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부르는 그림

   
안현신
ǻ
눈과마음
   
13000
2010�� 01��



■ 책 소개
명화를 읽는 새로운 코드,KISS!

사랑의 표현이자 관계의 결합을 상징하는 키스, 그것은 연인들에게 그렇듯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모티프이기도 하다. 이 매혹적인 주제를 예술가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또 어떤 의도로 사용해왔을까? 미학과 예술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하나의 주제에대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표현해낸 흔적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비단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을 모으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과 예술가의 삶을 심도 있게 다루어 각각의 작품과 화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관조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자기만의독특하고 창조적인 해설 방식으로 작품 하나하나의 디테일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다룸으로써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이해하고 그들과 교감을이루는 데 탁월한 도움을 준다. 아울러 ‘가상의 작업 일지’라는 코너를 통해 해당 작가가 가진 특유의 작품 세계와 개성에 대한 흥미로운 시선을선사한다. 


■ 저자 안현신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대학원에서 미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성대, 강릉대 등에서 미학, 예술철학, 영상예술, 공연예술 관련 강의를 했고 몇몇 국제영화제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라디오 프로그램 구성작가, 동화 작가 등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으며 여러 가지 형태의 예술 관련 글쓰기를 해오고있다. 석사 논문으로 「해체론적 영화 연구」를 썼으며, 옮긴 책으로 『영화 스타일의 역사』(공역)가 있다. 


■ 차례

 

Chapter1. 빛과 환희, 즐거운 입맞춤
1. 연인들만의 세상
사랑, 세상을 물들이는 즐거운 힘 - 마르크 샤갈의 연인들
마술 같은 세상, 그곳에 사는 연인들 - <여자 곡마사>, <공중곡예사> : 마르크 샤갈
낭만적인 사랑의 초상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그린 사랑의 낭만성
고즈넉한 평화의 시간 - <키스> : 콘스탄틴 브랑쿠시
가상의 작업 일지 ① 사랑이 세상을 무중력으로 만들다 - <생일> : 마르크 샤갈

 

2.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관하여
기쁜 소식을 나누는 사람들 - <금문의 만남> : 지오토 디 본도네
쾌락을 관찰하다 - <쾌락의 여왕>, <키스> : 툴루즈 로트레크
일상의 따뜻한 힘, 엄마 - 메리 카사트가 그린 모성
가상의 작업 일지 ② 삶이, 음악처럼 - <음악(스케치)> : 앙리 마티스

 

Chapter2. 어둠의 세계, 비극의 입맞춤
1. 배신과 불안, 고통의 몸짓들
배신자의 입술, 연민의 시선 - <유다의 키스> : 지오토 디 본도네
불안과 두려움으로 엉키다 - <키스> : 에드바르트 뭉크
사랑하는 자, 질투하는 자 - <질투 II> : 에드바르트 뭉크
가상의 작업 일지 ③ 당신은 누구십니까? - <연인들> : 르네 마그리트

 

2. 비극적 사랑, 죽음의 그림자
죽음에 관한 아름다운 변주 - <베아트리체가 죽는 순간의 단테의 꿈>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지옥을 떠도는 연인들 -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
파손된 삶, 침묵 속으로 사라져간 예술가 - <샤쿤탈라> : 카미유 클로델
가상의 작업 일지 ④ 소녀, 해골을 품에 안다 - <죽음과 소녀> : 에드바르트 뭉크

 

Chapter3. 황홀의 순간, 유혹과 관능의 입맞춤
1. 부재에 대한 사랑, 불가능을 향한 욕망
사랑이라는 이름의 나르시시즘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 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조각상 - 영혼을 얻다> : 에드워드 번존스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향한 복수의 몸짓 - <살로메>, <살로메 - 클라이맥스> : 오브리 비어즐리
신의 욕구, 인간의 욕구 - <제우스와 이오> : 안토니오 알레그리 다 코레지오
가상의 작업 일지 ⑤ 진실을 그리다 - <키스> : 툴루즈 로트레크

 

2. 관능과 도취 그리고 에로티시즘
사랑의 긴박한 찰나를 포착하다 - <도둑맞은 키스>, <빗장>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  프랑수아 부셰
지상에 진정한 낙원은 있는가 -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원초적인 성의 냄새를 그리다 - <추기경과 수녀> : 에곤 실레
에로티시즘 혹은 폭발적인 삶의 에너지 - <키스>, <연인>, <포옹> : 파블로 피카소
가상의 작업 일지 ⑥ 그러니까, 이것은 예술입니까? - <우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키스> : 로이 리히텐슈타인

