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세상을 바꾸다

   
이태호
ǻ
미술문화
   
18000
2015�� 04��



■ 책 소개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는 진짜 미술의 힘!


미술관에서만 존재하던 미술이 세상 밖으로 나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미술, 세상을 바꾸다』는 미술이 사람들 삶으로 찾아가 개인과 공동체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온 다양한 사례를 담고 있다. 좋은 미술이란 홀로 고상하고 어려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살을 다시 각성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미술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보다 성숙하게 만드는지 진짜 미술 이야기를 만나보자.


이 책은 미술이 인간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양시키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역할과 힘을 제시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미술로 삶을 바꾸고 희망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예술의 위대한 힘을 새삼 일깨워준다. 또한 전쟁, 권력, 폭력 등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미술이 어떻게 결과를 바꾸었는지, 미술과 시대정신과의 관계까지 밝히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국 미술의 현재위상과 미래 방향을 짚어준다.


■ 저자 이태호
1951년 생. 홍익대학교 미술대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계간미술』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저지 몽클레어 주립대학원을 다녔다. 뉴욕 일대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귀국 후 3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광주 비엔날레 등에 출품했다. 《아시아의 지금》(2003), 부산 비엔날레 ‘부산 조각 프로젝트’(2006), ‘공공미술 낙산 프로젝트’(2006), 《입양인, 이방인-경계인의 시선》(2007), 《Women Artists In Action》(2007, 샌프란시스코) 등 다수의 국제전을 기획했고 감독을 맡았다.


번역서로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테리 바렛의 『미술비평-그림 읽는 즐거움』(아트북스)과 엘리너 허트니의 『포스트모더니즘』(열화당)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며 젊은 미술인들이 자본의 횡포에 치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과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또한 낙산공공미술연구소를 운영하며 미술이 존중과 사랑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 차례
책머리에


Ⅰ. 미술, 사람들과 함께하다
1. 우리는 모두 사진 예술가 - 슈팅 백 프로젝트
2. 달동네에 색채의 옷을 입히다 - 브라질의 파벨라 페인팅 프로젝트
3. 낙서화를 따라 관광코스가 만들어지다 - 게릴라 아티스트 뱅크시
4. 미술을 가르친다는 것 - Tim Rollins+K.O.S.의 사례
5. 평범한 이웃에게 바치는 존경과 사랑 - 존 에이헌의 실물 조형
6. 상처를 치유하는 조형물 - 마야 린의 [월남전 참전용사 기념비]


Ⅱ. 미술, 세상에 맞서다
1. 세상은 정의로운가 - 알프레도 자르의 작품 세계
2.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의 진실 - 예술노동자연합의 사회적 참여
3. 68혁명,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질주 - 68혁명의 꽃이 된 민중공방의 포스터
4. 백인 남성의 지배에 도전장을 던지다 - 게릴라 걸스의 선전포고


Ⅲ. 미술, 그 시대정신
1. 이 깃발은 누구의 깃발인가 - 우리 땅에서 우리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
2. 살색은 어떤 색인가 - 다문화 사회 속, 한국미술의 정체성
3. 공공을 위한 미술, 개인을 위한 미술 - 공공미술의 양적 확대와 질적 결핍
4. 퇴폐미술의 반란 - 나치가 기획한 《퇴폐미술전》
5. 미술에 나타난 전쟁 - 미술은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묘사하나


인명색인


 




미술, 세상을 바꾸다


우리는 모두 사진 예술가 – 슈팅 백 프로젝트

벼랑에 선 사람들, 관심에 굶주린 아이들

짐 허버드는 UPI 사진기자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특히 전쟁지역을 찍은 사진들로 유명하다. 1980년대 초부터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근처의 노숙자들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극빈층인 노숙자들의 삶과 그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대도시의 노숙자 수용소에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있는 이들이다. 아이들은 폭력과 마약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고, 가족의 무관심과 학대, 빈곤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허버드는 이런 환경에 사는 아이들을 사진의 소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카메라를 든 허버드가 수용소 시설에 들어오면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그의 뒤를 따르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카메라를 만져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는 안전하게 카메라를 쥐는 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와 소도구들을 들고 매주 수용소에 가서 카메라 다루는 법과 사진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는 많은데 모두를 수용할 만한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아이들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가르칠 만한 시설을 갖추고 사진교육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슈팅 백 프로젝트

