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

Secret lives of great artists

   
엘리자베스 런데이(역자: 최재경)
ǻ
에버리치홀딩스
   
15800
2010�� 12��



■ 책 소개
미술시간에는 왜 가르쳐주지않나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지난 2006년소더비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인 1억 4000만 달러에 낙찰된 잭슨 폴록의 [No. 5, 1948]이다. 오늘날 폴록은 ‘액션 페인팅’을 대표하는화가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가 액션 페인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족’한 회화 실력 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미술시간에 폴록이 드로잉 실력이 형편없었고 알코올중독자에다 성추행을 일삼은 사람이라고 가르쳐주지 않기때문이다!

이 책은 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35인의 감격·충격·파격 뒷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소개한다. 미술시간에 로댕의 조각상, 피카소의 큐비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배웠다 해서위대한 예술가들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 누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누가 알코올중독자였으며, 누가 평론가와 칼부림을 했고,누가 마네·모네·드가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사생활에서는 얼마든지 바보짓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예술가들이 견뎌낸 시련과 상처를 아는 것은 그들이 거둔궁극적인 성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들의 생애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은 혼란스러운 작품 스타일을 해석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할것이다. 최고의 화가들은 대부분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살았고, 바로 그곳에서 위대한 예술이 태어났다. 

■ 저자 엘리자베스 런데이(Elizabeth Lunday)
안녕하세요. 저는 미술과 건축, 도시설계, 음악, 문학 전문 작가예요.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고요? 그럼요. 글의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답니다. 저는 예술을 사랑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해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말했듯이, 예술은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니까요. 그렇다고 예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다거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없어요. 위대한 예술은 도전적이고 추잡하고대립적이며 공격적일 수 있지만, 아름답고 계몽적이고 즐거우며 우리를 위로해줄 수도 있다고 믿어요. 무엇보다 전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것을즐기는 사람처럼 약간의 기벽과 어리석음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 생각해요. 

유머러스하면서도 유익한 미술과 건축, 도시설계, 음악, 문학 기사를 「멘탈플로스(Mental Floss)」「아키텍추럴레코드(Architectural Record)」「어반 랜드(Urban Land)」「플래닝(Planning)」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과 『위대한 작곡가들의 사생활Secret Lives of Great Composers』 두 권의책을 내기도 했답니다. 2002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를 따기도 했죠. 

http://www.lunday.com으로 놀러오세요. 

■ 역자 최재경
1971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95년 가을 「상상」에 단편소설 『살아 있는 죽은 여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 『반복』『숨쉬는새우깡』『플레이어』와 에세이 『여자 서른, 자신 있게 사랑하고 당당하게 결혼하라』『新여우의 기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사소한 것에 관한 큰책』『깃털이 전해준 선물』『그레이시』『까마귀의 마음』『글쓰기 수업』『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 등이있다.

■차례
들어가며
얀 반에이크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브레히트 뒤러
미켈란젤로부오나로티
세기의 예술: 라파엘로 산치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렘브란트 판 레인
요하네스 (얀)페르메이르
프란시스코 고야
세기의 예술: 밀로의 비너스
자크 루이 다비드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에두아르마네
제임스 맥닐 휘슬러
에드가르 드가
폴 세잔
오귀스트 로댕
클로드 모네
앙리 루소
빈센트 반고흐
세기의 예술: 우키요에와 호쿠사이의 영향
조르주 쇠라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드 뭉크
앙리 마티스
파블로피카소
세기의 예술: 아프리카 미술
에드워드 호퍼
디에고 리베라
마르크 샤갈
마르셀 뒤샹
조지아오키프
M. C. 에스허르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
세기의 예술: 프리콜럼비안 미술
잭슨폴록
앤디 워홀
위대한 예술가들의 대표작





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

미술시간에 가르쳐주지 않는 예술가들의 사생활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4년 - 1510년 5월 17일

국적 : 이탈리아

대표작 : 비너스의 탄생(1486년경)

재료 : 캔버스에 템페라

화풍 :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시관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흥미로운 시대에 살기를이라는 저주가 있듯이, 산드로 보티첼리의 세대는 정말로 흥미로웠다. 피렌체 르네상스의 황금기에 태어난 그는 귀족인 로렌초 데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면서 일했고, 수많은 전쟁과 침략에서 살아남았으며, 배교한 탁발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라놀라의 맹렬한 설교에 전율했다.


