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품다 예술을 낳다

   
고미
ǻ
대숲바람
   
22000
2016�� 07��



■ 책 소개
제주에서 얻은 예술적 영감을 조형적 언어로 표현해내는 15인의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역 언론인 제민일보 문화부에서 다년간 문화예술 분야를 취재해온 저자는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작가들과 깊이 있게 교감하며 작가와 작품 세계를 저자의 독법으로 유니크하게 안내하고 있다. 제주 옹기, 회화, 설치, 판화, 영화, 도예, 사진 등 다방면의 예술가들이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제주의 질감을 느껴보는 시간은, 예술의 메카로서의 제주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 저자 고미
제주 출신. 제주대학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한때 애니메이션에 빠져 외국어에 탐닉했고 동시통역에 대한 원대한 꿈을 꿨다. 이루지 못한 꿈에 몇 년 목을 매다 1996년 12월 제민일보에 입사, ‘기자’라는 명함을 만들었다. 문화부를 시작으로 경제부와 정치부, 교육부, 사회부를 두루 거쳤다. 2006년 질문 많고 고집 센 성격만 꼭 빼닮은 아이를 얻으며 현재 ‘11년차 워킹맘’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여러 부서를 거쳤지만 전체 기자 경력 중 절반 이상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전시장’에 입성하기까지 2년 가까이 문화 예술 외곽부터 훑는 수련 과정을 거쳤고 이후도 매일 배우는 마음으로 현장을 찾고 있다. 2005년 대하 기획 ‘제주잠녀’팀에 합류, 11년 넘게 필드를 지키고 있다. 지역 문화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심으로 2010년 제주대학교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에 입문, 수료했다. 『추자도 바당』(공저, 블루노트, 2012) 『통사로 살피는 제주해녀』(공저, 제주도(사)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 2014) 『제주해녀-역사의 고리를 연결하다』(공저, 제주도(사)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 2015)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

 

■ 차례
질박한 묵묵함을 지닌 제주 옹기의 재해석_강승철
제주를 품고 사색하고 그려내다_강요배
경계에서 본 제주_고권
거문오름 안에서 길을 찾다_김연숙
바다처럼 품어준 해녀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_김흥구
풍부한 공간감으로 풀어낸 제주의 시간-이미지_문창배
바다의 오래된 기억, 서정과 서사의 균형미_박훈일
숨 멈춘 오브제에 판화적 생명을 불어넣다_부지현
소소한 일상 속에 숨겨진 드라마틱한 제주_오멸
다양한 실험 위로 제주마 달리다_유종욱
제주의 일상적 풍경을 비틀다_이지유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제주 돌의 미학_하석홍
제주의 시간을 긁고 새기다_한중옥
꿈꾸는 섬이 들려주는 환상적인 이야기_허문희
제주 신화에서 건져올린 삶의 메타포_홍진숙




제주를 품다 예술을 낳다


질박한 묵묵함을 지닌 제주 옹기의 재해석_강승철

"옛 방식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현재 쓰임이 없다면 의미가 없죠. 가능한 당장 쓸 수 있어야 진짜 옹기라고 생각합니다. 애써 구해놓고 장식품으로 보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옹기가 아닌 거죠. 옹기는 원래 우리 어머니들이 애용하던 생활 도구에요. 귀한 것이라 대를 물리기도 했고 행여 깨뜨릴까 애지중지 다뤘죠. 쓰면서 좋다를 느껴야지 보면서 괜찮다하는 것은 옹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꾸밈도 꼼수도 없는 제주 옹기에의 끌림

가마 앞에 섰다. 뜨거운 열기가 주변의 것들을 거침없이 밀어낸다. 불이 흙을 담금질하는 기세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운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무섭게 덤벼드는 불꽃 앞에 초연한 것들은 조심스레 가슴속 숨겨뒀던 색을 꺼낸다. 스스로 단단해진 것들에서 돋을볕 같은 적색이 우러난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기억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사이,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질박해진다.


