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소개된 50여 명의 여성들은 역사를 이끌어간 여성들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남성들에비해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온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대변한다. 1부는 남자 못지 않은 정치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준선덕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여성 정치인들을, 2부에서는 인류를 감동시킨 예술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3부는 세상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4부에는 여성과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실었다. 독자들은 흥미로우면서도진지한 그녀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인류 역사의 반을 담당해온 여성들의 위대한 업적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김정미
1970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방송 드라마와다큐멘터리를 썼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외 역사 관련 인물사전을 집필하고 한국일보사의 「주간한국」에 칼럼 "역사 속여성이야기"를 연재했다.
■ 차례
헌정사/머리말
1부 그녀의 카리스마
태양의 딸, 최초의 이집트 여성파라오 : 하쳅수트
팜므 파탈? 혹은 지략가 : 클레오파트라
베트남의 국민영웅 : 쯩자매
카리스마로 이룩한 통일의 기초 :선덕여왕
위기를 기회로 : 이사벨 1세
권력에 사로잡힌 포로 : 카트린 드 메디시스
가장 불행했던, 가장 훌륭했던 :엘리자베스 1세
불꽃의 인생 : 메리 스튜어트
노회하고 전략적인 정치가 : 마리아 테레지아
민초들을 피 말린 열정 :예카테리나 대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소박한 여왕 : 빅토리아 여왕
나라까지 망쳐버린 욕심과 사치 : 서태후
2부 그녀, 혹은 예술가의 초상
레스보스 섬의여류시인 : 사포
몽마르트의 연인 : 쉬잔 발라동
민중미술의 어머니 : 케테 콜비츠
자유와 열정으로 춤추는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 코코 샤넬
추리소설의 여왕 : 애거서 크리스티
이루지 못한선각의 꿈 : 나혜석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천재 : 레니 리펜슈탈
역사를 기록한 한 장의 사진 : 마가렛 버크화이트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 최승희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 빌리 홀리데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죽고 마리아 칼라스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 : 마릴린 먼로
우드스탁의 여신 : 재니스 조플린
3부 그녀, 세상 속으로
이유있는 누드 : 레이디고다이버
신이 보낸 소녀 : 잔다르크
여성에게도 인권을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살롱의 여주인 : 마담 스탈
가난한자들의 천사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노예의 삶을 떨치고 : 해리엇 터브만
여성 참정권을 위한 외침 : 에멀린 굴덴 팽크허스트
20세기를 연 천재과학자 : 마리 퀴리
어린이의 눈높이로 : 마리아 몬테소리
아름다운 인술 : 박에스더
여성은 출산기계가 아니다 : 마가렛 생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소: 피 숄
침묵의 봄을 깨우다 : 레이첼 카슨
낮은 데로임하소서 : 마더 테레사
4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
미인계의 원조 :서시
시대를 풍미한 경국지색 : 양귀비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권모술수의 희생양 루 : 크레치아 보르지아
홈스쿨의 대모 :신사임당
사치와 애욕의 권력자 : 마담 퐁파두르
화려하고 무지했던 왕비 : 마리 앙투아네트
여명의 눈동자, 혹은 이중간첩: 마타하리
망한 나라의 불운한 왕비 : 이방자
왕좌를 버린 세기의 로맨스 : 심슨부인
손문의 아내, 중국의 어머니 :쑹칭링
날 위해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 : 에바 페론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의 대명사 :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인물색인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1부 그녀의 카리스마
가장 불행했던, 가장 훌륭했던 : 엘리자베스 1세
2000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났던 지도자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첫 번째로 선정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이후 세계 역사를 주도한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인 국왕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정부 앤 불린이 임신을 하자 그녀가 낳은 아들을 적장자로 만들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불린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딸이 태어난 순간, 식어버린다. 그는 앤 불린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 지 3년 만에 죽였고, 세 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라야 했다.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기까지
엘리자베스의 남동생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고,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다짐한다. 이로써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곧이어 런던 탑에 유폐된다. 메리 여왕은 국교가 뿌리내린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만들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다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이 실패한 후 메리 여왕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는 했지만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했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했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길러내 국가를 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나라까지 망쳐버린 욕심과 사치 : 서태후
아름다운 자태, 불타는 야망
서태후(1835~1908)는 19세기 말 중국을 다스린 여인이다. 서태후가 권력과 조우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녀는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청소년기를 가난 속에서 보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애인을 버리면서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했다. 막연히 궁궐에 들어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궁궐에 들어간 후 그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주와 미모로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일약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제 옆에서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서태후의 이런 행동에 남편은 그녀의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경계했으나, 함풍제의 요절로 그녀의 여섯 살 아들이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자식마저 희생시킨 권력욕
아들이 성장하자 서태후에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성인이 된 아들은 슬슬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려 하고 며느리마저 다루기 힘든 명문가의 딸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했다. 더불어 황제의 관심을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한다. 홍등가에 드나들던 황제가 몹쓸 병에 걸리자 서태후는 동치제를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방관하고,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도록 만든다.
