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미학

   
제인 포지(역:조원호)
ǻ
미술문화
   
20000
2016�� 01��



■ 책 소개

디자인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철학적 미학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전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서이다. 기존의 미학은 주로 미술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주로 예술과 자연의 숭고함과 미의 개념에만 몰두했다. 저자는 전통적인 미학의 범위를 넓혀 디자인까지 포용해야만 인간의 관심사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선택과 경험이야말로 미적인 것이며 디자인과 우리의 상호작용에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철학적 미학 안에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디자인의 위치를 새롭게 모색해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일정한 계획 아래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에 디자인은 자연과, 디자인된 것은 자연적인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주거 환경에서 자연적인 것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며, 그 자리는 수많은 인공 제조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디자인 연구는 이렇게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을 눈에 띄게 하려는 시도이며, 너무 진부해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디자인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며,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필수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어디에나 있는 디자인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디자인된 물건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일손을 덜어주며, 우리의 생명을 구하거나 앗아갈 수도 있다.


■ 저자 제인 포지
캐나다 킹스턴의 퀸즈 대학교를 거쳐 현재 위니펙 대학교의 철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포지는 칸트 철학을 기반으로 미적 경험에서 차지하는 즐거움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미학의 한계 극복: 인간과 창조적 표현」(2002), 「예술과 아이덴티티」(2003), 「숭고미 일치론」(2007), 「일상에 대한 감상: 일상미학의 갈등」(2013) 등이 있다.


■ 역자 조원호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 PEP 과정(ID 전공)을 수료했다.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디자인 이론 및 디자인 역사를 강의했다. 디자인 저널 편집부장, 디자인 미술관 학예연구사, 한국산업은행 서소문지점장을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는 『20세기 디자인 아이콘 83』(2008)과 『디자인 액티비즘』(2010) 등이 있다.


■ 차례
서론


1장 디자인의 존재이유
1. 몇 가지 방법론
2. 디자인에 대한 직관적 생각들
3. 디자인과 예술, 디자인과 공예
3.a. 대상으로서의 예술과 형태주의
3.b. 행위로서의 예술과 표현
4. 디자인에 대한 정의 

2장 미와 취미판단
1. 규범성의 문제
1.a. 미적 실재론
1.b. 미적 주관론
2. 미감적 판단
3. 칸트적 설명
3.a. 판단능력
3.b. 미의 주관적 측면
3.c. 미의 객관적 측면
4. 규범적인 미


3장 디자인과 부수미
1. 자유미
2. 부수미
2.a. 아름다운 사물들
2.b. 순수한 취미판단과 비순수한 취미판단
3. 기능에 대한 평가
4. 미술과 공예
5. 디자인의 미 

4장 디자인과 일상미학
1. 미학에 대한 비판
2. 미학의 범위 확장
2.a. 사이토: 행위, 즐거움, 불확정성
2.b. 하팔라: 낯섦, 친숙함 그리고 장소의 의미
3. 디자인과 일상적인 것




디자인 미학


디자인의 존재이유

몇 가지 방법론

디자인 미학의 첫 번째 과제는 범위를 분명하게 정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디자인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작업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해야 하고, (2)예술이나 공예가 아니라 디자인이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물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문제는 아니며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둘 다 이론적 연구를 위해 디자인의 실제적인 정의를 모색하기 위한 문제이다. 우선 질문(1)에 대해서는 서로 비슷하게 보이는 것들끼리 물건이나 작업의 무리를 나누게 된다. 질문(2)에 대해서는 디자인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따라 디자인이라는 단어나 개념의 뜻을 분석하게 된다. 쟁윌은 이처럼 조건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1)의 경우에서는] 디자인이라는 물건과 작업의 범위의 대해 알고 싶은 것이지, 그러한 것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나 개념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개념이 아닌 물건 - 말이 아닌 실제 세계에 관심이 있다.


