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김광우
ǻ
미술문화
   
22000
2017�� 10��



■ 책 소개

 

전통을 종합한 마네와 새로운 시각 세계를 연 모네

 

오늘날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으로,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마네와 모네가 골격을 이루지만 그들을 둘러싼 많은 평론가와 후원자, 그리고 동료 화가들의 이야기가 살이 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는 당대에 활동했던 화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델, 문인, 화상,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함께한 일화들을 통해 미술사 속에 나열된 개념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마네와 모네의 회화 세계를 접할 수 있다.

 

특히 마네와 모네가 활동했던 19세기는 문인들이 화가들과 교류하며 남긴 주옥같은 미술 비평들 때문에 ‘미술 비평의 황금기’라 할 만큼 많은 평론들이 발표되고 그 영향력을 드러냈다. 에밀 졸라, 보들레르, 말라르메는 마네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마네뿐 아니라 많은 인상주의자들의 미술을 소개하고 평론을 썼다. 미르보나 모파상은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주변에 그의 재능을 알리기도 했다. 이들의 평론과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함께 실어 독자들의 구체적인 이해를 도울 것이다.

 

■ 저자 김광우
저자 김광우는 뉴욕 시티컬리지와 포담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예술의 중심지 뉴욕에서 많은 예술을 접하면서 현대미술과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뉴욕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알리는 대가와 친구들 시리즈를 소개하는 1997년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인 미술비평과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가 소개하는 작가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거기서 피어난 작품 이야기를 담고 있어 예술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저서로 대가와 친구들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비롯하여 《백남준 vs 앤디 워홀》, 《프랑스미술 500년》,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가 있다. 역서로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앤디 워홀 타임캡슐》, 《컨템퍼러리 아트북》이 있다.

 

■ 차례
서론
인상주의의 거장들

 

마네의 수업 시대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다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가다
위대한 전통 회화가 물려준 유산
쿠르베의 혁명, 사실주의
쿠튀르의 영향에서 벗어나다

 

낙선전의 스타 마네
모더니즘의 자유 <풀밭에서의 오찬>
일본 판화의 영향
스페인 취향
현대 삶의 생생한 묘사
"나는 그렇게 보았다"
바다의 위력
바티뇰 그룹의 새 리더
드가와의 우정과 갈등

 

모네의 수업 시대
마네보다 여덟 살 어린 모네
부댕으로부터 수학
동료 화가들: 용킨트,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모네가 그린 <풀밭에서의 오찬>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정원의 여인들>

 

실의에 찬 마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화풍
에밀 졸라의 옹호
<발코니>
개성이 강한 모델 베르트 모리조
만국박람회와 마네의 개인전
<막시밀리안의 처형>
보들레르의 죽음
인상주의의 예고

 

인상주의
가난 속에 낳은 아들
모네의 결혼
런던으로의 도피
아르장퇴유에 정착
인상주의의 탄생
마네가 그린 모네

 

끝없이 모네를 도운 마네
마네의 성공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 말라르메
<베네치아 대운하>
가난한 제왕
제2회 인상주의전
진전된 사실주의 <생라자르 역>
베퇴유의 자연에 묻혀
<카미유의 임종>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마네
마네의 자연주의 그림
마네의 마지막 화실
나의 우상 벨라스케스처럼
마비 증세
파리의 명물 폴리 베르제르 술집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마네

 

같은 장소 다른 시간
노르망디의 해안 푸르빌
지베르니에 정착
모파상과의 만남
바다가 어우러진 혼돈의 세계 브르타뉴
로댕과의 2인전
마네의 은혜를 잊지 않은 모네 <올랭피아>를 루브르로

 

연작의 시대
연작의 출현 <크뢰즈 계곡>
다른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건초더미>
회화적이면서도 장식적인 <포플러>
색의 완고한 외피들 <루앙 대성당>
젊은 시절의 영상을 찾아서
템스 강 풍경
물 위의 정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수련>을 위한 오랑주리 미술관
작품 기증
인상주의의 막을 내린 모네

 