멈출 줄 모르는 극단적인 사치와 향락
서태후는 황실의 세 살, 네 살의 어린 아이를 황제로 내세워 양어머니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이어갔다. 그리고 세 살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김없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스물 일곱 살에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고, 그는 평생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했다. 그녀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현재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짓게 했다.
서태후와 청나라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진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청조도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태후가 만든 보수적인 정치풍토는 새롭게 다가드는 서구 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고, 황실과 주변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백성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서태후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서구열강의 손아귀에서 농락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2부 그녀, 혹은 예술가의 초상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 코코 샤넬
명품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샤넬’이라는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샤넬 하면 주로 향수 ‘NO.5’를 떠올리지만, 사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현대 여성 옷의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다. 19세기까지 코르셋으로 조여왔던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사람이 바로 샤넬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여성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패션 속에 녹여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버림받은 고아소녀
프랑스의 오르베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코코 샤넬(1883~1971)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행상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샤넬이 열두 살에 아내가 사망하자 아이들을 버렸고, 결국 샤넬은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서 성장한다. 청소와 바느질보다는 춤과 노래가 좋았던 그녀는 기병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바에서 댄서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즐겨 부르던 노래 <코코>에서 이름을 따 코코 샤넬로 이름을 고쳤다.
그녀를 성공시킨 두 명의 남자
샤넬의 성공기에는 중요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싸구려 바에서 최초로 샤넬을 건져낸 사랑은 상류층의 부유한 남자 에티엔 발상이었다. 그는 샤넬을 자신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두고 그녀를 가꾸기를 좋아했다. 이곳에서 샤넬은 비참한 어린 시절 동안 배우지 못했던 상류층의 예절과 습관을 배운다. 그녀가 두 번째로 만난 남자는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이었다. 그는 샤넬에게 살롱과 의상실을 열 수 있는 돈을 빌려주었다. 샤넬은 이곳에서 디자이너로서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했고 결국 훗날 아서 카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단순하고 명료한 디자인
샤넬 디자인의 정수는 단순함과 명료함이다.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은 모자 디자인에서부터였다. 19세기 말 여성들은 모자에 온갖 것들, 리본이나 꽃, 심지어 과일까지 얹고 다녔다. 당연히 모자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으며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했다. 샤넬은 스스로 디자인한 검은 모자에 하얀색 리본 하나만을 두른 단순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모자는 당시 상류층 여인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를 찾는 사람들이 급작스레 늘어나면서 샤넬은 일약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그녀는 모자 디자인에 그치지 않고 1913년 도빌에 의상실을 열었다. 이곳에서 샤넬은 여성의 옷과 향수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샤넬은 여성 옷의 코르셋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약간의 곡선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헐렁하며 움직임이 자유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이 옷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샤넬은 1920년 이른바 ‘샤넬라인’으로 알려진 무릎 밑 5~10cm까지만 오는 길이의 스커트를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 옷에서 다리를 드러낸 것은 샤넬의 옷이 최초였다. 주머니가 달려 있는 여성의 재킷을 만들어낸 것도 샤넬이었고, 어깨에 메는 숄더백을 디자인해 핸드백으로부터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도 샤넬이었다.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 빌리 홀리데이
19세기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강제로 미국 땅으로 끌려와 노예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에 정착한 흑인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리카에서부터 가지고 온 선천적인 리듬 감각과 미국생활에서 얻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섞어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때로는 흥겹고 때로는 호소하며 때로는 사람을 관조하게 하는 그들의 음률은 곧 미국인들의 귀를 사로잡고 머지않아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 가운데 흑인 재즈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한 명의 여성 보컬리스트가 있었다.