 

참고 문헌





키스를 부르는 그림

Chapter1. 빛과 환희, 즐거운 입맞춤
연인들만의 세상
사랑, 세상을 물들이는 즐거운 힘 - 마르크 샤갈의 연인들

다른 그 무엇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연인들만이 있을 뿐. 남자와 여자가 입을 맞추고 있다. 남자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붉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여자의 키스를 기다린다. 동그랗게 말린 곱슬머리와 순진한 얼굴 표정, 좁게 움츠린 어깨가 꼭 어린아이 같다. 여자는 하얀 망사 장갑을 낀 한쪽 손으로 남자의 턱 언저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에게 살며시 입술을 댄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도 한 여자의 눈이 몹시 깊게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세상은 그들과 상관없이 지금도 그 어딘가에서 여러 가지 모양새를 뽐내며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이 순간, 입 맞추고 있는 남자와 여자 주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푸른빛이 있을 뿐. 푸른 빛깔의 공기가 그들을 푸르게 물들인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은 사랑의 절대성과 그 힘을 믿었던 사람이다.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표현했던 샤갈은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랑이야말로 샤갈의 기교이자 종교였던 셈이다.


그 사랑의 뿌리에 벨라가 있었다. 벨라 로젠펠트. 마르크 샤갈의 첫 번째 부인이자 오랜 연인, 샤갈의 뮤즈라 불린 사람. 샤갈과 벨라는 1909년 가을, 그들의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샤갈을 보게 된 벨라는 후에 남겨놓은 수기 형식의 글에서 당시 샤갈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두 눈은 하늘에서 막 내려온 것처럼 파랗다.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눈이다. 눈 꼬리는 아몬드처럼 갸름하다. 미간은 넓고 두 눈은 각각 작은 배처럼 떠 있다. 이런 눈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짐승들의 그림책에서나 봤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이상하리만치 파란 눈을 가진 샤갈에게서 벨라는 운명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 나는 긴 잠을 잔다. 그리고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전쟁의 기운이 세계를 감싸고 있던 어두운 시기, 1915년 여름에 샤갈은 고향 마을에서 사랑하는 벨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벨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 1944년 가을까지 약 30년 동안, 샤갈은 줄기차게 벨라를 그렸고,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림도 색채도 사랑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샤갈은 말했었다. 사랑이 그에게 말을 걸어 세상에 흩뿌리게 만들었던 그 색채들의 힘인지, 혹은 평생 사랑을 하고 꿈을 꾸는 소박한 소년 같았던 그의 삶의 에너지 탓인지, 샤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행복의 전염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그림을 보는 일은 그와 더불어 우리도 함께 천진난만해지는 일이다. 세상 그 어느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연인의 숨결만을 느끼며 입을 맞추고 있는 저 그림 속 연인들처럼 즐거워지는 일이다.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관하여
일상의 따뜻한 힘, 엄마 - 메리 카사트가 그린 모성

아이가 안겨 있다. 아이를 품에 안는 저 몸짓은 과연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아마도 태곳적부터 계속되었을,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는 한 앞으로도 끝없이 반복될, 저 무궁한 불멸의 몸짓. 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 구석구석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든 누군가는 취하고 있을 그 보편적 몸짓. 안는 사람과 안기는 사람이 바뀌어도 저 포옹의 몸짓만은 하나의 원형처럼 대를 이어 나타나고 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안겨 있다. 세상의 모든 자연스러움과 평화로움이 아주 순간적이나마 저 포옹 안에 함께 머물고 있으리라. 아이의 저 시선이 머무는 곳 어딘가에 낯설고 괴이하고 위협적인 그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 한들 저 포옹의 단단함이 주는 안정감을 뒤흔들 수 있을까. 아이의 작은 손이 놓인 넓고 둥근 어깨. 아이의 다리께를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 힘센 팔. 엄마가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춘다. 아이의 부드럽고 통통한 볼은 엄마의 입맞춤으로 살짝 눌려, 사랑스런 팽창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 무엇이 이 친밀함을 대신할 수 있을까?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아마도 세상 사람 모두가 태어나 최초로 경험했을 포옹,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살의 냄새를 처음으로 전했을 엄마의 포옹, 엄마의 입맞춤. 메리 카사트의 그림에는 어린아이와 엄마 사이의 그 밀접한 관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그곳에서도 역시 모든 예술 활동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교육을 받을 기회도 재능을 펼칠 기회도 여성에게는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 외국인이자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극복하며 프랑스 미술계에서 활동을 펼쳤던 화가가 메리 카사트(1844~1926)이다. 메리 카사트는 미국 펜실베니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매우 운 좋은 여성이었다.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후 파리에 정착하여 활동하게 된 그녀는 1877년에 드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상파 전시에 함께 참여했고, 이후 인상파 그룹의 일원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이중의 굴레라 했던가. 메리 카사트는 매우 훌륭하게 그 굴레들을 긍정적인 힘으로 바꿔낸 화가이기도 하다. 프랑스에 사는 미국인으로서 그녀는 양국을 오가며 전시를 할 수 있었고, 미혼의 몸으로 자유롭게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예술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여성의 시선으로 포착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해내려 했다.