참고문헌 | 도판목록 | 인명색인




마네와 모네


마네의 수업 시대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다

에두아르 마네는 파리 북쪽 교외에서 8대째 지주로 행세한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1814년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클레망은 파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시장을 지내고 고향 젠느빌리에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아버지 오귀스트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법무부의 고위 공직자로 지내다 나중에는 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오귀스트는 스웨덴 외교관의 딸 외제니데시레 푸르니에와 1831년 1월 18일에 결혼했는데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신부는 스무 살이었다.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1월 23일 파리의 센 강 남쪽에 위치한 프티오귀스탱 5번지에서 태어났다. 에두아르가 태어난 4층 건물에는 마네 가족 이에도 어린 에두아르에게 데생을 가르쳐준 외삼촌 에드몽 푸르니에가 살고 있었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에드몽을 통해 회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두아르는 열두 살 때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롤랭 중학교에 입학했다. 5학년부터 가르치는 사립학교였는데 에두아르는 입학하던 해에 5학년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낙제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한 오귀스트의 걱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진학하여 가업을 이어주기를 원했지만 법대에 진학할 만한 성적이 되지 못해 강권할 수 없었다.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가다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한 마네는 해군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 해군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였다.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16세가 되는 마네는 1847년 7월에 해군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해군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주로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다. 1849년 6월 르아브르 항구로 귀국한 마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해군 입대시험을 쳤지만 또 낙방했다. 이제 오귀스트는 화가가 되려는 아들의 뜻을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네는 그해 가을, 학자이면서 화가인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갔고 1849년부터 1856년까지 6년 이상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했다. 쿠튀르는 두 주에 한 번 화실에 와서 제자들과 대화하며 기교를 가르쳤다. 마네는 낮에는 쿠튀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쉬스 아카데미에서 모델을 그리면서 스케치를 익혔다. 마네가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간 첫 학기 1850년 1월까지 어떤 작업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849년 거울부터 동생 외젠과 함께 금발의 네덜란드 여인 쉬잔 렌호프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마네는 두 살 연상의 피아노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1852년 1월 29일에 마네의 아들을 낳았다. 막 스무살이 된 마네가 아들을 얻은 것이다. 당시 미혼모가 자식을 낳는 일은 예사였으며 아버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구청에 출생신고를 하는 것 또한 보통이었는데 법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쉬잔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야 했다.



낙선전의 스타 마네

모더니즘의 자유 풀밭에서의 오찬

마네는 1862-63년에 악명 높은 누드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를 그렸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스페인 의상을 입은 두 중년 신사와 나신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 식사를 풀밭 위에 펼쳐놓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주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네는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의 와토, 부셰,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했다.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라파엘로풍의 파리스의 심판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마네의 그림 속 나신의 여인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 감상의 자유를 느끼게 했다. 이는 과거에는 누릴 수 없던 모더니즘의 자유였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1863년 국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국전이 예술가들에게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국전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이었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보수주의의 성향이 농후했다. 그래서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국전의 심사 기준에 늘 불만이 많았으며 1850년대부터는 아예 국전에 출품하지 않는 예술가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의 불만은 해가 갈수록 더해졌고 마침내 황제에게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국전에서 낙선한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낙선전을 개최하는 것을 허락했다. 풀밭에서의 오찬도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소개되었다. 낙선전은 국전 개막 2주 후 5월 15일에 매우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다. 입장료는 1프랑 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낙선전을 관람했다. 사람들은 국전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았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18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피크닉 장면을 그렸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과 달리 세잔은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일본 판화의 영향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미술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일본 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미국 페리함대가 1853년 도쿄 외항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한 이래 일본이 예술작품과 가재도구들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일본 미술은 한동안 유럽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ㆍ조각ㆍ판화를 연구하면서 동양의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특히 우타마로, 호쿠사이, 히로시게의 다색 목판화가 그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다. 그 외에도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 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유럽의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그림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모네의 수업 시대

마네보다 여덟 살 어린 모네

클로드 오스카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 아돌프와 어머니 루이즈 쥐스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네는 일찍부터 캐리커처를 그렸고 장 프랑수아 샤를오샤르로부터 드로잉을 배웠다. 오샤르는 나폴레옹 시절 궁정화가로 활약한 자크 루이다비드의 문하생으로, 국전에 초상화와 풍경화를 소개했으며 드로잉의 대가로도 알려졌다. 오샤르로부터 수학한 예술가 샤를 륄리에는 르아브르 미술 학교 책임자가 되었으며 라울 뒤피가 이 학교 출신이다.