본 장은 형이상학 - "디자인"이라고 총칭될 물건과 작업의 본질 - 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의 형이상학이 그 물건을 가리키는 언어나 개념에 대한 분석과 무관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디자인이 무엇인지 정의하기에 앞서, 미학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존재이유 몇 가지를 우선 살펴봐야한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의 과제는 사물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혹은 수학적이든 문학적이든 상관없이 본질적인 특성을 들추어보려는 욕구에서 시작된다. 내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하는 (칸트 이전에 제기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등장한) 접근방법은 경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논의를 통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뜻한다. 수학적 대상이나 본질 또는 수학적 사고방식 같은 것은 (논증도 가능하고) 변하지 않겠지만, 실제 예술과 공예(및 디자인)의 작업이나 작품은 분명히 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인 닫힌 삼면체라고 선험적으로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나 디자인이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철학 연구의 한 분야에서 나온 방법론을 무조건 다른 분야에 적용하다가는 득보다는 실이 있게 마련이다. (쟁윌의 관점에서는) 사물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개념이나 언어를 분석하는 것 보다 유리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단어로 묘사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으며, 무수하게 많은 디자인된 물건들을 보편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어떠한 개념을 언어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실제 사례에만 매달리다 보면 이론적인 관심 대상들의 범위를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면한 과제가 이제껏 간과해왔던 대상과 작업의 범주에 철학적 미학의 관심을 돌리려는 것이라면, 언어 사용의 현상학에만 머물지 말고 사물의 본질 자체로 다가가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디자인이 공예나 예술과 다르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언어, 창작의 관행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예술"이나 "미술" 또는 "공예"에 상대되는 의미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연구의 의미가 없어진다. 특히 예술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한 방법론에서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드라마틱한 역사적 변혁을 겪는 중이다.


고대 철학자들이 시, 비극, 회화,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리스인들은 테크네(techne), 로마인들은 아르스(ars)라고 했던 "예술"이라는 용어는, 웅변술 또는 전쟁술을 비롯해서 오늘날 우리가 "수공"이라고 하는 제화나 목공 같은 기술과 솜씨를 두루 가리키는 말이었다. 소위 "미술(fine art)" 이라는 분야는 전문 감식가와 함께 미 이론이 등장하는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미술은 그때부터 비로소 크리스텔러가 말하는 "근대 예술 체계"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 체계는 실제로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 같은 일정한 형식들을 표준화하고 있으며, 이 분야들에 대한 연구가 당시에 전개되던 철학적 미학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소설이나 무용을 비롯해서 (20세기에 들어서는) 영화와 사진 같은 이야기 서술 형식의 새로운 분야들이 생겨났는데, 이 중 일부는 미술이 범주에 편입되었으며 미학적 관심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공예와 팝아트 분야는 아직까지 미술이라 불리는 부류와 확연히 구별되는 형식과 활동이 보이지 못하면서 특별히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 분야들은 미 이론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화들은 첫째로는 개념적 분석과 형이상학적 이론이 겹친다는 점을 보여주며, 둘째로 역사를 통해 나타난 미학적 과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쟁윌은 "예술이론으로 설명할 표적이 무엇인지 몰라서 표류하고 있었던 것 같다"면서도, "미 이론이 수많은 예술형식들에 공통된 본질을 잘 밝혀낼 수만 있다면, 근대 예술 체계에 있는 모든 항목에 대해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며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쟁윌에게는 선험적 과제로서의 이론이 우선이며, 그 이론이 세상의 여러 대상에 적용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의 독특한 이론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직조, 휘파람 불기, 불꽃놀이"까지 예술로 포함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미술에 대한 현재의 관행이나 일반적인 이해와 일치하지 않지만, 그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그는 "먼저 표적을 정하고, 그 다음에 명중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쟁윌에 의하면 이론은 현상을 설명해줘야 하며, 어떤 현상을 설명할 것인지는 실제 관행과 개념 그리고 언어의 사용에 달려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크리스토의 퍼포먼스나 바스키아의 거리 낙서처럼 어차피 예술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들을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하거나, 일반적으로는 예술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휘파람불기, 불꽃놀이)을 예술에 포함시킨다.


