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윤석달
1948년 충남 당진 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지은책으로는 『한국현대가족사소설 연구』『대중문학의 이해』『국어의 발견』『금강기행문선』등이 있다. 현재 한국항공대학교 국어과 교수로 재직하고있다.
■ 차례
머리말
1. 전설의 시대
1. 명창의 역사 |2. 전설의 명창시대 | 3. 가곡창의 가객
2. 전기 8명창시대
1. 비가비 명창,권삼득 | 2. 기왕, 송흥록 | 3. 호령성의 명창. 모흥갑 | 4. 아귀상성의 명창, 방만춘 | 5. 석화제의 명창, 신만엽 | 6.자웅성의 명창, 황해청 | 7. 추천목의 명창, 염계달 | 8. "사랑가" 더늠을 만든 명창, 고수관 | 9. 고수 명창, 송광록 | 10.고수 출신의 명창, 주덕기 | 11. 석화제 명창, 김계철
3. 동리 신재효와 석파 대원군
1. 동리신재효 | 2. 석파 대원군
4. 후기 8명창시대
1. 대원군의 총애를받은 박만순 | 2. 많은 명창 제자 길러낸 이닐치 | 3. 동편제의 명맥을 이어간 송우룡 | 4. 판소리 이론에도 해박했던 김세종 | 5.양반가 출신의 유랑가객 정춘풍 | 6. 동편제의 본령을 계승했던 장자백 | 7. 시김새를 잘 구사했던 정창업 | 8. 이면을 잘 그렸던 김찬업
5. 근대 5명창시대
1. 협률사 창극을처음으로 만든 김창환 | 2. 소리로 통정대부 벼슬 받은 이동백 | 3. 협률사를 이끌고, 숱한 제자를 길러냈던 송만갑 | 4. 중고제 소리가문의 법통을 이은 김창룡 | 5. 이론과 비평에 밝았던 유성준과 전도성 | 6. 창극좌를 조직, 인재양성을 도모했던 정정렬 | 7. 대기만성의명창 김채만 | 8. 당대의 "알아주는" 명창들 | 9. 축음기와 SP시대의 명창들 | 10. "5명창시대" 이후의 국민명창, 임방울
6. 근대 여류명창의 시대
1. 여류명창의세계 | 2. 최초의 여류명찬, 진채선 | 3. 창극의 여주인공 명창, 허금파 | 4. 원각사의 명창, 강소춘 | 5. 요절한 천재 명창,김록주 | 6. 협률사에서 이름 날린 명창, 배설향 | 7. 창극무대의 주역 명창, 김초향 | 8. SP시대 인기 명창들,신금홍.권금주.신숙.조농옥 | 9. 스승의 바디를 제자에게 충실하게 전한 김여란 | 10. 현대 판소리를 이끌어온 여류명창, 박록주 | 11.국악계의 사표가 된 여류명창, 김소희 | 12. 에필로그
용어풀이
미주
색인
참고문헌
명창들의 시대
1. 전설의 시대
명창의 역사
‘판소리’는 문학이면서 음악이며 동시에 연극이다. 사설과 음률과 너름새(소리하는 사람이 소리의 가락이나 사설의 극적 내용에 따라 몸짓으로 하는 동작)의 통합으로 또 하나의 색다른 장르를 탄생시켰던 것이므로, 연구자마다 그 기원을 다르게 보기도 하고, 전개 과정에 대한 탐색도 구구각색이다. 그러나 판소리가 처음 형성된 시기는 17세기 말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7세기에 이미 창우로 활약했던 박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과 『조선창극사』에서 이 무렵 판소리 광대로 하은담(‘하한담’이라고도 하는데,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과 최선달이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판소리는 더욱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 무렵 열두 마당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이미 명창들도 등장하고, 이들 명창들은 나름대로 더늠(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을 만들어내고, 음악적 세련미를 더해서 유파를 형성해나간다. 이 시기에는 하은담과 최선달도 활동하였고 여기에 우춘대라는 인물이 또 다른 명창으로 등장한다. 18세기 말, 이른바 전기 8명창에 드는 명창들 가운데 특히 권삼득, 모흥갑, 황해천 등 몇몇 사람들이 이 시기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판소리는 드디어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판소리의 음악성이 완성된 시기였고, 동편제와 서편제 등의 유파도 이 무렵 완숙되었으며, 판소리를 애호하는 권력자들도 생겨나서 명창들의 생계에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활동했던 명창들로서는 박유전, 신만엽, 고수관, 염계달, 송광록, 김계철 등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정춘풍, 송우룡, 장자백 등 빼어난 명창들이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20세기는 판소리 역사에서도 격변기였다. 