달항아리 같은 날렵한 선이나 청자의 은근한 색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감탄이란 이름으로 바꾼 체질은 질펀한 대지의 느낌으로 세상의 것들을 품는다. 땅의 색에 가까워지는 만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삶의 숨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자연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질박한 묵묵함은 미라는 한 글자로는 다 채우기 어려운 깊음이 있다. 제주 옹기다. 검정에 가까운 갈색의 것들은 손때를 타야 윤이 난다. 착시 같은 붉은 기운은 탁하고 투박하다. 두텁고 완만한 곡선 어디에도 관능적이거나 날렵하다는 느낌을 찾을 수 없다. 한라산이 한참 활동을 하던 시기 점성 높은 용암 줄기가 세월과 함께 흙이 되고 다시 열을 만나 옹기가 되는 자연 윤회 안에서 점점 더 거칠어진다. 그래서 가슴에 밟힌다.


작가 역시 그런 것들에 매료됐음을 털어놨다. 한창 나이 때 돈이 되는 것들의 유혹을 쫓아 달렸지만 끊임없이 뒤통수를 쳤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은 새로운 출구를 갈망했다. 그때 제주 옹기가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음을 외쳐대는 제주 흙으로 만들어진 제주 옹기는 꾸밈도 꼼수도 없이 진솔했다. 이런 면이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하여 작가를 끌어당겼다.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기 위해 제주에서 대구, 서울, 이천, 부여를 떠돌아다녔던 그는 제주의 흙에 발을 내렸다. 그동안 씨름했던 기름 가마도 장작 가마로 바꿨다.


"다들 뭐하는 짓이냐고 했죠. 남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쓰는데 뭐하러 섬으로 돌아오는 거냐? 훨씬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 틈을 찾기 어려운 작업을 굳이 해야 할 이유는 뭐냐? 누구는 말리고 누구는 충고하고. 그중에는 잘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실 주변 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니 그냥 해야 했죠."


제주 옹기의 기원은 생각보다 한참을 거슬러 간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들에서 고산리식 원시 무문 토기와 융기문 토기가 발굴되면서 신석기 이래 많은 토기와 옹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섬에 사람이 살았던 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그런 것이 어느 순간 사라져 갔다.


1970년대 초에는 전남 강진에서 흙부터 다른 옹기가 들어왔다. 추자도에 옹기를 팔러 길을 나섰던 배 하나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를 해오면서 강진 옹기라는 신문물이 제주로 들어와 제주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것도 잠시, 플라스틱이며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것이 보편화되면서 옹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옹기장이의 맥이 끊기고 잊힌다 했다. 아니 했었다. 십수 년 전 지역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제주 옹기를 살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도시화에 밀려 허물어진 가마터를 복원하고 흙을 찾았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옹기는 다른 느낌의 옹기였다. 예전과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지 맛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때문이다. 물론 공정 과정에서 체온이 보태지기는 하지만 결국 옹기는 손때가 묻어야 한다. 작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옹기는 가만히 모셔놓는 것이 아니라 쓰고 닳으면서 사람과 같이 나이를 먹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저절로 번들번들 빛을 먹지요. 그런 자연스러움은 외면하면서 전통의 재현이라거나 과거의 현재의 공존, 지난 것들에 대한 재해석 같은 설명을 보태가며 진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제주 옹기에 대한 공부 제주다움의 자료화

작가는 그런 가운데서도 정통의 중요성을 붙들었다. 옹기를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늘 모자랐다.


"먼저 옹기를 연구하신 분들이 많아서 어렵지 않을 거라 안이하게 생각하기도 했었죠. 부지런히 따라다니고 연구 모임이 있다면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그래도 모자란 거예요. 각자 자신들만의 영역에 집중하느라 답보다는 채워넣어야 할 질문이 늘었죠. 쉽게 얻겠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빙빙돌며 답을 피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녔어요. 급했죠.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혹시 나처럼 옹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싶기도 하고..."


