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미 하원의장이었던 탐 폴리를 비롯, 리빙스턴 의원 등 약 300여 명의 상·하원의원들이준 리 태권도를 배워 검은 띠가 되었고, 미 역사상 최초로 공화당의원과 민주당의원들 간의 겨루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 대회는 CNN방송 등을통해 미국 전국에 중계되어 태권도의 위상을 높였고, 한국에 대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주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준 리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나의 성취와 명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아니다. 미국 격언에 ‘기적은 기적 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Miracle doesn"t happen miraculously)’라는 말이 있다.나는 목표가 세워지면 남보다 더 엄청나게 노력했고, 하느님은 이러한 나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준리의 끝없는 집념과 노력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이준구(李俊九·Jhoon Rhee)
1932년 충남 아산군 염티면 산양리에서 태어났다. 수원 신풍초등학교와 서울 동성중?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 청도관에서태권도를 수련했다. 육군 중위로 제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오스틴 대학을 다녔다. 미 국방부 태권도 지도자를 거쳐 1965년 이후지금까지 미 의회 태권도클럽을 지도해 오면서 300여 명의 전현직 의원들을 태권도인으로 키워냈다. 레이건 대통령의 체육-교육 특별고문을역임했고, 구 소련 옐친 대통령의 교육고문을 맡기도 했다. 미국 정계의 인맥을 활용한 민간외교를 활발히 펼쳐 한국 정,재계에서 신망이 두텁다.러시아 현지에 65개의 ‘Jhoon Rhee 태권도장’을 설립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주류사회에서 동양적인 규범을 가르치고 스스로 실천하는 삶을 이끌어 온 저자는‘무술인’이자 동시에 ‘도(道)’의 경지를 이룬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다. 저자는 진미애를 갖춘 완성된 인격을 추구하는 모임인‘국제10021클럽’을 창설해 21세기를 이끌어갈 각국별, 지역별 지도자들과 교류하는 장을 마련했다. 현재 ‘Jhoon Rhee 태권도협회’의창설자이자 의장, 세계무술협회 창설자, Jhoon Rhee 재단 회장, 태권도세계재단(TWF) 부의장, 세계검도연맹(회장 김종운) 명예총재,대한민국 국회 태권도 클럽 상임고문 등을 맡고 있다.
■ 차례
제 1 부
성밖에서 포효하는 호랑이 / 은혜를 입었으면 꼭 갚아라 / 어머니, 나의 어머니 / 미국을 꿈꾸는 소년 / 내 인생을 바꾼 태권도 / 첫 번째인생의 위기 - 한국전쟁 / 꿈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다 / 나는 한국에서 온 준 리 입니다 / 워싱턴의 작은 거인
제 2 부
박보희 씨와의 인연 / 새로운 스타일, 준 리 태권도 / 준리의 날 선포 / 나의첫사랑 / 나의 첫 번째 결혼 / 한순, 그리고 테레사 / 태권도를 통해 맺은 인연 / 코리아 게이트와 나 / 청도관의 창시자 이원국 관장과의인연 / 제2의 인생 /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 / 노태우 대통령의 미 국회 연설 / 한승수 대사와 인연 / 이홍구 대사 / 김창준 미하원의원 / 부시 대통령 취임 / 이회창 총재와의 만남 / 미국 태권도협회와 국제 태권도연맹의 최홍희 장군 / 김운용과 태권도
제 3 부
미국독립기념일의 행사준비위원장 임명 / 나의 건강, 나의 행복론 / 나의 인생과 골프인생 / 세계를 향한 비전 / 공산국가 소련 땅에 태권도를 개척하다 / 첫 번째 소련 여행 / 두 번째 소련 여행 ①②③ / 세 번째 소련 여행/ 네 번째 소련 여행 / 다섯 번째 러시아 여행 / 여섯 번째 러시아 여행 / 등불에 불을 붙이는 심정으로
Grand master JHOON RHEE 자서전
- 태권도로 세계를 정복한 한국인 이준구 -
제1부
“13세 소년의 겁없는 원대한 꿈은 찰나가 아닌 세계 속에서 큰 열매를 이루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준 리입니다
나는 워싱턴에서 미국 국회의원들을 가르치는 한국인 사범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기자들이 항상 묻는 것이 있다.
