 만천하에 정식으로 확인시키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두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아픔도 엇비슷했다. 재키의 부모는 재키의 나이 아홉 살 때 이혼했다. 재키는, 뉴욕 증권거래소 회원으로 주색에 빠져 진작부터 가족과 사이가 멀어진 부친 존 베르누 부비에 3세와 모친 재닛 리 부비에 사이에서 긴장과 불안의 시절을 보내는 사이 사람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마치 사고무친처럼 홀로 자기 안에 갇혀 지내는 성향을 띠게 되었다. 잭도 부모 간의 알력과 긴장에다 병약한 몸 때문에 고민과 고통을 겪었지만 재키와는 대조적으로 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몰두하면서 그 그늘을 이겨냈다. 이렇듯 언뜻 보기에 한쪽은 사람을 멀리하고 한쪽은 사람을 가까이했다는 점에서 둘은 영 딴판이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둘의 결합이 과연 뜻대로 성사될지 아슬아슬해질 만큼 한편으로 갈등의 소지도 있었다. 조지프 케네디는 아들 잭이 스스로 홀가분한 자유를 단념하지 않으려 할까 봐 걱정이었다. 조지프는 아들의 친구인 토비 맥도널드에게 편지로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결혼하게 된다는 생각에 초조해할지 몰라서 상당히 걱정스럽다네. 대개 마찬가지이지만 걔는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그럴 가능성이 커서 말일세.”


잭과 재키는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에 있던 재키의 의붓아버지 저택에서 혼례를 치렀다. 1953년 9월 12일의 그 결혼식은 세상이 떠들썩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부유한 저명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석했고 숱한 매스컴 관계자들이 들러리를 섰는데, 이들은 두 사람의 혼례를 ‘데브(Deb) 여왕’과 미국 최고 총각 신랑감의 결합이라며 ‘올해 사교계의 최대 사건’으로 꼽았다. 아카풀코에서 신혼 여행 중에 잭은 부모 앞으로 이런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저는 황홀한 환희의 진정한 의미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재키를 제 마음속에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하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그녀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처럼 열렬했던 사랑도 오래가지는 않아서 신혼 생활 15개월 사이에 이런저런 갈등과 긴장이 생겨났다. 매카시 징계 사안 처리 문제 등 ‘다른 일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탓이기도 했다. 재키는 잭이 자기보다 일을 우선시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 있을 때도 자나깨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눈치여서 자기는 “알래스카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재키는 그 시절을 이렇게 돌이켰다. “주말마다 거의 어김없이 난 혼자였어요. 완전히 잘못된 노릇이었지요. 정치가 내 원수였어요. 우리한테 가정생활이라고는 도대체 눈곱만치도 없었으니까요.” 잭 쪽에서는 재키가 돈을 물 쓰듯 낭비한다고, 또 자기네 거처가 한두 군데도 아닌데 곳곳의 장식을 어찌나 자주 바꾸어대는지 자기는 “지나가는 길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불평했다.



희망의 축제, 대통령 선거
결전에 임하다

전당대회를 치른 7월의 나날들은 케네디 집안 식구 모두에게 흥분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것은 미국 정치에서 최고에 버금가는 목표를 성취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제2대 대통령 애덤스 이후 서른네 번째로 백악관에 입성하기까지 단 한 차례 선거전만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전당대회 폐막 이후 처음 실시된 몇 군데 여론조사 결과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일리노이?뉴욕?펜실베이니아?텍사스 등 미국의 5대 주를 통틀어 22대 17퍼센트의 우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잭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하이애니스 포트로 날아갔다. 전당대회의 중압과 부담. 몇 개월간의 여독을 털어버리고 원기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휴식과 수면을 취하거나 수영과 요트를 하기도 했고, 바비 등 식구들이랑 잔디밭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눈앞에 닥친 선거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재키는 임신 5개월의 몸이기에 투표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담당할 수 없을 터였다.


