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바이올린

   
진창현(역자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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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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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3��



■ 책 소개
인간애를 연주하는,『천상의 바이올린』.일본 도쿄에는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고 불리는 바이올린 장인이 있다. 그가 바로 세계에 다섯 명뿐인 "무감사 마스터메이커 제작자"라는 최고의명예를 얻은 일흔 여덟 살의 재일 한국인 "진창현"으로, 이 책의 저자다. 이 책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푹 빠진 저자의 삶과 꿈, 그리고집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만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 중의 바이올린이다.하지만 그것을 만든 "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의 기술을 아들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스트라디바리"가 죽자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제작 과정은20세기의 과학으로도 알아내기 불가능한 신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 고생 끝에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꿈을 접어야 한 저자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신비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는데……. 


이 책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바이올린 기술을 배울 수는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혼자바이올린 제작에 매달려 결국 1976년에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공인받은 저자의 아름답도록 거친 삶을 따라간다. 그리고 저자의 삶에깃든, 상처로 가득한 우리 역사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시대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저자 진창현
1929년, 경상북도 김천시 이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면서 메이지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독학으로 바이올린제작에 매달려 기술을 익혔다.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부문 중 바이올린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 부문, 비올라 음향 부문, 첼로 세공 부문, 첼로 은향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계에 다섯 명뿐인 "무감사마스터메이커 제작자" 중 하나로,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제작하는 바이올린의 장인이다.


 역자 이정환
경기도 청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경영학과와 인터컬트 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 역학 칼럼니스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대체의학으로 모든 병을고친다』『얼굴 보고 사람을 아는 법』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간경영』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세계 지도로 역사를읽는다』『스푸트니크의 연인』『준비된 행운』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제1현 
내 고향, 이천, 아버지 진재기와 어머니천대선 
여행 
바이올린과의 만남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생이별 
구라마 덴구의 나라 
특공대 전투기와 바이올린
안녕, 미스터 달러 
북에서 찾아온 아들 
인민재판 


제2현 
바이올린을 만드는 농부 
애벌레와반딧불이 
위험천만한 노동 
여동생의 편지 
지상의 낙원 
로망스 


제3현 
바이올린 장수 
집에 부착한 약음기
영원한 수수께끼 
결혼이라는 감옥 


제4현 
염력 아줌마 
바이올린을 먹는 남자
어머니와의 재회 
잃어버린 세계 
하늘을 나는 바이올린 
무지개 하늘을 향해 


에필로그 




천상의 바이올린


제1현
내 고향, 이천, 아버지 진재기와 어머니 천대선

나는 1929년,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군 이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는 첫 아이다. 이천은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마을이다. 커다란 강 주위로 논이 끝없이 펼쳐진, 아시아 특유의 산촌 풍경이다. 농약이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 마을에는 잠자리나 메뚜기 같은 곤충과 개구리나 뱀 등의 작은 동물들이 풍부하게 서식했기 때문에 곤충을 잡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놀이가 되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손만 뻗어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고추잠자리들이 하늘 가득 수를 놓았다.


가뭄이 들면 사정이 완전히 바뀌어 강물은 하얀 모래바닥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모래바닥을 조금만 파보면 신기하게도 물이 솟아오른다. 마을사람들은 그 물을 논밭으로 끌어대어 농사에 이용했다. 강 한가운데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아이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그곳에서 헤엄치는 은어 떼를 쫓는다. 하지만 나는 몸이 약해서 활발하게 뛰어 놀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을의 노인이 가르쳐준 다른 방법으로 은어를 잡았다. 다른 아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여울로 가서 적당한 막대기를 하나 주워들고 있는 힘을 다해 수면을 두드리는 것이다. 몇 번 두드리면 그 충격이 물속으로 전해져 정신을 잃은 은어가 물 위로 떠오른다. 이 은어를 주워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매일 은어잡이를 나갔다. 아버지는 그 은어로 회를 떠서 술안주로 삼았다. 내가 잡아온 은어를 보고 좋아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나 역시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 복잡한 생각도 들었다. 그 은어들도 나처럼 몸이 약한 녀석들이 아닌가 하는 동정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은어에게 자신의 모습을 겹쳐 생각하면 그 은어들이 불쌍했다.