태초에 생명을 안았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세상에 내보내진 모습 그대로의 발가벗은 몸이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에 안겨, 그 귀에 들려왔던 것은 흥얼흥얼 읊조리는 자장가 가락이었던가, 그 살결에 와 닿았던 것은 푸근한 입맞춤이었던가. 누구든 잘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단지 그 작은 몸은 어떤 커다란 힘에 의해 두둥실 둥실 세상을 떠다니는 기분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 아가야”라고 말해줬던 사람, 한없이 누렸던 보호의 느낌, 평생의 삶을 버텨내게 하는 가장 따뜻한 일상의 힘은 그런 것일까. 메리 카사트의 그림에는 그런 따뜻한 힘이 녹아 있다.


Chapter2. 어둠의 세계, 비극의 입맞춤
배신과 불안, 고통의 몸짓들
불안과 두려움으로 엉키다 - <키스> : 에드바르트 뭉크

인간의 가장 밑바닥, 저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일상의 세세한 감정들과 군더더기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남겨지는 것.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거기에서 비롯되는 해결할 길 없는 불안과 공포일지 모른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작품들은 우리들 모두의 내면 가장 밑바닥 어딘가에 있을 그 숙명적인 불안과 공포를 건드린다. 모든 군더더기들을 생략하고 본질적인 내면의 뼈대만을 남겨, 우리도 사실을 모두 이렇게 불안한 존재들이지 않은가를 되묻는다. 인간 실존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의 시선. 뭉크의 그림에선 19세기 말 북구의 음습한 분위기와 더불어 자신의 개인적인 질병과 날카로운 감수성, 어린 시절부터 마주해야 했던 죽음의 공포와 내면적 갈등을 그림을 통해 집요하게 표현해낸 한 예술가의 집념이 보인다.


뭉크의 예술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의 그림들은 곧 나의 일기이다”라고 뭉크는 말했었다. 그만큼 뭉크의 그림은 그의 인생 향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의 자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죽음과 질병, 광기의 세계에 유난히 노출되어 있었던 어린 시절은 평생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웨이의 로텐에서 태어난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10년 뒤 누나도 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경험했다. 이상 성격을 가진 의사였던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의 성장기에 사망했으며, 누이동생은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뭉크 자신도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오래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뭉크는 늘 죽음과 질병 가까이에 있었고, 자연히 삶에 대한 불안과 질병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 문제들과 직접 대결하고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며 그렇게 그 공포와 상처를 통과해 나아갔던 것이다.


‘생의 프리즈’ 중에서 ‘사랑’ 연작으로 제작된 이 그림 <키스>에도 이와 같은 뭉크의 성장 배경과 예술적 특성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서로에게 녹아들어 하나의 덩어리로 일체화된 두 몸뚱이는 마치 하나의 짐승 같은 모습이다. 홀로 버티기 버거운 존재들이 서로의 경계를 강하게 침투해보지만 그 몸짓은 오히려 불안하고, 채워질 길 없는 사랑의 갈망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붉은색 계열의 색감으로 칠해진 얼굴의 느낌이 어두운 배경이나 푸른 색조와 대비되면서 남녀의 묘한 흥분감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어쩌면 강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녀는 서로에게서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이다. 상대방의 강한 침투가 나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두려움은 또 있다. 나 혹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두려움. 두 남녀가 속해 있는 어두운 실내는 창 밖의 강한 빛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성은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가져온다. 두터운 윤곽으로 처리된 벽에 의해 두 사람은 보호받고 있는 셈이나, 바깥 세계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이 언제 닥쳐올지 모를 파국을 이미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비극적 사랑, 죽음의 그림자
파손된 삶, 침묵 속으로 사라져간 예술가 - <샤쿤탈라> : 카미유 클로델

