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연구교수.1996년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한국과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에 『한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조선사람의생로병사』 『조선사람 허준』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1장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처음 만들었을까?
『직지』가최고로 인정받기까지 | 고려인들이 금속활자를 개발한 이유는? | 인쇄술 발전의 징검다리 | 구텐베르크 활자와 고려 금속활자의 차이점 | 체험!금속활자 찍어보기 | 중국의 우선권 주장에 대한 고찰 | 보론 - 사료로 읽는 금속활자 이야기
2장 평면에 펼쳐놓은 "하늘 그림"의 용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별자리 그림이다 | 동아시아의 별자리 이야기 | 천문학의 족집게 핵심 노트 | 카이저린은 빛나야 한고,천문도는 정확해야 한다 | 고구려 기원설의 시비를 가리다 | 천문도와 새 왕조의 정통성 | 영광과 독주, 그 후의 이야기 | 어떻게 하늘을평면에 펼쳐 그렸을까? | 보론 - 사료로 읽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이야기
3장 세종이 칠정에 관심을 쏟은 이유는?
1422년1월 1일, 세종을 격노케 한 사건 | 1각의 오차는 왜 생겼을까? | 중국의 역법으로 만족했던 세월 | 독자적인 역법 제작 프로젝트 |"조선"을 기준점으로 한 관측기구들 | 달력, 그 이상의 달력을 지향하다 | 『칠정산외편』의 일식 예측 | 1각은 바로 진정한 "중화"의상징이었다! | 간의 측정법 | 보론 - 사료로 읽는 『칠정산』이야기
4장 최한기는 왜 서양과학을 배웠을까?
영화<취화선&&에 등장한 최한기 | 베일에 싸인 비운의 천재 학자 | 모든 것은 기로 통한다 | 기학과 서양 자연과학의 만남 | 최한기우주론의 실체와 오류 | 과학을 열쇠로 기학을 정립하다 | 보론 - 사료로 읽는 최한기의 기학 이야기
5장 풍수지리는 과학인가?
풍수지리는 미신이다? |조선시대 왕릉의 선정 과정 | 지관은 누구인가? | "동아시아 과학"의 정의 | 조선시대의 4대 풍수지리서 | "생활 속 과학"으로 정착하다 |특명! 혈과 명당을 찾아라 | 풍수지리학의 등장 배경 | 진짜 명당은 존재하는가? | 모든 땅은 명당이다? | 보론 - 사료로 읽는 풍수지리이야기
6장 정약전은 왜 물고기를 그리지 않았을까?
설마체통을 구기면서 물에 뛰어들었을까? | 직접 물고기를 해부했을까? | 흑산도 근해의 해양생물을 총망라했다 | 독특한 분류와 명명법 |『자산어보』에 사는 인어 이야기 | 정약전은 왜 물고기를 그리지 않았을까? | 왜 하필 물고기 백과사전인가? | 정약전의 도우미들 | 보론 -사료로 읽는 『자산어보』 이야기
7장 거북선은 철갑선이었을까?
거북선인가, 거북배인가| "철갑을 두른 배"의 신화화 과정 | 거북이 등껍질의 작동 원리 | 아군을 보호하고 적군을 원천봉쇄하라 | 2층인가, 3층인가 | 사료로읽는 거북선의 활약상 | 보론 - 서울에서 뉴욕까지, 그림으로 남아 있는 거북선의 이모저모
8장 측우기로 눈의 양도 쟀을까?
카이스트로 장영실동상, 무엇이 문제인가? | 측우기를 만든 까닭1 - 세금징수를 위해? | 측우기를 만든 까닭2 - 왕권 유지를 위해? | 측우기를 만든 까닭3- 기우제와 관련된 것? | 하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 | 오랜 기간의 통계자료를 확보하다 | 측우기는 전국에 몇 개 있었을까? | 홍수와폭설도 쟀을까? | 왜 3단 구조일까? | 측우기는 문종의 발명품인가? | 현대의 기기 못지않은 정확성을 자랑하다 | 왜 개량해서 쓰지않았을까? | 보론 - 사료로 읽는 측우기 이야기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 2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처음 만들었을까?