너무 빨리 삶의 고통을 알아버린 소녀
빌리 홀리데이(1915~1959)는 1900년대 초반 가혹한 인종차별과 가난 속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빌리의 본명은 일리노어 페이건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떠났고, 당시 열세 살이었던 어머니는 일리노어를 친정에 맡겼다. 일찍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일리노어는 외가에서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열 살이 되자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그녀는 열 살의 나이에 일하러 나간 집에서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리노어는 감화원에 가야만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또 다시 다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녀는 이 사건들을 계기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고, 자포자기 속에서 결국 뉴욕의 뒷골목을 헤매는 창녀가 되었다.
치자꽃을 머리에 단 가수
당시 미국은 경제 대공황기를 맞고 있었고, 일리노어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녀는 절박한 심경으로 ‘포즈와 제리즈(Pods &Jerrs)라는 나이트클럽 댄서에 응모한다. 제대로 된 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일리노어는 당연히 낙방이었다. 나이트클럽 주인의 면박을 받으며 힘없이 돌아서던 일리노어에게 피아노 연주자가 장난삼아 노래나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오디션 장에 울려 퍼진 일리노어의 노래 한 곡. 그 노래는 사람을 울리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를 태어나게 했다. 언제나 머리에 하얀 치자꽃을 달고 목소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노래하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단번에 재즈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대 위에선 레이디, 무대 아래에선 검둥이
1930년대 빌리 홀리데이는 음반을 취입하고 여러 악단과 공연을 하며 재즈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가수였다. 그러나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가혹한 미국의 인종차별 속에서 검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연주하던 백인 백 밴드들이 순회공연을 끝내고 따뜻한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할 동안 메인 보컬인 빌리 홀리데이는 추운 밤거리로 나가 잠자리를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흑인을 재울 수 없다는 호텔의 방침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성급히 결혼을 한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 실패는 그녀의 외로움과 비참함을 더욱 짙게 했다.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
고통스러운 삶을 잊으려고 남편을 따라 시작한 마약은 빌리 홀리데이의 건강과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 재즈 비평가상 수상, 최다의 음반 판매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1959년 빌리 홀리데이는 쓰러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한다. 본명 일리노어 페이건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딱딱하고 차디찬 병상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외로운 마지막을 맞이한다. 진료 기록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3부 그녀, 세상 속으로
20세기를 연 천재 과학자 : 마리 퀴리
인류의 역사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급진적이고 가속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혁신적인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인간의 삶을 창출케 한 원동력이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원자력의 발전과 그것의 이용이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자연의 거대한 힘인 원자력을 발견하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초석을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위대한 과학자는 마리 퀴리다.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 소녀
지적이고 강직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했던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 중 한 명으로 태어난 마리는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 했지만 마리의 집에서는 마리를 뒷바라지할 힘이 없었다. 마리의 언니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마리는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언니의 유학 자금을 대고,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4년 뒤 의사가 된다. 그리고 마리를 파리로 부른다.
