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그림 속 의학 이야기

   
이승구
ǻ
생각정거장
   
16000
2017�� 04��



■ 책 소개

 

천년 그림, 의학의 역사를 기록하다

 

유럽 약국 입구에는 왜 뱀이 휘감긴 막대기가 그려져 있을까? 마취제가 없던 시절에는 수술을 어떻게 했을까? 혈액형이 발견되기 전 수혈은 어떤 위험을 감수했을까? 현대 의학 이전에 사람들이 어떤 의료 행위를 하고 제공받았는지 상상해보는 것은 쉽지 않다. 고서를 뒤지거나 잘 고증된 역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해보는 정도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생생하게 체험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과거 의학을 증언하는 이미지들을 살피는 것이다.


이 책은 고대 벽화, 파피루스 조각, 중세 필사본, 근대 명화, 의학 교과서의 삽화들을 통해 오랜 세월 의학이 저지른 실수와 그 극복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21세기 최첨단 의학이 존재하기까지는 돌팔이 이발사들의 잔인한 외과 수술, 수혈이나 지혈 과정에서 발생한 시행착오, 그리고 그것을 줄이려는 의료진의 노력이 있었다. 이 책이 소개하는 그림 속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의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가늠해볼 수 있다.

 

■ 저자 이승구
저자 이승구는 서울에서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정형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너필드정형외과센터(Nuffield Orthopaedic Centre)와 류머티스관절센터(Rheumatology Centre), 서태평양 국제정형외과학회 장학생으로 홍콩중문대학(香港中文大學) 의과대학 수부외과와 중국 충칭의과대학(重慶醫科大學) 종양 분야에서 유학했다. 전공 분야는 수부, 종양 및 소아 정형외과이며, 대한골관절종양학회와 대한수부외과학회 학회장을 역임했다. 2004년에 근정포장, 2013년에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3년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로 은퇴한 뒤로 현재 대전 선병원에서 정형외과장과 국제의료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며: 모든 이의 쾌유를 기도하며

 

PART 1 의학의 시작
01 의학의 상징, 뱀이 휘감긴 지팡이와 십자가
02 동양 의학의 탄생
03 우리나라 의학 제도의 역사와 평균수명
04 수혈의 시작
05 인류 최초 진통제인 술과 아편, 그리고 마취제들
06 의학의 아버지는 누구?

 

PART 2 의학의 발전
07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의 발전사
08 병원의 시작
09 이발사와 외과 의사
10 고갈 치료의 전성기
11 타진법과 청진기의 발명
12 두려움, 신경정신증의 시초
13 인체의 혈액 순환 원리를 밝히다
14 우리나라 최초로 안경을 쓴 사람
15 콘돔과 올림픽

 

PART 3 수술과 해부
16 동물과 인체 해부의 시작
17 사지와 유방 절단
18 수술의 변천사
19 전쟁과 부상병들
20 종교적 목적으로 행해진 수술들

 

PART 4 새로운 의술과 기계
21 의료 기구의 역사
22 산부인과의 역사
23 항생제와 백신의 발명
24 세균과 소독법의 발견
25 현미경의 발명과 세포병리학의 창시
26 치과 치료
27 성형 수술과 안과 수술

 

PART 5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
28 과거의 의사들
29 과거의 간호사들
30 무당과 최면술사
31 환자 개념의 변천
32 왕진
33 환자와 아이들
34 선천성 기형
35 탄생에서 죽음까지
36 죽음
37 병원 외래
38 정신병원

 

PART 6 의학 교육
39 의과대학의 시작과 교과서
40 의학 교육
41 고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의학서들

 

부록 1 역사의 명의名醫들
부록 2 참고문헌
나오며




천년 그림 속 의학 이야기


의학의 시작

의학의 상징, 뱀이 휘감긴 지팡이와 십자가

현대인들에게 병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표적인 상징은 빨간 십자가일 것이다. 이 상징은 전 세계에 걸쳐 활동하는 인도적 기구인 적십자의 마크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에 가면 잔이나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뱀을 묘사한 간판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바로 약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십자가, 뱀이 휘감고 있는 술잔이나 지팡이가 의학을 상징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어떤 이유에서일까?


