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제1악장 스타카토처럼 경쾌하고 활기차게
승부사 기질이 필요할 때 : 20세기 마지막 독재자 카라얀
흔히 19세기를 피아니스트의 시대, 20세기를 지휘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슈만과 브람스,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19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대부분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고, 그 시대 청중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도래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휘자에게 모아졌습니다.
20세기를 통틀어 위대한 지휘자 한 사람을 꼽으라면 쉽지 않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휘자라면 단연 카라얀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입니다. 탄생 100주년을 넘긴 카라얀은 늘 새로운 관심과 변신으로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판도를 바꾸었고, 그 때문에 숱한 찬사와 더불어 그에 못지않은 비난도 받았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으로 알려진 베를린 필과 빈 필, 오페라극장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스칼라 극장과 빈 국립 가극장을 혼자 움켜쥐었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세계 최고 음악 축제 잘츠부르크 음악제까지 지배한 그는 오케스트라의 제왕일 뿐 아니라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대부 같은 존재였습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휘자가 군림하던 시대도 막을 내렸고, 지금은 그 어떤 오케스트라도 독재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카라얀의 신화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음악적 능력에서 찾아야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업가적 감각과 경영자적 리더십이 두드러진 것이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에 대응해 변신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카라얀은 중요한 시기마다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해 결단과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은 물론 클래식 음악의 흐름까지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가 세상을 떠나자 단원들의 투표 결과 그토록 원하던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종신 지휘자를 요구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결국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카라얀은 이후 30년이 넘는 긴 세월 베를린 필뿐 아니라 세계의 음악계를 지배하는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요트와 승마는 물론 스포츠카 운전과 비행기 조종까지 즐길 만큼 속도와 경쟁을 좋아한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일생일대의 호기로 반전시킬 만큼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났는가 하면 순간을 포착하는 순발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때 연주 활동이 금지되는 시련에 부딪혔지만, 이때 찾아온 음반사 EMI의 프로듀서 월터 래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음반 작업에 적극 뛰어들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이 시대 대다수의 지휘자와 연주자가 음반 작업에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얼마나 모험적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는 래그가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만든 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음반을 내놓았고, 활동에 대한 제재가 풀린 뒤에도 음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더욱 키워나갔습니다. 나중에 도이치 그라모폰과 작업이 잦아지면서 EMI와 묘한 입장에 놓이지만 끝내 어느 한쪽과도 독점 계약을 피함으로써 항상 더 좋은 조건을 선택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시기마다 그의 선택이 모두 성공적인 건 아니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변명하지 않는 자신감 또한 그의 장점이었습니다. 한때 나치당에 입당한 전력이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 스스로는 아헨 가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당시로 돌아가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했을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80년 소니의 회장 아키오 모리타(盛田昭夫)를 만나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성을 감지한 카라얀은 오페라 <마술피리>를 최초로 디지털로 녹음했고, 이듬해 4월 15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모리타 그리고 필립스의 간부들과 함께 새로 출시할 CD의 규격을 발표합니다. CD를 처음 개발한 필립스와 소니는 카라얀에게 한 장에 담게 될 녹음 분량이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두 장의 LP에 나누어 담아야 하는 것이 늘 불만이던 카라얀은 합창교향곡을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정도를 제안해 결국 74분으로 정해졌습니다. 카라얀은 EMI와 그라모폰을 오가며 많은 음반을 냈습니다. 에스피와 레이저디스크까지 포함하면 생전에 판매한 그의 음반만 1억1500만 장이 넘습니다.
1989년 여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Sabine Meyer)의 입단 문제로 불거진 단원들과의 불화로 끝내 베를린 필을 사임한 카라얀은 그해 잘츠부르크 인근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단원들과 사적으로 만나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카라얀은 어쩌면 그런 지나친 자기 관리로 말미암아 화를 키웠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키와 짧은 하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연주를 녹화한 영상물에서 허리 아래를 찍지 못하게 할 만큼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던 그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카라얀의 음악 제국은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감 있게 지휘하던 그가 그립습니다.
