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르 코르뷔지에(역자: 최정수)
ǻ
안그라픽스
   
17000
2010�� 06��



■ 책 소개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20대를 만나다! 보헤미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를 여행하면서 젊은 르 코르뷔지에가 글로 기록한 시간의 이미지들을 모았다.눈에 보이는, 지각에 작용되는, 감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채집한 영감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예술가, 건축가로서의 인생에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 기간을 기록한 중요하고 의미 깊은 자료이다.

■ 저자 르 코르뷔지에
1887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샤를르 에두아르쟌느레(Charles Eduard Jeanneret)이다. 라 쇼 드 퐁의 공예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7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30여개의 크고 작은 건축, 도시 작품들을 계획했으며, 이 가운데 3분의 1인 100여 개의 작품이 실현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빌라사브와이에(Villa Savoye, 1928~1931), 마르세이유의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1946~1952),노트르담 뒤 오 순례성당(chapelle Notre-Dame-du-Haut, 1950~1955), 라 투레트 수도원(couventSainte-Marie de la Tourette, 1953~1960) 등이 있다. 


■ 역자 최정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연금술사』『오, 자히르』『단순한 열정』『키리쿠와 마녀』『숨쉬어』『제로』『위에트 아저씨가 들려주는 천문항해의 비밀』『찰스 다윈 - 진화를말하다』『오를라』『화가들의 천국 물랭 루주』『한 달 후 일 년 후』『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등을 우리말로옮겼다.

■ 차례
내형이자 음악가인 알베르 자느레에게
1911년 동방여행의 여정
몇몇 인상들
라 쇼 드 퐁 작업실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도나우 강
부쿠레슈티
투르노보
터키 땅에서
콘스탄티노플
모스크
묘지들
그녀들과그들
카페
열려라, 참깨
두 개의 동화, 하나의 현실
스탐불의 재앙
혼란스러운 추억들, 귀환과 회환……
아토스산
파르테논 신전
서유럽에서

감수자후기
옮긴이 주
르 코르뷔지에 연보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몇몇 인상들
“그렇게 여러 달 동안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면 당신의 놀라운 능력이 무뎌지고, 신선한 감성이 퇴색하고, 결국엔 환상에서 깨어나 조금 무감각해진 눈으로 사물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이따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면 당신의 생각이 너무 예기치 못한 것이라 무척 놀라곤 했는데 말이에요!……어쨌든 당신은 이제 동방으로 떠나죠. 당신이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당신의 계획에 모자람이 없을 거라는 걸 우리는 잘 알아요.……얼마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상을 갖고 돌아오겠어요!……우리의 조언이 동기부여가 될 거예요. 그러니 행여 우리를 원망하지는 마요.”


여행을 떠나기 전 베를린에서 매력적인 여자 동료 두 명이 나에게 말했다. 결국 그 말이 옳았다. 티어가르텐(독일 베를린 중앙에 있는 큰 공원)의 무거운 하늘 밑에서 혹은 슈프레 강(독일 북부를 흐르는 하펠 강의 지류)의 청록색 운하를 따라 천천히 산책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나는 게르마니아(고대 로마인이 게르만인의 거주지에 붙인 이름. 유럽 중부 도나우 강의 북쪽, 라인 강 동쪽에서 비슬라 강까지)의 구시가와 신시가에 늘어선 돌투성이 미로 속을 오랫동안 힘들게 산책하다 돌아왔고, 숭배 받는 건물의 돔을 보며 험담했고, 평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 하구에 자리 잡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성곽’이 높이 솟은 그 유명한 도시에 회의를 품었다. 소탑, 해자, 총 쏘는 구멍이 뚫린 성벽에 둘러싸인 중세풍의 그로테스크한 외관에 욕설을 퍼부었고, 수상쩍게 비죽거리는 그 모습을 통렬히 비난했다. 웅장한 투구를 쓴 듯 보이는 이면에는 온통 칼자국이 나 있고, 나병으로 인한 불결한 농진과 공장의 거무스레한 굴뚝이 내뿜는 악취 나는 연기 그을음이 보였다. 그 모습은 가히 연극적이었다.