오늘날 그는 <비너스의 탄생>으로 가장 널리 기억되는 화가다. 그 그림은 알면 알수록 더 해괴한 구석이 많은 그림이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그 그림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보려고 분투하고 있다. 단지 고전적인 신화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인 걸까? 아니면 예술에 관한 복잡하고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걸까? 절반의 조개껍질 위에 서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너스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스폰서 가라사대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는 공화국처럼 보였지만 실제 막후에서는 한 가문이 도시를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은 국가 간 은행 시스템을 고안함으로써 천문학적인 액수의 부를 축적했다. 위대한 로렌초는 부친의 죽음으로 피렌체의 은행과 도시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보티첼리는 로렌초의 환상적인 측근 세력에 속했다. 후원자인 로렌초의 조각 공원을 한가로이 거닐고 정찬으로 구운 공작새고기를 나눠 먹는 동안, 화가는 배설물의 악취가 코를 찔러대는 아버지의 무두질공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극단적인 대비에 화가는 무엇을 느꼈을까?


보티첼리는 기초 교육을 받고 나서 지역의 화가 밑에서 도제로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1470년경 그는 자신의 작업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475년에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완성했는데, 그는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완성하고 얼마 후, 메디치 가문은 보티첼리에게 보다 더 무시무시한 대상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했다. 즉, 파치 가문의 음모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을 공격한 사람들에게는 정의(혹은 복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행사된다는 점을 설파할 목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보티첼리에게 여덟 명의 주요 공모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장면을 프레스코화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세대교체

로렌초 데메디치는 오랜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진주 가루로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492년 3월에 사망했다(아, 르네상스 시대의 훌륭한 약들이여). 그러자 피렌체의 통치권은 그의 장남 피에로에게 이양되었다. 피에로는 불운한 자라는 별명으로 기억되는데, 그 표현에 딱 맞는 인생을 살았다. 피에로는 2년 후 피렌체를 침공한 프랑스 군대에 도시의 통치권을 넘겨줌으로써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분노한 피렌체 사람들은 메디치의 집으로 돌격했고, 가족들은 위험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보티첼리는 후원자에게 버림받았지만 쉽게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그것은 신성한 종교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마침 피렌체에서 종교적 열정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한때 자유분방했던 피렌체는 엄격한 신권국가가 되었다. 작은 천사들이라고 불리는 젊은 청년들이 거리마다 돌아다니면서 밝은색의 비단옷을 입었거나 노출이 심한 여자들을 괴롭혔다. 작은 천사들은 카드놀이 도구나 화장품, 춘화 같은 천박한 물품들을 뿌리 뽑겠다는 명목으로 집 안까지 침입했다. 또한 그렇게 압수한 물품들을 교만의 횃불에다 불태웠는데, 그 때문에 중앙 광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20미터 정도까지 불길이 치솟기도 했다. 이런 모든 분규에 보티첼리가 어떤 식으로 반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세기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의 주장에 의하면, 보티첼리는 사모나롤라를 지지하여 자기 그림들을 직접 불태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1490년대에 그려진 보티첼리 그림들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단순성이 증가했는가 하면, 금욕적인 면도 증가했다. 이교도적인 표현은 사라지고 기독교적인 요소가 그림에 도입되었다.