허버드는 1989년 워싱턴 예술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만나 구상을 털어놓았다. 60퍼센트 이상이 학교를 그만두고 마약과 폭력에 빠져드는 수용소의 아이들에게 사진을 통해 자기를 찾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교육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의 제안이 채택되자 워싱턴 시 중심에 있는 한 수용소에 장소가 마련되었다.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희망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슈팅 백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방과 후 학교였다. 허버드는 친구이자 동료였던 사진작가들, 특히 정년퇴임한 작가들을 자원봉사자를 영입하고 중고 카메라도 사들였다. 주로 일본제인 중고 카메라들은 가격에 비해 성능이 우수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조작법과 사진의 원리를 가르치며 카메라를 들고 나가 촬영하게 했다. 규칙은 단 하나, 수용소가 있는 블록 안에서만 찍을 것, 한 블록의 리얼리티만 기록할 것이었다. 이는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한 규칙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그 모습을 아이들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고 포착하게 하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수용소 밖의 사람들도 참여를 자원해 몇 개월 후 슈팅 백 교육 미디어 센터로 확대되었다. 이 센터를 비영리 단체로 등록한 후 많은 사진가들의 자원봉사를 받아들여 캐피톨 시티뿐만 아니라 6개의 다른 수용소 아이들도 교육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에는 암실 등 완전한 시설이 갖추어져 방학 중 프로그램까지 실시할 수 있게 됐다.


1990년 9월, 1년 반 만에 아이들의 사진을 모아 첫 전시회 <슈팅 백 프로젝트: 노숙자에 의한, 노숙자 사진>를 열었다. 여기에는 53명의 아이들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잠깐 사이에 관람객이 수만 명을 넘어섰으며, TV와 신문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사진잡지 「라이프」가 7페이지를 할애하여 작품과 함께 전시를 소개했고, 당시 최고 인기 있는 TV진행자 오프라 윈프리의 프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어서 전시는 전국을 순회했고, 1991년에는 프랑스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낙서화를 따라 관광코스가 만들어지다 – 게릴라 아티스트 뱅크시

뱅크시가 체포됐다고?

"뱅크시가 체포됐다." 영국과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기사다. 2013년 2월에는 한 인터넷 언론에 뱅크시가 런던 경찰에 체포된 사진과 얼굴사진이 게재되었다. 그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낙서 화가, 정치적 행동주의자, 영화감독으로 오랫동안 뱅크시라는 가명으로 활동해온 인물이 드디어 런던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새벽에 그를 체포해 심문하고 런던에 있는 작업실을 급습해 그동안 감춰졌던 그의 정체를 밝혀냈다. 뱅크시의 진짜 이름은 폴 윌리엄 호너로, 브리스틀 출신이고 39세이다.


뱅크시의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 경찰청에는 뱅크시를 사칭하는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으며, 오후 6시경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경찰서 밖에 모여 "내가 뱅크시다!"라고 외치며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진위여부에 대한 기사들이 나왔다. 「허핑턴포스트」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가짜 뱅크시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뱅크시의 그림이 브리스틀의 한 벽에 나타났다.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작품으로, 뱅크시가 지금까지 해온 표현방식과 달라서 잠시 설왕설래 했으나 그것이 뱅크시의 홈페이지에 게재되면서 그의 그림으로 확인됐다. 이 그림으로 뱅크시가 여전히 불법 낙서화를 그리며 건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낙서화를 따라 관광코스가 만들어지다

뱅크시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가장 베일에 싸여있는 화가기도 하다. 뱅크시란 이름은 가명으로 진짜 이름은 물론 출생, 나이, 성장배경, 얼굴, 주소 등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스스로 개인정보를 철저히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유일하게 직접 인터뷰를 했다는 「가디언 언리미티드」의 기자 사이먼 하텐스톤은 이렇게 썼다.


뱅크시는 28살의 남자이며, 지미 네일(영국의 영화배우)과 마이크 스키너(영국의 래퍼)가 뒤섞인 듯한 인상이었다.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으며 은 귀걸이와 은사슬을 착용하고 있었다.


2003년 7월 17일 자 신문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쩌면 당신은 그를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그의 작품을 보았을 것이다. 스마일마크 얼굴의 경찰들부터, 총 대신 바나나를 든 「펄프 픽션」 총잡이에 이르기까지 뱅크시의 도발적인 작품들은 도시 곳곳에 널려있다.


뱅크시는 게릴라 아티스트,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며 "그를 보면 21세기 미술이 보인다"와 같은 평가를 듣는다. 그는 미술계와 대중 양측으로부터 화제를 불러 모으는 스타 아티스트다. 뱅크시는 유명 록밴드 블러의 2003년 앨범 「싱크 탱크」의 재킷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낙서화를 따라 런던을 돌아보는 관광코스가 만들어졌고, 2006년에는 뱅크시의 작품이 있는 장소를 안내하는 책(마틴 불, 『뱅크시 작품 투어』, 셀 쇼크 퍼블리싱)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뱅크시가 유명해지고 그의 작품 가격이 오르자, 그가 그린 낙서화를 지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벽을 새로 칠할 때도 그의 작품은 남겨놓고 칠하는 식으로 작품을 보존하고 있다. 최근에 그려진 작품들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그려지자마자 투명 아크릴판으로 보호하거나, 아예 그림 부분만 떼어내 따로 보관 전시하기도 한다.