지나다니는 자동차 때문에 아스팔트에 반들반들 윤이 나고, 지는 해 때문에 검은 나무기둥이 수없이 늘어서고,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푸른 초목 밑에 잠긴 대로는 종종 숭고한 창조물처럼 나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복원된 돔과 허술한 정면의 과도한 돌출부 밑에 파묻힌 불결한 골목길, 거기에 괸 악취, 거기에 틀어박힌 수상쩍은 사람들과 짹짹거리며 우글거리는 어린아이들 무리는 여러 번 나를 그것에서 도망치게 했다. 반면 베데커(여행 안내서로 유명한 독일의 출판인)는 그런 광경에 황홀해했고, 자신이 느낀 감동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에서 별 세 개를 떼어내 그곳을 한껏 찬양했다. 


만일 내가 아름다움이란 크기나 규모, 높이 혹은 거기에 사용된 돈의 액수나 연극적 효과가 아니라 무엇보다 조화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사물을 보는 이런 방식에, 이런 존재방식에 다음 사실을 덧붙이는 바다. 나는 젊다(덧없는 과오). 그래서 무모한 판단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절충주의를 숭배한다. 하지만 절충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눈을 감고 머리가 허옇게 세기를 기다린다. 반대로 나는 안경 낀 근시의 눈을 아주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회의적인 아가씨들이여. 여행이라는 것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행에 대한 사랑 속에서 조금씩 더 고귀해진다. 내 신념에 따르면, 여행은 모든 것이 사회주의화하는 요즈음 찬양받아 마땅한 일이다. 새벽 2시에 나는 상념에 잠긴 채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 사이를 흐르는 넓은 강을 타고 내려가는 하얀 배 위에 있었다. 벌써 둥글게 차오른 달이 별들의 미로를 통과하여 하늘로 떠오르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도 잊은 채!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삶을 즐긴다. 그러니 그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만일 부자들마저 권태를 느낀다면 재미없고 지루한 나날이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또한 부자들이 기분전환으로 즐기는 멋진 구경거리를 박탈당할 것이고, 사람들은 즐겁게 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블루멘 탁(Blumen Tag)’, 즉 꽃의 축제여서 길에 색채가 넘쳐흐르고 화려함이 한껏 펼쳐진다. 그러나 프라터로 통하는 길에는 지저분한 군중이 북적인다. 군중은 축복받지 못한 삶에 대한 원망을 풀려고 거기에 오거나 아니면 단순히 빈둥거리며 구경하고픈 마음에 온다. 4년 전에도 이미 본 적이 있는 빈의 가난한 사람들은 전혀 호감이 가지 않고, 불결하고,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 있다!


행렬을 이룬 말과 호사스러운 자동차가 대로 중앙에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꽃무더기 아래 파묻힌다. 순간적이고 덧없는 꽃무더기 아래, 또 다른 덧없는 존재인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모여 있다. 시인은 말할 것이다. 아가씨들은, 덧없는 또 다른 꽃인 아가씨들은 욕망으로 인해 조금 성이 난 채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고. 이런 색채의 관현악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2부 바이올린 파트를 맡아 아무렇게나 던져진 장미와 백합이 등장하는 테마를 반주로 받쳐준다.


오후의 열기에 짓눌린 우리는 축제를 건성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색채의 연속적인 폭발 속에서, 귀부인 두 명이 까만 씨가 보이는 하얀 양귀비 무늬가 있는 닫집 밑에서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종이꽃이 진짜 꽃보다 오히려 더 광채를 발했다. 종이꽃은 아주 잘 만들어져서 진짜 꽃과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열대 지방에서 들여온 종이꽃은 산책로 멀리서도 눈부시게 반짝였고, 주변에서는 유럽의 장미, 아이리스, 향이 강한 백합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름다운 치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이 시시한 축제 행렬에 엄청난 돈이 들었지만, 정작 축제의 취지는 사라져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자극적인 세부 때문에 그림 전체가 괴로움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세부에 신경 쓰지 않는다. 유용성의 요구가 너무나 강력해서 그런 세부를 용서한다. 간단히 말해 축제를 즐기는 쪽은 부유한 빈이고, 가난한 빈은 구경만 한다.


석양이 내린다. 나무가 가득 서 있는 가로수길을 지나 변두리로 나가니, 아주 넓은 정원 하나가 펼쳐져 있다. 루이 14세풍으로 지은 매우 웅장한 쉰브룬 궁전(빈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의 여름 별궁)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궁전 중심부를, 그 무표정하고 널찍한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갑자기, 준비도 없이, 프랑스 식 정원의 깜짝 놀랄 만한 장관이 펼쳐진다. 그 정원은 너무 소박해서 빈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규모는 엄청났다! 고도(古都) 빈은 이런 우아한 광경 속에서 빛을 다소 잃긴 했지만 ‘귀족적으로’ 살아남았다.


