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평전 : 불꽃과 색채

   
슈테판 폴라첵
ǻ
이상북스
   
23800
2013�� 11��



■ 책 소개
‘천재’와 ‘광기’를 넘어, 인간 ‘빈센트반 고흐’를 만난다! 

‘빈센트 반고흐’를 둘러싼 수많은 의문에 ‘인간’을 담는 시도를 한 책이다. 그의 삶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천재’ 혹은 ‘광기’로 뒤덮인 ‘반고흐’라는 환상이 아닌 노력하는 한 인간 ‘빈센트 반 고흐’를 담담히 드러낸다. 특히 이 책은 반 고흐의 작품 세계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의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그려낸 ‘소설적’ 평전으로서 의미가 있다.

기자 출신의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폴라첵은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과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모든 전기적자료와 막대한 문화, 역사, 사상 관련 자료들을 재구성해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재창조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동안 수많은 책에서 다루지못했던 반 고흐의 유년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주요 순간들을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냈다. 따라서 사뭇 진지하고 어두운그림자만 드리웠을 것 같은 비운의 화가의 삶이 인생의 한 장면 장면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 조금은 편안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마주할 수있다.

■ 저자 슈테판 폴라첵
오스트리아 출신의 기자이자 작가다. 1930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주로 실제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소설 형식의 평전을많이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는 대화가 많은 것이 특색인데, 이 책 ‘불꽃과 색체’에서도 반 고흐의 편지와 그에 대한 비평 글들을 토대로 소소한대화 장면을 실감 있게 되살려냄으로써, 지금까지 주로 인도주의자 혹은 예술의 순교자로만 기술되던 반 고흐의 세속적인 면까지 속속 드러냈다.능란한 대화 기술과 세심한 이야기를 조화롭게 꾸려 나가는 능력으로 폴라첵은 이 책을 이색적인 전기물로 완성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서예비장교로 세계대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전쟁 후 런던에서 무국적 망명자로 살다가 사후 자신의 바람대로 유태인 묘지에 묻혔다.

■ 역자 주랑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출판사 편집부에서 십수 년간근무했다. 지금은 프리랜스 편집자 및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 평론 반이정 
원래 꿈은 배우라고 하는 미술평론가.「중앙일보」「시사IN」「씨네21」「한겨레21」 등에 미술 평론을 연재했고, ‘교통방송’과 ‘교육방송’ 라디오에 미술 고정 패널로 출연했으며,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송은미술상, 에르메스미술상 등에 심사와 추천위원을 역임했다. 서울대, 홍익대, 세종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지은책으로는 『새빨간 미술의 고백』외에 『아뿔싸, 난 성공하고 말았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2.0』『자전거,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아홉 가지 매력』『웃기는 레볼루션-‘무한도전’에 대한 몇 가지 진지한 이야기들』『나는 어떻게 쓰는가』『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등에 공저자로참여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에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 차례
00 1890년 7월 29일 
01 YELLOW 네덜란드그루트준데르트, 헤이그 
02 WHITE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영국 램스게이트,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 
03 GRAY 벨기에보리나주, 브뤼셀, 프랑스 파리 
04 RED 벨기에 브뤼셀, 네덜란드 에텐, 헤이그 
05 DARK RED 네덜란드 드렌테,누에넨, 벨기에 앙베르 
06 PURPLE 프랑스 파리 
07 Chrom yellow 프랑스 아를르 
08 BLACK 프랑스생레미 
09 DARK BLACK 프랑스 리옹, 오베르 
10 1890년 7월 29일 

주 
평론: ‘반 고흐’ 브랜드와 거리 두기 -반이정(미술평론가)





빈센트 반 고흐 평전: 불꽃과 색채


네덜란드 그루트준데르트, 헤이그

“빈센트, 문 좀 닫고 다녀라."

할머니가 말했다.

“꼭 닫아야 해요? 닫고 싶지 않아요."

소년은 대답했다.

“어른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버릇없는 아이처럼 구는구나."

옆에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예전에는 버릇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다루지 않았다. 그렇게 무르게 대해서야 말을 듣겠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때부터 똑부러지게 가르쳐야지. 요즘에는 정말……."

“어머니, 빈센트는 남다른 아이예요. 예민하고, 몸도 약하고……."