오후에는 코드곶 연안 서남쪽으로 멀리 마서스 비니어드 섬이 아스라이 바라다보이는 곳까지 한나절 몇 시간을 잔잔한 뱃놀이로 보냈다. 수영과 칵테일과 점심과 대화가 어우러진 하루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래도 정치마저 뒷전일 수는 없었다. 최고의 전리품이 걸려 있는 결전의 개시를 내다보며 잭과 바비, 오브라이언, 오도넬, 파워스, 샐린저, 소렌슨 그리고 부친 조지프 등 모두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코드곳에서의 휴식은 고작 이틀로 작파였다. 잭과 바비는 곧바로 일련의 전략 회의며 당내 견제 세력들과의 화합에 관한 논의 등 선거전 관련 일정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태세였다. 결전에 임하는 그의 자세에서 주저하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를테면 뉴욕 주 개혁과 민주당원들에게 바비는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여러분, 11월 이후에 주 조직이나 군 조직이 살아남든 말든 나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든 말든 나는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건 존 F. 케네디를 당선시키는 것입니다.” 플로리다 주 선거운동의 통합?조정 역할을 맡고 있던 사람은 바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철두철미 단호하고 의지가 강철같았습니다. …… 정말이지 무뚝뚝하고 매몰차고 악착같았습니다. 물론 선거운동 총책임자로는 기막히게 제격이었지요.” 바비가 못마땅하던 당 실무 일꾼들은 이렇게 투덜거리곤 했다. “리틀 브라더(남동생이라는 뜻과 함께 대형 허리케인에 뒤이어 일어나는 소형 허리케인을 가리키기도 한다)가 그대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바비에게 “흑태자(영국 왕 에드워드3세 맏아들의 별칭”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또 잭을 “새파랗게 어린 놈”이라고 일컫던 아이젠하워는 바비를 가리켜 “그 애송이 녀석”이라고 하기도 했다. 바비는 주위의 온통 가시 돋친 반응들이 마음에 걸리기는 해도 미안해하거나 변명하려 하지는 않았다.


바비가 모두에게 초인적 노력을 기울일 것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공사판 현장 감독’ 역할이었다면 잭은 ‘어르고 달래는 상전’ 역할이었다. 후보로서 그는 누구라도 쓸모가 있으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권 가도에서 한몫씩 이바지하게 하려고 열을 올렸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의 워싱턴 특파원이던 헨리 브랜던은 6월에 잭과 대화를 나눈 뒤 개인용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흥취와 신명이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소산이다. 어떻게 하면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온갖 기술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 진심 어린 온기는 없을지 모른다. 차갑고 계산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의 편에서 일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고 여기거나 최소한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이를테면 아우 바비의 경우 린든 존슨 하면 비위가 뒤틀릴 만큼 싫었던 까닭에 정치적 판단을 흐릴 정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잭은 선거에서 실리 계산을 우선적인 지침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잭의 다음 행선지는 뉴욕 주 하이드 파크(크랭클린 D. 루스벨의 고향)였다. 엘러너 루스벨트의 협력을 요청할 심산이었다. 한때 적대적이던 그 역시 이제는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발 벗고 나서서 돕겠다고 했다. 트루먼, 스티븐슨, 엘러너 루스벨트 등과의 협력 관계를 성사시켰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주의 개혁 성향의 민초 유권자들 사이에 열렬한 지지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케네디 선거운동에 시큰둥해하는 입장이었다. 8월 임시 회기 중에 의회에서 진보적 법안이 제정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목청을 높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케네디 정견 발표에 자유주의 개혁 지향적인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 그런 무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유였다.


스티븐슨은 코드곶에서 잭과 만난 뒤 엘러너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지금 단계에서 케네디의 관심과 주안점은 정견이 아니라 조직에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잭과 바비의 복안은 선거운동 조직의 구축을 최우선순위로 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슐레징거는 그러한 구상이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8월 말에 잭은 그에게서 이런 충고를 들었다. “물론 조직이 중요한 몫을 담당하지만, 조직 그 자체로 뉴욕 주나 캘리포니아 주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가 생각하기에 잭에게 필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선거운동에서 기폭제 구실을 해온 부류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개혁 성향의 인사들, 혁신계 인사들, 지식인들 ……. 생계 때문이 아니라 신념과 원칙에 대한 깊은 관심과 문제의식 때문에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 문제의식이 투철한 민주당원들한테 일단 불이 붙었다 하면 선거운동이 기세를 올리게 될 거야.” 슐레징거는 그 며칠 후 보낸 편지에서 당시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헨리 키신저로부터 들었다는 말도 전했다. “남이 당하는 아픔을 보면 피눈물이 나느니 어쩌느니 떠벌려대는 공상적 사회개량주의자도 못되는 그런 키신저가 …… 나한테 이러더군. ‘우리는 한 차례 크게 뜀뛰기를 할 사람, 그저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국민적 분위기를 연출해 낼 사람이 필요하다. 케네디가 닉슨이랑 누가 현상 유지를 가장 요령껏 잘 해나갈 수 있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면 망하는 거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저러한 기술적인 선거 공약 한 가지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획기적인 새 시대에 관한 것이다.

?

잭은 슐레징거의 날카로운 지적을 달게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비판을 언짢게 생각하지 않네. 내게는 자네가 11월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렇게 일러주는 편이 한결 나아.” 9월 중순, 잭은 뉴욕 주 자유당에서의 연설을 통해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하고 나섰다. 자유주의 개혁 진영의 단골 주제들과 관련해 확실한 태도를 표명한 것이다. 이 연설을 기점으로 비로소 흥분의 열기가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슐레징거가 선거 승리의 관건이라고 판단하던 바로 그 진보의 열기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