체격이 자그마한 그림 수집가가 우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가 그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은, 다름 아니라 인상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소장한 그림 가운데 어떤 것은 아름다웠다. 우리는 여러 차례 그림을 칭찬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작은 그림 속에 파묻힌 수집가는 내심 실망한 듯했다. 할머니들의 성경책에 나올 법한 조잡하고 서툰 그림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십 만 개의 보석 중 쓸 만한 것을 골라내니 겨우 오천 개쯤 되었다고나 할까.


빈 회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벨라스케스의 화려함은 뮌헨에서는 너무도 강렬했지만 이곳 빈에서는 혐오감을 주었고, 루벤스의 육체적 풍만함도 이곳에서는 부담스러웠다. 사실 빈은 음악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곳의 음악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말러가 이곳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였다.) 또한 빈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기품 있는 건물들이 오늘날 사라져간다. 현대 건축이 붐을 이루면서 17세기와 18세기에 지은 왕족의 집들이 가차없이 허물어졌고, 오래된 프랑스풍 공원이나 쇤브룬 궁전, 벨베데레 궁전(빈 남동쪽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 정원에서나 바로크 양식 건축물을 겨우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부주의한 탓에 나는 아우가르텐 궁전을 잊고 보지 못했다.


빈의 대로를 가득 채운, 젊은 건축가들이 최근에 지은 천박하고 과장된 건축물에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었다. 건축물은 터무니없긴 했지만 상식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에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상식이 우글거리는 이 과밀한 도시에서 그런 건축물을 찾아내려면 전문적인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화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에 대한 인상은 결국 회색이 되어버렸다. 몰취미하게 돈만 쏟아 부은 느낌이 빈의 대기를 짓누른다. 빈은 색이 바랬으며, 보는 사람의 기분을 거스른다. 빈은 그곳을 스쳐 지나간 우리에게 잿빛 도시로 남았다.  


콘스탄티노플
페라(이스탄불 신시가인 베요글루 지구의 옛 이름), 스탐불(이스탄불의 옛 이름), 스쿠타리(이스탄불 주에 있는 도시. 현재의 이름은 ‘위스퀴다르’). 이 세 지구는 삼위일체다. 나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성스러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보날 신부와 함께 아이날리 마을의 발코니에서 유향수 수액을 천천히 마셨다. 보날 신부는 늦은 저녁을 들기 전이었고, 나는 스탐불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다리를 건너온 참이었다. 우리가 앉은 발코니에서는 사이프러스가 서 있는 저 너머의 들판과 골든혼(이스탄불 구시가와 신시가 사이에 있는 내포(內浦))이 바라다보였다. 하늘이 드리우는 널찍한 그림자가 주요 모스크의 윤곽을 흐리게 했다.