소르본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 수학과정을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마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뿐이었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마리는 연구소에서 여덟 살 연상의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신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 연구욕과 단출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행복한 과학자 부부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실험실로 출근했고 열악한 실험환경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따스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퀴리 부부 사이에서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부부는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울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radioactivity : 방사능이라는 이름도 마리 퀴리가 붙인 것이다)을 가진 라듐을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마차에 치여 즉사하고 만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고,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되어 실험을 계속했다.
위대한 행보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한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에는 파리대학교에 라듐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 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 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 인류에게 돌린 것이다. 마리 퀴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부상 당한 많은 병사들을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직접 치료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만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 마가렛 생어
1960년대 한국의 가족계획 운동은 인구 억제를 통해 사회가 창출하는 부의 분배를 조절하고자 하는 차원이었지만, 원래 가족계획, 즉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여성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는 기계처럼 취급받았던 여성의 몸을 여성 스스로에게 돌려주기 위한 것이 바로 산아제한운동이었다. 그 중심에 마가렛 생어가 있다.
어머니가 되지 않을 권리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산아제한운동의 제창자 마가렛 생어(1883~1966)의 말이다. 그 이전까지 여성들은 임신과 육아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피임에 대해 교육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많은 여성들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유산을 하려고 애쓰다가 죽어갔다. 때로 마지못해 아이를 낳았어도 그 아이들은 축복 받지 못한 채 유기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출산 기계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것은 하층민으로 갈수록 더 심각했다.
가난과 다산으로 죽어가는 여성들
마가렛 생어 자신의 어린 시절도 다산과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1명의 자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마가렛 생어는 열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사십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과도한 출산과 가난으로 인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어 뉴욕의 빈민가에서 여성들을 돌보면서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목도한다. 마가렛 생어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스스로 유산을 하려다가 병원에 실려온 한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가 결국 두 번째에도 똑같은 실수를 하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노동자의 아내는 피임법을 알고 싶어했지만 의사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산아제한의 선구자
1914년 그녀는 「산아제한평론」을 발간하면서 적극적으로 산아제한운동에 나선다. 이 운동은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자는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1873년 제정된 풍속교란방지법으로 그녀의 책은 독자들에게 우송되지도 못했다. 그녀는 1916년 브룩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어 많은 가난한 여성들에게 피임법을 교육했다. 그러자 마가렛 생어는 공안질서방해죄로 체포되었다. 이 일로 그녀는 재판에서 30일 노동형을 선고받았지만 ‘성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는 판결도 이끌어냈다. 이후 계속된 그녀의 투쟁이 결실을 맺었고, 의사들에게 무제한으로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법이 1939년 제정되었다. 1960년 마가렛 생어와 과학자들이 이루어낸 먹는 피임약 개발은 산아제한운동에 큰 획을 그었고, 여권의 신장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산아제한운동과 인구문제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운동뿐 아니라 생식과 성 경험을 분리하였다는 의미에서 인류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산아제한운동은 여성운동의 차원을 떠나 민족과 인종,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후진국들은 인구 억제를 통해 가난을 구제하고 경제적 부의 분배를 조절하기 위해 산아제한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운동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새로운 성 의식과 종족 번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고 인구조절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제정책 또한 불러일으켰다.
4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
미인계의 원조 : 서시
미인계란 바라는 목적이 있을 때 아름다운 여인으로 상대를 유혹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아름다운 여인은 단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쓰는 수단일 뿐, 여인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여인은 단지 임무와 사명만 가지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몸을 허락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자를 팔아 산 승리에 남성들이 취해 있을 때, 정작 일을 성사시킨 여성들은 쓸쓸히 역사의 뒤로 밀려나곤 했다. 그 중 서시가 가장 유명하다.
