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뤼포

Francois Truffaut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역자 : 한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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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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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06��



■ 책 소개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삶과 영화인생을 조명한 평전. 전통적인 영화문법을 탈피한 새롭고 도전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강력히 주장하며 누벨바그의 중심인물이 된, 귀족적이면서도본능적이고, 예리하면서도 감상적인 트뤼포의 다양한 면모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에 대한 새로운 초상화를 그려냈다. 이 책은52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52편의 작품, 동료들의 증언과 트뤼포의 일기, 메모,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사적 자료를 토대로,트뤼포의 후배 영화인들이 집필했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던 트뤼포는 단절된 외부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예술가들의 오만함에 조소를보냈으며, <400번의 구타&&, <훔친 키스&&, <쥘과 짐&&, <아메리카의 밤&&, <여자들을사랑한 남자&&와 같이 "나"에 대한 영화, "삶을 찍는"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책에는 깊은 상처를 남긴 성장 과정, 히치콕, 혹스,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에 대한 숭배와교류, 영화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연출의 비밀들, 시네필들의 우정, 연애와 불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방황을 비롯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프랑스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 누벨바그 세대의 형성 발전 과정, 1968년 5월의 칸영화제 풍경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 저자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앙투안드 베크는 역사가이자 영화비평가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총감독을 역임했다. 2006년 현재 「리베라시옹」의문화면 편성을 담당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혁명기의 풍자화』『역사의 몸통 - 은유와 정치』 『작가들의 영화』(공저)『영화의 귀환』 『아비뇽 - 연극의 천국』 『미누엘 데 올리베이라와의 대화&&, 『시네필리』 등이 있다.


세르주 투비아나는 1974년부터 2002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발행인이었고,2006년 현재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에 대한 장편영화 <도둑맞은 초상화(Portraitvole"s)&&를 미셸 파스칼과 공동 연출했고, 트뤼포 영화의 DVD를 책임 감수했다. 지은 책으로 『인내』 『잔존한 기억 - 미슐린프레슬과의 대화』 『두 번째 세기를 향하는 영화』(공저) 『칸 영화』 등이 있다.


■ 역자 한상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영화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사 기자, 중앙대 영상대학원 교수,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2006년 현재 부천국제영화제수석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단편영화 "M/T 교수의 외출"과 "너의 이름은 아르헨티나"의 각본·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영화음악의 이해』 『영화에 대한 13가지 테마』(공저)가 있고, 엮은 책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세계』(공편), 『신상옥 연구』가 있다. 옮긴책으로는 『장 뤽 고다르 - 소비 사회의 영화와 이데올로기』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사
옮긴이의말
머리말


1. 비밀 속의 어린 시절, 1932~1946
2. 400번의 구타,1946~1952
3.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 1952~1958
4. 새로운 물결, 1958~1962
5. 정체기,1962~1967
6. 숨겨진 생활, 1968~1970
7. 영화 인간, 1971~1979
8. 미완의 초상,1979~1984


감사의말
필모그래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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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1. 비밀 속의 어린 시절, 1932~1946
1932년 2월 6일, 스무 살도 안 된 자닌 드 몽페랑은 아들을 낳아 "프랑수아 롤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닌의 아버지는 '딸이 동네 노동자나 놈팡이, 심지어 외국인과 놀아나" 낳은 이 아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기는 유모가 맡아 길렀으므로 아이는 3살이 될 때까지도 엄마를 자주 보지 못했다. 미혼모였던 엄마 자닌은 롤랑 트뤼포와 결혼했는데 아이는 그제서야 양아버지를 얻을 수 있었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어진 뒤에야 아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랄 수 있었다. 어린 트뤼포는 유아원에 등록해 글을 배웠고, 외할머니 곁에서 책 읽기를 즐겼다.