사보나롤라도 영원히 권력자들에게 지옥의 업화를 퍼부을 수는 없었다. 1497년 그는 간신히 파면될 뻔한 위기를 넘겼지만, 1년 후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통상금지령으로 피렌체를 위협하자 도시의 지도자들은 그 수도사를 더 이상 지지했다가는 경제가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보나롤라와 그를 섬기던 보좌관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처형당했다. 바사리는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몰락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고 거짓으로 적었지만, 사실상 그는 그 후에도 몇 가지 작품을 더 완성했다. 그 그림들은 종교적, 신화적 색채를 동시에 드러냈다. 1510년 보티첼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예술계는 이미 그를 잊은 지 오래였다. 그의 창백한 마돈나는 미켈란젤로의 왜곡된 누드들에 비교할 때 이미 한물간 그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보티첼리는 약 3세기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다시피 했다. 그의 작품은 1800년대 중반에서야 재발견되었고, 한 번 더 대중의 평가를 받았다. 비록 그의 종교화가 오늘날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신화적 세계를 표현한 그림들은 어느 정도 전통적인 지위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비너스의 탄생>은 커피 잔 위에서도, 스크린 세이버 화면에서도, <심슨네 가족들>의 에피소드에서도 발견됐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문제가 생긴 이유는 그 그림의 전체적인 의미가 지난 세월 동안 잊혀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티첼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보다 더 피렌체 르네상스다운 인물이었다.


바위 굴리기

그렇다면 보티첼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르조 바사리(재미있긴 하지만 가끔씩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한 전기 작가로 알려짐)는 이 화가를 "변덕스럽고 별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그가 대단히 짓궂은 장난꾸러기였다고 주장했다. 한 일화에 의하면, 베를 짜는 사람이 보티첼리 옆집으로 이사 왔는데, 소음이 심한 베틀을 설치하는 바람에 보티첼리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가는 이웃에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이웃은 자기 집에서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보티첼리는 자기 집 지붕 위에다 커다란 바윗돌 하나를 올려두었다. 그 돌은 당장 이웃집 지붕 위로 굴러 떨어져 천장을 뚫어놓을 것처럼 보였다. 이웃이 불평하자, 자기도 얼마든지 자기 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웃은 당장 시끄러운 베틀을 제거했다고 한다.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년 11월 12일 - 1917년 11월 17일

국적 : 프랑스

대표작 : 생각하는 사람(1880년)

재료 : 청동 주조

화풍 : 후기 인상파

전시관 : 프랑스 로댕미술관


오귀스트 로댕을 지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천재? 그건 맞는 말이다. 이성적 인간? 당치도 않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이 철학과 이성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로댕은 심사숙고하는 삶보다는 행동하는 삶을 선호했고, 자신의 작품이 예술가를 대변하기를 바랐다. 그는 일생을 바친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 예술적 창조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고를 묘사하고 있다.


게으른 천재

로댕은 일찍부터 창작의 욕구를 드러냈다. 파리의 노동자 계급해서 태어나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학교를 다니는 내내 빈둥거리기만 하는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아들의 천부적 재능을 뒷받침하는 일을 주저하던 로댕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미술 공부를 허락했다. 1854년 로댕의 아버지는 아들이 국립 공예 실기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했다. 2년간의 공부를 마친 후, 로댕은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인 에콜데보자르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는 크게 실망했지만 당신은 절대 나를 해고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먼저 그만둘 테니까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 여하튼 그의 아버지는 곧 말도 안 되는 예술 짓거리를 위해 청구서를 지불하는 일에 염증을 느꼈고, 아들에게 진정한 돈벌이를 하라고 호통쳤다. 로댕은 다양한 스튜디오와 공장에서 화가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한 지 10년 후, 그는 1871년 브뤼셀에서 처음으로 단독전시회를 열었다.


지옥에서 봐요

1875년 로댕은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을 보겠다고 이탈리아로 가는 호사 여행길에 올랐다. 미켈란젤로를 연구한 후 잔뜩 창작 열정이 불타오른 그는 최초의 전신 누드상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 일로 인해 최초의 스캔들에 휘말리고 만다. 조각상의 명칭은 <청동 시대>였는데, 미켈란젤로의 1516년 작 <죽어가는 노예>를 연상시키는 포즈로 서 있는 멋진 근육질의 남자로 표현했다. 조각이라면 응당 인체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신고전주의의 이상화된 형태를 동경하던 시대였으므로, <청동 시대>의 사실적인 묘사는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평론가들은 로댕이 손으로 흙을 빚어서 누드의 본을 뜬 게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모델로 직접 본을 떴다고 비난했다. 로댕은 망연자실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진상 조사를 한 후에야 논쟁은 불식되었다.


