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와 33인의 화가

   
박세당
ǻ
북성재
   
14000
2010�� 08��



 책 소개
한국 중견화가 33명의 작품을 소개하는책으로, 화가들이 붓으로 색을 풀어냈다면 저자는 끊임없는 입담으로 화가의 개성을 핀셋으로 집어내듯 적확하게 잡아 인문학적, 예술적 시각을 동원해재구성하여 죽어 있는 부분까지 되살아나게 하는 재능을 보여준다. 그림에 드러난 은유와 상징의 세계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화가의 개성을가장 함축적으로 풀어낸 저자의 맛깔스런 글들이 읽는 이들을 그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손을 잡아 이끌어준다.

■저자 박세당
치과의사, 미술 컬렉터, 발명가, 언어학습 전문가로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영화제작을 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유연한 사고와 시나리오 작업 등 글쓰기에 눈을 뜨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전방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중이다.“한국 현대화가들의 수준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음은 물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그리고 경제개발시대 등 지난 수십 년간 한꺼번에 압축적으로 겪은 엄청난 경험들은 화가들의 인생뿐 아니라 작품들 속에 생생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한국의 현대미술계는 세계에서도 드문 독특하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한국의 현대미술품은중국의 작품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어 있다”는 자각이 저자와 화가들의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책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저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먼저 수백여 명의 화가들의 전시회장을 누비고, 관심 있는 작가들의 허락을 일일이 받아내기에 이르렀으며, 그의 생각과 그림 해설은 현재 미술계의뜻있는 작가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저서로는 1994년 『남자는 죽었다』(에세이), 2008년 『10일의 기적 하이퍼 캡션영어』(영어학습법) 등이 있다.수상경력은, 1998년 ‘현대벤처기술상’(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을 수상하였고, 1999년 ‘밀레니엄 상품’(산업자원부장관)에 당선되었으며2000년 ‘신지식특허인’(특허청장)에 선정된 바 있고, 2007년 코리아타임스가 수여하는 ‘대한민국 외국어 교육상’을수상하였다.

■차례

시작하는 글 - 우연을 가장한 ‘기회’
가국현 - 헝겊을 찢어 살포시 눌러붙인 듯 포근한 질감을 가진 색채의 마술사 
강수돌 - 극사실과 미니멀의 조화 
구병규 -이 화가의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누가 말리랴: 흥과 페이소스의 작가 
김석중 - 샤갈을 울린 남자가 색깔로 그려낸 환상교향곡 
김순겸- 어머니, 그 그리움의 원형질을 극사실 기법에 실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달하는 작가&nbsp& 
김영일 - 풍부한 인문지식을 바탕으로한 동양적 판타지를 아름다운 극사실로 그려내는 화가 
김용선 - 긁고 또 긁는 집요한 나이프 워크가 드러내는 사물의 속살, 그리고 생생한감동의 작가 
김정호 - 사라져가는 달동네 풍경 속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화란의 휴머니스트 
김종하 - 대한민국근현대미술의 살아 있는 전설 고전과 초현실주의를 아우르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가진 진정한 거장 
김형주 - 억압과 상처. 자유와 치유를섬세한 조형으로 풀어내는 
노대식 - 로댕의 고전적 사실주의의 조각의 맥을 고스란히 이은 한국조각의 드문 실력가 
림용순 - 김홍도신윤복의 대를 이은 생생한 민속화. 르노아르를 보는 듯한 건강한 에로티시즘 
문창배 -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형상화하는 시간의 시인
신동권 - 원초적 욕망과 남성적 에너지를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국제적인 명성의 화가&nbsp& 
오종철&nbsp& - 실경을현대적으로 묘사하는 신선한 느낌의 극사실적 수묵화 
오현철 - 모노프린트로 판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판화계의 보석과 같은 존재 
우희춘- 전통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거장&nbsp& 
이동업 - 보석처럼 빛나는 마띠에르와 소나무의 화가
이석보 - 들꽃들의 클림트, 그의 꽃들은 기쁨에 넘쳐 있다 
이춘환 - 풍경의 마음을 얽고 숨은 움직임마저 화폭에 옮겨놓는 한국화의귀재&nbsp& 
이한우 - 형적 재해석으로 서사적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거장 
장용길 - 대상의 내면을 드러내는 인상적이고질박한 마티에르 
전창운 - 그의 소 그림은 선과 색을 초월하여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의식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국택 -동작만으로 표정을 만드는 조각의 마임, 21세기의 채플린 
진양욱 - 세잔을 넘어선 색의 천재 내면의 색채를 드러내다&nbsp&
최광선 - 기쁨이 가득한 장미의 연인 
최예태 - 청색의 누드, 붉은산의 환타지 절정의 감각 
최정길 - 이 화가는 보석 같은마법의 푸른 물감을 가지고 있다 
추연근 - 두터움으로 드러내는 맑음과 고요의 세계 그리고 생명의 본질 
한미키 - 피카소를 넘어선신입체파(Neocubism)의 세계적 거장 
허진호 - 추상과 누드의 절묘한 조화&nbsp& 
황선화 - 천경자의 恨을 넘어서는찬란한 슬픔 
황제성 - 극사실로 그려낸 초현실적 세계 