이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위축되고, 판소리 역시 순조로운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개화기 이후부터 밀어닥친 서양음악과 서양연극이 우리의 전래 예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특히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이 우리의 전통 예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탄압을 계속하였으며, 이에 견디지 못한 판소리도 굴절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유성기가 보급되고 SP판에 담긴 명창들의 토막소리(온 바탕이 못 되는 판소리 중의 한 대목)나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1인창의 소리판으로 중심을 이루던 판소리가 배역을 나누어 연극으로 소리하게 되는 창극으로 변모하였다. 이런 연극창을 하는 데는 협률사(協律社)와 원각사(圓覺社)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판소리를 살려야 한다는 열망과 의지로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교육과 보급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위축되기는 했지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고, 판소리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다. 전통 판소리를 보존하면서 널리 보급하자는 운동과 정책으로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판소리 창자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국악과가 설치되고, 국악예술학교도 개교하였으며, 각 국악 단체에서는 판소리 강습도 하였다. 이 무렵 특히 명창 박동진의 활동을 비롯해서 뿌리깊은나무사의 후원으로 판소리 완창 발표회가 꾸준히 열려 판소리의 대중 보급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 전기 8명창시대
판소리 3백 년 역사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은 무수히 많아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다. 소리광대 말고도 고수로서 일세를 풍미했던 광대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숱한 이들 가운데 당대마다 8명창이니, 5명창 혹은 7명창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8명창은 전기 8명창과 후기 8명창으로 나눈다. 전기 8명창 시대는 영조, 정조, 순조 무렵으로 판소리가 정착된 시기다. 신재효의 ‘광대가’라는 노래에는 당대 이름난 소리꾼 아홉 명이 기재되어 있다. 송흥록, 모흥갑, 권삼득, 신만엽, 황해청, 고수관, 김계철, 주덕기, 송광록이 그들이다. 신재효는 이들 모두 명성이 자자하고 사람마다 칭찬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중국 역대의 이름난 문장가들에 비유하고 있다. “송선달 흥록이는 이태백, 모동지 흥갑이는 두자미, 권생원 사인씨는 한퇴지, 신선달 만엽이는 두복지, 황동지 해청이는 맹동야, 고동지 수관이는 백낙천, 김선달 제철이는 구양수, 송낭청 광록이는 왕마힐, 주낭청 덕기는 소동파”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신재효가 파악한 이들의 소리가 위에 들고있는 중국 시인들의 시풍이나 품격에 얼마나 근사한지는 알 길이 없다. 신재효가 한시에 얼마나 해박했는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신재효가 당대의 명창으로 들고 있는 이름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이름 앞에 각각의 별호를 갖다 붙인 것이다. 선달, 동지, 생원, 낭청 등은 이들이 실제로 따낸 것이 아니라, 편의상 붙인 별호다. 그들이 과거시험을 보았을 리 없고, 무과시험에 들만큼 그 방면의 특장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박유전이나 박만순 같은 이는 대원군으로부터 선달이라는 별호를 받을 만큼 무과급제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명창 외에 우춘대, 하은담, 박유전, 방만춘 등이 또한 이름난 소리광대였다. 그래서 이 시대 8명창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달리 말하게 된다. 위에 든 이름 중에 아무나 골라 여덟을 대면 그들이 곧 8명창이 되는 것이다. 다만 우춘대나 하은담에 대해서는 이들이 구전으로만 남아 있는 인물이라서 별반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심지어 이들의 생몰연대마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소리꾼들은 이들을 판소리의 제1세대로 드는 데,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비가비 명창, 권삼득