“몸이 약하다고? 앤 변덕스럽고 사납기까지 하니, 가끔 때려줘야 말을 들을 거다. 어릴 때 매는 약이 되는 법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너도 아이를 많이 길러봐야 잘 안다는 듯한 말투구나. 하지만 안나, 나는 아이를 열둘이나 길러냈다. 물론 나도 아이들이 귀여웠지. 그렇지만 엄하게 대했다. 그래서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었어. 요하네스는 해군 중장, 네 남편은 할아버지와 같은 목사고, 헨드릭 빈센트는 브뤼셀의 어엿한 미술상이 되었고……."

브레다의 반 고흐 부인이 자식들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안나는 알고 있었다. 아들들 이야기가 끝나면 육군의 고관과 결혼한 딸들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안나는 얼른 아들을 쳐다봤다. 흐트러지고 곤두선 머리털을 보며 또 깎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머리칼이 빨리 자랄까.

“빈센트, 이리 온. 머리를 좀 빗어야겠다."

“싫어."

구석에 버티고 서 있던 소년은 대답했다.

“그런 아이에겐 고운 말이 먹히지 않는 법이다."

할머니가 큰소리로 말했다.

“빈센트, 말 좀 들으렴. 할머니가 너를 나쁜 아이로 생각해도 괜찮다는 거니?"

“난 아무래도 좋아"

“네 자식 교육의 결과를 아주 잘 보여주는구나. 네 자식이니 네 법대로 키우려무나.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빈센트, 당장 할머니께 잘못했다고 해!"

“싫어."

“그럼 좋다. 대신, 저녁은 없다."

“됐어."

할머니는 웃기 시작했다.

“이 애 말대꾸하는 것 좀 봐라. 네 교육이 아주 잘 먹힌 모양이로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아버지께 말해야겠다."

“상관없어."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손가락 끝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빈센트! 그렇게 손톱을 깨물면 못쓴다."

“재밌어. 그리고 맛있는걸"

“엄마한테 말대꾸하지 말고. 자, 이리 온. 머리를 빗겨줄 테니."

안나가 끌어당기려 하자 소년은 재빨리 몸을 빼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영국 램스게이트

빈센트는 스스로를 성격파탄자라고 생각하며 암스테르담의 어두운 밤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나는 나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걸까? 왜 언제나 불만족 상태인 거지?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는 걸까? 나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오만하고 사악한 나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계신 걸까?


나는 정말로 사악한 인간일까? 진정 선량해지고 싶지 않은 걸까? 혹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영심에 빠져 스스로를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우월감을 느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


그는 어제 스트리커 숙부가 상선학교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튜더 예배당에 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목사라고 하는 스트리커 숙부나 내 아버지는 어쩌면 저렇게 선량할 수 있을까…… 저들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다. 어느 한곳에 지긋이 있지를 못한다. 나는 주위의 사물들이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저히 몇 해씩이나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성급하다. 아, 그러나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성급한 인간으로 만드신 것 아니던가! ……내 결점과 약점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나는 또 얼마나 죄인인가!


한밤중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묘해 보이는지…… 그들은 마치 인생의 행로를 잘못 잡아 몰락하고 만 사람들 같다. 해가 지면 그들의 시커먼 형상이 헤매기 시작한다. 그들은 바로 밤의 공포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그리고 내 자신을 잃기 시작한 비참한 내 모습 역시 그들과 똑같다…….



네덜란드 드렌테, 누에넨, 벨기에 앙베르

앙베르는 부두와 높은 건물, 소박한 상점들과 창고, 그리고 커다란 음식점 등 그릴 소재가 풍부한 곳이었다. 이곳은 누에넨 같은 시골과는 다르니, 이 많은 사람들 중 내 그림에 흥미를 갖고 사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빈센트는 가끔 거리를 산책했는데, 그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그는 식료품 가게 앞에 오랫동안 서서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한 번이라도 먹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생선과 치즈, 장밋빛 햄과 소시지, 노란 사과와 황금빛 살구, 초록빛 포도 등이 있었다. 또 하얀 솜으로 싼 조그만 상자에 버찌도 있었다.