마을 변두리에는 강물을 따라 포플러나무 숲이 있었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 내게는 이 숲이 놀이터였고 공작에 사용할 재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창고였다. 또, 창조의 꿈을 배양하는 요람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들려 한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둥근 나뭇조각을 못처럼 사용해서 나무상자를 만들어 자동차를 완성하거나 목재를 조합하여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요즘의 장난감 같은 것은 없었다. 또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줄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주변에 그런 장난감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나무를 이용하여 직접 장난감을 만들었다. 장난감을 직접 만드는 아이들은 나말고도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물건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특공대 전투기와 바이올린
당시, 이치카와(市川)시 고노다이(國府台)에 일본 육군이 사용하던 막사가 남아 있었다. 문부성에서는 이 막사 중의 하나를 기거할 곳이 없는 도쿄 주변의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에게 공짜로 개방하고 집세를 받지 않았다. 국철(國鐵) 이치카와 역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지만 그 대신 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오차노미즈까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 막사에는 나 같은 가난한 학생이 30명 정도 기거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자네는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학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땄다고 해도 채용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자격은 쓸모가 없는 거야. 단순한 액세서리일 뿐이지.”


교사자격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휴짓조각과 다름없다는 말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까지 남은 기간은 1년. 그 말을 듣기 전까지도 일본에서 선생이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닐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어t지만 그런 한편으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아무런 보람이 없다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직장을 구하더라도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것이 뻔하다. 졸업해서 조국으로 돌아가면 대학 졸업 자격을 이용하여 모교의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온 이후, 가족에 관한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내가 편지를 보내도 그대로 돌아와 버린다. 지금쯤 조국의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국제전화는 물론이고 시내 전화조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연락을 취하고 싶어도 취할 방법이 없다.


나는 중고품상점 한 군데에서 추억의 바이올린을 보았다. 당시에는 기타나 바이올린이 상점의 윈도우를 장식하고 있었다. 메이지대학 바로 앞에 그런 상점이 세 개나 있었기 때문에 나도 지나다닐 때마다 쇼윈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스즈랑 거리에는 큰길과 뒷길이 있는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구입한 곳은 뒷길의 대학서점가 근처에 있는 중고품상점이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스즈키바이올린 4호로, 가격도 비교적 싼 편이었다. 싸구려이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입한 바이올린이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약장수의 바이올린도, 아이카와 선생님의 바이올린도 나의 바이올린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내 이제, 그렇게 동경하던 나의 바이올린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즉시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이올린을 배운 것은 어린 시절의 일이고 아이카와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에는 바이올린을 만져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저는 이미 스무 살입니다. 지금이라도 배우면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까요?”
“그야 당연히 할 수 있죠.”


강사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강사의 말과 달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한 길은 험난했다. 그 이후 나는 최선을 다해 바이올린 연습에 매달렸다. 숙소에서 연주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기 때문에 옛날에 아이카와 선생님에게 배운 소리를 없애는 방법(그래 보아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주하는 것뿐이지만)을 이용해서 한밤중에 연습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소리가 새어 나가기 때문에 옆 방 학생이 벽을 두드려 어쩔 수 없이 밭 한가운데까지 걸어나가 연습한 적도 있다.


“또 음정이 틀리잖아요! 여기에서는 이런 음이죠!”


강사는 짜증을 내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아, 조금 낮았군요.”


그래서 다시 높게 잡으면 이번에는 너무 높아진다. 매번 이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역시 스무 살이 넘어서 시작하려니까 절대음감을 갖추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바이올린을 이용해서 먹고살 생각은 없었다. 단지 취미로서 바이올린이 마음의 외로움을 해소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배운 것이다.
 