작가는 자료화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직접 옹기를 만든 적이 있다거나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다는 말만 들으면 일단 필기도구와 녹음기부터 챙겼다. 가마는 굴이라 하고, 항아리는 통개라 했던 이름의 연원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식기류, 바다에서 사용되는 어로구, 연적과 벼루 등 문방구류, 한약 도구인 뜸단지에 이르기까지, 캐면 캘수록 옹기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했다. 그릇을 구울 때 불의 온도가 대략 섭씨 1200도 내외로 표면에 자연적인 유약 발색을 유도하는 노랑굴이며, 불의 온도가 섭씨 900도 내외로 연기를 품어 그릇 자체에 검은색을 띠게 하는 검은굴이며, 작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자료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흔히 허벅이라고 부르는 물 긷는 용기에서부터 떡을 안치는 시리, 전통술을 빚는 고소리, 요강, 펭 같은 전통 옹기를 만나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처음엔 지금 가마터가 남아 있는 곳만 봤더랬죠. 구억리에 제주도 지정 기념물로 등록된 굴 중 2곳이 있어요.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구억리는 현재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곳이고, 정작 잃어버린 곳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죠. 옹기를 굽기 위해서는 물과 흙, 완만한 비탈이 필요한데 이중 두 가지는 집성촌을 이루는 요소와도 겹쳐요. 그렇게 본다면 도심 중 이전 중심지였던 곳들에는 가마터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작가의 눈이 반짝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질문이 따라온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어디에 있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우물우물 머리와 입이 따로 논다. 작가는 몇 군데를 지목했다. "그저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옹기를 구웠다는 채록 자료도 있어요. 특정한 한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을 인정받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는 제주 안에서 모든 것을 찾고 있었다. 제주에서만 찾을 수 있는 암반 사이 퇴적된 흙을 그냥 덥석 쥐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확인하는 흙 만지기에서부터 전통 가마와 같은 온도로 소성하는 가마도 만들었다. 일종의 섬과 소통하는 의식이다. 생각대로 처음부터 옹기와 예술은 어울리지 않았다. 도예의 한 부분으로 우겨넣기는 하지만 섬 마냥 비와 바람에, 또 파도에 치이며 울퉁불퉁한 개성을 감추려 하지 않는 것들에 반짝이는 옷을 입히고 나서 멋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원래 용도를 살리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아닌 등에 지기 편했고, 식품류를 저장하는 데 더없이 적합했고, 슬쩍 금이 가고 살짝 이가 빠져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티가 나지 않는,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뭐든 담아 넣을 수 있어 요긴했다. 그래서 더 눈이 가고 정겨웠다. 그 맛이 옹기의 매력이 아닐까. 애초부터 옹기는 필요하면 그때그때 만들어 쓰는 생활 도구였기 때문에 질감과 색깔 같은 것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옹기를 원형 그대로 살리는 작업은 그래서 당연히 밟아야 할 수순이었다.


생활 도구로서의 옹기가 꼭 필요할 때 외엔 자신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듯이, 작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옹기들 역시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 마당 한켠에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게 하는 것은 옹기의 숨통을 쥐어짜는 일이다. 생활 도구였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작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옹기도 생활에 요긴한 것들로 차곡차곡 안을 채우며 삶이란 이름으로 다가간다. 숨을 들이고 내쉬는 동안 저절로 축적된 기억은 하나의 역사다. 하나하나 역사를 품은 것들은 쓰임을 찾아서야 비로소 이름을 허락한다.



바다처럼 품어준 해녀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_김흥구

그의 좀녜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감정이다. 사진들마다 막막하고 먹먹한 세월들이 여러 겹 주름으로 접혀 있다. 흔히 봤던 좀녜들과는 어딘지 다른 표정들이다. 작가 역시 한 장 한 장 어머니, 할머니의 이름을 기억한다. 사진을 찍었을 때의 상황이며 작은 소품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도 훤하다. 카메라 렌즈 곳곳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라져가는 해녀 10년의 기록, 제주 좀녜

사진 하면 어딘지 유려한 느낌이 앞선다. 비주얼 면에서는 다른 장르들을 압도하는 무엇이 있다. 제주에서는 더하다. 사진 좀 찍는다고 하면 자기만의 뷰포인트 하나쯤은 다 갖고 있고, 남들에게 자랑하고픈 멋진 사진 한두 장쯤은 예의다. 그런 사정들로 종종 기록 사진이나 예술 사진이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일도 있었다. 순간을 포착하는 매력에 나는 감히 사진을 시간을 담는 그릇이라 부른다. 그의 사진을 봤을 때도 그랬다. 돼지고기뼈를 푹 고은 국물에 모자반을 넣고 풀풀해질 때까지 끓인 몸국 한 그릇을 혼자 몰래 먹는 기분이었다.