“어떻게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나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어린 시절의 사건 때문이라고. 옆집 여자아이에게 맞고 들어왔다고 오히려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난 사건은 6살 나이에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때 ‘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나 자신뿐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남도 지킬 수 있고 혼자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6살 나이에 아주 논리적인 사고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조숙(早熟)한 면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훗날 농담처럼 “그때 그 여자아이 덕에 내가 태권도를 하게 되었으니 그 아이가 오늘날의 준 리를 만들었다”고 주위 사람들과 농을 하곤 했다. 가끔 그 여자아이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 지금쯤이면 꽤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 있을 텐데…. ‘옛날 너한테 뺨을 얻어맞았던 옆집 아이’라고 나를 소개하면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1957년 11월 21일 어릴 때부터 꿈에 그리던 유학생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엔 정말로 희망에, 그리고 큰 꿈에 가득 부풀어 있었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이면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생활이 계속 됐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내가 미국에 온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바로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고유 무술인 태권도를 알리는 일, 세계에 한국 태권도의 위상을 떨치는 일이었다. 그 날로 나는 대학교 내에 태권도 클럽을 세우기로 결심을 하고 체육부를 찾아갔다. 당시 텍사스 대학 체육부에서 교내 모든 스포츠클럽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한국 유학생이 알지도 못하는 무슨 클럽을 만들겠다고 나서니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일단은 태권도가 뭔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체육관을 빌려 사람들을 모아놓고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미국에 온 지 5개월 만인 1958년 4월의 일이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때론 전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만약 내가 그대로 계속 텍사스 대학에서 전공을 마쳤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져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나를 텍사스를 떠나 위싱턴으로 인도했다. 워싱턴에서 태권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미국의 중심에 태권도를 심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텍사스에 있을 때부터 워싱턴 진출을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던 나에게는 이번 만한 기회가 없다 싶었다. 마침 집이 워싱턴인 학생이 가는 길이라며 나를 태워주기로 했다. 그 넓은 땅을 사흘이나 걸려 운전을 하고 가면서 새삼 나는 미국의 거대한 크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60마일 이상의 속력으로 운전을 하는데도 4일이나 걸린다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넓이였다.
1962년 6월 28일, 나는 워싱턴의 K스트리트 2035번지에 ‘준 리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첫 도장을 열었다. 당시 돈이 없어서 주미대사관의 무관(武官)이며 6촌 형뻘인 박보희 씨로부터 400달러를 빌려 개관을 했다. 도장을 열고 이전에 텍사스에서 했던 것처럼 「워싱턴포스트」에 조그맣게 ‘준 리 태권도 도장에서 관원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냈다. 태권도 시범을 보이기로 한 날, 125명의 관중이 찾아왔다.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 태권도장이 생겨났다고 해서 당시 주미 대사였던 정일권 대사가 특별히 그 날 축하연설을 해주셨다. 그 날 시범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도장에 등록을 한 사람이 20명. 점차 그 수가 늘어 문을 연 두 달 뒤인 1962년 8월 말에는 관원이 125명으로 늘어났다. 그 덕에 400달러를 빌려서 시작한 태권도장이지만 3개월 후에는 그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준 리 태권도장은 날로 번창해갔다. 나 혼자 사범도 하고, 경영도 꾸려가고, 도장 청소까지 다 해내니 수강생이 날로 늘어나도 따로 지출할 돈이 특별히 없었다. 그렇게 돈이 막 모이면서 2년 후에는 하잇스빌, 베데스타, 버지니아 지역까지 총 4군데에 도장을 더 세울 수 있었다. 준 리 태권도장의 성공으로 나는 워싱턴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고 있으니 이곳은 이제 나의 제2의 고향과도 같다. 그렇게 해서 ‘위싱턴의 대 사법 준 리’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워싱턴의 작은 거인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한국 무술인 태권도를 가르치는 작은 키의 한국 남자, 준 리. 