이토카와 교수의 강연에 감명을 받은 나는, 그날 당장 처음 독일제 바이올린을 구입한 메이지대학 앞의 시모쿠라(下倉)악기점의 낯익은 바이올린 담당자를 찾아가 상담해 보았다.


“저는 내년에 졸업합니다. 바이올린을 조금 연주할 줄 알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바이올린 학원 선생님이 되기도 힘들고 또 어려운 곡은 도저히 연주할 수 없습니다. 취미로 연주하는 정도죠. 그런데 오늘, 이토카와 교수의 바이올린 제작에 관한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이올린 제작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바이올린 기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이올린은 제작도 힘든 일입니다. 일본에도 바이올린 제작자는 많이 있지만 모두 외국제품에 밀려 판매가 되지 않아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요.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해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도저도 안 된다면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넣고 싶습니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보고 싶다는 겁니다. 선생님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아, 이 사람이 괜찮을 겁니다. 이 사람은 이타바시(板橋)의 오야마(大山)에 살고 있는데 나이가 이미 85세이고 제자도 없으니까 어쩌면 당신을 제자로 받아줄지도 모르겠군요.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의 첫 스승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제자로 들어가 고생을 하기 이전에 진짜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2현
바이올린을 만드는 농부

오야마의 노인에게 거절당한 이후에도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모쿠라악기점을 드나들며 도쿄에 있는 몇 명의 기술자를 소개받아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손이 남아돈다거나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의욕도 점차 잃어 갔다. 나는 학교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1년 정도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신문기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아사히신문의 3면에 실린 기사였다. 기사에 의하면, 신슈(信州), 나가노(長野)현 나카노(中野) 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농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내용이었다. 그 사람은 징병되어 만주의 하얼빈으로 갔다. 어느 날 저녁, 당번병사로서 시내를 걷고 있으려니 아름다운 음색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소총을 들러 멘 채 소리가 나는 집을 방문하자 유대계 러시아인 가족이 사는 가정으로, 남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남편은 소총을 멘 병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떨면서 말했다.


“저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병사는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문제로 찾아온 게 아닙니다. 당신의 바이올린 음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소리에 이끌려 잠깐 들른 것입니다. 나는 바이올린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습니다. 사실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지요. 음색이 너무 좋아서 어떤 바이올린인지 구경 좀 하려고 들렀습니다.”


유대계 러시아인은 병사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듯 혹시라도 체포당하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소중한 악기를 빼앗아가려는 것은 아닌지 몹시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서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병사는 숨을 삼켰다. 세계적인 명기로 알려져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 병사는 비번일 때면 어김없이 그 집을 방문하여 바이올린에 종이를 대고 그 형태를 신중하게 복사했다. 그리고 그 종이를 기름종이로 싸서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중국 전 지역을 전전했다. 이윽고 전쟁이 끝나자 그 종이를 일본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이 사람이라면 바이올린 제작 방법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고, 내 마음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 결심을 하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인 나는,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행 열차에 올라타 나카노로 향했다. 지방에는 아직 바이올린 공장도 있고 이름 없는 바이올린 제작자도 있었다.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대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서 기초만 배우고 나머지는 노력하면 된다는 기대를 안고 있었다.


신문사에 문의하지 않고 갑자기 현지를 찾아가더라도 신문을 보여주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 사람의 집 주위에는 민가는 거의 없고 사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바이올린을 만들만한 공방 같은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곳에서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을까?”

“물론 나는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네. 하지만 본업은 사과 농사야. 여름과 가을에는 소독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한가하게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을 여유가 없어. 그래서 전혀 손대지 않고 있지.”
“그럼 언제 만드십니까?”
“글쎄…. 눈이 내려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나 손대고 있어. 그때 찾아온다면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네.”