어둠이 내렸다. 멋진 잿빛 눈썹 아래 자리 잡은 압생트 빛깔의 커다란 눈이 눈물에 잠겨 빛난다. 눈앞은 온통 황금처럼 빛난다. 비잔티움 궁전의 대리석과 술탄의 보물이 모두 금색이다! 둔중한 황금 비너스상과 케레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곡물 또는 대지의 여신)상이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유스티니아누스 궁전 계단 꼭대기에 서 있다. 벼랑 끝 모래사장의 하렘에는 금을 덮어씌운 청동 대포와 왕관, 관능을 자극하는 멋진 오달리스크(하렘에서 살던 술탄의 총비(寵妃)가 벗은 발목과 통통한 팔목에 차던 커다란 금발찌, 금팔찌가 있다. 금으로 치장하고 손톱을 진홍빛으로 물들인 그녀들은 언덕 높은 곳에 있는 화려한 새장에 갇혀 기다림으로 질식해갔을 것이다. 언덕은 바다를 향해 쑥 내밀고 있으며, 바다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친다. 술탄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녀들을 산 채로 자루에 담아 바다에 ‘첨벙’ 빠뜨렸고, 물고기들이 몰려와 살을 뜯어먹었다. 보날 신부는 그녀들이 남긴 장신구가 모두 그 증거물이라고 주장했다. 조화롭고 균형미 있는 대리석이 바닷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슭을 따라 오르내렸다. 대리석은 늘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화려한 광채에 신물이 났다. 고집 센 나는 지금 우리가 본 이것이 다는 아닐 거라고 보날 신부에게 장담했다. 사실 나는 골든혼에서 스탐불 쪽을 바라보기를, 그리고 스탐불이 흰색이기를, 백악처럼 선명한 흰색이기를 바랐다. 빛이 환하게 부서지고, 유백색 정육면체 모양의 건물 위에 돌 지붕이 부풀듯 얹혀 있기를, 모스크의 첨탑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를, 그리고 하늘이 짙푸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내가 본 스탐불은 온통 왜곡되고 저주스러운 노란색, 황금색뿐이었다. 나는 하얀 햇빛 아래 서 있는 하얀 도시, 초록색 사이프러스들이 방점을 찍는 도시, 파란 하늘에 화답하는 푸른 바다를 상상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광경이 전개되는 것을 보기 위해 관례에 따라 바다를 통해 여기에 왔다. 바닷길은 우회하는 길이었지만, 우리는 로도스토에서 빈대에게 물려가며 잠을 자고, 아주 작은 배를 13시간이나 타고 험한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다. 예전에 러시아 순례자들이 성스러운 산이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간절한 마음으로 갑판 위에 서서 일곱 개의 탑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처음엔 작은 모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윽고 큰 모스크들과 비잔티움 궁전의 폐허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성 소피아 대성당과 술탄의 하렘이 보였다.


선원과 짐꾼들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작은 보트에서 우리가 탄 작은 배로 넘어왔다. 그러고는 우리를 마치 가축처럼 대하며 하선시켰다. 우리는 당황하여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길에는 그리스인, 독일인, 프랑스인이 한데 섞여 득실거렸다. 근동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수성쩍은 조합이었다. 길에는 합승마차들이 지나다녔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자그마치 나흘 동안 연이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위풍당당하고 방종했던 비잔티움은 되살릴 수 없다. 비잔티움의 영혼은 유적으로 남아 몇몇 돌덩이를 이미 떠나버렸다.


페라에서 사람들은 종탑 근처에 모여 살았다. 사람들은 뉴요커처럼 분주하다. 노쇠한 지역에 살면서 낮잠 시간에 한가로이 조는 터키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지붕이 큼직한 보랏빛 목조주택이 울타리 사이에 자라난 신선한 초록 식물 속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그 신비로움에 황홀해졌다. 준엄한 분위기로 페라를 지배하는 아주 높고 하얀 모스크 꼭대기 주변에서 집들은 조화롭게 무리수를 이루었다. 하얀 벽에 창문이 뚫린 돌집이 앞서거니 뒤서거나 언덕에 줄지어 있는 모습이 마치 도미노 같다. 집들는 좁은 여러 개의 도로 꼭대기에서 다시 만난다. 거기서는 조화로움과 일체감, 열에 들뜬 경쟁심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런 분위기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지독하고, 따분하고, 무정하고, 냉혹한 페라. 그러나 페라는 아름답고 커다란 둥근 탑이 장엄함을 자랑한다. 탑은 마치 전쟁의 탑과 같고, 용병대장처럼 거만하고, 호전적인 정찰병 같다.


페라에서 교회 종탑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위해 그런 신앙을 바치겠는가? 이들은 쾌락의 신봉자들이다. 이곳 여자들은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쓰고, 그래서 멋지다. 아! 그러나 부쿠레슈티 여인들만큼 멋지지는 못하다!


나는 터키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 아무튼 거기에는 한없는 평온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체념 혹은 운명론이라고 부르며 그 가치를 훼손한다. 그러니 이제는 ‘믿음’이라고 부르자. 나는 이 믿음을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묘사하고 싶다. 특히 파란색. 왜냐하면 바다가 파란색이고, 하늘이 파란색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어디서 끝나고 다른 하나가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무한하고 기분 좋은 믿음이다. 