1942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롤랑 트뤼포는 자닌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려다 돌보겠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이 부부는 그때까지 기껏해야 주말의 가족 식사나 일주일의 휴가 때나 만나던 아이를 떠맡게 되었다. 아이는 좀더 냉랭한 세계로 던져졌다. 프랑수아가 부모 집에 들어와 살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급속히 어려워졌다. 롤랑 트뤼포는 자신이 양아버지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프랑수아는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1944년 초, 12살 생일이 지난 후 프랑수아는 부모가 외출한 동안 장롱을 뒤져 롤랑 트뤼포의 1932년 소형 캘린더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산행 일정, 기억해야 할 기념일, 연극 공연 등 다양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태어난 2월 6일 난에서 프랑수아는 특별한 사항을 찾지 못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가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의 생활을 동요시킬 만한 이야기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감추었고, 자신의 일과 생각은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남의 시선을 끌려 하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독립을 허락할 만큼의 돈을 금고에서 정기적으로 조금씩 훔쳐냈다. 문제를 감추기 위해 프랑수아는 이야기를 꾸며댔다. 이 거짓말은 결국 들통났고 부모는 공공연하게 친지나 친구들에게 아들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다. "별똥별"이란 별명을 얻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안정된 학교생활을 거짓말과 몰상식 이상으로 흔들어놓은 것은 무단결석이었다. 프랑수아는 가족의 무관심과 교사의 독단을 잊을 중요한 도피처를 로베르 라슈네와의 우정에서 찾았다.


1945년부터는 영화에도 흠뻑 빠지게 되는데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는 트뤼포의 문구는 이 유년 시절의 열정을 잘 요약하고 있다. 12살부터 일주일에 두세 편 정도로 시작된 최초의 영화 열정은 오로지 프랑스 영화로만 형성되었다. 미국 영화는 금지되어 있었고, 독일 영화는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뤼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처음 본 200편의 영화는 학교를 빠지거나 돈을 내지 않고 슬쩍 영화관에 들어가 몰래 본 것이다. 나는 이 멋진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심한 복통이나 소화불량으로 치렀다. 이 증상은 모두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죄의식은 영화가 야기하는 감정을 증대시킬 뿐이었다. 나는 또한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점점 더 화면 가까이에 앉음으로써 영화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다."


2. 400번의 구타, 1946~1952
전후 프랑스의 생활은 어려웠고, 모든 것이 회복?재건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트뤼포를 평판 좋은 상업학교에 등록시켰지만 트뤼포는 그곳을 그만두었다. 새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만에 정학을 당한 트뤼포는 독학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수용?선택하게 된다. 1946년 프랑수아는 오페라 구역의 유명 식당과 대형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엘리베이터 보이나 벨 보이 같은 직업을 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파리에서 손꼽히는 곡물상 "알베르 생페르 상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나는 봉급을 전부 부모님께 드렸고, 그러면 그 3분의 1을 다시 내게 주셨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한 달에 1,300프랑으로 책과 영화, 다른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었다.


로베르와 프랑수와는 영화 열정을 활용해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고자 했다. 그들은 근처 영화관의 프로그램 조사를 계속하면서, 그 대상을 에투알에서 클리시 사이에 있는 극장들로 확대했다. 두 사람은 이 프로그램을 마르티르 가에서 팔았다. 둘은 밤에 드라이버로 영화관 진열장의 창유리를 떼어내고 스틸 사진을 훔쳐내 은밀히 거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트뤼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각의 영화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파일을 만들었다. 이 파일에는 영화 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정리해두었다. 트뤼포는 전후 영화 주간지 가운데 내용이 가장 충실했던 「에크랑 프랑세」에서 지식의 공백을 채울 또 하나의 수단을 찾아냈다. 1948년 4월 13일부터 12월 7일 사이의 독자 투고란에는 "파리 나바랭 가 33번지 F. 트뤼포"라고 서명된 글을 15편 이상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수련은, 당시 젊은 영화광들과의 경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놀랄 만한 "인간 시네마테크"로 간주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 영화관과 시네클럽에 열성적으로 출입한 결과였다.


1948년 10월,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공적으로 알리려는 시도로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로베르와 함께 "세르클 시네만(영화중독자 서클)"이란 시네클럽을 만들었다. 로베르는 임시 사무장 겸 관리자를, 트뤼포는 예술감독의 직책을 맡았으나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이때 트뤼포는 앙드레 바쟁을 만나게 된다. 바쟁은 서른에 마르고 조금 구부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지닌, 당시 젊은 평론가들의 "집결지" 격인 인물이었다. 바쟁은 이 혈기왕성한 젊은 시네필에게 호감을 느꼈다. 트뤼포에게 바쟁의 사무실은 새로운 영화학교가 되었다.