제2악장 안단테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밤새 거리를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인 1827년 9월 6일,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는 영국 극단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연하고 있었으며, 객석에는 파리 음악원에 다니는 스물네 살의 젊은 음악 학도 헥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날 여주인공 오필리어를 열연한 아일랜드 여배우 해리엣 스미드슨을 보고 첫눈에 반한 베를리오즈는 구애의 편지를 쓰고 연주회를 여는 등 온갖 방법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베를리오즈는 한참을 방황하게 됩니다. 몽유병자처럼 밤새 파리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는가 하면 불현듯 사라지는 바람에 친구들이 찾아다니느라 법석을 떨기도 했죠. 그렇게 3년이 지난 1830년, 이토록 지독한 짝사랑의 열병을 음악에 담은 환상 교향곡이 세상에 나왔고, 이로 말미암아 무명의 젊은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음악의 신천지를 열게 됩니다.
이 교향곡은 어느 예술가의 생활 에피소드라고 하는 2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5부로 된 환상 대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줄여 나중에 환상 교향곡이라 부르게 됩니다. 참고로 나머지 2부에 해당하는 랠리오, 생애의 복귀는 2년 뒤 완성하는데 교향곡이 아니라 서정적인 독백극 형식으로 만들어집니다. <환상 교향곡>에는 각 악장마다 음악으로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작곡가가 직접 글로 써 넣었지만 나중에 표제만 남기고 모두 삭제했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삭제한 부분을 다시 살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악장에는 꿈, 정열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한 저명 작가의 상상 속에서 정열의 파도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 젊은 음악가가 마음속에 품은 이상적인 매력을 모두 갖춘 여성을 처음 만나 무서운 사랑에 빠진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악상과 결합되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그 악상이 지닌 정열적이며 기품 있고 내성적인 특징이 그 여자의 성격과 같다는 것을 느낀다. 이 선율과 여인의 모습이 이중의 고정 악상으로 등장해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닌다." 고정악상, 즉 이데 픽스(Idee Fixe)는 영어로는 Fixed Idea로 어떤 고정된 선율이나 음형으로 구체적 대상이나 개념, 정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교향곡의 다섯 개 악장 모두에 사랑하는 여인의 고정 악상이 되풀이해 등장합니다.
2악장은 무도회입니다. 소란스러운 무도회에서 멀찍이 떨어져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음악가는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복잡한 시절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축제의 소용돌이에 끼어들기도 하고 전원의 아름다움을 보며 평화로운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이나 들판 그 어디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의 앞에 나타나 자꾸만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3악장은 들판의 풍경입니다. "시골의 어느 저녁, 멀리서 두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린다. 이들의 목가적인 이중주와 주변의 정경, 고요하게 일렁이는 나무의 속삭임, 지금에야 발견하게 된 희망의 싹, 이런 모든 것이 함께하면서 그의 마음을 아상하리만치 평온하게 만들고 생각까지도 밝게 물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고독을 다시 생각하며 이제는 고독을 벗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모른 척 기대를 저버린다면…….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이 기분, 어두운 예감으로 어지럽혀진 행복한 상념이 아다지오 악장의 주제로 나타난다.
마지막에 이르러 목동 중 하나가 다시 피리를 부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고독…… 그리고 정적……."
4악장은 단두대로의 행진입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작곡가는 아편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마약이 치사량에 미치지 못해 깊은 잠에 들면서 무서운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꿈속에서 그는 애인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받아 단두대로 끌려가는 자신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때로는 음울하고 거칠며, 때로는 당당하고 밝은 행진곡 리듬에 맞춰 행진하는 사형수들의 발걸음이 엄청난 소란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행진 끝에 고정 악상의 네 소절이 사랑의 마지막 추억처럼 다시 나타나는데 오케스트라의 일격으로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 5악장은 마녀들의 밤의 축제와 꿈입니다. "시신을 묻으려고 모여든 무서운 유령, 마술사와 마녀, 그 밖의 여러 요괴들이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야릇한 소리와 신음, 오싹한 웃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다른 고함 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다시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미 수줍은 듯 고귀한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이제 야비한 선율에 불과하고 기괴하면서 보잘것없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녀가 이 밤의 축제를 찾아왔다. 그녀가 도착하자 환희에 들뜬 요괴들의 소란…… 그녀는 악마의 밤 축제에 끼어든다.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Dies Irae, 즉 분노의 날을 익살스럽게 풍자한다. 돌고 도는 춤인 윤무가 분노의 날과 합쳐진다."