뱅크시 작품의 힘

뱅크시가 가장 폭넓게 구사하는 방식은 패러디와 차용이다. 패러디란 이미 유명한 작품을 선택하여 그것을 모방하거나, 그것에 손을 가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이다. 그것은 이 시대와 세계에 대한 깊은 고민의 산물이다. 뱅크시는 이미 유명해진 이미지를 차용해 대중의 시선을 끌고 나서, 그 원본의 의미를 해체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주제와 형식으로 현실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그 현실을 각성시킨다.


그는 자기의 고향 브리스틀 시의 한 아파트 벽에, 벌거벗은 사내가 매달려있고 창문 밖으로 사람을 찾는 남자와 속옷 바람의 여자를 그렸다. 한눈에 봐도 불륜 상황을 짐작케 하는 그림이다. 이 유머러스한 그림은 브리스틀 시의회에서 지우느냐 남겨놓느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존속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자, 시의회는 이 문제를 여론에 부치기로 했다. 인터넷투표 결과, 주민의 97퍼센트가 작품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졌고 결국 시의회는 이 작품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그 후 이 작품은 브리스틀 시의 유명 관광상품이 됐다.



백인 남성의 지배에 도전장을 던지다 – 게릴라 걸스의 선전포고

차별과 편견 드러내기

2003년 3월 1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릴 예정인 할리우드에 세워진 광고판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건장한 남성 모양의 금색 인물상인 오스카 트로피에 백인이나 흑인 같은 인종 구별은 없다. 그러나 이 광고판에는 뚱뚱한 백인 남성이 두 손으로 다소곳이 성기를 가리고 있는 트로피가 그려져있고 옆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다.


여성이 감독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각본상의 94퍼센트가 남성에게 수여됐다.

연기상 중 3퍼센트만이 유색인에게 수여됐다.


게릴라 걸스와 익명의 여성 영화제작자 그룹 앨리스 로카스가 만든 이 빌보드를 보노라면 아카데미상이 얼마나 백인 중심, 그중에서도 남성 중심으로 수여됐는지 알 수 있다. 이 광고판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게릴라 걸스는 각종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 응하기 바빴고, 광고판 내용은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 광고판이 세워졌던 2003년에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이 모두 흑인에게 수여됐다. 흑인 여배우가 주연상을 수상한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었다. 영화인들은 영화계 인종차별에 대한 게릴라 걸스의 비판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게릴라 걸스는 한 인터뷰에서 "수상 소식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산업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 왜 여성과 유색인은 오스카상에서 따돌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영화산업이 그들을 따돌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벽보 붙이는 여자들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는 단순, 명료, 대담하다. 그들은 포스터에 미술계의 권력을 쥐고 있는 화랑, 화가, 평론가 등의 실명을 거론했기 때문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특히 미술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을 순식간에 끌 수 있었다. 게다가 포스터의 문구와 형식에는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 뉴욕의 유명 갤러리들에 점수를 매긴 <뉴욕 갤러리 성적표>는 『아트 인 아메리카』의 1985~1987년 연감을 토대로 여성 미술가의 전시를 연 횟수와 그에 대한 짧은 평을 썼다. 그 평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성적표에 기록하는 전형적인 문장이어서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게릴라 걸스의 포스터를 기다리게 되었고, 회원이 누구인지 포스터는 누가 붙이는지 궁금해했다. 게릴라 걸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인터뷰나 공개토론회에 종종 초대되었는데, 모두 얼굴에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마스크는 얼굴을 감출 뿐만 아니라 게릴라 걸스라는 집단성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들은 미니스커트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 차림으로 공개토론회에 참석하며 각자의 이름 대신 이미 고이니 된 프리다 칼로, 로메인 브룩스, 조지아 오키프, 케테 콜비츠, 다이앤 아버스, 에바 헤세 등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을 차용한다. 그들은 회원들의 이름, 출신, 회원 수 등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여성차별에서 인종차별로

게릴라 걸스는 남성 우월사회에서 여성 작가의 처우 문제를 제기하며 출발했다. 그러나 성차별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차별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유색인종에 가해지는 차별, 종교와 성적 취향에 따라 소수자에 가해지는 차별 등 전 인류적 차원으로 관심을 넓혔다. 이른바 WASP(미국의 주류로 인정되는 인종: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 사람들) 이외의 유색인과 소수민족의 현실로 눈을 돌리고, 백인과 남성으로 대표되는 주류 사회와 기득권 세력의 의식적·무의식적 관행과 편견, 집단이기주의를 고발하기 시작한다. 또한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영화 등 전 예술 분야로 관심을 넓히고 나아가 여성의 낙태, 동성애, 전쟁, 에이즈 등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했다.