세르클 시네만 덕에 트뤼포는 빚을 잔뜩 지게 되었다. 롤랑 트뤼포는 아들에게 시네클럽 활동을 완전히 접고 정신을 차린 뒤에 확실한 직업을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한다면 지난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모욕과 패배감 속에서 프랑수아는 이 비참한 거래 증서에 서명했고, 롤랑 트뤼포는 채권자 한 명 한 명에게 빚을 갚아주었다. 총액은 2만 4,605프랑이었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시네클럽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또 빚을 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 며칠 전 서명한 자백문서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그를 비행청소년 특수 시설에 수용해줄 것을 부탁했다. 프랑스 민법상 "부친적용법"에 의하면 '자식의 행실에 과히 심각한 불만의 이유를 보유한 부친은 다음과 같은 교정수단을 취할 수 있다. … 16세의 연령부터 성년 또는 친권 해제 연령에 도달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부친은 자식의 대상으로 하는 최장 6개월의 구금 요청이 가능하다." 프랑수아는 미성년자 관찰소와 기느메르 수도원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1950년, 롤랑 트뤼포는 친권해제에 동의했다. 트뤼포는 자유를 얻었다.


앙드레 바쟁이 프랑수아를 잊지 않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프랑수아는 좀더 수월하게 영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949년, 팽창해가던 파리 시네필의 세계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출현은 성가신 존재의 난입과도 같았다. 집단의 가장 어린 구성원으로서 그는 문제아처럼 인식되었다. 더 어리고 더 반항적이고 더 가난한 트뤼포는 이 까다롭고 폐쇄적인 작은 시네필 집단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보여야 했다. 1950년 봄 트뤼포는 두 편의 영화 비평문을 「라탱구역 시네클럽회보」에 게재하고 에릭 로메르의 문하생의 길을 걸었다. 18세의 젊은 독학자는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훈련했다. 교양 지식과 시네필의 소명의식을 결합시킨 훈련에 몰두하면서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찾게 된다.


3.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 1952~1958
릴리안과의 연애가 실패로 끝나면서 자살을 기도하고, 느닷없이 군대에 지원했다가 탈영하는 등 트뤼포의 젊은 날은 쉽지 않았다. 앙드레 바쟁 부부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된 프랑수아는 바쟁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만의 안목과 지력을 형성해갔다. 그는 「시네 몽드」와 「카이에 뒤 시네마」에 비평을 발표하면서 훈련을 거쳤고, 「아르」에서는 상당한 원고료를 받으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는 5년에 걸쳐 528편의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본명과 필명을 섞어 일주일에 평균 두 편을 섰으며, 대개 혼자서 영화란 전체를 채웠다. 다른 청탁도 밀려들었다. 하루 한 편의 영화, 이틀에 한 편의 글, 트뤼포는 이 속도로 매일 밤 강심제와 담배와 커피를 마시면서 일했다. 생활과 직업의 구분도 없었다.


평론가로서의 눈부신 성공 행로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트뤼포가 영화 연출의 욕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편 시나리오를 계속 써왔고, 영화 촬영 아이디어를 메모해왔다. 1956년 12월, 트뤼포는 장 뤼크 고다르와 전철역 벤치에 앉아 긴 대화를 나눈 뒤에 종이 위에 급히 몇 줄을 메모했다. 3년 뒤인 1959년 여름, 4장에 걸친 이 시놉시스는 변형 발전되어 장 뤼크 고다르의 첫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시나리오로 완성된다. 트뤼포는 자신의 제작사를 세우고 장 르누아르에 대한 경의를 담아 "카로스 영화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영화 자금지원 기관인 UFIC로부터 영화의 예산에 상응하는 200만 구 프랑을 신용 대출했다.


프랑스 영화의 위기를 분석하는 가운데 트뤼포는, 제작자와 각본가, 감독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한 결과 발생한 파산 상태를 거리낌 없이 지적했다. 이번에도 트뤼포는 영화계에 분노를 일으켰지만, 트뤼포의 영화 <개구쟁이들>은 만족스러웠고, 트뤼포는 부유한 배급업자의 딸 마들렌 모르겐슈테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미래의 영화감독이자 스타 평론가, 그리고 행복한 신랑. 26세의 트뤼포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했다.