그림 읽어주는 남자와 33인의 화가


가국현

헝겊을 찢어 살포시 눌러붙인 듯 포근한 질감을 가진 색채의 마술사

흔히 그를 색채의 마법사라고 부른다. 그만큼 그의 색감이 독특하다는 뜻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그림이 아이덴티티를 색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물에 살짝 적셨다가 아프지 않게 찢어-아니 뜯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붙인 듯, 배경과의 경계가 모호한 윤곽선이 없는 형상들이 주는 가물한 몽환적 이미지를 가국현 그림의 일차적 특색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농가의 겨울

이 그림은 풍경화로서 앞서 말한 작가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잿빛 하늘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그러나 그림에서 화가는 색채의 마법사답게 보랏빛이 섞인 청색의 세련된 색감으로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비정함을 산뜻하게 비틀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왼쪽에는 차마 나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털실 몇 오라기를 널어놓은 것 같은 실루엣들이 몇 그루 서 있어, 생명의 부재와 황량한 겨울의 느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하늘과 같은 색의 담장이 있고 더 짙은 색으로 농가의 건조실(높은 천정과 한층 더 높은 환기구로 보아 거주 목적의 공간은 아니고 담배 건조실이나 저장고일 것이다)이 들어서 있다. 건물들은 오직 지붕에 쌓인 눈들로 하여 청보랏빛 하늘과 구분되고, 또 눈으로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솜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나무도 건물도 아닌 눈이다. 건조실의 지붕에 살짝 발라져 하늘 건물을 겨우 이어놓던 눈이 어느새 농가의 지붕 위에 조금 내리는가 했더니 어느덧 농가 밖을 온통 뒤덮고 있다. 그림의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눈은 점층법적으로 그 존재감을 더해 나가며 본격적인 이야기의 주제인 겨울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살짝 핑크가 들어간 흰 눈은 뜯어붙인 듯 예의 가국현스러운 부드럽고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눈의 질감이다. 만지면 차갑고 밟으면 뽀드득거려야 할 눈이 어찌된 셈인지 만지면 따듯하고 밟으면 이불처럼 푹신할 것 같은 솜털의 질감을 보인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갑자기 형세가 달라진다. 잿빛 하늘의 스산한 느낌은 지천으로 깔린 눈의 이상한(?) 질감 덕분에 갑자기 따스한 느낌의 풍경이 되고야 만다. 굴뚝에 연기 하나 없고 온통 절망적 분위기가 엄습한 한겨울의 농가를 솜사탕 같은 눈이 포근하게 감싸는 풍경으로 바꾼 이 사람을 정녕 색채 마술사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구병규

이 화가의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누가 말리랴: 흥과 페이소스의 작가

이 화가의 주체할 수 없는 흥을 누가 말리랴? 일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이 화가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체포된 장면들 속에 화가의 웃음과 비애가 절제된 풍경에 투명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러다가도 미스테리한 핑크의 필을 받게 되면 밭 갈던 소가 갑자기 웃는 것을 신호로 세상은 단번에 무릉도원으로 변한다. 대상과 배경은 단숨에 작가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즐거움과 청춘만이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로 녹아든 채로 재구성된다.