이것이 내가 최초로 워싱턴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2년 후 신문과 TV에서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미 국회의원들의 사부, 준 리’라는 별명이었다. 나는 특별히 정치 지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태권도가 세계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힘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것은 바로 정치. 이미 내가 워싱턴에 도장을 차리면서부터 나는 태권도를 세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국회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내가 미국의 국회의원들에게 처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차근차근 도장을 늘리고 조금씩 준 리 태권도의 이름을 알려가던 1965년의 어느 날, 「워싱턴 포스트」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제임스 Cleveland라는 뉴햄프셔 출신 국회의원이 강도를 만나 작은 부상을 입고 돈을 빼앗겼다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장 제임스 Cleveland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준 리라고 합니다. 현재는 워싱턴에서 태권도라는 한국 무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태권도를 배우신다면 앞으로 그런 봉변을 당하더라도 충분히 방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잠자코 내 얘기를 듣던 Cleveland 의원은 몇 번인가 사양을 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 권유를 하자 못내 사양하던 그도 나중에는 날짜를 지정해 주고는 자기 사무실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약속한 날짜에 Cleveland 의원의 사무실을 찾아가니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태권도를 배우겠다는 국회의원 외에도 「라이프」와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배우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기자들을 불렀던 모양이다. 그 날의 첫 수업이 1965년 5월 6일자 「라이프」와 「워싱턴포스트」에 대대적으로 실리면서 준 리 태권도는 단번에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 뒤로 많은 정치인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이 흔치 않던 대에 태권도라는 신기한 한국 무술을 가르친다는 것, 그것도 미국의 국회의원들에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기사거리였다. 그 후로 자주 나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면서 한국 특파원들 역시 경쟁적으로 한국에 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국과 미국에 본격적으로 태권도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날 4명의 국회의원들을 시작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미 국회 상?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습료도 없이 무료로 말이다. 돈 몇 푼의 교습료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미 정계 국회의원들의 신뢰였다. 40년 가까이 국회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오면서 맺은 인연들…. 그들은 밖에서는 미국이라는 큰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 리더들이었지만 나에게는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한 태권도 제자들이다. 언제나 나를 깍듯이 스승으로 섬기고 Grand Master로 부르며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도움을 주려하고 나를 통해 배운 태권도와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워싱턴에서 보낸 인생의 절반은 너무나 소중하고 의미 깊은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제2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나는 후회란 것을 하지 않는다. 내가 원해서 미국에 왔고,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태권도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기에 나의 태권도 인생은 누구보다도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자신한다.”
새로운 스타일, 준 리 태권도
미국에서 태권도는 힘만 쓰는 무술이 아니라 무예 또는 무도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 주위에는 태권도 사범들이 많은데 그들의 부인들은 자기 남편의 직업을 얘기할 때 Martial Artist라고 소개를 한다. 그 정도로 태권도를 높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미국인들을 낯선 태권도에 그토록 매료시켰을까? 지금도 여기 저기 강연을 다니다 보면 이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곤 한다.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준 리 태권도가 새로운 방식으로 태권도의 대중화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국회의원들을 가르치는 사범, 준 리’의 이야기가 연일 신문에 보도되면서 태권도를 찾는 사람들 역시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학부모들에게 준 리 태권도장은 큰 신뢰와 인기를 얻었다.