게릴라 걸스의 이러한 활동들은 형식이나 내용 등 여러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권위주의에의 도전, 개인성의 발현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표현, 미술관의 전통적이고 고급스러운 형식 무시, 거리에 전시되는 포스터와 광고, 스티커 등 생활 현장 중심의 활동, 타자에 대한 관심과 옹호 등이 게릴라 걸스의 대표적인 경향이자 특징이다.



퇴폐미술의 반란 – 나치가 기획한 《퇴폐미술전》

엉터리 화가에 대한 분노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고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의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중에서


극작가이자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나치가 작성한 정치사상범 명단에 포함되자 곧장 망명길에 올랐다. 이 망명은 체코,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러시아, 스위스 등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15년 동안 이어졌다.


브레이트가 말하는 엉터리 화가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정치인이자 희대의 독재자였던 히틀러가 한때는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히틀러는 1907년과 1908년 빈 미술대학에 지원했으나 거부됐다. 이때를 전후해 그린 수채화와 연필화가 여러 점 남아있는데, 원근법에 충실한 소박한 풍경화 수준이다. 그가 만약 미술대학에 합격하여 그가 원한 대로 미술학도의 길을 갈 수 있었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그가 정권을 잡고 권력자가 되자 선무당이 되어 한 맺힌 문화계를 좌지우지하면 독일 미술계를 뒤집어엎는 사건들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미술에 대한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 확신을 갖고 직접 예술의 심판관이 되었다. 그가 기획한 두 전시 《위대한 독일 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 그 결과물이다. 《위대한 독일 미술전》에는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작품들을 전시한 반면 《퇴폐미술전》에는 그가 싫어하는, 즉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퇴폐미술전》에 몰려든 인파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위대한 독일 미술전》이 열리던 날 공원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는 《퇴폐미술전》이 시작되었다. 고고학연구소로 사용하던 곳에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고 650여 점에 달하는 회화, 조각, 판화, 카탈로그 등이 복잡하게 전시됐다. 감상에 적절한 작품 간격은커녕, 작품을 조롱하는 문구들과 작품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설치됐다. 칸막이부터 작품 설치와 설명서 부착까지 단 2주 만에 마치고 관객을 맞은 것이다.


관람객은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전시는 주제가 있는 세 개의 방에서 시작됐다. 첫째 방은 종교를 모독하는 작품, 둘째 방은 유대인 작가들의 작품, 셋째 방은 독인 여성과 군인, 농부를 모욕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그 외의 작품들은 특별한 주제 없이 나열해두었고 벽에는 작품을 조롱하는 글도 써 붙였다.


그들에게 이 작품들은 히틀러의 제3제국이 허용할 수 없는 기준, 즉 비독일적이며 정신병적이고 불온할 뿐 아니라 사악한 유대인 정신이 깃든 것들이었다. 나치 정부는 그 작품들을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쓰레기들로 보고, 반면교사와 경고의 의미를 담아 전시를 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나치가 자랑하는 《위대한 독일 미술전》보다 《퇴폐미술전》에 훨씬 많은 사람이 몰려 매일 평균 2만 명이 관람했다. 개장한 지 보름이 지난 8월 2일 일요일은 하루 3만 6천 명이 관람하는 경이적인 기록까지 세웠다. 결과적으로 《퇴폐미술전》 관람객 수는 새 미술관까지 지으며 엄청난 공력과 예산을 들인 《위대한 독일 미술전》 관람객의 5배에 달했다. 뮌헨에서 4개월 동안 2백만 명 이상, 지방 순회전에서 1백만 명이 관람했다.


자유와 아방가르드에 대한 나치의 증오

나치에 의해 퇴폐 작가라고 낙인찍힌 이들은 오히려 모더니즘의 위대한 전진에 앞장선 이들이 되었다. 달리 말해 《퇴폐미술전》은 당시의 전위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현대미술의 백미를 감상할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나치는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기묘한 방식으로 모던아트의 전파에 기여했다. 《퇴폐미술전》의 역설적 성공도 그렇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치의 박해와 공포를 피해 미국 등지로 흩어짐으로써 20세기 새로운 예술의 확산에 기여한 셈이다.


하지만 《퇴폐미술전》의 작가들은 1945년 나치가 공중분해될 때까지 온갖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들은 전시회와 함께 공식적·비공식적인 모욕을 당했으며 학교와 미술관,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등 사회적 차별과 정치적 위협, 정신적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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