후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남기고 있는 몇 안 되는 광대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양반 광대이기 때문이다. 양반 출신의 광대 혹은 한량으로 가극에 능하여 광대로 행세하는 사람을 ‘비가비(비갑)’라고 한다. 이는 재인 계급의 광대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족보에 의하면 본명이 ‘사인’으로 알려진 그는 영조 47년인 1771년에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곳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학동들과는 달리 공부에는 뜻이 없었던 모양으로 남원으로 장가를 간 뒤에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양반 자제가 하지 않는 소리공부에 열을 올렸다. 남원의 구룡폭포 밑에서 수년간 수련을 쌓아 마침내 득음을 하였으며,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3. 동리 신재효와 석파 대원군
동리 신재효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판소리사에서 우리의 소리가 예술적 완숙기에 접어들던 때였다. 어떤 예술장르든지 완숙기에 접어들면 이론적 점검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전과 중흥의 전망을 발견해 나가기 위하여 수준 높은 감식안과 비평 담론을 형성한다. 신재효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나온 인물이다. 그는 순조 12년(1812년)에 태어났다. 신재효 가계는 부친 대에 고창으로 이주하였고, 이 지방에 터를 잡았다. 신재효의 부친은 철종 때 고창 현감이었던 이익상 밑에서 이방으로 일하다가 호장에 올랐으며, 그가 이방으로 활동하던 40세 전후에 이미 곡식 1천 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았던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 판소리는 그 생동하는 문화적 힘이 기층에서 상층으로 올라 마침내 어전에서까지 펼쳐졌던 놀이 예술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신재효와 같은 후원자이자 이론으로 무장한 논평가들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방의 부유한 토호들과 양반들이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일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음악, 미술계에 더욱 확산되었는데, 이에 힘입어 중인 출신의 예술가들이 그들의 능력을 키웠으며, 큰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자신의 재산을 광대를 기르고 후원하는 데 쓰고, 원근의 광대들을 불러모아 정확한 음을 가르치고, 또 그 사설의 바른 뜻도 익히게 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소리꾼들을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이런 일이 소문이 나서 암행감사로부터 사찰을 받기도 했다.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 나간 명창들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그 지침과 척도를 경하지 아니고는 도저히 명창의 반열에 허참을 부득하였으니 저국창으로 명을 일세에 굉박(轟博)한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여류극창가의 진채선, 허금파 등이다. 그 문단에 열하여 친자(親炙)한 자라, 이조고종년 간 대원군 집정 시에 그 성명이 입문되매, 특히 오위장의 직계를 수하니 그 예술문화에 공헌을 포상하기 위함이리라. 그리하여 사계에 재하여 고창신오위장이라면 항아가동(港兒街童)이라도 모르는 자 없기” 이른다고 했다.