나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승급심사를 통과하여 검은 띠를 따려면 태권도만이 아닌 공부와 교우 관계도 좋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등생이 아니면 검은 띠를 주지 않기로 원칙을 정했기 때문에, 태권도를 하는 아이들이라면 아무래도 저절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불어서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도리(道理)에 대해서 철저한 교육을 시켰다. 스승이란 단어는 단순한 ‘선생님’과는 다르다. ‘지식만 주입하는 것이 아닌 함께 인생은 논하고, 삶에 있어서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 바로 스승의 개념이다. 태권도장을 다니면서 동양식 스승 교육을 받은 미국의 아이들은 또래와는 달리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준 리 태권도 검은 띠 유단자라는 말은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보증수표와도 같다. 그러기에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태권도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고 나서는 것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에게서 태권도를 배우는 성인 학생들과 국회의원들은 입을 모아 태권도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신체를 단련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또 태권도를 하면서 무술과 철학을 동시에 흡수하면서 정신이 단련되었다는 것이다. 준 리 태권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본 것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와 미국 국가에 맞춰 태권무(Martial Ballet)를 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태권무는 이름 그대로 음악에 맞춰 태권도를 하는 무용이다. 원래의 태권도가 음악 없이 시각적으로만 다가오는 데 비해 거기에 음악을 집어넣어 눈과 귀가 같이 즐거울 수 있는 태권도, 즉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태권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음악은 클래식이나 국가만 허용한다는 원칙 아래에, 태권도의 각 동작을 응용시켜 안무에 적용했다. 모든 안무는 내가 직접 맡아서 했다. 그렇게 완성된 태권무를 가지고 나는 1980년, 전국 TV에 나오는 댄스 피버 대회에 출전해 2회 연속 2등의 우수상을 차지하며 그 예술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금도 미국 전역의 준 리 태권도장 어디에서나 학생들은 애국가와 미국 국가에 맞춰 태권무를 한다. 미국의 준 리 태권도장을 찾은 한국의 정치인들, 유명인사들, 혹은 낯선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한인 교포들이 가장 감동을 받는 부분이 바로 미국 학생들이 한국의 애국가에 맞춰 태권무를 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태권무를 통해 미국인들은 한국의 국가를 알게 되었고, 공식자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함께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었던 일본의 유도장과 가라데 도장이 지금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한국의 태권도장이 채우고 있다. 내가 아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들만 해도 미국 내에 3,000여 명이 넘는다. 미국인 사범까지 합치면 수만 명의 태권도 사범들이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변화무쌍한 미국 사회에서 태권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에 맞춰 도장을 운영해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특별한 신기(神技)를 보인 것도 아니다. 행동하는 실천 철학이 담겨있고, 아이들에게 스승의 역할을 하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적절히 대중들 속에 녹아 들어가는 것. 그것이 준 리 태권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미국에, 그리고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비결이다.
준 리의 날 선포
2003년 6월 28일. 위싱턴에서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이 날 무대에서 윌리엄스 워싱턴 시장은 28일을 ‘준 리의 날’로 선언했다. 워싱턴에 태권도를 알리고 공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이 날을 만들게 된 것이다. 6월 28일은 41년 전 워싱턴에 첫 도장을 연 날이다. 자국인도 아닌 동양계 태권도 사범의 이름을 딴 날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이제까지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기념 음악회에 모인 2만 5,000명의 한국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미국에 온 이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워싱턴에서 나를 기념하는 날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나에게 벅찬 감동을 주었다. 사실상 워싱턴은 내게 있어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준 리의 날’이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처음으로 태권도란 것을 소개하고, 한국 문화를 알리고 또한 태권도를 통해 신체와 마음의 바른 수양과 기본 도덕을 가르친 것이 미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 사실을 가장 기뻐하셨던 분은 민관식 전(前) 국회의장님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의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렇게 인정받을 정도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그 나라의 한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남은 미련이 있었다. 바로 내 진짜 고향. 두고 온 내 조국 한국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 이렇게 성공을 했지만, 막상 한국에서는 내가 무엇을 이뤘던가. 물론 여기에서의 소식이 전해지며 한국에도 나름대로 태권도 붐이 일었다고는 하지만, 왠지 내가 제대로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 항상 마음의 짐이 되었다. 그것을 씻기 위해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찾았다. 내가 처음 떠나올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태권도란 그저 깡패들의 주먹질거리나 별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미국에 와서 준 리 태권도를 만들고, 워싱턴 정가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국회의원들의 소식, 나의 여러 활동들이 특파원들에 의해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태권도인들에게 외국에 나가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이 꿈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
거리를 지나면서 태권도 도복을 입고 도장에 가는 어린이들을 보는 게 흔한 일이 되었고, 이제는 올림픽에서 한국과 세계의 선수들이 태권도 종목에서 메달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큰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꿈을 평생에 걸쳐서 조금씩 이루어가며 죽을 때까지 그것을 위해 인생의 진로를 바꾸기도 하고 때론 포기도 하고 좌절도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처음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해 왔다. 이제 태권도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널리 알려져 사랑 받고 있다. 60년 외길을 걸어온 나는 꼭 100년을 채울 것을 목표로 한다. 10대 소년 시절에 처음 배우면서 시작된 태권도와 함께 한 시간도 벌써 60여 년이 넘어간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나는 후회란 것을 하지 않는다. 내가 원해서 미국에 왔고,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은 만나고 태권도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기에 나의 태권도 인생은 누구보다도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자신한다.