아, 이런 것들은 배고픈 자가 볼 것이 못 된다. 이걸 사 가는 사람들을 보고 내 속에서 질투심이 솟아오르지 않는가. 지금 나는 이런 음식들을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주 기본적인 식료품값과 방세, 담뱃값도 부족한 형편이다. 게다가 그것마저 절약해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질끈 눈을 감고 지나가자. 배고픈 건 참자…….


초상화를 그리는 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릴 바에야 차라리 동물 그림을 그리는 게 낫다. 처음에는 성가시겠지만 고분고분 말을 따라주는 짐승 쪽이 낫다.


모델 값을 아끼기 위해 다니던 미술학교도 빈센트의 비위에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이론만 내세우고 자기네들만 참다운 예술을 안다는 듯이 굴며, 되지 못한 비난만 해대는 교수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 그림을 이해하는 한 남자가 있다. 이 작가는 웬만한 미술학교의 교수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색채와 그 효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아, 파리에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공부하며 여가 시간에는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걸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테오와 같이 지낸다면 여기에서처럼 비참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빈센트는 위장과 치아가 많이 상한 상태였다. 얼마 전에는 이를 열 개나 뽑으면서 100프랑을 지불했고, 위도 매우 좋지 않았다. 의사는 영양 결핍이 심각하니 먹는 데 각별히 유의하라고 했다. 또 위에 안 좋다며 담배도 피지 말라고 했다.


물론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더 배가 고프다. 담배라도 피지 않으면 허기를 도저히 채울 수가 없다. …… 그래, 파리로 가야 한다. 대도시의 공기를 마시면서 모네와 이야기하고, 세잔이나 고갱, 르누아르 같은 사람들의 아틀리에를 찾아간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내가 갈 곳은 파리밖에 없다.


빈센트는 파리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진 돈을 샅샅이 모았지만 그것은 파리까지의 여비밖에 되지 않았다. 밀린 방세와 물건 값을 치러야 할 돈이 필요했다.


도둑처럼 야반도주라도 할까? 하지만 그동안 그린 그림을 가져가야 한다. 아무리 불쾌하더라고 물감집 주인과 이야기해야 한다.


물건 가게 주인은 빈센트의 이야기를 듣고는 강경하게 말했다.

“다른 데로 이사를 가면서 방세를 못 치르겠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뭐 담보로 잡힐 만한 건 없소?"

“돈이 생기는 대로 갚을 생각입니다."

“그림들을 모두 담보로 맡아두겠소."

“내 그림을……이 그림들을!"

빈센트는 울먹였지만 물감 가게 주인이 벽에 걸린 데생과 수채화를 떼어내는 모습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리는 동안 얼마나 숱한 고생을 했으며, 다 그리고 난 후의 기쁨은 또 얼마나 컸었나. 나는 파리에 가지 않고 이 그림들과 함께 여기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아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파리로 가야 한다.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내 그림들에게."

여전히 울먹이는 빈센트를 보며 물감 가게 주인은 생각했다.

이 녀석, 미치광이가 틀림없군.



프랑스 파리

빈센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파리라는 도시에 압도당했다. 이곳에는 어쩌면 대가들이 이렇게 많을까?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까? 내가 이제까지 도달한 곳은 기껏해야 가련한 딜레탕트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 도시를 떠날 수 있다면…… 떠난다면 어떨까? 그러나…… 다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테오가 또 돈을 써야 하나?


그 무렵 테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밤에 이야기를 하다가도 졸거나 초초함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붓이나 물감 튜브나 수건, 걸레 따위가 방에 흩어져 있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못마땅해 했다. 게다가 세잔, 르누아르, 드가, 시슬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에다가 친구의 졸작을 걸어놓는 돼먹지 못한 짓까지 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니?"

빈센트가 물었다.

“다 장삿속이지."

“그러니까 너는 돈벌이를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거냐?"

“형, 그 전람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구필 화랑에서 하는 거야. 그러니 예술적 완성도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거지. 팔릴 만한 그림도 내놔야 한다고."

빈센트는 격분했다.

“내가 아니라 화랑에서 결정한 일이라고 말했잖아."

이렇게 말하고 나서 테오는 하품을 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니? 화랑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으면 네가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냐? 대가들의 그림과 페릭스 산디에 같은 녀석의 졸작을 함께 걸어놓다니…… 말이 안 된다."