고철장수를 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나는 집세를 지불하고 방을 얻어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이 찾아와 눈이 60센티미터 정도 쌓인 어느 날, 나는 다시 그 사과 과수원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자 그 기술자는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었다.


“자네, 지금까지 뭘 하면서 지냈나?”
“네. 시내에서 고철장수를 했습니다. 겨울이 되어야 바이올린을 만든다고 말씀하셔서요."


농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놀랍군. 이런 곳에서 버텨내다니…. 자네, 바이올린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아.”


“사실, 바이올린 제작기술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게 아냐. 전에, 나중에 다시 찾아오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한 건 그렇게 말하면 자네가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 같군.”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가르쳐줄 수도 없어. 안됐지만 가르쳐줄 수 없네. 돌아가게.”


그 말을 듣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술자 세계에서는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젊은 나이였던 나는 당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하물며 싸움을 할 수도 없다. 단, 알겠다고 순순히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그…,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 설계도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제3현
영원한 수수께끼

바이올린 제작은 미지의 영역을 더듬는 것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진행된다. 이것은 스트라디바리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제목의 이토카와 교수의 강연이 있었을 때와 상황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스트라디바리로 대표되는 과거의 바이올린 거장들은 자기가 터득한 바이올린 제작 비결을 친자식에게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세상을 떴다. 그 때문에 바이올린 제작 방법에 관한 지식이 서적 등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남을 수 없었다.


바이올린의 재료는 당연히 나무다. 하지만 같은 나무라도 각각의 목재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A라는 나무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경우에는 그 판에 적합한 두께가 있고, 또 다른 나무에는 그 나무에 맞는 두께가 있다. 그 비율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또, 판을 깎을 때에도 그 소재에 적합하게 깎아내지 않으면 이 또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그리고 바이올린 전체로 말한다면 이런 모든 부품의 조합에 의해 소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조합 중에서 최고의 음질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 때문에 그 소재의 성질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방법으로 제작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음향이 울려퍼지는 바이올린은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이토카와 교수가 최첨단 과학의 성과를 이용한다고 해도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의 신비를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이유다.


“역시 바이올린 제작은 어려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이렇게 한숨을 내쉬면서, 오리지널 수제 바이올린 제작을 포기하고 수리 같은 일을 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집념이 있는 사람은 실험을 계속한 끝에 나름대로의 보편성과 법칙을 발견해 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운이 좋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설사 운이 좋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노력, 집념, 호기심, 시행착오가 거듭 쌓여 토대를 이루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결과이며 거기에 선천적인 감성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까지 첨가되어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결코 운만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는 아니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내가 제작한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는 점차 올라갔다. 시노자키 선생님의 지원 덕분에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만드는 한편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고 있던 성인용 바이올린을 몇 군데의 악기점에 진열할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 세계는 매우 좁아서 무슨 일이 있으면 곧 소문이 난다. 소문 중에서도 특히 내가 제작한 3,000엔짜리 바이올린을 이용해서 도쿄예술대학에 합격한 청년의 이야기가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좁은 세계에 일종의 전설처럼 퍼졌다. ‘진창현’이라는 특이한 바이올린 제작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시노자키 선생님을 찾아온 사람을 선생님이 내게 소개해 준 적도 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나의 바이올린은 다른 바이올린과는 다른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네의 바이올린은 일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 나도 그런 평가를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자네가 제작인 바이올린은 최근 들어 정말 멋진 소리를 내.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작하는 것인가?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야.”