고려인들이 금속활자를 개발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인쇄술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작은 목판인쇄에서 비롯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살펴보면 적어도 이를 발간한 8세기 중엽에는 목판인쇄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의 4산비명 중 하나로 경주 외동면에 있었던 초월산 대승복사에 남긴 비명을 보면 당의 사신에게 시집을 인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시대에 이미 목판인쇄술이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금속활자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인쇄술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금속활자를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목판본 『직지』에서 발견했다. 『직지』가 모두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목판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금속활자본을 원본으로 하여 다시 찍은 것이다. 즉 고려 우왕4년(1378) 6월 백운화상의 제자인 법린 등이 여주 취암사에서 이 책의 목판본을 찍었는데, 그 한해 전에 출간된 금속활자본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왜 금속활자로 먼저 간행하고 목판본은 나중에 간행했을까? 목판인쇄 방식이 고려의 당시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다면 왜 굳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을 목판본으로 다시 인쇄한 것일까? 목판본이 금속활자본보다 더 글자체가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처음 흥덕사라는 청주의 지방 사찰에서 학승의 교재로 쓰기 위해 임시방편용으로 찍었던 것이다. 훗날 위대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장대한 역정이 펼쳐지겠지만, 초창기 금속활자술은 이처럼 미미했다.
따라서 『직지』를 가지고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금속활자를 말해서는 안 된다. 대규모 자원을 가지고 벌인 사업이 아닌데다, 목판에 비해 금속활자는 간행 기술이 정립되어 널리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조판은 밀랍을 이용해 활자를 틀에 고정하여 찍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여러 판을 인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 판을 찍고 나서 다시 흐트러진 활자를 보정한 후 찍어야 했을 정도로 효율성이 낮았다. 그렇기 때문에 1판으로 찍어낼 수 있는 부수에도 제약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목판본은 금속활자본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또한 목판본과 금속활자본 『직지』를 비교해보면, 금속활자본은 탈자와 뒤집어진 글자가 많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직지』는 최고(最古)일지 모르지만, 미학적으로 최고(最高)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금속활자 인쇄술이 목판인쇄술보다 더 우수하다. 하지만 금속활자가 나오던 초창기에는 실제로 찍힌 책의 완성도나 아름다움의 측면에서는 목판본이 더 앞서 있었다. 초창기 활자인쇄술에서 금속활자본은 활자 한 벌을 가지고 다수의 책을 수요에 맞춰 빨리 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변적이고 신속했다. 만약 이런 수요가 없었다면 고려에서도 목판본보다 글씨 모양도 밉고 삐뚤삐뚤한 금속활자본 책을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금속활자를 만들어야 했던 고려의 특수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교과서의 일반적 정설은 금속활자 인쇄술이 탄생하던 무렵 고려의 책자 유통에 비상이 걸렸다는 점을 들고 있다. 1126년과 1170년 두 차례에 걸쳐 궁궐에 화재가 났는데, 이때 책 수만 권이 불타서 책이 귀해졌다는 기록을 그 근거로 든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송이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 때문에 문화가 쇠퇴하고 있었으며, 전쟁 통에 고려에서는 책을 수입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 주장은 좀 더 꼼꼼히 살펴볼 여지가 있다. 궁중의 책은 보급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이다. 따라서 금속활자본이라도 책을 찍어내서 채워야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장서용 책을 다시 갖추는 것을 뜻한다. 송과의 문화 두절은 정말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금에 내쫓긴 송은 1127년 강남지역으로 천도했으며, 13세기 이후에는 몽고의 침입에 시달렸다. 몽고가 득세하면서 강화 천도(1232) 이후 고려는 그동안 서적문화의 큰 젖줄이었던 송과의 교역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수입품에는 귀중한 책 이외에 다수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실용서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송과의 서적교류 중단은 고려의 문화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고려는 갑자기 수많은 서적을 자체적으로 인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팔만대장경 파듯 할 것인가? 그것은 국난극복을 위한 발원으로서 온 국력을 기울인 대사업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교재와 일상적으로 읽는 불경과 유교경전, 문학작품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런 책들을 다 목판으로 파야 할까?
당시 고려의 목판인쇄술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목판인쇄용 나무를 준비하는 데만 무려 1~2년이 소요되었다. 목판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적당한 나무를 찾아야 한다. 조직인 균일하고 조밀하며 적당히 단단한 것이 글자를 새기기에 좋다. 나무를 찾은 다음에는 5~6척 정도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건조를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습하지 않고 바람이 적은 음지에서 1~2년 정도 위치를 바꾸어가며 말려야 한다. 나무는 2.5~3.5센티미터 정도로 켜는 것이 적당하지만, 너비로 켤 때는 만들고자 하는 목판의 크기에 맞춰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목판용 나무를 마련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목재를 준비한 후에도 불과 습기에 약하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후가공이 필요하며, 글씨를 새기고 교정하는 데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완성한 다음에도 보존에 신경써야 했다. 이렇듯 목판은 상당량의 시간, 노동력, 재료 등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목판인쇄는 고려의 서적시장 규모만을 놓고 본다면 최상의 기술은 아니었다. 부처님의 모든 목소리를 진실 되게 담아낸다는 국난극복의 종교적 의지가 있었기에 국가 차원에서 팔만대장경을 목판으로 새길 수 있었다. 또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을 위해 열람용이나 장서용 책자 혹은 일부 소수의 경전처럼 과거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정도의 수요가 있는 책이라면 목판으로 찍을 수도 있었다. 중국에서 수입해올 수 없었던 책들, 곧 국내인이 쓴 책은 달리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목판으로라도 찍어야 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요가 적은 수많은 종류의 책을 모두 목판으로 찍는 것은 경제적으로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갑자기 중국 목판본 책을 구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확보했을까? 금속활자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하나의 타개책이었다.