카페
우연이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나는 복잡한 시장을 벗어나려고 눈에 띄는 카페로 곧장 들어갔다. 카페는 고요하고 시원했다. 오래된 나무들이 하늘이 뿜어내는 열기를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긴 의자 두 개를 놓고 화려한 장식을 한 작은 방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끓였다. 터키의 집들은 구불거리는 좁은 길목에 촘촘히 늘어서 있어서 시야를 차단하곤 한다. 이 카페로 오는 동안 나는 기묘한 돌계단을 오르고, 높은 벽에 뚫린 예쁜 문 아래를 지나갔다. 카페에는 수많은 벤치가 울타리를 이루며 곳곳에 흩어져 있고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천이 그 위에 덮여 있었다. 벤치는 깊어서 몸을 파묻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등받이와 팔걸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거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커피는 아주 작은 잔에 담겨 나오고, 차는 배 모양의 둥근 유리잔에 담겨 나온다. 저렴한 가격인데도 몇 번이고 잔을 다시 채워준다.


이 까페를 더 생생하게 묘사하려면 카페 의자 사이에 뻗어 있는, 모스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각형 기둥 여섯 개에 대해 말해야 한다. 기둥머리 장식은 독특한 스페인 바로크풍이다. 다섯 개의 작은 돔 지붕은 검은 나무 문 하나가 달린 단색 담장으로 이어진다. 나무 문에는 자개와 상아로 상감한 복잡한 장식이 빛나고 있다. 여러 색깔로 짠 벽걸이 양탄자가 둥근 지붕 밑에 깔린 등나무 돗자리에까지 늘어져 있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모스크 첨탑 위에 무에진(하루에 5번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막 올라갔고, 곧이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느새 사람들이 돗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며 알라를 숭배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나는 터키의 고상하고 감동적인 정취를 발견했다. 탁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무덤 세 개가 있었다. 그 옆에 자라난 몇 미터 높이의 나무에 걸린 등불 하나가 무덤들을 매일 밤 환히 밝혀준다. 비석에 글씨를 휘갈겨 써놓았는데, 하늘을 향해 뻗은 키 큰 무화과나무 뿌리 사이에 잠든 용감한 사람들의 미덕에 대해 말하고 있으리라. 그들의 평온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산 자들 사이에 무덤을 만든 것이리라.


혼란스러운 추억들, 귀환과 회환……
우리가 보낸 빈약한 일곱 주는 터키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스탐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린다면, 그것은 영혼을 빼먹고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면, 스탐불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불가피했던 그 파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터키의 도래 말이다. 나는 거기서 콘스탄티노플의 황혼을 보았다.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인 이를 기린다! 오래되고 어두운 그림들이 방랑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건드린다. 경건한 성상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상과 현성용(예수가 팔레스타인의 다볼 산 위에서 거룩한 모습을 드러낸 일), 발현(신이 현자나 예언자에게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표현한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한가운데 하늘이 불타오르고, 천사가 떨고 있는 한 처녀에게 장차 있을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바로 부쿠레슈티 교구 대주교 성당에 있는 그림 <천국>이다.

 

부쿠레슈티의 수도원을 유람하던 때였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부쿠레슈티의 철학에 대해 토론했다. 오귀스트와 나는 종교로서 개신교가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채워주는 관능성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관능성은 스스로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인간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며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본성일 것이다. 관능성은 이성을 도취시키고 이성의 지배력을 벗어난다. 그것은 잠재된 기쁨의 근원이며 생기 있는 삶의 원천이다.


롱사르(16세기 프랑스의 시인)는 가톨릭을 찬양했는데, 그 이유는 가톨릭에서 인간의 근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버린다 해도 다른 종교를 믿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행복하게 따르는’ 야생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투르고 경직된 도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페라에서 동방정교회의 장례 행렬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시신을 그대로 노출시켜 운반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화가 나고 혐오감을 느꼈다. 시신 위에 파리가 날아다녔고, 창백하고 역겨운 시신의 모습이 햇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왜 그런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일까? 그 모습을 보고 모두 마지막 때가 다가오리라는 사실을 상기하라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선한 삶을 설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상의 복을 누리며 선하고 조화롭게 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같다.

지금부터 모순된 말을 하겠다. 시골의 예술은 도시의 예술에서 유래한다. 시골 예술은 도시 예술의 특별한 형태다. 그것은 잡종이지만 아름답고, 언제나 흥미로운 특성을 지닌다. 어쨌든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 원시 예술은 선구적이다. 시골의 예술가들은 창조 행위를 할 때 다행스럽게도 야생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취향이 세련되지 못하고 오만하고 게을러서, 도시에서 표현과 언어를 훔쳐다 사용한다. 순진하고 무의식적인 태도로 그것을 복제한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사에 반해서 자연스러운 힘이 솟아난다.