기원전 460년에 그리스의 코스 섬에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기원전 약 4660-기원전 약 377)는 의사라는 신분 외에도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가 과거의 주술적이고 철학적인 의학을 거부하고 환자의 머리맡에서 직접 관찰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자연과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의학 개념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의사의 사명을 명시한 의학 선서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다. 12세기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의 의학 선서를 기독교적 사유와 관련시켜 십자가 모양으로 동판에 조각했다.


고대 의사들은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의사의 특별한 상징으로 여겼으며, 이것을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라 불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의학의 신으로서, 기원전 550년경, 히포크라테스보다 100년 전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의학 실력이 얼마나 출중했으면 신으로까지 추앙받게 되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항상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환자에게 들이밀어 놀란 환자가 자가 치유를 하도록 했다. 덕분에 이 지팡이가 의학의 상징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학 제도의 역사와 평균수명

《조선왕조실록》의 영조와 정조 시대 부분을 보면, 1749년에 심각한 역병이 발생하여 인구 3-4명당 1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의 의학 수준을 보여주는 끔찍한 사망률이다. 그 시절 질병의 대응 방식은 한약과 침 치료 후 환자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는 것뿐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염병이 창궐하면 별 소용없는 약제나 탕약을 쓰고, 그러다가 환자가 죽으면 사체 화장 후 기도와 제사, 굿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국인들이 근대 의료를 접하게 된 것은 1876년(고종 13) 2월 27일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본과 열강들에 나라 문을 열면서부터다.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1899년에 국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1902년 최초의 근대식 면허 의사 19명이 탄생했다. 2차례에 걸쳐 17명의 졸업생을 더 배출한 국립의학교는 1907년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었고,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변경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1904년에는 미국 선교사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고, 1952년에는 한의사 제도가 국내에 정착되면서 한의과 대학이 설립되었다.


2014년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평균수명은 85.48세로, 일본 86.8세와 에스파냐 85.5세 다음으로 세계 3위 수준이다. 여성은 86.5세, 남성은 78.8세로 북한 평균수명인 69.5세보다 훨씬 높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명을 추정하려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국왕 27명의 사망 나이를 통해 대다수 국민들의 수명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가장 장수한 조선시대 왕은 81년 5개월에 세상을 떠난 영조이며, 두 번째는 72세까지 산 태조 이성계다. 70살 고희를 넘긴 임금은 27명 중 2명뿐이어서 “인생칠십고래희(사람이 칠십 세까지 살기 힘들다는 뜻”이라는 옛말이 들어맞는다. 그다음으로 고종과 광해군이 각각 66세, 정종이 62세로 뒤를 잇지만, 회갑 잔치를 치른 왕은 몇 안되며, 사망 연령은 평균 46.1세다. 생활 여건이나 건강 상태가 이들 임금과 크게 차이가 났을 백성이라면 조선시대 평균연령은 더 낮았을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출생아 셋 가운데 하나는 4살까지 살지 못했고, 최장수 임금 영조의 자녀 14명 중 5명이 4살을 넘기지 못했다. 201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첫돌까지 살지 못하는 아기는 3백명 중 하나밖에 되지 않는다.


수혈의 시작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 과거의 치료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수혈이다. 현대의 안정적 수혈 방법이 확립되기 전인 약 6백 년 동안에는 무수한 우여곡절과, 고귀한 생명들의 속절없는 희생이 있었다. 수혈과 관련된 우연한 발견, 그리고 그 발견들을 예의 주시한 명철하고 용감한 의사들의 혁신적 사고와 무모한 시도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더 많은 생명들을 잃었을 게 분명하다.


수혈에 대한 최초의 흔적은 기원전 2,000년 고대 이집트 때의 문학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건강한 혈액을 이용하여 늙거나 병든 사람에게 젊음과 생기를 부여했다는 구절이 실려 있다. 공식 문헌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수혈은 중세시대에 있었다. 1492년 로마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임종을 앞두고 소년 3명의 피를 마셨으나 네 사람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17세기에는 영국의 윌리엄 하비가 인체의 혈액 순환 체계를 해부학적으로 정립한 혈액순환론을 통해 인체 생리학을 소개했다. 1665년 옥스퍼드대학교의 리처드 로워는 최초의 개 실험을 통해 동물의 몸을 돌아 폐로 들어가는 검붉은 피가 폐를 거치면 산소 공급으로 건강하고 선명한 색이 됨을 밝혔다.