풍수지리는 과학인가?
풍수지리학의 등장 배경
옛사람들은 왜 풍수지리라는 학문을 만들어냈을까? 먼저 하늘, 땅, 인간에 관한 비슷한 학문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주의 삼라만상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음양오행 등의 법칙을 따른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천, 지, 인을 기본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자연관에서는 그중 어느 하나도 학문화의 대상에서 빠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천문역법은 시간을, 풍수지리는 공간을, 의학과 연단술은 인체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에 질서를 부여했다. “좋고 나쁨” 또한 동아시아 자연학을 관통하는 개념이었다.
천문학은 국가 정치의 좋고 나쁨을, 풍수지리는 넓게는 나라에 좁게는 일가에 좋고 나쁨을, 의학은 한 몸에 좋고 나쁨을 다뤘다. 하지만 의학의 좋고 나쁨은 대부분 실제 병의 악화 또는 치료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천문학의 좋고 나쁨은 왕도정치라는 다분히 추상적이고도 상징적인 차원에 머무른 데 비해, 풍수지리의 좋고 나쁨은 길흉화복이라는 종교적 측면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는 인간의 욕심과 결합되어 천박한 학문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우려는 관상감 운영을 담은 『서운관지』의 「감여(堪輿)」에도 잘 드러나 있다. 풍수지리설은 중국 고대에는 없던 것이다. 주나라 때 주공이 단지 장사 지낼 자리와 날짜를 점쳐서 정했을 뿐이다. 공자도 거처와 무덤을 편안히 모신다고 했을 뿐, 길흉화복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라 이래 풍수지리를 비롯한 술수설이 나와 혹세무민했고, 당송을 거치면서 더욱 유행하게 된다. 물론 유학자인 정자와 주자 모두 풍수지리의 길흉화복설을 취하지 않았다. 정자의 말처럼 “거처를 따지는 것은 땅의 아름다움과 그렇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지, 땅의 방위를 가리거나 날의 길흉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유학자들의 인식과 달리 조선 사회에서도 풍수지리는 복을 얻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약한 심성을 파고들어 엄청나게 유행했고, 결국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사람들이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애쓴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왕가나 가문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풍수지리에는 이와 다른 측면도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건축에 풍수지리 지식이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서울로 올라가 벼슬을 하다 임기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다. 서울에서 벼슬하다 낙향한 이들을 독자로 하는 책들이 많았는데 유명한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는 낙향해 살기 좋은 지역을 선택하기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사민총론」에서는 사농공상의 유래, 사대부와 백성의 구실과 살 만한 지역에 관한 내용을 기록했고, 「팔도총론」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세와 위치, 8도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 도별로 자연환경?인물?풍속?생활권을 파악하여 각 지역의 특색을 종합 정리했다. 또 「복거총론」에서는 당시 조선사회의 취락과 거주지의 이상적인 조건과 각종 풍수적인 조건들을 제시했다. 이 외에 조선 후기의 베스트셀러였던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에서는 집짓기에 관한 매뉴얼을 제시한다.
홍만선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고려하여 집짓기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지침을 정했다. 그 절대 원리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생기를 원활하게 한다”는 풍수의 일반론과 같다. 무덤을 쓰는 것이 ‘화복’의 성격이 짙었다면, 『산림경제』의 내용은 집짓기 방향을 이끄는 ‘생활의 지혜’라는 성격이 짙다. 이런 집짓기 내용은 『산림경제』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생활백과사전의 필수항목이자 하나의 관습이었다. 예를 들면 “방의 머리맡에는 궤(櫃)를 두지 말고 방 양쪽 벽에는 창(窓)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무너진 부엌 위를 밟으면 사람이 부스럼을 앓게 된다”, “우물과 부엌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면 남녀가 문란해진다” 등 상당히 많은 내용이 속담이나 격언 비슷하게 민간에 퍼졌으며, 일부 내용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한다.