나무등걸에 걸터앉은 여자의 육체는 몹시 지쳐 보인다. 그 어깨 위에는 고단함이 내려앉아 있다. 마치 옷걸이에 헐겁게 걸린 옷가지들이 아주 미약한 자극으로도 스르르 흘러내리고 말듯이. 여자의 몸은 지금이라도 당장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다. 무게중심을 온전히 앞으로 향한 채, 그 몸은 또 다른 몸에 간신히 기대어 있다. 아니, 내맡기고 있다 하는 편이 나을까? 깊이 숙인 머리는 마주한 남자의 이마에 기대고, 모든 힘을 놓아버린 듯이 축 늘어진 왼쪽 팔은 남자의 어깨에 털썩 걸쳐져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아픈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지듯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감싼다. 가만히 감은 두 눈은 이제 잠시 찾아온 평화를 느끼는 듯하다. 한바탕의 폭풍우를 겪고 난 후일까? 그 어떤 정신적 고통이 휩쓸고 간 자리에 놓인 육체는, 무언가를 버텨낸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바람을 따라 푸른 숲과 초원을 누비며, 그 어떤 가르침 없이도 본능적으로 흙을 빚어내던 아이가 어린 시절의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이었다. 호주머니에 든 조그만 칼을 꺼내어 진흙을 잘게 부수고, 전설 속에나 나오는 괴물의 상을 맹렬히 빚어내곤 하던 아이, 호흡하듯이 자연스럽게 진흙을 만지며 스스로 흙을 가지고 조각하는 법을 터득해간 꼬마 클로델은, 그렇게 대담하고 강인하고 열정이 넘치는, 매우 명민한 아이였다고 한다. 클로델의 조각 세계에서 보이는 자연주의적 성향과 생명력, 그 안에 깃든 강렬한 내면적 힘과 같은 것들의 뿌리는 어쩌면 그녀의 이런 타고난 성품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예술적 삶의 종말은 이런 열정이나 생명력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처절한 침묵과 세상으로부터의 외면, 절대적 고독 속에서 맞이한 죽음이었다. 연인이었던 로댕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배신감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으로 인해 그녀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침묵 속으로 물러났고, 피해망상과 편집증의 증상을 보이는 그녀를 가족들은 30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가둬둔 채 방치했다. 병원에서 나가도 좋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 지옥에서 나오게 해달라는 클로델 자신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지녔던 한 인간은 그렇게 철저히 홀로 무기력하게, 감옥과도 같은 정신병원 안에서 끝내 세상의 빛을 못 본 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로댕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탓으로 돌리기에도, 여성이 예술가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보수적인 시대 탓만으로 몰아가기에도,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세상의 모든 단단하고 두터운 편견들 때문이라고만 주장하기에도 개운치 않을 만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그녀는 매우 불운한 삶을 살았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이름, 카미유 클로델은 그렇게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말 뻔한 예술가였다. 그녀가 죽은 지 8년 후에야 남동생 폴 클로델의 노력으로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0년대 이후에야 그녀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가 다시 이루어지며 그녀의 삶은 재발견되고 있다. 그녀의 삶의 흔적과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미처 세상에 발견되지 못한 채 낙담하고 절망하며 사라져간 예술가가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Chapter3. 황홀의 순간, 유혹과 관능의 입맞춤
부재에 대한 사랑, 불가능을 향한 욕망
사랑이라는 이름의 나르시시즘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 장 레옹 제롬