이후 의사들은 인간과 동물 간의 수혈 실험을 활발히 진행했다. 1667년 리처드 로워가 자기 자신과 한 환자에게 양의 피를 수혈했고, 같은 해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의 장밥티스트 드니가 양의 피로 사경을 헤매는 15세 소년에게 수혈을 했다. 이 두 실험은 별다른 후유증 없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67년 7월 24일 스웨덴 남작 구스타프 본데는 송아지 피를 수혈받고 바로 사망했다. 이후 1670년대까지 장밥티스트 드니가 행한 수혈 중 몇 차례의 성공 사례가 있었으나, 대부분 사망하여 곧 동물과 사람 간의 수혈은 중단되었다.



의학의 발전

두려움, 신경정신증의 시초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모든 일에 크고 작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에는 즐길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정신병적이고 고질적인 경우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대인의 단조로운 반복적 삶과무기력적으로 황폐해져가는 정신 변화를 표출한 화가로는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트 뭉크, 르네 마그리트 등이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의 불합리한 현실, 미래의 인간 삶에 닥칠 정신적 변화의 두려움과 고통을 미리 예견했으며, 이러한 내적 두려움을 그림이라는 예술에 의해 외적 성취감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16살에 헤이그의 구필화랑에서 동생 테오와 미술 판매상으로 근무했다. 이때 매일 수많은 화가들의 다양한 그림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각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1877년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1886년 벨기에 안트베르펜미술학교에서 잠시 공부했으나,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전달하는 새로운 미술 화풍을 형성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그린 900여 점의 그림들이다. 그중에는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정신병원의 정원> 등이 있다. 현대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이지만 생전에는 <붉은 포도밭> 단 1점만이 팔리는 등 정신병과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노르웨이 화가이자 판화가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을 시작으로 누이, 아버지 등 가족을 차례로 잃었다. 특히 애인인 다그니 유엘이 자신의 친한 친구와 결혼하자,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불렀던 그가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이었다.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주제를 강렬히 다룸으로써 보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기법은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1893년에 그가 그린 <절규>는 인간 정신의 어두운 심연을 탐구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이 초상은 끊임없이 물결치는 선을 사용하여 화면 안의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우리 시선을 옭아맨다. 기묘한 일출이 격렬한 색채를 통해 극적이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머리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삶이 복잡해진 현대인의 피폐해지는 정신세계, 고뇌, 정신착란의 발작이 느껴진다.


벨기에 태생인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그의 작품에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와 위기감, 그리고 신비주의적 환상이 어우러져 있다. 1953년 그림 <골콘다>에서는 똑같은 중산모와 짙은 회색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들이 똑같은 붉은 색 지붕의 주택가 위를 빗줄기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다. 개인 정체성의 상실과 변함없는 일상의 단조로운 진부함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는 현대 인간들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수술과 해부

종교적 목적으로 행해진 수술들

중세시대에는 많은 수술들이 종교적 믿음과 그릇된 신념에 의해 행해지기도 했다. 그림 <광기의 치료>는 광기를 방지하고 치료할 목적으로 정신병자들의 머릿속에 있다고 상상되던 돌을 제거하는 수술 장면을 보여준다. 당시에 황당한 의학적 소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다.


수술은 때로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실행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예는 포경수술이다. 아브라함이 99세 때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창세기 17:10-14)” 이처럼 포경수술은 최초의 기독교적 수술이었다.


종교적 신념, 부족 간 왕의 권위 경쟁, 생존 신앙을 돈독히 하기 위한 제물의식의 수술도 행해졌다. 1550년경 멕시코 아즈텍인들은 약초로 타박상, 치질 등을 치료했고, 천연 마취제를 사용했으며, 날카로운 흑요석 칼로 수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경미한 수술외에는 온통 종교적 의식만을 생각했으며 인간의 생명 존중이나 의사의 사명 등은 아랑곳없었다. 신을 숭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고 그 피와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의술과 기계