정약전은 왜 물고기를 그리지 않았을까?
직접 물고기를 해부했을까?
『자산어보』는 첨성대, 거북선 등 다른 유산들에 비해 대중에게 익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과학사적으로 한국의 박물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학술 저작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귀양지인 흑산도 앞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양박물학 책으로 총 226종의 해양 생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수많은 해양생물종을 담고 있다는 점과 함께 조선학계에서 유래가 없던 관찰의 정확성 때문이다. 묘사된 물고기의 사실성을 볼 때 확실한 관찰의 결과물이지 그 이전의 책들처럼 추측이나 상상, 혹은 문헌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살펴보면 겉모습에 대한 묘사가 매우 자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산어보』의 아귀 부분을 보자.
아귀 큰 놈은 두 자 정도이고, 모양은 올챙이를 닮아 입이 매우 크다. 입을 열면 온통 발갛다. 입술 끝에 두 개의 낚싯대 모양의 등지느러미가 있어 의사가 스는 침 같다. 이 낚싯대의 길이는 4~5치쯤 된다. 낚싯대 끝에 낚싯줄이 있어 그 크기가 말꼬리와 같다. 실 끝에 하얀 미끼가 있어 밥알과 같다. 이것을 다른 물고기가 따먹으려고 와서 물면 잡아먹는다.
대부분은 어부들이 잡아온 것을 해변에 나가서 관찰하면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반면에 심해생물인 아귀나 상어는 쉽게 관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심해생물인 아귀가 먹이를 잡는 모습은 어떻게 포착했을까? 이 외에도 상어의 교미나 출산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상어 역시 수심 20~100미터에서 살기 때문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수면에서 상어의 교미 장면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고기의 겉모습과 생태 묘사는 해녀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내장과 같은 내부 묘사는 어떻게 한 것일까? 『자산어보』에는 상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해놓았다.
대체로 물고기가 알을 낳은 것은 암수의 교배에 의해서가 아니다. 수컷이 먼저 정액을 쏟으면 암컷은 이 액에 알을 낳아 수정, 부화되어 새끼가 된다. 그런데 유독 상어만은 태생이다. 잉태에 일정한 시기가 없다는 것은 물 속에 사는 생물로서는 특별한 예다. 수놈에는 밖으로 두 개의 콩팥이 있고, 암놈은 배에 두 개의 태가 있다. 태속에는 또 각각 4~5개의 태가 있다. 이 태가 성숙해지면 새끼가 태어난다. 새끼상어의 가슴 아래에는 각기 하나의 태와 알이 있다. 크기는 수세미와 같다. 알이 없어지면서 태어난다. 알은 사람의 배꼽과 같다. 그러므로 새끼상어의 배 안에 있는 것은 알의 즙이다.
여기서 정약전이 상어의 내부를 직접 관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자세히 보았다. 실제로 새끼를 낳는 상어의 암놈은 몸 속의 좌우에 하나씩 자궁을 가지는데 이는 “두 개의 태가 있다”라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태보 속에는 4~5개의 태가 있다“고 한 것은 한꺼번에 4~5마리씩 총 8~10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는 말인데, 상어는 한 번 출산할 때 10마리 정도 낳는 것이 보통이므로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새끼가 가슴에 달고 있는 알은 영양분인 난황을 의미하고, 알을 태아에 양분을 공급하는 탯줄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요리 등의 다른 용도 때문에 물고기를 자르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내용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내부 구조를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해부를 했다는 사실은 불가사리 등 잘 먹지 않는 수중생물에 대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KBS 역사스페셜>에서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정약전은 불가사리(楓葉魚)를 개부전이라 명명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의 하나로 “배 안에는 장이 없는 것이 오이 속과 비슷하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먹지 않고 잘라서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불가사리가 음식은 물론 그 어떤 용도로도 쓰였던 전통이 없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기록들과 사실을 놓고 볼 때 물고기 해부가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데 정약전이 직접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자산어보』의 해부는 현대 생물학의 해부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현대 생물학에서 해부는 생물 내부 기관의 모습과 위치만 보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내장의 한 부분을 없앤 다음 물고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해서 그 부분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비해 『자산어보』의 해부는 물고기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여 기록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해부에는 세 종류가 있다. 사람의 정상적인 구조를 조사하는 ‘정상해부’, 내장?신경?감각기 등 각 계통으로 나누어서 상세히 조사하는 ‘계통해부’, 사망 전의 병상이나 그 경과를 확인하고 병의 원인이나 변화를 조사하는 ‘병리해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약전의 해부는 ‘정상해부’에 속한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에서는 해부를 통해 내부의 기능을 관찰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약전식 해부를 완전한 해부라고 보기는 힘들다. 정약전은 어족의 모양과 형태 관찰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해부 행위도 내부 모습을 들여다보는 관찰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측우기로 눈의 양도 쟀을까?