4. 새로운 물결, 1958~1962
<개구쟁이들>을 만든 뒤 트뤼포는 첫 장편 영화에 도전할 자신감을 얻었다. 1958년 봄, 기획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였지만, 초보 감독은 목표 달성의 첫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8년 5월, 트뤼포는 평론가 자격으로는 마지막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했다. 지난해 그가 맹공을 퍼부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영화제 집행부가 취재 허가를 거절하자 트뤼포는 『아르』를 통해 반격했다. 1면의 끝 부분에 그는 '칸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한 유일한 프랑스 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라고 기명했고, 2주일 뒤에는 영화제에 죽음을 선고했다. '근본적 개혁이 있기 전에는, 다음 번 영화제는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트뤼포가 첫 장편영화를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장인 이냐스 모르겐슈타인이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영화 <학이 날다>를 배급해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학이 날다>의 배급권을 즉각 구입하라고 설득한 사람은 트뤼포였다. 영화제가 막을 올리기도 전에 "완전 껌값에" 이루어진 거래는 3주일 뒤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학이 날다>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성공도 만족스러웠다. 이냐스 모르겐슈테른은 사위의 첫 영화를 공동제작하는 작업에 좀더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에게 재정적 위험은 미미한 것이었다.


트뤼포는 이제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그는 자신의 유년기를 다룬 <앙투안의 가출>을 손질하기로 했다.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마르셀 무시가 함께 했고 1958년 늦여름에 94페이지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최종 제목은 <400번의 구타>였다. 1958년 11월, 트뤼포가 영화 촬영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아버지이자 스승, 친구로 여겨왔던 앙드레 바쟁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가상의 인물이 탄생하는 한편, "실제의" 아버지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 이상이었다.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비밀스런 어린시절과 버림받은 유년기에 대한 일종의 "정산"과도 같았다. <400번의 구타>는 그 고통, 그 아픈 치유의 흔적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도니올 발크로즈, 리베트, 고다르, 로셀리니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자시사회 반응 역시 최상이었다. 이때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칸영화제 집행부가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에게,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 함께 이 영화를 프랑스를 대표하는 공식 경쟁 부문에 추천한 것이었다. 1959년 5월 5일, 공식 상영이 끝난 다음날 주요 언론의 1면에는 커다란 활자의 제목이 펼쳐졌다. 「프랑수아르」에는 층계를 내려오는 사진의 상단에 '28세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14세의 스타, 장 피에르 레오. 칸에서의 승리. <400번의 구타>"라고 실렸고, 5월 9일자 「파리 마치」는 '신동들의 페스티벌"이라는 제목으로 4면 전체에 걸쳐 성공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잡지 「엘」은 젊음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칸영화제는 이만큼 젊었던 적이 없었으며, 젊은 세대가 사랑하는 예술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이토록 행복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제12회 칸영화제는 우리를 향해 프랑스 영화의 재탄생을 선언하는 큰 영광을 맛보았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 "젊음"을 아낌없이 구현했고, 영화제에서 가장 사랑받은 장 피에르 레오(배우)는 그것을 확장했다.


트뤼포와 그의 가족, 힘들었던 생활, 성격, 야망에 관련된 글들이 각종 매체에 넘쳐났다. 칸의 식당과 바, 나이트클럽에서의 짓궂은 행동, 그의 독설과 부모와의 불화 등은 기자와 파파라치를 열광시켰다. 고급 언론매체가 뒤를 이으면서 트뤼포는 며칠 사이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영화는 더 나아가 영화 애호가 관중에 그치지 않고 급속히 사회 현상으로 퍼져나갔다. 전문 매체뿐 아니라 대중 매체, 여론 형성 매체까지 앙투안 두아넬(<400번의 구타>의 극중 주인공)의 사례를 계기로 불행한 유년기, 청소년 교육 등의 사회적 주제로 나아갔다.


신속한 촬영, 신세대 배우를 통해 보여주는 현시점의 이야기, 스튜디오 대신 자연광을 사용한 야외 촬영, 적은 제작 인원과 저예산 방식. 칸에서 <400번의 구타>가 거둔 성공에 힘입어 이 같은 새로운 사고방식이 대중매체로 확대되면서 예상치 못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트뤼포의 영화는 바로 이 운동의 출발점으로 보였으며, 이후 얼마 동안 프랑스의 영화 제작 방향을 "젊은 영화"로 향하게 했다. 3년 동안 170여 명의 감독이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며, "누벨바그"라는 낙인은 일종의 (미등록된) 등록상표가 되었다. 지금까지 젊은 영화를 깊이 불신하던 수십 명의 제작자는 무명 배우를 데리고 저예산 영화를 만들어 수익을 올리기 위한 길을 찾았다. 영화계 내부의 이 변화는 프랑스 영화 역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트뤼포의 두 번째 장편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는 실패했다. 기자와 영화계 사람들은 1960년대 초에 일어난 영화관의 뚜렷한 쇠퇴 현상의 책임을 누벨바그 영화 탓으로 돌렸다. 그들의 영화가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며, 지루하기" 때문에 대중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트뤼포는 <쥘과 짐>이 완벽한 성공작이 되길 바랐다. '<쥘과 짐>은 삶과 죽음에 대한 찬가가 될 것이며, 부부 관계 이외의 모든 애정 조합의 불가능성을 그것이 지니는 기쁨과 슬픔을 통해 예시할 것입니다."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두었다. 가정의 위기, 직업상의 고통과 단절의 결과 트뤼포는 고립감을 느꼈다. 자신은 성공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좌초했다. 이런 대조적 상황은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불러왔다.