치과 치료

사람이 정말 참기 어려운 통증은 자연분만 때 산모들의 산통, 요로 결석 때 혈뇨와 옆구리 통증, 통풍성 관절염 때 엄지발가락의 염증성 통증, 그리고 치통이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정 시대의 풍습과 사회생활 모습을 알아보는 데에는 때로 책보다 한두 점의 그림이나 삽화가 더 직접적이고 깊이를 가진다. 그 시대의 시각물들은 우리의 감정에 바로 다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존 클리어의 작품이 그렇다. 2백 년 전의 영국 옥스퍼드 주민들의 치통 진찰 모습, 발치 때 나타나는 두려운 기색이나 통증의 표정은 현재 우리가 치과에 가서 보이는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과 의사의 엉뚱한 발치 자세는 오히려 환자의 아픔을 즐기는 듯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18세기에 그려진 또 하나의 입속 치료 장면이 있다. 배경은 약제상 상점으로, 약초를 조합한 많은 종류의 약제들을 담아놓은 항아리들이 선반에 있다. 당시에는 약제상도 간단한 진찰과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제, 소화제, 하제 등을 조제해 판매할 수 있었다. 약제상은 고급 매춘부의 입속 궤양을 검사하고 있고, 뒤 의자에 앉은 서기는 약제상이 말하는 증상들을 적고 있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젊은이는 약제상의 처방에 따라 약초들을 혼합 제조하고 있는 듯하다. 뒤에서는 두 명의 환자가 대기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250년 전 진찰실 정면에 알로에로 보이는 백합계 식물이 크게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알로에가 아마도 실내 공기를 맑게 하는 용도거나, 소화제나 하제로 사용되는 약용 약초이거나, 우리가 잘 모르는 치유의 상징이었던 듯하다.


성형 수술과 안과 수술

15세기 유럽에서는 얼굴 성형술이 많이 발달했다. 당시 유럽에 창궐한 선천성 매독으로 인해 흉측하게 주저앉은 ‘안장 모양의 코’를 교정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 외에는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의 부상자들과, 성질 급한 귀족들 간의 무수한 결투로 인한 안면 추형의 성형 수술이 많았다.


《조직 이식을 통한 복원 수술에 관하여》에 실린 삽화를 보면 당시 코 성형 수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가스파로 타글리아코지는 지금부터 500년 전에 성형 수술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이 삽화는 유경 식피술로 팔에서 피부 절편을 만들어 얼굴로 전위 이식하고, 이식 피부가 당겨지거나 탈락하지 않고 활착될 때까지 최소 4주간 보조기로 고정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수술로도 시행하기 어려운 방식을 그 당시 고안하고 성공시켰다는 것은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안과학은 의료 분야 중에서 가장 늦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광학 연구 전에는 안구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구가 없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다가, 1708년 프랑스의 피에르 브리소가 수정체가 흐려지는 백내장을 확인했다. 1745년에는 자크 다비엘이 수정체 적출을 시도했다.


백 년 뒤에는 베를린대학교의 알브레히트 폰 그뢰페가 안압을 낮추기 위해 홍채를 깎아내고 녹내장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후 점진적으로 냉동 수술 기법, 레이저 사용 기법, 수정체를 플라스틱 수정체로 교체하는 방법 등 안과 수술이 현대적으로 발전했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

과거의 의사들

옥스퍼드사전을 보면 돌팔이 의사란, 의학 기술과 치료에 대하여 깊이는 없으면서 많은 걸 아는 척하는 떠돌이 의사나 약사를 가리킨다.


헤릿 도우의 <돌팔이 의사> 그림 속의 돌팔이 의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번잡한 시장 속에서 높은 단상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있다. 오른쪽으로 원숭이 한 마리를 데리고 있으며, 위엄 있게 보이느라 대학 교수들의 가운을 걸치고 있다. 중국식 우산 아래에서 자신이 만든 약을 큰소리로 선전한다. 빵을 파는 여자아이들과 잡상인들이 모여 있으며, 앞의 사냥꾼은 돌팔이의 약에 관심이 있는 듯한데, 오른쪽의 주부는 회의적인 표정이다. 팔려는 약이 아마도 사랑의 묘약인 듯, 사냥꾼의 왼쪽에 서 있는 남녀는 약에 호기심을 보이며 속삭인다.