쟁윌의 설명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 놓인 가변적이고 이질적인 대상 집단을 탈역사적이고 본질론적으로 규정하려는 형이상학적인 미학 방법론중 하나일 뿐이다. 쟁윌은 자신의 형이상학이 대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만년에는 그가 희망하는 것보다 개념적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적인 야심과 거리가 있는 물건들은 무시한 채, 먼저 예술"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다음에 그 용어의 쓰임을 규정하려고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본질주의적인 예술 존재론들은 반대사례에 발목을 잡혀 실패하고 만다. 반대사례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필수 기준이 결여된(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예술로 간주되는) 작품들이라든지 예술에 대한 기존 정의를 명확하게 나타냈지만 예술적, 언어적 관행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하면서 예술에 포함시킬 수 없게 된 작품들을 말한다. 문화 현상의 집합체들은 그것들을 전체화시켜 보려는 선험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미적 대상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렇다고 예술이 이론의 정의 기준에 대한 반대사례를 피하기 위해, 탈역사적인 본질에 얽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디자인을 정의하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여기에서 디자인을 일정한 대상과 일의 집합으로서, 미 이론에서 함께 거론되는 예술이나 공예 분야와 구별해서 보려고 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디자인의 특징들을 미적으로 평가하려면, 미술이나 공예와 별개의 것으로 다루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소위 디자인의 존재 이유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요충분조건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너무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에 대한 정의들을 찾아내려는 요구는 우리를 너무 오랫동안 철학적인 문제에 얽매이게 했으며, 진짜 흥미로운 점들을 찾아낼 수 없도록 미학자들을 속박해왔다. 미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표적을 정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다보니, 정작 명중시키는 데" 들일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여기에서 공예와 구별되면서도 흥미로운 디자인의 특징들을 열거해보려고 한다. 이는 디자인을 철학적 미학의 영역에 포함시키려는 보다 거대한 목적을 이루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나는 디자인이 예술도 아니고 공예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물론 디자인이 예술이나 공예의 특징 중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야말로 필요 충분한 본질을 담고 있는 어떤 대상이나 작업의 집단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고, 디자인이 미적 현상임에 틀림없다는 선험적 논쟁거리를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디자인은 과거에 소설과 영화가 그랬듯이 새로운 작업이자 작품 분야이며, 우리가 함께 논의를 통해 그 자체의 발전과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자인의 역사와 우리가 디자인을 어떻게 대해왔는지의 역사를 나란히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디자인의 사회학과 역사를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집대성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므로, 그러한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고 자만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제공하려는 것은 올바른 디자인 이론에 필요한 철학적 구조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이끌어갈 생각이다. 우선 디자인에 대해 얘기할 때면 떠오르는 언어적 관행을 살펴봄으로써,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직관적인 생각들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예술과 공예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를 디자인과 대비시켜볼 생각이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무엇이 디자인이 아닌지 배우게 될 것이며, 디자인을 독특하게 만들고 미적으로 흥미롭게 해줄 만한 그림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러한 가닥들을 한데 모아 우리의 표적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쏟아부을 것이다. 디자인에 대해 실용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은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디자인과 부수미

미술과 공예

칸트의 취미 이론이 예술 철학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는 몇 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술을 택했다. 칸트는 벨이 오해했듯이 예술형식주의자라고 (잘못) 해석 되어 왔다. 천재와 미적 개념에 대한 설명 역시 우리가 예술에 독특하고 심오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한다는 점 때문에, 예술을 특별한 종류의 부수미로 설명하는 초기 단계의 표현이론처럼 보일 수 있다.


예술작품은 의도를 가진 대상이며, 모종의 개념을 원인으로 삼아 행위의 주체가 노력해서 얻어낸 생산물이다. 이는 연필의 경우처럼 실제 목적물이다. 길거리에서 알록달록한 무늬만 보고 즐거워할 때에는 나무나 태양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을 배제하지만, 예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러한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회화나 조각에 대해 자유미를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개념적 지식이 예술에 대한 우리의 풍부한 경험을 옹색하게 설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이나 자전거에 대해서는 목적과 완전함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그 의미나 내용에 대해 반응하게 된다. 예술의 의미와 내용은 "천재"의 재능으로부터 나온 산물이자, 독특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근거이다. 이러한 내용 자체에 의해 "개념들이 표명되기는 하지만, 결코 구속한다거나 규정짓는다는 느낌 없이" 인식능력의 자유로운 유희가 일어나게 된다. 상상력과 이해력의 자유로운 유희가 자연에 대한 순수한 판단 속에서는 자발적으로 일어나지만, 예술에 대한 판단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얻으려면 치밀한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예술의 산물에 담겨 있는 합목적성은 의도된 것이면서도, 마치 의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즉 아름다운 작품은 그것이 예술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마치 자연의 산물인 거처럼 보여야 한다."는 다소 애매한 칸트의 설명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그저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 속에 무관심한 즐거움을 만들어 내면서도 자유미와 동일한 방식으로 마음에 감동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한 방식으로 즐거움을 생성시키는 것은 오직 미술뿐이다.


칸트는 예술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념 (여기에서 칸트가 말하는 이념(idea)은 이데아라는 독특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역주)"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예술의 미감적 이념과 순수 이성의 산물인 이성적 이념을 대비시켰다. 칸트의 철학 체계 내에서는 우리가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는 것들이 있는데, 『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정하는 일이다.