그는 2003년 대학생 신분으로 제1회 GEO - OLYMPUS PHOTOGRAPHY AWARDS 대상을 수상하며 신선한 화제가 됐다. 다큐멘터리 사진만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인데다 여러 장의 작품으로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를 구성하는 피쳐스토리 부분 상이어서 더 그랬다. 기획에서부터 작품 완성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다 피하체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만큼 전문 작가들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작업의 결과물로 아마추어가 첫 대상을 차지했던 까닭에 작가는 물론이고 작가가 탐닉한 대상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일생을 결정하는 큰 자극은 다름 아닌 좀녜다. 어찌 됐든 그의 좀녜는 덤덤하다. 현장에서 만나는 모습 그대로다. 사진이나 영상에서 보는 것과는 그 느낌이 다르다는 말이다. 많은 사진들이 특별한 순간에 집중했다면 그의 사진은 맨살을 드러낸 듯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2011년 좀녜-사라져가는 해녀, 10년의 기록이란 타이틀을 내건 작품전을 진행했을 때는 솔직히 수차례 섬 밖 작가들이 그려냈던 것 이상은 없을 것이라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작가와 몇 번 대화를 하고 나서는 마냥 미안해졌다.


제주적 감성적 프레임 좀녜들의 생생한 삶

흔히들 해녀라고 부르는 그녀들을 몇 줄 설명까지 보태가며 좀녜라고 부른 것부터 범상치 않다 느꼈지만 그의 감성은 이미 제주적이다. 좀녜나 좀수, 잠녀는 제주에서만 쓰는 말이다. 일부러 섬에서만 쓰는 말을 골라냈을 만큼 작가는 섬과 밀착했다.


"제주에서 해녀를 이르는 방언이라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오해도 많았죠. 일반적으로 알려진 해녀라는 말 대신 굳이 좀녜라고 쓰는 게 혹시 튀어보려는 것이 아니냐, 무슨 말인지는 아냐 하는 질문도 받았어요.


해녀가 일본의 식민화 작업으로 만들어진 명칭이라는 말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면 따를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것은 깡그리 잊혀진 채 껍데기만 남은 해녀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지켜 가기 위해 생의 막바지까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좀녜들을 있는 그대로 프레임 안에 담고 싶었다. 처음 좀녜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학생 신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좀녜 작업을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부터였다.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수업을 꽉 채워 듣고 목요일 밤에 부산으로 가서 제주까지 11시간 걸리는 밤배를 탔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무조건 바다에만 가면 만날 수 있겠다 생각했죠. 해안도로를 순환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 작업하는 모습이 보이면 내려서 다짜고짜 말을 걸었어요. 사진을 찍게 되고나니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 망설여지더라고요. 작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힘겨워들 하세요. 그렇게 해안가 바위를 오르는 할머니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고민을 하면서도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어요."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약속이나 한 듯 배를 타고 제주도를 찾았다. 누가 보면 고향이냐고 물을 정도로 부지런을 떨었다. 물과 볕에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로 젊은 날의 사진 앞에 선 비양동의 할망 좀녜부터, 비 오는 날에도 테왁을 들고 바다로 나가는 서천진동의 좀녜 무리, 물안경을 쓴 채 건져올린 해산물부터 확인하는 온평리 좀녜에 이르기까지, 그는 꾸준히 어머니, 할머니들과 생활하며 그녀들의 살을 기록해 왔다.


"처음에는 왜 왔냐는 타박이 더 많았어요. 학교에서 공부나 할 것이지 할망들 고생하는 것 찍어서 뭐에 쓸 거냐고. 어떤 할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곱게 화장도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시기도 했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찍는다면 손사래를 쳤어요. 그렇게 한두 해 작업을 하고 나니 서로 편해졌어요. 카메라의 존재를 잊는 적도 많았고요. 아마 작품들을 보면 그런 느낌들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절절한 좀녜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직접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웠다. 장비를 착용한 채로는 숨비소리의 깊이를 알 수 없어서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든 적도 있다. 바깥물질을 나간 좀녜들을 찾아 바다 건너 일본을 드나들기도 했다.


"시험에 이런저런 이유로 한 몇 주 얼굴을 못 비추면 그렇게 궁금해하시는 거예요. 일부러 숙소 쪽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기척을 살피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듣고 싶어하시면서도 서운한 기분에 일부러 냉정하게 대하시는 할머니도 계셨어요.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제가 오고 가는 걸 다 보고 계신 거예요. 카메라 가방이 바뀌는 것까지. 한번은 얼굴이 많이 까매졌다고 선크림을 잘 발라야 한다는 설명을 한참 들은 적도 있어요. 어제 옆집 누구를 더 많이 찍었으니까 오늘은 나를 더 찍어줘야 한다는 농까지 던지셨죠. 1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내년 해경(마을공동어장 작업을 이르는 말) 때 다시 올게요 하는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되는 경우도 몇 번 있었어요. 돌아가셨다는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그때는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었죠. 왜 더 일찍, 더 자주 오지 못했나 싶어서요."