베토벤이 죽고 불과 3년이 지나 세상에 나온 이 교향곡은 시대를 앞서도 한참이나 앞선 미래의 모형, 말하자면 일종의 콘셉카였습니다. 순수한 기악곡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꾸려가는 표제 음악, 즉 프로그램 뮤직의 발단이 되어 이 곡을 초연하던 연주회장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리스트로 하여금 결국 교향시를 쓰게 했고, 특정한 선율로 하나의 대상이나 개념 혹은 정서를 나타낸다는 고정 악상, 즉 이데 픽스는 훗날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유도 동기(라이트 모티브)로 발전하게 됩니다. 오케스트라의 편성도 획기적이어서 당시 두 개를 쓰던 파곳을 네 개나 사용하는가 하면 전에 없던 튜바를 둘이나 무대에 올렸고, 하프도 두 대에 튜불라 벨로 종소리를 내고 3악장에서는 네 명의 연주자가 팀파니를 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현악기의 활털로 문지르지 않고 활등으로 현을 두드리는 콜 레뇨 기법까지 등장합니다.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가 되기를 바란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음악의 길을 택한 베를리오즈는 어려서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작곡가로는 드물게 피아노를 치지 못했습니다. 악기는 플루트와 기타를 조금 다룰 수 있는 정도였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그것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음악의 전통적 틀에서 벗어나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환상 교향곡>을 발표하고 3년 뒤 결국 부모의 반대에도 열 살 연상의 해리엣 스미드슨과 결혼하지만 10년 만에 별거하다 끝내 헤어집니다. 해리엣의 임종을 지킨 베를리오즈는 성악가인 마리아 레치오와 재혼하지만 그녀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년에는 해리엣과 사이에서 얻은 아들 루이까지 잃는 절망을 겪게 됩니다.
프랑스의 시인 고체는 문학의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회화의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ene Delacroix), 음악의 베를리오즈를 가리켜 프랑스 낭만파의 3대 거장이라며 낭만파 예술의 생명의 불꽃이 그들로부터 솟아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작곡가로는 드물게 자서전 회고록을 쓴 베를리오즈는 "예술가의 생애에서는 때때로 벼락과도 같은 충격을 잇달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큰 폭풍우가 천둥을 부르고 돌풍을 휘몰아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연이은 충격은 괴테와 베토벤, 셰익스피어와 해리엣 스미드슨이었습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던 그 무렵 프랑스어로 번역한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 읽었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처음 들었으며, 스미드슨이 열연하는 셰익스피어를 처음으로 본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 이후 프랑스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베를리오즈는 평생 남들이 생각지 못할 작품만 내놓았습니다. 교향곡이면서 마치 협주곡인 것처럼 비올라가 독주 악기로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해롤드>도 그렇고 오페라도 아니고 오라토리오도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도 전대미문입니다.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의 실패 이후 심혈을 기울인 초대형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은 결국 살아서 온전한 형태로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는 못했죠. 이 작품은 엄청난 규모와 제작비 때문에 그 후로도 제대로 공연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지휘자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 감독으로 있을 때 이 작품을 제작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당시 투입한 막대한 예산으로 정명훈이 물러났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엉뚱하고 무모한 천재는 평생 떠돌아다녔고, 날마다 상상을 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조국 프랑스에서보다 독일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더욱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파가니니와 리스트, 멘델스존과 바그너까지 당대의 수많은 거장 음악가들이 그의 모험과 도전을 높이 받들었지요. 집단생활에서 누구도 예외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진 꿀벌 중에도 사실은 제멋대로인 날라리 벌이 있다고 합니다.