지식 너머에는 신, 자유, 정의, 죽음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에는 개념적인 내용과 함께 감각 경험에 근거한 정신적 표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들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아울러 우리는 이성적 이념을 경험할 수 없다. 칸트는 이러한 이념들에 대해 객관적인 실재성을 확립하려는 것은 "그 이념들에 맞는 직관이란 절대로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이념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성적 이념들은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이념들은 추상적으로 정의될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가진 정신적 표상으로서 직접 드러낼 수는 없다.


미감적 이념은 이성적 이념과 대응관계를 이룬다. 칸트는 미감적 이념이란 "어떠한 특정한 생각, 즉 그것과 맞아떨어지는 특정한 개념 없이도,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표상" 이라고 규정한다. 이성적 이념은 이성에 의해 인지되지만 표상되지는 못한다. 반면에 미감적 이념은 감성적 직관(또는 정신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칸트는 (모든 지식이 그렇듯이) 감성적 직관을 "언어로 완전히 파악하고 인지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미감적 이념은 예술적 천재의 산물이며, "단어로 규정되는 개념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여, 수많은 유사한 표상들이 퍼져나가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작품의 표현 내용을 이룬다. 미감적 이념에는 단일한 규정적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내용이 풍부하다. 이성적 이념과 마찬가지로 미감적 이념도 경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다. 그런데 이성적 이념은 직관적인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입증할 수 없는 반면, 미감적 이념은 직관적인 내용이 너무 풍부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예술가의 행위는 "볼 수 없는 존재의 이성적 이념을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려는 것이다." 폴 가이어는 천국이건 지옥이건 또는 운명 같은 것이건 이성적 이념이 "예술작품의 내용 또는 주제"라고 했다. 예술가가 생산하는 것은 알아볼 수 있는 경험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이다. (칸트가 제시하는 일차적인 예시는 "하늘나라의 전지전능한 왕의속성[으로서] 발톱에 번개를 움켜쥔 주피터의 독수리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능한 일이 아니므로, 그 작품이 이성적 이념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작품의 내용을 정신적 표상으로 보고, 상상력을 가동시켜서 결정적인 개념을 모색하거나 보편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의 정신적 능력들은 자유로운 유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이 그저 형식적으로 합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예술은 부수적으로 아름답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술이 이러한 효과를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대상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가들 중에는 미감적 이념으로부터 예술을 은유라고 보는 이론이 나왔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사실 칸트의 설명과 1장에서 살펴본 단토의 설명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예술이 은유적이든 아니든 칸트는 예술작품에는 독특한 내용이 있으며 이성적 이념을 묘사하는 예술 작품에는 심오함마저 있다면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를 잘 가려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단토의 설명처럼, 여기서도 마음은 주어진 표상에 맞는 개념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다가 찾지 못하면 결국 "움직여지게 된다." 이처럼 판단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자유롭게 모색하다가 반성적이 되고, 능력들은 조화를 이루면서 예술작품이 (부수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술에 있어서도, 모든 요소들을 일반적인 아름다움의 속성과 일치시키려고 한다. 예술의 부수미가 자유미와 다른 점은 또다시 목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예술작품은 실제의 목적물이며, 따라서 인지하게 된 내용이 바로 그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디자인의 부수미와 다른 점은 이처럼 인지하게 된 내용이 목적과 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합목적적인 대상이 전달하려는 심오하고 표현적인 내용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예술과 디자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으며, 이 둘과의 자연미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1장에서 설명한 내용과도 부합된다. 예를 들어 자연미가 (사물의 겉모양에 대해서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지 않다면, 그 자연미는 부수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가 눈앞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판단에 있어서는 오직 객관적인 합목적적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기 때문에 뭔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실제 목적물이라고 보는 디자인된 대상들은 제조되고 의도된 것이므로, 원래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 그 대상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예술과 대조적으로 디자인은 침묵한다. 디자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표현하려는 내용도 없다. 우리가 미술을 부수적으로 아름답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미술도 실제 목적의 산물이다.


그러나 미술의 경우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의미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부추기는 내용의 애매함도 함께 가지고 창조된 산물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에 대한 맬러밴드의 반응이 해석의 문제라고 했듯이)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는데, 이성적 이념과 미각적 이념의 관계에 대해 카트가 설명하듯이, 결정을 내릴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에는 형태와 기능의 관계가 있으며, 예술에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칸트적인 접근법을 적용해볼 때,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기능이나 내용이 대상의 실질적인 속성이 아니다. 기능과 내용이란 미감적인 측면에서 사물들의 겉모양에 대해 내려지는 판단의 방식들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1790년이라고 해도, 칸트는 공예와 미술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칸트는 공예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즐거운 직업인) 예술의 "자유로운" 행위와 반대되는 공예 또는 "수공"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공예가 "강제적으로 떠맡겨질 수밖에 없는 노동으로서, 그 자체가 불쾌한 것이고 그 결과에 이끌릴 뿐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예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첫째, 콜링우드의 경우처럼 부정적이다. 여기에서 "공예"란 대장일 같은 당시의 길드 직업들을 가리킨다. 둘째, 오늘날의 공예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하다. 칸트는 더 나아가서 좀 더 흥미로운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예술가와 장인을 구별하려면, "이러한 직업에 요구되는 재능의 비율"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참고할 점은 재능이나 솜씨에 대한 언급이다.