신재효가 이룩한 일 가운데 또 하나의 업적은 판소리 사설을 고치고 가다듬어서 정착시킨 일이다. 물론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고, 그의 개작이 오히려 판소리를 망친 작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충분히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판소리 사설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는 판소리 사설 가운데 사설의 정착과 개작 과정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판소리 여섯 마당을 개작하였다. 작업은 40세(1852년) 전후 1864년경 <토별가>를 정리한 것을 시작으로 1884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했다. 그는 죽기 전에 판소리 여섯 마당의 정리 작업을 마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가객들에 의해 구비전승되는 판소리를 기록하고 서로 대조하여 다시 개작하고 정착시키는 작업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고 그만큼 후대를 위해 가치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석파 대원군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는 집권하기 전 세도정치의 박해를 받으며 불우하게 보낸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그는 시정잡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가객, 광대들의 무리와도 퍽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객이었던 안민영이라든지 당시 판소리 애호가이면서 광대 후원자였던 신재효 등과도 어울렸는데 이런 일이 그의 집권 후 하층 예술이 크게 진작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대원군의 민속예술 애호가 광대들의 지위 격상을 가져오는 데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판소리 광대가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고 그 소리 하나로 관직의 칭호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특히 1864년 대원군이 전주 단오절에 전주감영에서 판소리대회를 주최하게 하여 이때 장원한 명창을 상경케 하고, 이를 ‘전주통인청대사습’으로 승격시켰던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판소리 가객들에게 경제적 풍요와 함께 신분 상승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는 집권자의 개인적 기호를 넘어 판소리가 음악적 세련성이나 문학적 수식에 있어 다른 민중예술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상층부의 애호까지 받으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누구보다도 판소리를 즐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판소리 광대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대원군의 판소리 애호로 인해 박유전, 박만순 말고도 양반 출신의 사람까지도 스스로 소리를 익혀 광대로 나서고, 소리를 즐기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양반 출신의 광대를 비가비라고 불렀는데 정춘풍이란 인물은 본시 진사급제를 한 양반인데도 독학으로 판소리를 익혀 스스로 이름을 ‘춘풍’이라 고치고 광대로 나섰으며 명창으로 알려진 서성관(徐成寬) 또한 비가비 출신이었다. 양반 출신까지 광대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대원군시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물론 개인의 품성과도 직결되는 것이지만, 조선 후기 소리광대의 신분 상승도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4. 후기 8명창시대
후기 8명창시대는 철종 연간에서부터 고종 초기까지를 말한다. 이렇게 시기를 구분 짓는 데에 어떤 명확한 근거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 명창들의 활약상을 볼 때 대체로 위와 같이 나누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전기 8명창시대는 판소리가 정착되어 비로소 전문 소리꾼들이 자신의 자질과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후기 8명창시대에 오면 앞 시대 전문 가객들을 스승으로 혹은 전법으로 삼은 소리꾼들이 더욱 소리의 예술성을 심화시키고 자신의 미적 감각을 드높였다. 이 시기의 명창들로 박남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을 든다.
판소리는 다른 민속예술과 달리 음악적 세련성과 문학적 수식을 고루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민중예술로서 하층민의 사랑을 받았던 동시에 상층의 애호도 받을 수 있었다. 판소리 광대가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고, 그 일로 관직의 칭호를 받는 일이 있게 되고, 광대 후원자가 등장하여 그야말로 판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광대들이 이전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일반의 대우도 훨씬 나아진 시대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광대였다.
많은 명창 제자 길러낸 이날치
이날치는 헌종 때인 1820년경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나 만년에는 장성으로 옮겨 72세 되던 해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이날치의 자는 경숙(敬淑)이라고 하는데 어떤 기록에는 경숙이 본명이고 날치는 별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별호도 그가 소리광대가 되기 전, 처음에는 판놀음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였는데 어찌나 그 몸놀림이 날렵했는지 마치 ‘날치’ 같다고 해서 얻어진 별호가 아예 이름이 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기록에는 그의 성질이 칼날같이 날카롭다고 하여 이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박만순이 송흥록으로부터 멸시와 박대를 받았던 것만큼 이날치도 박만순으로부터 크게 차별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날치는 박만순보다 열 살가량이나 위였으나 고수라는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얕잡아보기 일쑤였다. 박만순은 고집이 세었고, 이날치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이날치는 예전에 박만순이 그랬던 것처럼 소중히 메고 다니던 북통을 박만순의 면전에다 내동댕이치며 “더러운 고수 그만둔다”고 하고는 그 길로 박유전의 문하로 들어가 소리를 익히게 된다.