그러나 로댕은 논쟁 덕분에 프랑스 미술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술청은 1880년 <청동 시대>를 구매한 후 그에게 거대한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 미술관을 위한 기념비적인 현관문을 디자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로댕은 영감을 얻기 위해 단테의 <신곡>에 의지했다. <신곡>은 단테가 상상 속에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묘사한 14세기의 서사시다. 로댕은 그 이야기 중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영원한 고통을 구체화한 지옥편에 집중했다. 그는 작품명을 <지옥의 문>으로 정했다.


로댕은 원대한 포부를 품은 채 과제를 시작했다. 그는 세부 계획을 스케치한 후 모델이 될 만한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일반적인 접근법(문의 표면 위로 누드들이 솟아오르도록 제작)과 작품의 크기(세로 6.35미터, 가로 4미터)를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 다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로댕은 과제를 완성하기 위한 인내심과 지구력이 부족했고, <지옥의 문>은 그의 생전에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여러 해 동안 미술청은 자신들이 부탁한 현관문 디자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꾸준히 물었고, 그러다 미술관에 대한 계획들이 무기 연기되자 재촉하는 일을 중단했다. 로댕은 말했다. "대성당들은 어떤데요? 언제 완공되는 거 봤어요?"


문 하나가 닫힐 때

<지옥의 문>을 이리저리 땜질하기를 계속하던 로댕은 결국 새로운 프로젝트로 옮겨갔고, 그와 동시에 논쟁에 휘말렸다. 몇 점의 공공 기념상 제작을 의뢰받은 덕에 그의 작품들은 광범위한 관객에게 노출될 기회를 얻었지만, 그만큼 비난도 불러왔다. 특히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를 위한 기념 조각상은 관객들을 진노하게 만들었다. 평론가들은 그 조각을 "비만한 괴물" "볼품없는 땅딸보" "거대한 태아"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가 바뀔 무렵까지 로댕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다. 여자들은 그를 거부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로 보았고 그를 자연계의 불가사의이자 낭만주의 시대의 충동으로 똘똘 뭉친,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천재로 대우했다. 로댕은 개의치 않았다. 특히 자신들이 자신을 조각으로 새겨달라며 꽤 괜찮은 값을 제안하는 한 말이다.


로댕의 작품은 그의 사후에도 유명세를 유지했다. 비록 후세의 흥미를 끈 것은 그가 인체를 모델로 어떻게 작품을 빚어냈던가 같은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가 토막 나고 은유성이 없는 작품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20세기의 조각은 순식간에 고도로 추상화되었고,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로댕이 살아 있다면 그는 자신의 유산을 보고 경탄했을 것이다.


사랑도 로댕식으로

1864년 로댕은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다. 그녀는 그의 모델로 일하다가 덜컥 임신을 하여 1866년 아들을 낳았다. 로댕은 한 번도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뵈레는 그 후 평생 노예처럼 로댕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는 로댕의 집을 청소하고, 요리를 해주고, 그의 침대에서 잤다.


뵈레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다른 여자들을 사귀었다. 특히 카미유 클로델의 존재는 더 특별했다. 1882년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로댕은 저명한 화가였고 클로델은 젊고 야심만만한 학생이었다. 그녀의 기술과 지성, 맹렬한 야심은 로댕에게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곧 그들은 나란히 함께 작업을 했고 시골에 마련한 사랑의 안식처에서 연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관능적인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열정은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로델은 로댕이 자신의 성취를 가로채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계속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낙태를 감행했다. 로댕은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뵈레의 시중을 받으며 편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클로델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1898년 로댕과 헤어지자마자 정신분열증에 걸렸다. 1913년 클로델의 가족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녀는 1943년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는 동안 충성스러운 뵈레는 계속 로댕 곁을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불가사의한 인물로 보았다. 그녀는 로댕의 부와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도통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고, 노예처럼 대접받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분명했다.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친구들은 그들이 관계를 공식화하는 게 옳다고 결심하고는, 로댕에게 제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전쟁이 지속되던 1917년 1월 29일, 혹한의 추위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뵈레는 로댕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침상에 누운 채로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2주 후에 죽음을 맞았다. 