옛날 옛날 한 옛날,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섬 키프로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여성들을 혐오하며 멀리했고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오직 조각에만 열중하던 피그말리온은 어느 날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을 그만 사랑하게 되고 만다. 핏기도 온기도 웃음도 없는 그 조각상의 이름은 갈라테이아. 그 조각상을 가꾸고 어루만지며 애틋하게 말을 건네던 피그말리온은 이제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저 상아 조각과 같은 아내를 얻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 어느 날, 피그말리온이 여느 때처럼 갈라테이아의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자 놀랍게도 갈라테이아는 사람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하고,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대로 현실 속의 여성이 된 갈라테이아와 피그말리온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 간절한 사랑의 염원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여러 예술 작품에서 즐겨 다뤄진 테마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이고 고전적인 그림들 중 하나이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그림을 가르쳤던 전통주의자 제롬은 아카데미즘의 신봉자로서, 당시의 전위적인 예술운동으로 등장했던 인상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물과도 같은 사실적인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아카데믹한 예술을 옹호했던 제롬이, 너무도 정확하고 완벽해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한 조각상을 만들어 내고 바로 그 자신이 만든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버린 조각가 피그말리온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어쩐지 매우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이 그림은 바로 피그말리온의 키스를 받은 갈라테이아가 생명을 얻게 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의 입맞춤으로 피가 돌고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한 갈라테이아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듯, 상체를 구부린다. 유연하게 옆으로 휘어진 그녀의 상체는 온전히 인간의 활력을 얻었음을 드러내며, 마치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한 피그말리온에게 반가운 첫인사를 건네듯 다정히 그를 안는다. 하지만 그녀가 누리게 된 사람의 온기는, 혹은 사랑의 축복은 발끝까지는 미처 전해지지 못했다. 단단한 받침돌에 고정된 채 상앗빛 조각상의 기운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발과 종아리 부분으로부터 위로 갈수록 점점 따뜻한 인간의 피부색을 띠어가는 이 미묘한 색채 변화는, 피그말리온 이야기에 담겨 있는 시간의 경과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흔적인 동시에 기적의 순간에 관한 가장 극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발꿈치를 든 채 그녀의 허리께에 손을 두르고 있는 피그말리온의 모습에서는 마치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사람처럼 활기찬 운동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오른쪽 상단 배경에는 사랑의 신 큐피트가 활을 쏘고 있는 모습을 그려, 두 사람의 결합의 느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이나 욕망도 이렇게 기적처럼 이루어질 수 있음에 초점을 둔 제롬의 이 그림은 피그말리온 신화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능과 도취 그리고 에로티시즘
지상에 진정한 낙원은 있는가 - <키스> :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키스>는 황홀하고도 화려하다. 키스에 몰두한 연인들의 모습이 그러하고, 그들을 둘러싼 배경이 그러하다. 열중한 남자는 여자의 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고, 눈을 감은 여자의 표정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지금 이 순간의 황홀함에만 도취된 듯하다. 두 사람의 몸은 황금빛 의복으로 연결되어 무한히 서로에게 녹아들 것만 같고, 이제 당장이라도 한 몸이 되어버릴 듯한 두 연인을 축복이라도 하듯 화려한 황금색 기류가 후광처럼 그들을 감싸 하나로 묶어준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인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한, 그리하여 모든 사회적 문화적 맥락으로부터도 단절된 듯한, 아득한,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답고도 불안하기도 한 그 어딘가. 배경은 마치 황금빛 별들이 총총히 떠 있는 심원한 우주의 모습 같다. 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땅에는 꽃들이 만발하지만 그 꽃밭 아래는 바로 낭떠러지. 절벽의 한 모퉁이에 간신히 몸을 걸친 채 그들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여자의 발꿈치는 이미 아득한 심연을 향해 돌출되어 있건만, 천진난만한 연인들은 외부의 위험을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은 듯 마냥 평화롭기만 하여 그 모습이 묘하게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어쩌면 꽃무늬 양탄자의 끝자락에 걸쳐 타고, 끝을 가늠할 길 없는 무한대의 공간 속에서 두둥실 표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림트의 <키스>는 황홀한 사랑에 대한 낙관적 기대일까, 혹은 그런 사랑은 현실에 없다는 비관적 진단일까? 이상적인 사랑의 묘사일까, 혹은 그 이상적 사랑조차 벼랑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음을 보여준 염세주의적 절망일까?


클림트는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는 여러 모델들과 방탕한 성생활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와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에른스트의 아내의 여동생인 에밀리 플뢰게였다. 에밀리는 작품 <키스>의 모델로도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여성이며, 클림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불러달라고 했을 만큼 가장 친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열정적인 연인 관계였다기보다는 친구 같기도 하고 친척 같기도 하고 동료 같기도 한, 혹은 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년 이후의 부부 같기도 한 관계였다고 한다.


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어느 한 사람에게 깊이 빠져들어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 클림트는, 연인에 대해서든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든,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성향이 있었던 듯하다. 그가 어떤 글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의 작품이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는 것도, 때로 그 아름다운 작품들 속에서 풍겨나는 그 도저한 염세주의도 어쩌면 그가 자기 자신과 세상과 사랑 자체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그 거리감을 통해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