박유전으로부터 수년 동안 소리를 익힌 이날치는 다시 절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오로지 소리공부에만 전념했으며, 타고난 명창의 소질이 있었는지라 드디어 득음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이날치는 ‘수리성(판소리 창법에서, 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에 특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쉰 목소리처럼 걸걸하고 호방한 목소리는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또 소리 묘사를 잘해서 나팔소리, 새소리, 종소리 등도 능히 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령 <춘향가> 중 신관사도 부임 대목을 할 때 나팔소리를 흉내내면 실제 나팔소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고, 인경 소리가 ‘뎅뎅’ 하고 울리는 대목을 노래하면 많은 사람들은 정말 인경 소리처럼 들었다고 한다.
5. 근대 5명창시대
소리로 통정대부 벼슬 받은 이동백
판소리 명창은 소리의 실천을 통하여 문화의 정수를 계승, 창조한다. 그리고 이들은 판소리의 향수자와 함께 총체적 민족문화 형성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광대라고 불렸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중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전승예술의 관점에서 다룰 때 전승예술을 추구하는 두 분류의 유형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되도록 계승한 대로 되풀이하려는 경향이 강한 보수적인 유형과, 매양 ‘소리’를 변형함으로써 스스로 배출구를 찾으려는, 말하자면 창조력이 풍부한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성악연구회 시절에 이동백이 어느 젊은 여류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젊은 국악인이 그 여인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이를 안 이동백이 크게 노하여 그 뒤로는 그곳에 얼씬도 못 하게 하였다. 당대의 국창으로 군림하던 이동백으로부터 노여움을 샀으니 그것은 국악인으로서는 파문과 다름없었다. 후에 이동백이 어느 곳에 순회공연을 갔을 때, 아침에 같은 여관 바로 옆방에서 웬 소리꾼이 목을 풀고 있었다. 그 젊은 후배의 소리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도 특출하였다. 이동백은 당장에 미닫이를 열어젖히며 그 젊은 소리꾼을 불러들였다. “너, 공부 많이 했다. 장하다. 기왕지사는 내 다 잊을 테니, 너도 그리 알라.” 그 젊은 소리꾼이 명창 김창룡의 아우 김창진이었으니, 그가 바로 중고제의 명창이자 박동진의 스승이었다(이 이야기는 명창 박동진이 들려준 것으로 천이두의 『판소리 명창 임방울』에 소개되어 있다).
이동백이 진주를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상경한 후 그는 당대의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을 보좌하면서 함께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기량은 완벽할 정도가 되었고,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마침내 고종의 총애를 받기에 이른다. 이동백의 훤한 인물과 뛰어난 소리에 탄복한 고종은 자주 그를 불러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고종은 이동백에게 당상관인 정삼품에 이르는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물론 이때의 벼슬은 명예로서 내리는 것이지만, 판소리가 생겨난 이후 소리광대가 정삼품의 벼슬을 제수받은 것은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런 일은 소리꾼의 긍지를 높여주는 일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전국의 가객들을 상당히 고무하는 일이기도 했다.
축음기와 SP시대의 명창들
예전의 판소리 공연은 무대가 따로 없었다. 마당에 자리 한 닢을 깔면, 그곳이 곧 무대가 된다. 그 위에 광대는 서고, 고수는 앉아서 판을 펼친다. 창을 하는 광대나 추임새로 흥을 돋우며 반주를 맡는 고수나 오랜 세월 특별한 수련을 쌓아서 전문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놀이채를 지불할 청중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연회를 했다. 그렇게 현장성이 존중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판소리는 고정화된,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판소리는 언제나 미완결의 양상을 보여준다. 같은 대목이라 할지라도 창자마다 제각각의 특장대로 달리 부르기도 하고, 사설 또한 달라지기도 했던 연유가 거기에 있다. 음악이면서 문학이기도 했던 판소리는 창자와 고수, 청중이 함께 어울려 완성하는 특별한 양식의 예술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현장성이 존중되는 구비전승의 예술장르였다. 오늘 우리가 음반을 통해 듣는 판소리는 그러한 현장성이 사라진, 그 고유한 특징의 하나가 거세된 화석화한 노래며, 진화를 멈춰버린 완결된 문학인 셈이다.