에드바르드 뭉크

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

국적 : 노르웨이

대표작 : 절규(1893년)

재료 : 캔버스에 유화, 유화, 판지에 템페라화, 흑백 석판화의 네 가지 버전

화풍 : 표현주의

전시관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


역대 화가들 중에서 빈센트 반 고흐처럼 불행했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에드바르드 뭉크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에 비하면 반 고흐의 인생은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 적어도 반 고흐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지 않았던가? 뭉크는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킬 힘이 있었다. 그가 고통을 표현한 그림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은 유화와 석판화 등으로 제작된 <절규>다. 이 작품은 세상을 향한 근원적인 비명을 담고 있다. 절대 스무 살을 넘길 수 없을 것 같던 병약한 소년은 8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 게다가 부와 명예가 보장된 노후를 즐겼다. 그는 악마들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들을 화폭에 옮겨 넣음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강렬하게 표현한 그림들을 세상에 남겼다.


사랑과 상실

군의관이었던 크리스티안 뭉크는 1860년대 노르웨이 뢰텐의 작은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라우라 카테린 비욀스타드를 만나 결혼했다. 1862년 소피에가 태어났고, 1863년 에드바르드가 태어났다. 이듬해 가족은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로 이사했고, 거기에서 안드레아스, 라우라, 잉게 이렇게 셋을 더 낳았다. 뭉크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뭉크는 어머니가 기침할 때마다 손수건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본 사실을 생생히 기억했다. 어머니는 1868년 에드바르드와 소피에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다. 아내의 죽음은 크리스티안의 숙명적이고 칼뱅주의적인 경향을 강화시켰고, 그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경향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뭉크는 죽음과 저주에 대해 너무나 공포감을 느낀 나머지 한밤중에 자기가 이미 죽었을까 봐 두려워하며 깨어나곤 했다. 그는 "내가 지금 지옥에 있는 건가?" 하며 자문하곤 했다. 그는 매년 겨울 열과 기관지염으로 앓아누웠고, 열세 살이 되면서 피가 섞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핵을 이겨냈지만 누나 소피에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 년 후 열다섯 살이 된 소피에는 결핵으로 죽었다.


인생이 고달플 때 그림을 그려라

뭉크는 지독한 가난과 결합된 가정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도피처를 발견했다. 그는 난로 앞에 있는 석탄 조각들로 스케치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화가들을 무신론적 보헤미안들로 여겼고, 자기 아들이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다. 어쩌면 그곳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든가, 장학금을 받는다든가, 그림을 판다든가, 자기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는 식으로 아버지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뭉크는 가장 과격한 화가 집단에 합류했다. 또한 니체의 저서를 탐독하고 자살을 옹호하는 보헤미안 집단에 가입했다. 1885년경 그는 유부녀와 연애를 하는가 하면 간밤의 숙취를 가라앉히기 위해 대낮부터 해장술을 마셔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885년 그는 첫 번째 걸작 <병든 아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누나 소피에가 죽음을 맞을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라 물감 시너 한 병을 입에 머금었다가 캔버스에 뿜어내 물감이 그림 위에 눈물처럼 흘러내리도록 했다. 뭉크는 1886년 10월에 이 그림을 전시했다. 그는 관객들이 작품의 감정적인 깊이를 평가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평가는커녕 조롱만 당했다.


상처 입은 뭉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을 때, 마침내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빛의 도시라 불리는 파리조차도 그에게는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1889년 11월 아버지가 죽자 뭉크는 또다시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일기장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음과 함께 산다." 그는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했다.