기이한 일이지만 시골 예술은 이런 서투름과 어색함 때문에 가치가 있다. 서투름과 어색함이 우리 도시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고 세련되게 보이는 것이다. 루마니아 평원의 시골집을 보라. 집들은 눈부시고, 놀랄 만큼 광채를 발한다. 초벽은 하얗고, 받침돌은 강렬한 파란색이다. 색을 칠하거나 돋을새김을 한 모퉁이는 장식기둥 역할을 한다. 박공벽은 멋진 파란색이나 산뜻한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고전적이지만 조금 변형된 건축 양식이다.


그들은 매년 봄이 되면 격렬하게 벽을 칠한다. 그러면서 다채롭고 즐거운 축제를 즐긴다. 그들에게 집은 자신만의 개성을 나타내야 하고, 궁전처럼 화려해야 한다. 그래서 이 야생의 사람들이 찬란한 색깔로 자기 자신을 장식하고 주위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시가 시골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을 치료한답시고 약을 써서 병을 더 악화시키는 꼴이다. 도시는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변모해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 섣불리 다르게 행동하면 안 될 것이다.


여행자는 모름지기 친구들에게 엽서나 편지를 써야 한다. 여러분이 출발할 때 친구들은 여러분에게 흡사 명령조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아, 사진과 장식품도 가져올 거지!” 여러분은 진땀을 흘려가며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분을 배신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여러분을 질투하여 답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답장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 하긴 여러분이 여행 중이라 주소가 자주 변하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분의 주소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가? 혹은 답장이 도중에 분실되거나 너무 늦게 혹은 너무 일찍 도착할 수도 있다. 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몹시도 분주한 친구들이여!


터키 격언 중에 ‘집 없는 곳에는 무덤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땅에는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아무튼 사람이 산다는 말이다. 터키라는 나라는 하나의 사막과 같다. 사람들은 거기에 집을 짓고 나무를 심는다. 우리들의 나라는 동방에 비교하면 천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물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린다. 스탐불이 과수원이라면 라 쇼 드 퐁(스위스 뇌샤텔 주에 있는 도시)은 자갈이 깔린 배수용 우물이다.

유럽 담수에서 터키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작은 범선에 축음기를 가져다 음악을 틀어놓고 파도 소리와 축음기의 나팔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파리 교외에 사는 부르주아들도 그런 세련된 여흥을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플라타너스 아래 자리한 어느 카페에서, 한 노신사가 백파이프를 끊임없이 연주했다. 몇 시간 동안 똑같은 선율이었다. 마치 그들 종족이 가진 끈질긴 인내심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노신사는 곧 죽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아무도 그를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 산 축음기가 이미 승리를 쟁취하며 동방의 문지방을 넘어버렸으니 말이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빗나간 열정은 돌이킬 수 없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는 길이라는 어느 프랑스인 부부를 불가리에서 만났는데, 남자가 황홀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길이 너무 더러운 것은 참 안타까워요.”


그러자 여자가 급히 고쳐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그래서 거기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걸요!”


두 사람 다 거기서 보낸 보름이라는 시간이 매우 황홀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우리는 어느 불가리아인에게 필리포폴리스(불가리아 남부 마리차 강 연안의 도시. 현재의 이름은 플로브디프)나 아드리아노플에서 무엇을 보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필리포폴리스 말입니까? 현대적인 도시죠. 쭉 뻗은 넓은 도로가 있고, 아주 깨끗합니다. 하지만 아드리아노플은 터키 도시답게 더럽답니다!”


우리는 아드리아노플로 갔다. 그리고 미래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그 불가리아인의 판단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난, 수년 전부터 카이로에서 병원을 하고 있다는 그리스인 치과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카이로요? 카이로는 여기보다 백 배는 더 아름답지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영국인들이 살거든요! 한번 가보세요. 마치 유럽 같은 도시입니다. 거기 가보면 즐거운 거예요.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있고, 전차도 있고, 여기 호텔보다 오십 배, 백 배는 더 큰 호텔도 있어요. 아, 헬리오폴리스에 가는 걸 빠뜨리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새로 지은 집들이 많거든요.”


얼이 빠져버린 나는 하얀 건축물, 무샤라비(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만든 아랍 식 창살), 울긋불긋 장식된 첨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래요, 압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그가 피라미드는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