제3부
“인간의 공동가치관 중 첫 번째는 사랑이요. 두 번째는 아름다움이요. 세 번째는 진심이다. 내가 진실할 때 나의 마음은 아름답고,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마음을 사람들은 사랑하게 된다. 모두에게 사랑 받을 때 나는 비로소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건강, 나의 행복론
이제까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위 몇 개를 꼽으라면 ‘왜 태권도를 시작했는가?’ ‘왜 미국에 오게 됐는가?’ 등과 내 건강의 비결을 묻는 질문이 압도적이다. 강연을 다니면서 나는 강연 중간, 중간 내 건강의 정도를 보여주는 이벤트를 종종 갖는다. 양복을 입은 채로 한 다리를 일자로 쭉 뻗어 머리 위까지 올린다던가, 바닥에 앉아 스트레칭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중년의 남자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70대 노인인 내가 아무 어려움 없이 스트레칭을 유연하게 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자신도 운동을 시작했다고 마를 건네 오기도 했다. 잡지와 기념간행물 등의 표지를 찍기 위해 도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면, 오랫동안 사진촬영을 해온 베테랑 사진작가도 내 몸을 보고 깜짝 놀란다. 여느 할리우드의 젊은 남자 모델들보다도 훨씬 탄탄하고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 있는 비결이 대체 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사진작가도 있다.
나의 건강비결, 건강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저 잘 먹고, 잘 마시고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여 주는 것이 가장 특별하고, 항상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인 것이다. 거기에 음식 선정에 있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백세를 누릴 건강이란 건 누구에게나 허락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일단 물을 두 잔 마신다. 사람의 인체의 66%~70%가 바로 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루 종일 흡수하는 수분의 총량이 전체 음식 섭취량의 70%가 되어야 매일 체내의 수분이 깨끗한 물로 대체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물을 많이 마셔야 변도 부드럽게 볼 수 있고, 몸 안의 독소를 뽑아내어 밸런스가 맞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단지 음식만을 가려먹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운동. 나는 매일 아침 새벽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매일 하시던 새벽운동을 그대로 본받아, 태권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줄 곧 해왔던 것이다. 내가 하는 새벽운동은 아주 간단하다. 더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다. 이 정신을 가지고 간단한 운동을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나의 몸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인생의 절반, 아니 인생의 대부분을 태권도로 보냈으니 지금의 20대 젊은이에 못지 않은 건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정신의 건강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지혜의 말씀을 듣고, 명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창조 작업등으로 마음의 운동을 꾸준히 하면 우리의 정신 역시 쉽게 쇠하지 않고 젊은이와 같은 반짝거리는 창조적인 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건강과 함께 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 행복론이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한다. “왜 태권도를 하십니까?”라고.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그럼 당신은 왜 사십니까?”하고 물어본다. 만일 어떤 물건의 목적을 모른다면 그 물건은 버려지게 되어있다.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을 모른다면 이는 곧 삶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들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인간의 삶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는 분명한 목적과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목적을 찾아내야만 한다. 인간은 항상 두 가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고통을 회피하고,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가고, 절을 찾는 것은 모두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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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가장 행복할까? 바로 사랑할 때와 사랑 받을 때이다. 행복의 절대적인 가치관은 사랑이며, 이것이 곧 인간의 첫 번째 공동가치인 것이다. 나는 첫 번째 공동가치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아름다운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삶은 곧 지혜롭게, 아름답게 사는 길이며 행복의 길이기도 하다. 이를 정리하자면 인간의 공동 가치관 중 첫 번째는 사랑이요, 두 번째는 아름다움이요, 세 번째는 진심이다. 내가 진실할 때 나의 마음은 아름답고,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마음을 사람들은 사랑하게 된다. 모두에게 사랑 받을 때 나는 비로써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관 체계에 모든 인류가 수긍한다면 아마도 인류사회의 모든 전쟁과 분쟁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