캔버스에서 당신 비명이 들려

다행히 뭉크는 자살 욕구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베를린 화가 협회로부터 단독 전시회를 열자는 제안을 받았다. 1892년 11월 전시회가 시작되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이었다. 화가 협회는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전시회를 끝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투표했지만, 협회의 젊은 회원들이 반발했다. 젊은 회원들은 그 틈을 타 협회를 탈퇴하고 베를린 분리파를 결성했다. 뭉크는 그 일에 대해 "나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 남아 새로운 친구들의 인정을 받으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뭉크는 자신이 가장 정통한 테마인 고통에 관한 그림을 그렸고, 1893년에는 <절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몇 해 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산책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두 친구와 함께 그 길을 걸었다―석양이 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그리고 나는 슬픔의 숨결을 느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다리 난간에 기대섰다―죽도록 피로감이 몰려왔다. 피오르 위의 구름은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물처럼 붉은빛이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가슴속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덜덜 떨며 멈춰 섰다. 그때 세상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심상치 않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런 경험을 한 장소는 오슬로의 북쪽에 있는 시골 마을 에켈베르그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뭉크의 여동생 라우라가 수용되어 있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도살장도 있었다. 죽어가는 동물들과 미친 사람들의 비명이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곳이었다. 뭉크는 입을 벌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태아 같기도 하고 미라 같기도 한 인물을 그렸다. 좌측에는 형체가 모호한 사람 둘이 길을 따라 걸어오고, 우측에는 바닷물이 불안하게 넘실거린다. 그 모든 것 위로 핏빛 하늘이 너울거린다. <절규>는 그가 실제 경험한 공포감에 대한 걸출한 표현이다.


타락자는 누구인가?

1930년대 후반 나치가 강제로 미술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패한 미술학도인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현대 미술(기본적으로 인상파 이후의 그림들)을 미완성으로 간주했고, 나쁘게는 부패의 근원이라고 여겼다. 1937년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미술관에 공문을 보내, 아주 약간이라도 현대적인 작품들은 전부 없애라고 명령했다. 1937년 6월 소위 타락한 미술로 선택된 작품들이 타락 미술 전시회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뭉크 등의 그림이 한 전시관에 빽빽이 전시되었다.


타락한 화가로 매도당한 처지이다 보니, 1940년 4월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뭉크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두려움과 당혹감 속에서도 뭉크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주로 자화상과 풍경화에 전념했다. 그는 여든 살 생일을 한 달 앞둔 1944년 1월에 죽었다.


뭉크는 죽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집 2층에는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그의 사후에 2층이 개방되자 친구들은 모두 경악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그림 1008점, 드로잉 4443점, 프린트 1만 5931점, 석판화 378점, 에칭화 188점, 목판화 148점, 석판화용 석판 143점, 동판 155점, 그 밖에 수많은 사진과 일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오슬로 시에 양도했고, 1963년 도시는 그 작품들을 소장하기 위해 뭉크 미술관을 열었다. 유년기를 넘길 가망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던 한 남자에게 놀라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새빨간 밤하늘

<절규>에 등장하는 불길한 빨간색 하늘은 보통 예술적인 시도로 해석되지만 어쩌면 실제 석양의 색깔이었는지도 모른다. 1883년 8월 크라카토아 화산이 폭발하면서 25세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바위와 재를 하늘로 쏘아 올렸다. 기록에 의하면 대기에 남아 있던 먼지가 하늘을 뒤덮어 11월까지 유럽 전역에서 새빨간 석양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뭉크가 <절규>에 착수한 것은 1893년이었지만, 일기를 보면 그가 그 사건을 보고 드로잉을 해둔 게 분명하다. 과학자들은 뭉크가 작품에서 묘사한 하늘의 정확한 지점이 동남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크라카토아 화산이 만든 빨간 노을이 보고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동 학대

뭉크는 자신의 그림들을 "아이들"이라고 불렀고, 남들이 애써 그의 손아귀에서 그림을 떼어놓으려고 하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그림 판매라는 점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림을 팔더라도 원본만큼은 자기가 보유하겠다는 단 한 가지 목표로 사본 제작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림을 사랑한다고 해서 작품을 매우 잘 보살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야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기를 선호했고, 그곳에서 완성된 작품들에 둘러싸여 작업했다. 그는 완성작들을 바람, 비, 태양, 눈에 그대로 방치했다. 그것을 목격한 방문객들은 놀라 자지러졌다. 뭉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림이 태양과 빗속에서 1년을 보내다 보면 더욱 정제될 수 있을 거야."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거대한 유화 캔버스가 뭔가에 찔려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뭉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애완견이 그림을 뚫고 지나갔다고 말했다. 방문객이 필생의 역작을 이런 식으로 함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뭉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림이 자활하는 데 도움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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