쟁기질 하는 소와 도원의 꿈

이 두 작품은 이즈음 작가에게 일어난 파천황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부득이 동시에 해설할 수밖에 없다. 옆의 <쟁기질 하는 소>는 변화 이전 작가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묵묵히 밭을 갈고 있는 소도 쟁기를 든 사람도 어두운 분위기다. 사람은 아예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얼굴이 가려 있어 표정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에는 문제작 <도원의 꿈>을 보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관객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람처럼 웃고 있는 소이다. 잔등에 올라타고 피리를 불고 있는 목동(?)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 웃는 소와 피리 부는 소년이 좀전의 작품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밭을 갈고 있던 그 소와 그 청년이라면 어쩔 것인가? 확실한 것은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눈 한 번 찡긋하면 이것을 신호로 판을 뒤집어버리기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장면은 대변신의 시그널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숭아밭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그러나 여기서는 순간적으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종의 차원이동의 입구 역할을 하는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핑크색의 모자이크 틈틈이 보이는 나뭇가지와 복사꽃들의 흔적 그리고 그림의 제목으로 겨우 이곳이 복숭아밭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도대체가~"하면서 그림을 향해 다가가려는 내 눈앞에 척하니 가로막고 나선 것은 모자이크들 사이에서 두 손을 머리 위에 모아 하트를 만들고 하늘로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는 요정? 유령? 푸하하! 아, 졌다! 깨끗이 손을 들고 구병규 아저씨의 신명에, 그 장단에 몸에 힘이 주욱 빠지며 그저 나도 배실배실 따라 웃을 수밖에.



김순겸

어머니, 그 그리움의 원형질을 극사실 기법에 실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달하는 작가 

어머니에 대하여 남다른 그리움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길이 들어 반들반들해진 방짜유기 놋그릇 때문이다. 놋그릇은 닦을수록 윤이 나는 물건이다. 이 그림을 놋그릇을 통하여 진솔하게 표현된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초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표면에 상처가 날 정도로 속살이 드러나도록 피나게 닦고 또 닦아서 드디어는 이렇듯 찬란한 광택을 내기까지 이 그릇의 주인(아마도 화가의 어머니)의 깔끔한 성격과 더불어 이 분이 겪었을 신산했던 삶과 마음의 상채기가 표면의 예리한 광택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절절이 사무칠 리가 없다. 그림의 네 귀퉁이에 달린 네 개의 철제 반닫이 장롱의 장식은 짙은 나무색으로 처리된 배경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잠시 격동되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화면 전체를 어머니가 작가를 위해 준비해 놓은 마음의 반닫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손색이 없다.


기억 넘어 그리움-석류1


놋그릇 속에 담긴 석류들은 보통 풍성한 가을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음에 그리움을 가진 남자에게는 이 풍성한 가을이 다만 결실의 계절일 뿐 아니라 그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는 계절임도 숨길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이 가을에 이 작가는 가슴이 시리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 화가가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극사실기법이 아니라면, 보는 이에게 이토록 실감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극사실기법의 그림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하여도 이 작품은 또 하나의 훌륭한 답변이 된다.