사람에게는 꿈이 있다. 사람도 역시 꿈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그러나 나의 꿈인 바이올린의 비결은 지금도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상태다. 스트라디바리가 제자에게도, 친자식에게도 전하지 않은 명기의 비결.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을까. 이것은 일찍이 ‘황금이 나라’나 ‘엘도라도’를 꿈꾼 사람들, 동쪽 나라에 크리스트의 사도 요한이 이끄는 나라가 있다는 성 요한 전설을 믿은 사람들과 같은 우행(愚行)일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프로이드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싶어진다. 바로 거기에 로망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바이올린 제작도 물리법칙처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성립될 수 있다고, 나는 지금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법칙과 공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더욱 노력을 쌓는 것, 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제4현
바이올린을 먹는 남자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의 길을 걸어온 내게 있어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은 명기를 직접 보고 만진 경험과 내 주변에 있는 자연, 그리고 이후에 전세계를 돌아다녔을 때에 접한 자연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둠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가난한 생활 속에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일본을 방문하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명기를 구경했다.


나는 명기를 몇 번이나 직접 보고 만져보는 동안에 소리, 조형, 색깔의 조화, 니스의 소재 등 많은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론 수억 엔의 가격으로 거래되는 명기를 직접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명한 연주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분장실로 찾아가 부탁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반강제로 그들이 연주하는 명기를 구경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예전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에릭 프리드먼의 일본 방문이었다.


프리드먼 씨를 비롯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연주를 들으러 갔다. 내가 구입할 수 있는 것은 가장 가격이 싼 좌석의 티켓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테이지에서 멀리 떨어진 그 자리에서 앞쪽을 둘러보고 빈자리가 있는 경우에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연주되기 전에 그곳으로 이동해서 소리의 특성 등을 확인한 뒤에 다시 뒤쪽의 자리로 돌아와 가장 약한 소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하는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거대한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경우, 평범한 악기는 가장 약한 부분에서 소리가 희미해져서 맨 뒷열까지는 도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의 명기인 경우에는 1층은 물론이고 2층 맨 뒷열에 앉아 있어도 소리가 전혀 약해지지 않고 또렷하게 들린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내가 대학시절에 일본을 방문한 예후디 메뉴인과의 만남이다. 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첫 일본 방문이었기 때문에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했다. 나는 요코하마에서 린타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마련한 돈으로 비싼 티켓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연주장인 히비야 공회당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핸섬한 모습의 그가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은 남자인 내가 보아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바이올린 음색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메뉴인 씨의 두 번째 연주는 쇼와(?和)여자대학의 기념 강당에서였다. 연주가 끝나 분장실로 가자 나보다 먼저 면회를 신청한 사람들이 매스컴 관계자를 포함하여 열 명 정도 줄을 서 있었다. 매니저가 면회자들의 용건을 듣고 그에게 통역을 한다.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날 것인지 망설이던 메뉴인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바이올린 메이커, 플리스.”


나를 지목한 것이다.


메뉴인,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헨릭 쉐링(Henryk Szeryng)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능수능란하고 샤프한 연주로 잘 알려진, 현대를 대표하는 솔로연주자다. 기교가 풍부한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하면 지금은 기돈 크레머(Gidon Kremer)가 유명하지만 쉐링 씨는 크레머에 가까운, 샤프한 소리를 연주하는 솔로연주자였다.


1976년, 도쿄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리사이틀은 테크닉이 완벽해서 소문과 다르지 않은 멋진 연주였다.


“미스터 쉐링. 오늘 저녁 연주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쉐링 교수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즉시 ‘쉐링 교수’라고 호칭을 바꾸었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악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사용하는 악기는 1745년에 구아르네리 델 제수가 제작한 에쿠스 레듀크였다. 이것은 현존하는 델 제수의 마지막 작품으로 델 제수가 사망하기 전해에 제작된 것이다. 황금색 같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한 두꺼운 니스가 일품으로 델 제수다운 화려한 매력을 가진 바이올린이다. 대체 어떤 재료를 사용하면 이 니스 같은 색깔을 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한 나는 여느 때처럼 혀를 대어 감촉을 확인했다. 그러자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쉐링 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내 바이올린을 먹어치울 생각입니까?”
“아니,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어서 키스 좀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내 여자인데 키스는 안 됩니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