물질을 하고 밭일을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자식의 사연은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제주 4·3까지 제주의 굵직한 역사가 제주의 좀녜에는 얽혀 있다. 이제 삼십대 후반인 사진가는 좀녜 이야기에 목부터 메인다. 그의 앵글속에서 그녀들은 살아 있는 존재로 부각된다. 박제화에 대한 경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좀녜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희화한 모습으로 거칠게 지역에서만 통하는 말을 쏟아내며 웃음을 유발하거나 성큼 물속으로 들어가 전복이나 소라를 채취하고 거침없이 수면을 차고 오르는 모습, 해녀춤 공연을 하고 갓 잡은 해산물을 즉석에서 손질해 흥정하는 모습들은 좀녜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일부이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사진 속 모습을 보고 그녀들의 강인함을 떠올렸다면 좀녜라는 이름에 담겨 있는 얼마 남지 않은 기억, 그 안에 품은 제주 때문입니다. 애잔함과 쓸쓸함을 느낀다면 이것은 우리 삶의 한 단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송기영 시인이 그의 전사에 남긴 짧은 글이 별처럼 눈에 박힌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제주 돌의 미학_하석홍

제주의 돌은 그대로 작은 우주다. 제주의 삶이 천착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가 만든 돌은 생각하는 것을 펼치는 캔버스와 동격이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것처럼, 그가 부여한 존재성에 따라 돌이 된다. 화산 분출, 바닷물과 비바람에 의한 균열과 마모 등 자연의 힘으로 빚어진 독특한 형태미에 회화성 풍부한 질감이 오늘과 조율을 시도한다.


문화를 만들어내는 문제 작가 제주의 싸이, 제주의 강남스타일

그의 주변에는 물음표가 많다. 물음표 앞을 채우는 문장도 참 다양하다. 섬에는 지천인 돌을 왜 전시장까지 끌고 왔는지, 이게 진짜 돌은 맞는지, 어떻게 이런 느낌들을 만들어냈는지, 잘 나가던 붓 대신 온갖 재료를 이용한 몸을 쓰는 이유는 뭔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질문 목록을 줄이지 못해 애를 써야 할 정도다. 그런 그가 말춤을 말했다. 워낙 대세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그에게 싸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것 그리고 내 것에 대한 욕심이다. 어린아이 투정 같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으로 먹고 살겠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다른 건 생각도 못했었죠. 지금도 설치를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리고 있어요. 미술언어라는 것이 한꺼번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주고 그것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작가는 문제 작가예요."


그랬다. 그에게 싸이와 말춤은 변화와 표현 수단이다. 우리나라 K-POP이 일본과 중국을 넘어 유럽, 미국까지 진출한 상황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한 도전과 유행이라면,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하나로 움직이게 한 문화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만들고 싶은 건 바로 그 문화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때 아닌 제주앓이를 시작한 우리나라 추상 조각 1세대 원로 한용진 작가가 떠올랐다. 제주 돌에 대한 호기심에 시작한 일의 결과물을 내놓는 자리에서 은발의 작가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그냥 좋았단다. 그런 그를 따라 사람들은 엉겁결에 춤을 추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구부정하게 몸을 낮춰 별을 찾았다. 오래전이란 이름으로 기억에서 내려놓았던 향수며 영감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시간들은 그대로 신명이 됐다. 노작가는 돌에서 별을 읽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제주 돌 작업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안 만져본 것이 없는데 그쯤이야 했거든. 그런데 제주 돌에 진짜 우주가 있더라고."


순간 멍해졌다. 섬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돌의 구멍에 눈을 맞추는 생각은 더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나는 제주 돌에서 밤하늘을 찾았지만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하늘을 보는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어."


돌 틈에서, 자연이 빚은 숨구멍 사이에서 별을 보던 기억을 찾아낸 사람들이 그것을 옮기고, 다시 그것이 퍼지고. 그렇게 무쇠 가마솥마냥 은근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들 두 사람이 만났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문화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닮았다. 제주 그리고 돌의 효과다.