다들 가까이에 있는 꽃 무리에서 꿀을 따는데 입맛이 까다로운 날라리 벌은 멀리 날아가 별난 꽃을 찾는다지요. 심지어 20킬로미터를 벗어나 생명의 위협도 무릅쓴다고 합니다. 한동안 꿀벌을 먹여 살리던 꽃 무리에서 더 이상 꿀을 얻을 수 없어 모두 굶어 죽어갈 즈음 멀리 날아가 다른 꽃 무리를 발견한 날라리 벌이 돌아와서는 의기양양하게 팔자를 그리며 춤을 춥니다. 새로운 꽃 무리를 찾았다는 신호입니다. 음악사에서 베를리오즈야말로 날라리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날라리 벌을 키워야 합니다. 날라리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고 나름대로 날라리 짓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날라리 벌의 날라리 짓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제3악장 비바체처럼 열정적으로
마지막까지도 음악처럼: 영화 <타이타닉>
혹시 바이올리니스트 월레스 하틀리(Wallace Henry Hartley)를 아십니까? 클래식 음악에 꽤 관심이 있거나 조예가 깊은 사람도 그 이름을 듣거나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영화 <타이타닉>을 보셨는지요? 배가 기울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까지 갑판에 서서 끝까지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그 여덟 명의 악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이끈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로 월레스 하틀리입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하며 책임을 다한 선장의 결연한 의지도 감동적이고,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연약한 여성을 위해 기꺼이 구명선의 자리를 양보하고 죽음을 맞이한 1등실 영국 신사들도 숭고하지만, 무엇보다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면 죽음의 순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음악을 연주한 악사들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라도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면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지상낙원이라던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지진 앞에서 인간 군상의 처절한 몸부림과 이로 말미암아 나날이 더해가는 끔찍한 참상을 보고 생존 앞에 헌신짝처럼 버려진 인간의 존엄성이 참으로 서글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오래전에 본 영화 <타이타닉>이 떠올랐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음의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한 여덟 명의 악사. 그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여덟 명 모두 신원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여 다른 악사들이 따르도록 한 밴드 마스터 월레스 하틀리의 존재만큼은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878년 영국 콜른(Coln)에서 태어난 하틀리는 보험 판매원을 아버지로 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했고,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줄곧 여객선의 악사로 일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무려 70여 차례 항해를 마쳤으며, 타이타닉에 오르기 직전에 마리아 로빈슨(Maria Robinson)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처음에는 승선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최고 여객선의 처녀 항해에 참여하고픈 의욕이 앞서 계획을 바꾼 것입니다. 결국 그 항해가 마지막이 되었고, 그의 사랑 또한 그렇게 끝나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무려 4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숭고한 죽음을 추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콜른에는 3미터 높이의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호주의 내륙 도시 브로컨 힐(Broken Hill)에는 하틀리를 포함한 여덟 악사의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서 있습니다. 얼핏 영국도 미국도 아닌 호주에 있다는 것이 엉뚱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된 사연에는 잔잔하지만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은과 아연 등을 채굴하는 광산으로 경기가 좋았던 이 도시는 스포츠 말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지만, 네 개나 되는 밴드가 있어 나름대로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멀리서 전해온 타이타닉호 악사들의 미담에 감동한 이곳 밴드의 악사들이 기념탑 건립 기금을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섰고,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13년 12월 21일 마침내 추모탑 제막식을 열 수 있었습니다.