와신상담의 오나라와 월나라
절세 미녀인 서시가 살던 월나라는 춘추 말기 지금의 저장성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월나라는 바로 인접한 국가인 오나라와 언제나 세력 다툼을 했고, 서시가 살던 즈음에 오나라와 월나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월나라와의 전쟁으로 오나라의 왕 협려가 죽자 그 아들 부차는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그 원한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월나라를 굴복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월나라의 왕 구천이 쓰디쓴 쓸개를 옆에 두고 맛보며 오나라에 당한 굴욕을 되새기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월나라의 왕 구천은 오나라를 무찌르고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라도 감행할 만큼 깊은 원한에 젖어 있었다.
오나라로 간 서시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가 생각해낸 방법은 아름다운 여인을 통한 적의 무장해제였다. 몇 차례 월나라 미녀들이 오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고 마침내 서시도 오나라로 가는 미인들 속에 끼게 되었다. 워낙에 출중했던 서시는 금세 오나라 왕 부차의 눈에 들었고, 부차는 충신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시를 옆에 끼고 정치를 잊었다. 부차는 오자서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자결을 명령한다. 부차의 명령에 분노한 오자서는 눈을 파내 나뭇가지에 건 다음 죽었다.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나뭇가지에 걸어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고 했다고 한다.
서시의 마지막
오자서의 우려대로, 범려의 계획대로 오나라의 힘은 약해졌고 그 기회를 노린 월나라는 오나라를 쳐서 이겼다. 부차는 산 속으로 도망가 미인에게 속아 충신을 저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자결했다. 그러나 정작 오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 공신인 서시는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승리는 남성들에게 돌아가고 미인인 죄로 불행하게 살아야 했던 서시는 소외되었던 것이다.
홈스쿨의 대모 : 신사임당
한국의 어머니들은 너무도 당연히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계발마저 포기한 어머니가 과연 현명한 어머니일까? 성장한 자식이 그런 어머니를 볼 때 과연 좋은 어머니였다고 생각해줄까?
실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4남 3녀의 자식을 모두 강릉 친정에서 낳았고, 친정에 더부살이하며 자식들을 길렀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응시생으로 아내와 자식을 처가에 맡겨둔 채 서울에서 기거했다. 신사임당은 자식과 남편을 자연스럽게 방목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에서 참다운 모범을 보였다. 그녀 스스로가 효녀였고, 언제나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었으며, 여성이라는 굴레에 속박 당하지 않고 책을 곁에서 놓지 않았다.
그치지 않은 자기계발
그녀는 조선 중기 화단에 뚜렷한 자기의 이름을 남긴 당당한 화가이자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였다. 일곱 살부터 시작했던 그림 공부를 그녀는 결혼과 출산, 육아의 기간 동안에도 손에 놓지 않고 꾸준히 해나갔다. 더불어 신사임당은 당시 여성들은 거의 가까이 하지 않던 한문경전을 공부하여 남편 이원수와 학문적 토론을 일삼았다고 한다. 아들 율곡 이이가 말하는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회고에도 아버지가 실수를 하면 어머니가 이를 긴히 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가 당당하게 토론하며 학문을 함께 닦아 가는 가정 속에서 어떻게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함께 성장한 여인
신사임당과 그녀의 자녀들은 어머니와의 정서적ㆍ학문적 교감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전에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로서 서로를 거울삼아 성장했다. 율곡 이이가 수운 판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가 있을 때 병중에 신사임당은 아들 이이와 멀리 있는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들의 성장을 독려하고 정서적으로, 학문적으로 공감하였다. 두 사람의 편지글 속에는 모자간의 애정을 넘어서 학문적 동지로서 서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남이 잘못 되어도 내 자식만은 잘 먹고 잘 살아야 돼’라고 생각하며 부정이라도 저지르고 마는 것이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삶을 보자. 그녀처럼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참다운 자녀교육이 아닐까? 혹시라도 자식을 위해서라고 한번쯤 눈감았을지도 모를 옳지 못한 행동과 엄청난 자기희생이 어쩌면 자식을 더 망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