열여섯 살 때 모네가 주로 그린 것이 인물 풍자화와 배 그리고 풍경화였던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야외에 나가 그리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관심이 없던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에 대한 집념을 우려했고 따라서 모네는 아버지와 불화했으며 어머니가 타계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모네는 학교를 자퇴했다.


1858년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마리 잔은 조카인 마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조카가 회화에 재능이 있음을 안 고모는 지붕 밑 다락방을 작업실로 내주고 계속해서 드로잉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며 그림 재료를 사주었다. 아마 그녀가 모네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아돌프를 설득한 것 같다. 아돌프는 모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경제적인 뒷받침은 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모네는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에서 그녀를 실제 크기로 그리면서 화려한 초록색 실크 드레스와 가장자리에 털이 달린 재킷을 입은 그녀의 미모를 전형적인 파리 여인의 모습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림에서 풍기는 허구적ㆍ낭만적 분위기는 평소 모네의 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었다. 모네는 이 작품을 1865년에 그린 퐁텐블로 숲 속에 있는 샤이의 길과 함께 출품했고 모두 받아들여졌다.


초록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는 성공이었다. 사람들이 이 그림을 좋아한 이유는 유행하는 삶의 일면, 배경을 어둡게 해서 진지한 인상을 주는 점, 위로 돌아서서 얼굴을 관람자에게 향한 우아한 포즈 때문이었다. 한 딜러는 이 그림을 모사한 작품을 주문하기도 했다. 물론 이 그림은 보수주의 평론가와 진보주의 평론가 모두가 반겼지만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록 드레스의 묘사를 두고 모네가 미완성으로 그림을 마쳤다고 비평한 사람도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완성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건 평론가들에게 습작과 그림의 차이로 이해되었고 선천적 재능을 가진 화가와 교육을 받은 화가의 차이로 이해되기도 했다.



실의에 찬 마네

마드리드에서 만난 스페인 화풍

파리 사람들은 스페인 회화에 매우 호감을 나타냈다. 프랑스의 문학과 회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스페인 문화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 고티에, 들라크루아 모두 스페인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작품은 대중적이었다. 마네는 1865년 8월 마드리드를 방문했지만 더울 때라서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시설이 매우 불편하여 열흘을 지낸 후 파리로 돌아왔다. 마네는 자신이 묵은 호텔 식당에서 테오도르 뒤레를 만났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던 뒤레는 가족의 코냑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하던 사업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정기적으로 여행하고 있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는 파리에 안주한 후 공화당 계열의 신문 발행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평론가로 활동했다.


마네는 파리로 돌아와 보들레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벨라스케스가 화가들 가운데 최고라면서, 그의 작품 3-40점을 봤는데 모두 걸작이었다고 감탄했다.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스케치한 투우 장면을 파리에서 완성했다. 흥미롭게도 그가 1865년 10월에 그린 투우 장면을 포함하여 3점 모두에서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네는 1865년 가을 비극 배우를 그렸다. 벨라스케스의 바야돌리드의 파블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배경에 아무것도 삽입하지 않고 빈 여백을 남긴 채 모델을 그렸다. 이 그림과 6개월 후에 그린 피리 부는 소년을 1866년 국전에 출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피리 부는 소년에는 벨라스케스의 영향뿐 아니라 일본 회화법도 혼용되었다. 소년의 발뒤꿈치에 약간의 그림자를 그려 넣어 관람자가 단지 빛의 방향과 깊이만을 알게 했다. 회화의 양식이 주제보다 더욱 중요함을 시사했는데 이는 졸라가 마네의 그림에서 지적한 점이다.


인상주의의 예고

불로뉴 해변은 1868년에 그린 것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렸음을 본다.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질렀다. 이런 방법은 오히려 과학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것인데 사람이 어떤 지점을 바라볼 때 시선이 닿는 곳은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것들은 불분명한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불로뉴 해변은 수평선과 해변으로 나눠 평행으로 구성했으며 바다의 면적은 모래사장의 절반과 같다. 모든 인물들을 동등한 구성 요소로 화폭에 삽입하면서 특별히 어느 하나가 주제로 부각되지 않도록 했다. 이 같은 방법은 사실주의 소설의 일반적 경향이었으며 회화에서는 마네가 이런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마네는 작가 친구들과 잘 어울렸는데 작가들은 마네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화가라고 믿었다.