“그래도 그런 그림이 잘 팔리는걸"

테오는 이제 이런 이야기에도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그저 빈센트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이구나."

“난 한낱 고용인에 불과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정말 수치스럽다. 그럼 화랑을 그만두고 네가 직접 차리면 되잖니."

그 말에 테오는 그만 웃어버렸다.

“화랑 차릴 돈은 어디서 마련해? 나한테는 그럴 만한 돈이 없어."

젠장, 또 돈 얘긴가. 그렇지. 테오는 그동안 내 뒷바라지를 하느라 모아놓은 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아, 나는 동생 인생에 방해만 되는 존재인가? 빈센트는 생각했다.

테오도 생각에 잠겼다.

형의 마음속에는 마치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매우 상냥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이다. 그 두 인격이 원수지간이어서 전혀 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상냥하고 어떤 때는 가혹하다. 형이 남이었다면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활은 물론 함께 지내는 내 생활까지도 재미없게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형은 위대한 예술가고, 나는 형 옆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형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 이제 곧 봄이 온다.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 형은 다시 야외에서 일할 것이고, 그 기막힌 세 폭짜리 제단화를 계속해서 그릴 것이다. 센 강변의 레스토랑과 강에 떠 있는 보트, 그리고 초록빛 화원…… 세상의 온갖 것들이 형의 캔버스에서 고운 빛깔로 다시 탄생할 것이다.



프랑스 아를르

고갱이 도착한 바로 그날부터 둘은 함께 일을 시작했다. 포도 산에서 포도를 따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빈센트는 고갱의 작품에 감탄했다. 자기에게는 없는 점을 고갱의 그림 속에서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재를 정리하고 분류할 때의 냉정과 세밀한 배려, 그림에 나타나는 아주 선명한 느낌 등이었다. 빈센트는 고갱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나의 그림과는 얼마나 다른지. 내 그림은 모두 혼돈 상태 바로 그것인데, 나의 것은 모두 조야하고 분방한데, 나는 모든 것에 얽매여 있는데, 고갱의 그림은 일체의 것에서 초연하다. 고갱은 포도 따는 사람의 현실을 그리는데 나는 그저 그런 옷차림을 한 사람을 그리고 있다. 아, 내게도 폴의 냉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빈센트는 고갱이 자기의 그림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서 감정이 상했다. 고갱은 오랫동안 빈센트와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그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다. 빈센트의 작품에 대해서는 마치 그 존재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빈센트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지만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갱의 태도는 매우 삐딱했다. 그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드가나 모네, 피사로, 세잔 같은 대가들에 대해서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폴이 그 조롱하는 듯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빈센트는 뛰쳐나가 버리고 싶었다.


두 사람은 이젤 앞에 앉았다. 빈센트는 손을 떨면서도 두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자넨 대체 무얼 그리는 거야, 빈센트."

“자화상."

“왜 맘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왼쪽 귀를 잘못 그린 것 같아서……."

“잘못 그렸다고? 아니야. 내 귀는 이것과 똑같이 생겼어. 대체 어디를 잘못 그렸단 말이야?"

“난 귀의 생김새도 곡선도 다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귀가 너무 큰 데다 위치도 틀려."

“이렇게 그리면 돼. 내 귀는 이렇게 생겼어!"

빈센트는 악을 썼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어. 그건 네 자유니까."

고갱은 웃으며 말했다.

“이게 맞다고!"

이렇게 소리치는 빈센트의 음성은 이미 달라졌다.



프랑스 생레미

롤랑이 떠나버리자 빈센트의 노란 집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빈센트의 집은 다른 고장에서까지 구경하러 오는 이 마을의 명소가 되었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면 이런 소리가 들렸다.

“저기 빨강머리에 붕대를 한 사람이 자기 귀를 잘라버린 미치광이 화가예요."

빈센트는 이제 거의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이 뭐라 하든,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일했다. 그는 귀를 싸매고 모피 모자를 쓴 자화상을 그렸다.

빈센트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당신들은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있소. 당신들은 정말 당신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단 말이오? 당신들은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며 광기로 몰아놓고 있소. 이렇게 둘러싸여서 어떻게 내가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에게는 정적이 필요하오. 제발 무릎 꿇고 비니 내게 정적을 주시오.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내가 미치광이가 아니란 사실을 믿어줄 수 없겠소?"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정말 미쳤나보군. 우리에게 무릎을 꿇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일 텐데."