5. 정체기, 1962~1967
<쥘과 짐>의 성공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트뤼포는 "세 번째 영화 우울증"에 시달렸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모든 감독은 일생에 걸쳐 세 편의 영화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첫 세 편의 영화 말이다. 이어서 그는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때부터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라선다."


트뤼포는 공상과학영화 <화씨 451도>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순탄치 않았다. 그는 먼저 알프레드히치콕과의 대담집을 준비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찍었다. <부드러운 살결>은 1년 전 마들렌과 겪었던 결혼생활의 위기를 중심으로, 트뤼포의 애정 생활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압축하고 있다. 칸에서의 혹평으로 파리에서는 3개관에서만 개봉되었지만, 그럼에도 23주 동안이나 상영되었다. 물론 전체 관객 수는 많지 않아서 영화사는 투자액을 겨우 회수할 정도였지만 스칸디나비아 국가, 독일, 영국, 캐나다, 일본에서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면서 부담은 곧 가라앉았다.


1965년 초에는 마들렌과 이혼하게 된다. 몇 년이나 끌어왔던 <화씨 451도>도 완성했지만 파리 평론계의 반응은 그저 그랬고 상업적으로도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6. 숨겨진 생활, 1968~1970
<화씨 451도>의 실패로 영화사가 재정적으로 곤란해지자 트뤼포는 B급 영화를 여러 가지 기획했다. <훔친 키스>는 파리에서만 거의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저예산 영화인 <훔친 키스>는 투자액의 3배 이상을 벌어들였다. <400번의 구타> 이래 트뤼포의 어떤 영화도 이 정도로 '돈을 벌어들이지" 못했다. 1960년대 말 경영난을 겪은 카로스 영화사는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성공으로 트뤼포는 보다 야심찬 작품에 착수할 수 있었다. 카트린 드뇌브가 주연을 맡은 <미시시피의 인어>는 평론계의 반응도 좋지 않았고, 상업적으로도 큰 실패가 예상되었지만 트뤼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1969년 봄, 카트린 드뇌브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훔친 키스> 이후 <미시시피의 인어>와 <야생의 아이>, <부부의 거처>를 거치면서 트뤼포는 모든 일을 계획대로 진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촬영이 주는 작은 불안과 행복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의 그에게는 크게 결여되어 있던 특징이었다. 그의 인생에서는 이제 영화가 최전선에 위치했다. 트뤼포가 이렇게 작업에 열중한 것은 또한 꽉 짜인 스케줄에 대한 편집증적 몰입 때문이기도 했다. 


익살스러움이 넘치는 <부부의 거처>는 트뤼포에 의하면 자신의 유년시절을 '청산하기 위한" 영화이기도 했다. <미시시피의 인어>가 실패했지만, 다음 두 편을 합쳐 파리에서만 4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훔친 키스>의 성공까지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트뤼포는 이제 인기 감독이 되었다.

이제 명사가 된 트뤼포는 프랑스의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주 발언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든 정치적 참여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신문을 열심히 읽는 독자지만, 열렬한 개인주의자인 트뤼포는 여전히 유권자 명부에 등록할 의욕도 느끼지 않았다. 같은 논리에서 1967년에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자 했을 때 이를 거절했다. '저는 제 영화에 대한 것이라면 어떤 상이든 흔쾌히 받지만, 국민으로서의 제 역할에 관한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선거인 카드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그 임무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도 전혀 모르면서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장관께서는 시민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국민적 영예가 수여된다는 것은 저에게 파렴치한 행위가 되리라는 사실을 이해해주십시오." 트뤼포에게 '인생이란 나치즘도 공산주의도 드골주의도 아니며, 그것은 무정부주의적인 것"이었다.