인상주의

모네의 결혼

모네가 1868-69년 겨울 에트르타에서 카미유와 장과 함께 행복감을 맛보면서 그린 것이 오찬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음에도 230 x 150cm 크기로 그린 것을 보면 야망을 갖고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내용을 알 수 없는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요소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에서도 나타났고, 드가의 강간에서도 나타난다. 아마도 전통적인 회화 구성에 현대인의 삶을 삽입한 데서 오는 19세기식 그림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모네가 이런 형식주의에 매여 그린 그림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지 실내의 장면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모네는 1869년 6월에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작은 마을 생미셸에서 지내고 있었다. 모네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말을 들은 르누아르가 부모의 집에서 음식물을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1869년 6월과 10월 사이에 그르누예르 근처 유원지의 ‘떠 있는 카페’로 가서 이젤을 나란히 하고 작업했다. 이곳에서의 작업에서 인상주의 풍경화 기법이 나타났는데 붓질이 짧아졌고 긴급한 인상이 가벼운 붓질로 영롱하게 나타났다. 모네는 국전을 “진정한 전투지”라고 말해 왔으므로 이곳에서 그린 그림과 오찬을 1870년 봄 국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모네는 1870년 6월 28일 카미유 동시외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았다. 결혼식에 참석한 증인들 중에는 쿠르베도 있었다. 그해 여름 노르망디의 트루빌 해변에서 작업에 열중한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여러 점의 트루빌의 바닷가를 그렸다. 수 주 동안 8점 이상을 그렸는데 단번에 그린 듯한 것들이다. 모네는 로슈 누아르의 호텔을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장면으로 그렸다. 커다란 미국 국기가 쓱쓱 문지른 색조로 펄럭이고 호텔 꼭대기에는 갈겨 쓴 듯한 붓질이 하늘로 치솟는데 이것을 한 번의 붓질로 대충 묘사했다. 이것은 잘 알려진 호텔의 랜드마크로 금박을 입힌 바다의 신이다.


인상주의의 탄생

1867년에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이 그룹전을 구상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제 그 안이 다시 제기되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는 화가들은 그룹전에 찬성했지만 국전을 고집하던 마네는 반대했다고 한다.


1873년 국전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 정관을 몇 차례에 걸쳐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라고 이름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거리 35번지,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2층 화실에서 개최되었다. 오직 국전을 통해서만 발표하기를 원한 마네는 베르트 모리조에게도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드가의 권유를 받아들여 협회에 가입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열렸으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6시까지인데, 오후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고, 카탈로그는 50상팀에 팔았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4월 25일 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인상주의라는 말은 그들의 전람회를 통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화가들은 그림값을 비교적 낮게 책정했음에도 언론의 경멸과 비난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무명협동협회는 12월에 해산되었다가 2년 뒤 1876년에 다시 부활되어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인상주의 전시회는 188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여덟 차례 모두 참여한 작가는 피사로 한 사람뿐이었다. 전시회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드가가 주최한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주의 그림이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모네를 도운 마네

가난한 제왕

모네는 1874년 생드니 가 2번지로 이사했는데 아르장퇴유의 집 근처였다. 그가 이사한 곳은 역 바로 맞은편 초록색 덧문이 있는 분홍색 집이었는데 월세가 1천 4백 프랑으로 전보다 더 비쌌다. 1873년 모네의 연수입은 2만 4천 프랑이었는데 이듬해 그림 5점을 천 프랑에 팔 정도로 궁색해졌다. 돈이 생기는 대로 써버렸던 탓인데 그도 그럴 것이 새짐으로 이사하면서도 하녀와 정원사를 고용했다. 1875부터 프랑스 경제는 더 악화되었는데 보불전쟁 이후 계속해서 나빠진 것이다. 그해 모네의 연수입은 9,765프랑으로 하락했다. 모네는 마네에게 편지했다.


모네는 푸줏간과 빵집에서 더 이상 외상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다고 덧붙였다. 모네가 돈을 빌려가면 아주 오래 있다 갚았지만 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백 프랑 혹은 천 프랑까지도 선뜻 꿔주었다. 이는 마네가 화가로서의 모네의 재능을 인정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모네 역시 마네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네가 사망한 뒤 올랭피아를 박물관에 소장시키는 운동을 펴기도 했다.