개화 이후인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소리꾼들이 활동했고 다행히 그들 중 명창 소리를 듣던 상당수가 자신들의 소리대목을 음반으로 남겼다. 본격적으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30년대에 그런 작업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김창환과 같은 판소리사 불멸의 대명창들로부터 이화중선, 김추월, 오비취, 권금주, 김초향 같은 흘러간 시대 여류명창들의 소리와 박록주, 김소희의 어릴 적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소리를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복이라기보다 지금 우리들의 행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온 음반은 우리가 흔히 SP라고 부르는 쇼트플레이(short play) 음반이었다. 그나마 상당수가 일실되어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음질 또한 열악해서 듣기에 거칠었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 SP판의 LP판으로의 복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그 당시에 녹음되었던 상당수의 녹음 원반까지 발견되어 속속 CD판으로 복각되고 있어 관심을 갖기만 하면 원하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훨씬 개선된 음질로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6. 근대 여류명창의 시대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
진채선은 1847년 고창에서 태어났다. 고창이란 곳은 가객의 대부 신재효가 있었던 곳이며, 명창의 고을이라고 할 만큼 수다한 소리꾼을 배출한 곳이었다. 스승인 신재효보다 35세 연하였던 그녀는 스승의 말벗이며 또한 예술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재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뛰어난 미모와 미성, 성량의 풍부함 등 가객으로서 천부적인 품격을 두루 갖춘 여자였다. 거기에다 신재효로부터 체계적인 지도를 받음으로써 무용은 물론 음악이론에도 일가견을 갖춘 소리꾼이 되었다.
신재효 이전에는 여자가 판소리를 한다는 것이 당시 일반의 금기로 받아들여졌고 또 실제로 여자가 소리공부를 해서 득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기에 판소리가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평소 그녀는 남장(男裝)차림이었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이는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깬다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한 일화다. 그런데 그녀가 이 금기를 깨고 당당하게 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신재효의 안목과 진채선의 예술가적 기질이 맞아 결실을 맺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진채선이 자신의 소리 실력을 대중 앞에 최초로 드러낸 것은 1869년 7월에 있었던 경회루 낙성연 공연에서였다. 대원군이 세도를 부리던 시절,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새로 짓고 낙성연을 크게 베풀었다. 대원군은 경회루 낙성잔치에 전국 명창들을 모두 불러들여 소리 잔치를 마련했는데, 그때 초청된 수십 명의 명창들 틈에 홍일점으로 진채선이 있었다. 경복궁 넓은 뜰, 누각에는 고종과 왕비가 용상에 앉아 있고, 대원군을 비롯한 정승 판서 백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진채선의 차례가 되어 그녀가 소리를 했다. 그때 스승이었던 신재효는 스스로 명당축원(明堂祝願)이었던 ‘고사창(告祀唱)’을 작곡해서 진채선으로 하여금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먼저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
가사내용도 “백두산이 북주되고 한라산이 남안이며 망망한 대해수가 동서남을 둘러 있는 우리 조선이 천하에 명국이고 경복궁 주혈명당이 천천세세 기업이라”는 이른바 ‘축가’ 형식의 노래에 잘 들어맞았다. 미모의 진채선이 이 노래를 불렀으니 ‘고사창’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어서 판소리를 했는데 그녀는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불렀다. 그녀가 부르는 판소리 마당에 고종과 대원군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청중이 넋을 잃을 정도였다. 이후 명창 진채선의 이름은 대번에 장안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량들은 진채선을 한 번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그의 노래를 직접 듣지 않고는 율객의 행세조차 못 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