1장에서 지적했듯이 만약 예술과 디자인의 구별이 한편으로는 형식과 내용, 다른 한편으로는 형태와 기능의 구별이라면, 공예는 형태와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솜씨 좋게 변형되는 원재료로서) 질료의 관계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공예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을 실행하는 솜씨는 공예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칸트가 "재능"을 언급했다는 것은, 그가 공예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재능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그가 직접적으로 공예를 평가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예의 아름다움에 대해 규범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고작이다. 공예작품들은 실제 목적의 산물이므로, 공예에 대한 판단은 대부분 부수미에 대한 판단이 될 것이다. 사실 공예에 대한 판단에는 공예작품이 기능을 수행하는 목적에 대한 전제뿐 아니라 완전함에 대한 전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예작품은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으므로, 칸트의 설명에서건 나의 설명에서건 예술 작품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예에 대한 미적 평가도 미 일반의 속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만 만약 디자인을 판단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공예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뭔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공예에 대한 판단이 디자인에 대한 평가와 다른 점은, 손으로 실행되는 솜씨 또는 재능이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윅스의 주장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만들어진 대상의 목적은 공예에 대한 판단에 전제되어 있지만, 그 대상의 완전성은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성은 공예가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원재료를 선택하고 변형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솜씨를 발휘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대상이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의 우연적인 효과에 대해 자유롭게 시도해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우연성에는 어떤 개인이 어떤 원재료를 선택해서 어떻게 솜씨를 발휘하여 작업하는지에 따른 제약이 있다. 그래서 가이어의 부정적인 설명에 나타나는 입장이 여기서도 발견된다. 즉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도 공예 작업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게 하지만, 기법이나 재능이 부족한 것도 그 공예 작업물에 부수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가이어가 예를 들고 있듯이, 두 개의 교회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하나는 아름답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조각한 기둥 장식과 수공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를 생각해보자. 기둥의 엉성한 비례 때문에 보기 흉한 교회에는 솜씨의 정교함이 없지만, 스테인드글라스의 섬세함 덕분에 아름다운 교회는 수세공에 담긴 완전한 즉 뛰어난 재능 덕분에 부분적으로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가이어가 사례를 통해 보여주려던 바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목적을 충분히 수행한다고 해도, 시공을 어설프게 하면 위의 즐거움은 줄어들게 된다.


1장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공예는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대상들을 만들어낸다는 점과 그 대상들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잘 해내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과 같다. 그러나 공예는 손으로 만들어지며, 실제로 만드는 재능과 솜씨도 판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는 예술과 같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술의 재능과 공예의 재능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 제작된 예술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자유롭게 유희하도록 촉발시켜주는 미감적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공예에서의 재능은 공예가가 기능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해 원재료를 처리하는 솜씨와 창작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공예작품을 마주하면, 주어진 원재료로부터 그것을 창조해내는 개인의 솜씨를 통해, 그 대상이 기능을 수행하는 우연적인 방식들을 떠올리게 된다.  디자인에 대한 판단에서는 대상의 이 같은 측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노트북이나 자동차를 평가할 때 작업자의 개인적인 솜씨를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개인이 원재료를 어떻게 다루어서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평가하지도 않는다.


디자인에서는 그 물건이 기능을 수행하는 완전함을 상대적으로 판단할 뿐, 실제로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물론 우리가 디자인을 평가하면서 디자인 작업에 사용된 재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유리섬유로 만든 자동차가 금속으로 만든 것보다 덜 좋을지도 모르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와인잔보다 크리스털잔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재료 역시 어떤 대상이 기능을 수행하는 우연적인 방식 중 일부이며, 그래서 그 대상의 제작 이면에 존재하는 개인적인 손길을 알지 못해도 디자인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공예라면 이러한 손길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예는 취미 이론에 필요한 일반적인 범주와 부합되기는 하지만 자연, 미술, 그리고 특히 디자인에 대한 평가와 달리 공예에 대한 규범적 설명에는 개개인의 솜씨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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