빈센트는 결국 창문에 널빤지를 대고 막아버린 다음 고갱이 일하던 위층 방으로 옮겼다. 빈센트가 창을 막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법석을 떨면서 그를 지켜보았다. 사다리를 가져와서 빈센트를 보는 자도 있었다. 빈센트의 노란 집 앞은 이제 장터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자 관원에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미친 화가가 마을에 화를 끼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88명의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어지럽히는 이 화가를 구금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빈센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한 것은 지난번의 그 경감이었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군요. 행정 관리인 나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이곳에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당신뿐인 것 같군요. 호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내게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잽니다. 지금 내가 그 탄원서에 대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왜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그저 조용히 놔둬 달란 것뿐인데…… 난 자해를 했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면……."

목사 살르는 빈센트를 위해 이것저것 애써주었다. 그는 시장을 찾아 가고 닥터 레이와 노란 집의 주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또 빈센트가 살 수 있는 새 집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호의도 때가 늦었다.

시장은 마을 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빈센트를 구금했다.



프랑스 리옹, 오베르

다음 날 아침 일찍 빈센트는 모자도 쓰지 않고 가셰 박사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매우 다급하게 가셰 박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지금 당장 박사님을 만나야 돼요."

빈센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셰 박사의 침실로 다짜고짜 들어갔다.

“빈센트, 자네가 아침 인사를 하러 오다니, 오늘은 아주 좋은 날이 되겠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사님."

“현존하는 화가 중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지상의 모든 걸 만드셨지요."

“그야 그렇지. 어쨌든 자네의 이 면사무소 그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걸작이야."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걸 만드셨지요."

“그만 좀 하세요. 박사님. 인간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면서 박사님은 왜 피사로나 세잔의 그림을 틀에 끼우지 않고 내버려두는 건가요?"

“피사로나 세잔의 그림보다 자네 그림이 훨씬 가치가 있어."

“오…… 그런 말을 하는 건 죄악이에요. 제발 부탁이니 피사로와 세잔의 그림을 틀에 끼워주세요.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드려요."

빈센트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애원하듯 가셰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 어서 일어나라고."

“당신은 짐승같이 게을러서 분명 또 저 그림들을 틀에 끼우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내가 어쩌나 보라고요!"

“내가 꼭 저 그림들을 틀에 끼울 테니 걱정 말게."

“아니, 당신은 야만인에 폭군이라고요……."

이렇게 말하더니 빈센트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가셰는 빈센트의 손에 번쩍이는 물건이 쥐어 있는 것을 보았다. 권총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만 인식한 가셰 박사는 자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빈센트에게 다가갔다.

“어서 권총을 내려놓게.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났나? 군인이라도 될 작정인가?"

가셰 박사는 예리한 눈빛으로 빈센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빈센트는 권총을 쥔 손을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빈센트는 뛰쳐나갔다.


빈센트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7월도 다 지나가는 무렵이라 한길은 후텁지근하게 더웠지만 방 안은 서늘했다.


늘 이렇게 상쾌하면 얼마나 좋을까. 조용하고 서늘하고……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오만 가지 상념들을 쫒아버릴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행복할 텐데. 조용하고 서늘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 눈앞에서 노란색과 까만색 반점이 어른거린다. 또 발작이 오려는 걸까.


빈센트는 종이를 집어 써내려갔다. 친애하는 고갱…… 내가 자네와 친구가 되어 자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네. 떳떳치 못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신이 멀쩡할 때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어.


빈센트는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따위 편지를 쓴 걸까. 권총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절대로 내게 총을 겨눌 수 없다. 그런 비겁한 말을 하는 건 누구나! 이리 나오너라. 누구냐고! 내 욕을 하는 비열한 녀석, 당장 이리 오너라.


빈센트는 권총을 자신의 심장 가까이에 대었다. 나는 도저히 내 자신에게 총을 쏠 힘은 생기지 않는다. 난 단지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희롱하는 것이다. 또 나를 깔보는구나. 넌 누구냐! 난 비겁한 놈이 아니다. 비겁하지 않단 말이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와 함께 갑자기 하늘이 내려앉고 대지가 흔들리고 청색과 회색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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