제막식에서 네 개의 밴드가 참여한 연합 악대는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악사들이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Nearer, My God, to Thee)를 연주했고, 기념비에는 그 찬송가 가사와 함께 오선지에 그린 네 소절의 악보가 새겨 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 타이타닉호의 악사들이 실제로 이 곡을 연주했는지 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1등실 승객이던 캐나다인베라 딕(Vera Dick) 여사와 알버트 부인 등 몇몇 승객이 그렇게 증언했고, 하틀리 또한 평소 측근에게 자신이 만약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그 찬송가를 연주하겠노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지만 타이타닉호 사건을 다룬 책 『The Story of THE TITANIC』과 『A Night To Remember』에는 다른 증언과 정황이 드러나 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통신실에서 일한 이등 통신사 해럴드 브라이드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악사들이 연주한 곡은 가을(Autumn)이었다 하고, 당시 구명정 하강을 직접 지휘한 항해사 라이드는 곡명은 알 수 없지만 찬송가가 아닌 경음악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베라 딕 여사의 경우 배가 침몰하기 1시간 20분 전에 구명정을 탔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이미 악사들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는 것이고, 진술자 중 브라이드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나 살려고 발버둥치는 긴박한 상황에서 음악가로서 본분과 사명을 잊지 않고 음악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동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음악가라면,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이들 말고 누가 또 이렇게 했는지, 누구라서 이렇게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통해 다른 이들이 위로를 얻고 평정을 찾았겠지만 그들 또한 음악에서 힘을 얻어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에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
제4악장 칸타빌레처럼 흘러가듯이
절망을 희망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한참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던 1970년대 이후 부동산 투기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하던 사람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 너나할 것 없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가지 길을 궁리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가지고 있는 부를 지키거나 더 늘리는 방법을 찾는가 하면 동시에 그 일부를 써서 생활의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재산 증식 방법도 다양하고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보람도 찾을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봉건시대부터 그래온 것처럼 땅이나 금붙이를 사서 묻어두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 말고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나없이 부동산에 뛰어들었고, 유흥업소가 난립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유럽의 강국들이 무역국가로 성장하면서 중산층과 신흥 자본가들이 형성되었을 때 그들은 부동산이 아닌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습니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종마 사업과 경마에 관심을 기울였고, 네덜란드의 자본가들은 화훼 산업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미술품과 공연 또한 그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것들은 얼핏 달라 보이지만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재산 증식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는 일이고, 위험 부담이 큰 대신 성공하는 경우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동산과 달리 서민의 삶과 무관한 일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동안 벤처라는 말이 유행병처럼 번질 때 벤처 사업에 투자하는 자본가를 에인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위험 부담이 큰 새로운 첨단 산업을 그 가능성만 믿고 투자하는 사람들이니 투자를 받는 입장에서는 천사와도 같았을 테고, 그래서 에인절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원래는 공연 사업에 투자하는 투자자를 일컫는 용어라는 사실은 아마도 생소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벤처 사업은 공연 사업이었습니다. 오로지 작품과 제작에 참여하는 예술가의 능력을 판단해 투자를 결정했고, 공연이 성공하면 수십 배의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투자한 금액을 모두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배를 사서 물건과 선원을 실어 폭풍우와 해적이 들끓는 망망대해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데다 스스로 즐기는 일이기에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영국의 런던에 작곡가 헨델이 살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작곡가 겸 흥행사 혹은 제작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헨델 같은 오페라 작곡가는 곡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가수와 악사를 뽑아 훈련시키는 일도 해야 했고, 직접 오페라 제작에 필요한 재원까지 마련해야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스스로의 능력과 명성을 내걸고 투자자를 끌어들였습니다. 한동안은 그의 능력과 수완 덕분에 성공을 거듭했지만, 어느 순간 관객의 입맛은 오페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 가사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신화나 역사를 들먹이는 오페라에 식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존 게이(John Gay)라는 작곡가가 쓴 통속적인 <거지 오페라>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기존의 오페라는 더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헨델이 찾은 탈출구가 바로 오라토리오입니다. 오라토리오의 구성과 내용은 기본적으로 오페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무대장치와 의상, 연기가 따로 필요 없기에 오히려 제작 비용이 적게 들고 제작 시간도 단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성서의 내용을 다루는 데다 영어 가사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계층, 어떤 연령의 관객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당연히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교회가 아닌 극장에서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연주되고, 또 사랑받고 있는 <메시아>는 물론 <사울>이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까지도 모두 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그에게 오라토리오는 신을 위한 예배나 찬양이기에 앞서 새로운 벤처 사업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누리던 안정적 수입과 지위를 던지고 영국으로 건너와 오페라 작곡가로 변신한 그는 이번에는 오페라를 버리고 오라토리오를 선택하는 모험을 시도했고, 또 한 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바흐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헨델은 한편으로 그 시대 최고의 벤처 사업가였던 것입니다.
요즘 경제 침체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헨델이 오라토리오라는 탈출구를 찾아 위기를 극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누렸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도전과 모험의 정신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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