7. 영화 인간, 1971~1979
카트린 드뇌브와 헤어진 트뤼포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생애의 암울한 이 시기에, 트뤼포는 한 편의 소설에서 사실상 최후의 구명 수단을 찾아냈다. 앙리 피에르 로셰의 『두 영국 여인과 대륙』을 읽고 이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한 것이다. <두 영국 여인과 대륙>, <나처럼 예쁜 아가씨>는 연속적으로 실패했지만 해외에서의 반응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두 편의 실패 후에 1973년에 <아메리카의 밤>이 나왔다. 평론계는 찬사를 보냈고 관객도 많이 들었다. 작가이자 연출가, 독립 제작자로서의 성공을 거둔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계에서 선망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것은 결국 시기와 거부 반응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아메리카의 밤>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미국에서 트뤼포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는 펠리니, 베리만, 구로사와 등과 함께 이제 미국에서 부동의 가치를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외국 감독 집단에 포함되었다. 그와 동시에 할리우드에서의 영화 제작 제의는 더욱 많아졌다.


1974년 휴가 동안 준비해서 1975년에 출간한 『내 인생의 영화』는 3개월 만에 9,000부가 판매되었다. 이 책은 독일어, 영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트뤼포에게 이 책은 성공적 판매라든지 글 쓰는 재능을 인정받은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의 영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즉, 정치참여 영화, 실험 영화, 의도적 상업 영화 모두를 트뤼포는 기피했다. 어느 것도 그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1976년, <아델 H의 이야기>와 <포켓 머니>를 끝낸 트뤼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29세의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에서 UFO 전문가인 프랑스 과학자 클로드 라콩브 배역을 제안했다. 미국에서 1978년 2월 6일(트뤼포의 46회 생일이기도 했다) 개봉된 스필버그의 이 영화는 평론계와 관객 모두에게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트뤼포의 영화를 보지 못했던 전 세계 수많은 관객에게 프랑수아 트뤼포는 클로드 라콩브의 모습을 통해 알려졌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한 명의 감독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표현대로, 한 명의 '휴머니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1977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는 여성운동가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흥행에는 성공했다. 자신이 주연을 맡은 <녹색의 방>을 지인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최고의 찬사를 들었다. <녹색의 방>의 촬영 이후 모든 것이 트뤼포의 기대에 답하는 듯했다. 이 무렵 그는 완성과 절정의 시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8년 4월에 <녹색의 방>이 개봉되자 이 은총은 급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영화의 상업적 실패는 트뤼포에게 깊은 상처와 실망을 안겨주었다. 트뤼포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달아난 사랑>을 촬영했다. 평론이나 관객들은 호의적이었지만 트뤼포는 이 영화를 자신의 실패작으로 간주했다.


8. 미완의 초상, 1979~1984
그는 또 다른 영화를 준비했다. <마지막 지하철>은 거액의 예산이 드는 야심작이었다. 치명적 실패(<녹색의 방>)와 중간 정도의 성공(<달아난 사랑>)을 겪은 뒤라서, 그에게는 경력에 재차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게다가 여느 때와는 달리, 그에게는 현재 진행 중인 시나리오가 없었다.


1981년 제6회 세자르상 시상식에서 <마지막 지하철>은 큰 영광을 안았다. 12개 부문 후보에 지명된 <마지막 지하철>은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각본상, 최우수 촬영상을 비롯, 10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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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영화 아이디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심한 두통이 계속되었다. 트뤼포는 뇌출혈과 심한 동맥류 파열, 뇌종양의 위험이 있었다. 1983년에 뇌 동맥류 수술을 받기 전에 트뤼포는 지인들에게 장난기 섞인 즐거운 표현들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의 종양은 전두엽에 생긴 것이었으므로 언어 능력이나 기억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집중하는 일에는 큰 노력이 필요해, 그는 쉽게 피곤해지곤 했다. 1984년 9월 28일,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트뤼포는 아메리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 3주일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는 10월 21일, 영면했다. 고인의 희망에 따라 시신은 화장한 뒤 몽마르트르 묘지에 매장되었다. 트뤼포의 가족, 사랑했던 여자들, 친구들, 배우들, 시네필들을 비롯해 수천 명이 반짝이는 가을 햇빛 아래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