근대 이전의 의사는 현재와 같이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고, 떠돌이 약장사로서 시골 장바닥에서 스스로 만든 약이나 고약 등을 소리치며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가 점차 변하고 의료가 발전하면서 의사의 품격과 사회적 신분이 상승되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의사들의 진단 기술은 맥박 잡는 것과 소변 색깔을 보는 것이 다였다. 그러다 토머스 윌리스가 단맛이 나는 소변이 있음을 발견하고 당뇨병을 발견했다. 이후 소변으로 모든 병을 진단하는 소위 ‘소변 예언자’들이 한동안 득세했다. 그림 <시골 의사>에 등장하는 돌팔이 의사는 초라하고 빈약해 보이는 진료실에서 큰 의학책을 펼쳐 보면서, 소변을 흔들고 맛을 보고 있다. 소변의 색깔, 혼탁도, 이물질 유무, 냄새 등으로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옆의 환자는 자기 소변 검사물을 흔들고 있는 의사가 무엇이라 말할까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고, 조수는 뒤편에서 약초 약을 조제하고 있는 듯하다.


의사들의 옷차림과 진찰실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화려해지는데 고대부터 현대까지 의사들의 가운, 옷차림, 외래 진찰실, 그 외 사회적 신분 상승을 보여주는 예들을 당시 주거 환경의 변화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거의 간호사들

간호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50년경 이집트 람세스 2세의 한 석회암 비문에서 발견된다. 왕들의 계곡에서 신전을 건축할 때 환자를 보살피는 사제가 있었는데, 부역 의무가 없는 여성들이 사제들의 치료 보조일을 맡았다고 한다.


기원전 500년경 인도에서는 부처가 확립한 수도승 체계 안에 도움 간호사가 있었다. 이들 간호사는 청결해야 하고, 지적이고 박식하고 환자에 대한 동정심이 많아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자 카샤파는 간호사는 모름지기 신경질적이지 않아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의 성서 《스슈루타 사미타》에서는 간호사로 적합한 사람이란 냉철한 정신과 상냥한 태도를 갖추고, 결코 험한 말을 하지 않으며, 강인하고 병자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며, 끈기 있고 꼼꼼하게 의사의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간호사의 이러한 규정은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1893년에 영국의 백의 천사라 일컫어지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규정한 <나이팅게일 선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수많은 간호대학과 간호전문대학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적십자 간호대학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적십자 간호부양성소를 모체로 한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적십자병원 부설 교육기관으로 전환되었다가 1962년 적십자 간호학교, 1979년 적십자 간호전문대학(3년제) 등을 거쳐서 2011년 중앙대학교와 합병된 뒤 현재의 중앙대학교 적십자 간호대학이 되었다.  



의학 교육

고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의학서들

사회의 모든 새로운 발단에는 해당 분야 선각자들의 끊임없는 의구심과 탐구력, 그리고 개인적 천재성과 추진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대 의학은 대부분 종교적 힘에 덧붙여진 민간 요법들이다. 그 무모한 틀을 깨고 새로운 발전을 보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일단 부정적이고 배척하는 인간의 속성상 오랜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의학 교육의 발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세시대의 의학은 무지하지만 확고한 종교적 신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오용되고 무모하게 실행되었다. 이토록 무모했던 중세의 의학적 사실들은 대부분 한두 명의 획기적 사고방식과 의심, 뛰어난 관찰력, 선구자적 지식을 겸비한 추진력으로 인해 새롭고 진실된 의학의 길로 힘들게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의학서들이다.


세계 최초의 인체 해부학 책은 베살리우스가 저술한 《인체 구조에 관한 7권의 책》이다. 이 책은 중세 몇 백 년간 절대적 의학 이론으로 군림해온 갈레노스의 의학 지식(그는 동물 해부의 결과가 인체 해부의 결과와 같다고 주장했다)을 의심했으며, 많은 사형수의 시체 해부를 통해 얻은 정확한 묘사와 설명으로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오류들을 지적했다. 덕분에 오늘날의 해부학 기초를 이루고 있다. 특히 베살리우스는 의술이란 인간 구조의 해부학적 신비를 밝혀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의문과 회의 속에서,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과학에 남긴 가장 중요한 원칙, 즉 직접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는 것만이 진리로 향하는 확실한 길임을 거듭 주장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하고, 권위자들의 주장에 맹목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입증한 어떠한 모순이나 잘못도 동료들에게 알려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교과서는 이후 인체의 생리, 외과 수술, 정상 조직과 비정상적 암의 발생, 병리 등 모든 의학의 발전을 선도적으로 주도함으로써 고대 의학이 현대 의학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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