섬 아이의 장난감 돌의 재탄생

사실 섬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에게 돌은 흔한 장난감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 가지고 놀 것에 대한 욕심은 태어나면서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척박했던 환경 탓에 철이 들 무렵이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뭔가 해야 했던 섬 아이들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오래전 바닷가에 유독 가운데가 움푹 파인 돌 하나가 있었다. 형들은 학교에 가고 없고 혼자 남은 막내는 하릴없이 동네만 뱅뱅 돌았다. 형들이 학교에서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을 돌보기에 형들은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친구들도 몇 없고 장난감은 욕심이었던 어린아이가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바다뿐이었다. 철썩철썩 파도가 말을 걸어줬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몰랐을 때다. 슬쩍 돌 하나를 주워 들고 호기롭게 바위를 두들겼다. 툭툭하는 소리가 여간 재미있지 않았다. 파도에 젖은 몸을 따끈하게 데워진 돌위에 누이고 하늘을 보는 재미도 톡톡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아이가 있던 자리에 흔적이 만들어졌다. 바람이 만든 것도, 파도가 만든 것도 아닌 온전히 어린아이가 만들어낸 자국이다.


작가가 처음 돌을 던졌을 때 혹자는 조용한 일탈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 번이고 돌을 들었다 놨다 하며 평면보다는 입체에 가까운 작업을 이어가면서 그를 지칭할 이름을 고민하게 됐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돌은 자연 대신 그가 직접 만들어낸 것들이다. 쉽진 않았지만, 그나마 이전 작업들 덕택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로워 가능했던 작업이었다. 첫 개인전인 그릇 속 그릇전과 다음 바통을 넘겨받은 두 차례의 끼니전을 통해 낡은 놋그릇이며 숟가락, 젓가락, 고가구에서 찾은 세월의 흔적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돈을 번다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런 그를 흔든 것은 생태 환경과 시간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 것이냐는 질문에 부딪히며 수차례 생각을 바꿨다. 수많은 작가군 중 한명이 아니고 하석홍류의 특별한 것에 대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돌에 꽂힌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2002년 예술의 전당 기획 초대전 무당개구리의 울음 전에서 그는 제주 토종 어류 화석을 작업했다. 숯과 모래, 아교, 석분과 시멘트, 안료, 미생물을 배합해 만든 물고기 화석 200여 점으로 전시장 바닥과 벽면에 타원의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2005년 마안산예술제에서 그의 화석은 오염돼 죽어가는 평택호에 대한 안타까움의 상징이 됐다. 물고기 화석과 동선은 그대로 바람결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으로 비목과 한몸이 됐다.


2006년 제주설치미술제에서는 수명이 다한 낡은 배를 분교 운동장으로 옮기고 주변에 자리돔 화석과 현무암을 설치했다. 같은 해 부산비엔날레에서는 현무암 질감의 비정형 조형 작품 300여 점을 인공석 보도블록 대신 바닥에 깔았다. 물고기 화석 역시 빠지지 않았다. 돌의 느낌도 시간을 따라 달라졌다. 처음은 퍼석한 느낌의 화석이었다. 뼈가 앙상한, 오랜 시간 속에 텅 비어 버린 눈구멍까지 처연한 물고기 화석을 벽에 걸었을 때는 많은 이들이 "왜" 하고 물었다.


그냥 돌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만들자하고 덤볐지만 만만치 않았다. 부산비엔날레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을 때만 해도 국내 대학에는 관련 과정이 없어서 책과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에서부터 혼합 접착제, 고급 레진, 파라핀 같은 시중에 나온 재료들을 모두 구해다가 실험을 했다. 거의 독학으로 재료학을 공부했다. 마음에 드는 색을 어렵게 만들고 한숨 돌리고 나니 다음은 틀 작업이 문제였다. 크기며 색이며 느낌이 제각각인 것들은 작가를 괴롭혔다. 일단 작업을 멈추고 곰곰이 고민하며 얻은 결론은 어떤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작위이지 억지라는 점이다. 돌이란 이름은 오랜 시간 깎이고 부서지는 시간을 견뎌낸 후에 얻어진다.


작가의 돌은 제주에 지천인 것들과 차이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재련하는가는 조각의 영역이지만, 그는 그리고 싶은 대상을 아예 만들어 눈앞에 펼쳤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