이한우

조형적 재해석으로 서사적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거장

1927년 통영 출생이니 올해로 84세인 이 원로 화가는 그의 대표적 아름다운 우리 강산 시리즈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과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기사훈장을 받은 국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산과 나무, 들판과  포구, 바다 풍경과 마을, 논밭, 마을, 집 그리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일상들, 사실상 한폭의 캔버스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장대한 대상들이 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서사적 풍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치는 과감하게 생략되고 몇 가지 특징적인 선으로 정리되며 컬러 또한 통일성을 띤다.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구현한 정서의 <진경산수화>와 김홍도의 풍속화 전통을 바탕으로 조형적인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유화기법을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풍수지리 교과서를 보듯 명확한 산들의 배열과 풍경의 배치다. 이 그림에서 가장 멀리 푸른 색으로 묘사된 산들이 멀리 백두대간을 이루는 한반도의 등골들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지만 오렌지색 하늘과의 명확한 색 대비도 부족했던지 테두리를 하얗게 칠했다. 그렇다, 이야기는 한반도의 정기가 백두대간을 통해 마을로 흘러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몸통에 해당하는 주산은 어두운 오렌지색을 하고 가장 높고 웅장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아래 한층 밝은 오렌지색으로 완만한 산기슭이 보인다. 앞산은 비교적 높은 바위산으로 마을의 형세를 하나의 계곡으로 만들어놓는다. 자칫하면 답답할 수 있는 숨길을 시원하게 터놓는 장치는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인데 산골 마을 치고는 비교적 넓고 수량도 많아 보인다. 이 따스한 자연의 품 안에 마치 그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마을이 깃들어 있다. 시간은 마침 한낮,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냇가에 있는 채소밭에서 김을 매다가 맏딸이 차려온 새참을 즐기는 중이다. 저 멀리 대화하고 있는 모자가 보인다. 모든 풍경은 지극히 평화롭고 일상적이다.\


아름다운 강산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바로 우리들의 고향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순간 저 단순하고 동화 같은 그림 속에서 따뜻한 유년의 추억에 젖어, 잃었던 본성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정국택

동작만으로 표정을 만드는 조각의 마임, 21세기의 채플린

정국택은 소위 말하는 요즘 잘 나가는 작가다. 그의 유명한 비즈니스맨 시리즈는 단순한 원통형의 머리에 오똑한 코 하나로 눈도 입도 없이 온갖 표정을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뿐인가? 원통형의 몸통에서 곧장 돋아난 것 같은 와이셔츠의 깃과 넥타이로 다양한 동세를 만들어내고 툭 불거진 관절로 삐쩍 마른 몸매와 과도한 노동을 상징하고 납작하고 큰 발은 마치 <모던 타임스>의 채플린을 생각나게 한다.



검은 색 커튼을 배경으로 등받이도 없는 간이 벤치에, 남자는 책을 읽으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어깨 위에 앉은 비둘기 한 마리, 한순간의 평화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현대인의 안타까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뒤에 펼쳐진 사각형의 빈 공간은 말풍선이다. 여기에 단어까지 들어박히면 만화가 되어버린다. 말풍선이 둥글지 않은 것은 인물과의 조화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건조하고 메마른 현대인의 풍속도이기 때문이다.


休-2


인물은 눈과 입이 없어도 분위기와 자세만을 가지고 보다시피 풍부한 표정을 연출한다. 작가는 분명 대박을 칠 아이템 하나를 발굴한 것 같다.


무한한 공감대와 에피소드 그리고 크기별로 다양하게 조립시킬 수 있는 부품에 가까운 표준화된(?) 형태의 머리, 팔, 다리 그리고 몸통들은 과거 같으면 아예 예술이 아닌 것으로 혹평을 받았겠지만 현대인의 몰개성과 표준화된 시간과 가식적 매너, 과중한 업무, 이런 문제점을 비틀어내는 데에는 오히려 현대미술이 선호하는 최적의 아이템들이다. 그런데 저 남자의 평화가 기껏해야 몇 분이나 갈 것인가?


지금이라도 전화 한 통화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할 처지일 텐데 말이다.



추연근

두터움으로 드러내는 맑음과 고요의 세계 그리고 생명의 본질

화가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늙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분의 그림을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해가 갈수록 더욱 중후해지는 선, 굵은 붓 자국마다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터져나오는 생명의 환호성이 흡사 청마 유치환의 남성미 넘치는 시처럼 보는 사람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넉넉한 젊은 시절 이후 중년에 겪은 신산한 삶은 오히려 노년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 탈속한 선비의 고졸한 문인화처럼 숨길 수 없는 정신적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호수


일절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간결한 몇 개의 선만으로 이루어낸 작품이다. 나룻배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호수와 산들 밖에는 눈앞에 걸치적거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애(無碍)한 마음의 표현이다. 이러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위치는 역설적으로 호수 한 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배는 그림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아니 드러낼 필요조차 없다. 풍경 속에서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좌우의 먼 산과 가까운 산들이 겹쳐 만들어낸 풍경은 호수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정면으로부터 산과 산 사이를 가리키는 삼각형을 만들어, 물살 하나 일으키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동세(動勢)를 만들어내고 있다. 완벽하게 정적인 풍경에서 유유히 전진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낸 화가는 그 속에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을 기다리는 담담함을 석양빛에 물든 산과 호수의 보랏빛으로 드러내고 있다.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 법정 스님의 잠언 중에서