1875년 모네가 그린 그림들에는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반영된 듯 색조가 어두운 것이 특기할 만하다. 다리 아래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은 아르장퇴유가 산업화되는 일면을 보여준다. 수직선, 수평선, 대각선이 모두 사용된 이 그림은 모네가 그린 것들 가운데 가장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그림이었다.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마네

마네의 마지막 화실

마네가 1878년 7월 생페테르스부르 4번지의 화실을 폐쇄하고 암스테르담 77번지에 새로 얻은 화실이 그의 마지막 화실이었다. 그는 이 화실을 포함하여 생전에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 몇 집 건너 70번지는 스웨덴 사람으로 백작 칭호를 가진 역사화가 요한 게오르크 오토가 화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약 10개월 동안 비우게 되어서 새 화실을 단장하는 동안 그곳에 세 들었다. 오토의 화실은 다양한 식물들이 많아 마치 온실과도 같았다. 마네는 피아노와 세우는 커다란 거울, 소파 등을 들여놓았고 그곳에서 온실과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 등을 그렸다.


온실에 등장한 커플은 생토노레 거리에 고급 드레스 가게를 갖고 있던 마네의 친구 줄 기요메 부부였고 부인은 미국인으로 쉬잔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여인은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는데 이런 당당한 모습은 부유층 여인들에게서 발견된다.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은 기요메의 아내가 앉았던 그 벤치에 앉은 쉬잔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마네의 친구들은 이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말했지만 마네는 생생한 붓질을 남긴 채 마치려고 한 듯하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

마네의 은혜를 잊지 않은 모네 올랭피아를 루브르로

모네와 로댕의 2인전에 앞서 1889년 5월 파리에서는 국제 프랑스 미술 100주년을 기념하는 미술제가 열렸다. 그해 에펠에 의해 놓은 타워가 건립되기도 해서 파리는 무척 활기를 띠었다. 이 국제전에 모네의 작품 3점이 전시되었고 1865년 물의를 일으켰던 마네의 올랭피아도 소개되었다.


마네가 사망한 지도 5년이 지났다. 미망인 쉬잔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올랭피아를 미국인에게 팔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자 모네는 이 그림이 미국으로 팔려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올랭피아를 구입하기 위해 2만 프랑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마네를 아끼는 사람들이 협조했다. 결국 모네의 노력으로 정부에 압력을 넣는 일에 성공했다. 마네의 친구이자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앙토냉 프루스트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의 중재로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연작의 시대

연작의 출현 크뢰즈 계곡

늘 진경을 찾아다니던 모네는 1889년 봄에 프랑스 서부 크뢰즈 강을 헤매면서 20점의 풍경을 그렸다. 베퇴유에서는 부빙을 그렸고,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벌판을, 벨일과 앙티브에서는 바다의 절경을 그렸기 때문에 모네는 자연의 어떤 모습이라도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크뢰즈에서 다시금 자연과 싸워야 했다.


모네는 이곳에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9점을 그렸다. 그는 크뢰즈 강의 크고 작은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을 캔버스에 담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시간별로 빛의 효과가 달리 나타나는 것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를 탐지한 것이다.


젊은 시절의 영상을 찾아서

1895년 1월 모네는 노르웨이로 갔다. 그는 콜사스 산에 매료되어 순백의 광대함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을 주제로 13점을 그렸다. 그는 아마 호쿠사이의 후지산 그림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그해 4월 지베르니로 돌아올 때 그의 손에는 콜사스 산 그림 외에도 13점의 풍경화가 들려 있었다.


오십대 후반에 접어든 모네는 젊었을 때 찾아다니던 절경을 다시 보고 싶어 했다. 그는 1896년과 1897년 겨울에 노르망디를 여행했으며 또 센 강변의 풍경들을 다시 주제로 삼아 아침의 센 강이란 제목으로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영롱한 색으로 아름답게 묘사했다. 1896년 6월에는 프티가 1895년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모네의 개인전을 파리에서 열었다. 모네가 노르망디와 센 강에서 그린 그림들과 7점의 대성당 그림을 소개한 전시회는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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