한미키

피카소를 넘어선 신입체파(Neocubism)의 세계적 거장

미키는 영어 이름이 아니라 본명이다. 원래는 한미경인데 영문 이름(mikyung)의 뒷부분(ung)을 축약해서 미키(miky)로 부른 것이 그냥 굳어진 것이다. 한미키 화백은 18년 전인 1991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래 쭉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 명성의 여류작가다. 화가는 최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개최된 2009년 Art en Capital의 Le salon de societe des Artiste Francais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이 대회는 올해로 220번째가 되는 프랑스에서 가장 전통 있는 전시회 중 하나이며, 여기에서 동양인은 고사하고 프랑스 사람이 아닌 유럽인들도 이 상을 받은 유례가 드물 정도니 한국인 한미경 씨가 받은 이 상은 개인의 영예를 넘어 한국 미술계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자부심을 한껏 높이는 진정 뜻깊은 사건이었다.


화풍은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이 좀 더 구상 쪽으로 변화된 것으로 neo-cubism, 즉 신입체파로 분류되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는 대상에 대한 입체적 모색과 표현 방법을 쓰지만 피카소처럼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대상을 왜곡시키는 일은 없고 대신 배경과 사물을 다양한 원과 직선으로 분할하고 구성하는 데 뛰어나서 대단히 밝고 화려한 색감의 그림을 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림은 중앙에 있는 여인을 중심으로 구성을 위한 선과 면의 분할이 시작되고 상하에 대립적 모티브가 배열되어 극적인 효과로 몰아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여인은 화병이 있는 테이블 위에 한 팔을 올린 상태로 비스듬히 턱을 괴고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정면과 측면얼굴이 만나는 얼굴의 정중선으로부터 선 하나가 뻗어나와 마치 동양의 태극도의 일부처럼 나머지 두 여인을 휘감고 화면의 오른쪽 커튼의 일부를 잠식하며 여인의 허리 아래 골반을 돌아 반대편에 있는 화병의 허리를 가로질러 왼쪽으로 빠져나간다.


생각하는 정물


이것이 메인 선이며 화면의 밝은 부분과 어두움의 경계를 이룬다. 맨 뒤편에 서 있는 여인의 목에서 출발한 또 다른 선 하나가 두 여인을 감싸도는 날렵한 선을 이루고는 메인라인에 빠르게 합쳐졌다가 하단에서 다시 두 개의 나선으로 분리되어 흘러간다. 이런 방식으로 화가는 하나의 중심선에 역동성을 더하는 기법을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 그림은 또한 여인들에게서 비롯된 나선들과 테이블이 만들어내는 호선, 그리고 커튼과 빌딩, 화병들이 만들어내는 수직선들에 의해 단정하면서도 역동적인 선과 면들을 만들어간다.


여기에 더해지는 그녀만의 색상의 파도는 메인라인을 중심으로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고 커튼으로 비치는 광원들을 여인들의 볼륨 있는 몸매에 모아 하이라이트를 이루어 나가는 완숙한 구성으로 절정을 이룬다. 마치 그랜드 마스터가 지휘하는 베토벤을 듣는 기분이다.


이제 그림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시간이다. 빌딩의 창문들마다 환하게 커져 있는 등불과 주위의 어두운 하늘은 한밤의 풍경이다. 그럼 낮 풍경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측 상단의 커튼과 그에 비친 햇빛이다. 상하에 대각선으로 펼쳐진 밤과 낮의 교차선상에 여인들은 사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림 속의 여인들은 어느새 주변의 정물들과 한 덩어리로 융합되어 있고, 아마도 이런 사실마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은 이미 정물이 되어버렸으니까. 바로 생각하는 정물 말이다. 이때 화가의 나이는 불과 46세,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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