측우기를 만든 까닭 1 - 공평한 세금징수를 위해?
측우기는 일반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주려고”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나아가 전국에 배포된 측우기의 관측을 통해 월별 강수량을 예측하여 통계를 내어 활용했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세종실록』(세종 23년 8월18일자)에 측우기를 사용하여 각 지방에서 비를 측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랫동안 모은 기록은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태진 교수는 비를 측정한 기록을 보고 농사가 잘 안 된 것이 분명한 지역에는 세금을 감면하는 등 농사 정책을 펴는 데 활용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것이 실제 농업과 관련 있다기보다는 왕정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무게를 두는 설도 있다.
세종은 농산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 끝에 일방적인 정액세보다는 토지의 질의 등급, 농사의 작황을 반영하는 훨씬 공평한 제도를 마련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토지를 여섯 등분으로 정한 전분6등법과 한 해의 농사작황을 아홉으로 나눈 연분9등법이다. 농사작황은 상의 상, 상의 중, 상의 하, 중의 상, 중의 중, 중의 하, 하의 상, 하의 중, 하의 하로 나누었는데, 필지가 아닌 군?현 단위로 책정되었다. 이런 공법을 시행하려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데이터의 파악이 중요하며, 그런 점에서 정확성을 담보하는 측우기가 꼭 필요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세금을 걷었을 텐데 왜 유독 조선에서만 측우기를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 시대에 지방행정망을 통해 전국의 강수량을 측정한다는 발상을 할 만한 국가조직을 가진 나라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은 국토가 작은데 군현 수가 많고 그것이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군현으로 이뤄진 국가가 유지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나라는 지방행정망이 발달해 있었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측우기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그 자세한 데이터를 중앙에 모을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앞의 기록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지만, 농사작황을 위해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우량이 농사작황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상의 상에서 하의 하에 이르는 아홉 등급을 결정짓는 데 어떻게 얼마만큼 활용되었는지 일러주는 근거가 없다. 농사작황은 우량 등 여러 조건 9등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한 해의 평균 소출 내용으로 충분히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우량 정보는 전반적인 소출 결과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을 것이다.
측우기를 만든 까닭 2 - 왕권 유지를 위해?
조선시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이 지배적이었고, 유교의 전통적인 자연관에 입각한 왕도정치가 조선왕조 왕권 확립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유교사상이 널리 퍼진 동북아시아 3개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하늘에서 내린 왕권으로 종자부터 다르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려 일반 국민들이 감히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매우 편리했지만, 그만큼 문제도 많았다. 즉 가뭄이나 폭우, 천둥벼락, 혜성 같이 당시 하늘에서 내리는 ‘벌’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모두 왕권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은 천문 관찰을 매우 중시했으며 천문을 국정에 폭넓게 반영했다. 역법을 알고 있어야 하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민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비과학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정에서는 체제의 원초적 유지를 위해서 기우제 등을 지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백성과 신하들의 불만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만약 백성들이 왕을 싫어하는 상황에서 가뭄이나 폭우가 쏟아지면 반정이 일어나는 주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늘이 요동칠 때는 하늘을 대변하는 왕의 책임을 추궁하는 근거가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더 자세히 천문을 관측해 ‘하늘의 뜻’을 정확히 알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늘과 이어진 사람이 하늘의 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측우기 역시 이런 정치적 도구의 하나였다.
홍수와 폭설도 쟀을까?
홍수 때는 어떻게 했을까? 측우기는 홍수 때 물의 양도 잴 수 있긴 하지만, 실제 피해와 관련해서 가뭄 때만큼 수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다리가 물에 떠내려갔다든지, 많은 사람이 물에 휩쓸려 죽었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피해 내역을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큰 물의 양을 재는 청계천의 수표나 한강의 수위를 나타내는 푯말에 더 관심을 가졌다. 가뭄 때 내리는 단비의 혜택은 즉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측우기 속의 비의 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거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와 달리 홍수 피해는 강과 하천의 범람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의 양이 얼마인지 따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무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세종 23년(1441) 8월, 조정에서는 측우기 사용을 공식화하면서 동시에 청계천의 수표와 한강의 푯말을 정했는데, 이 둘은 홍수 보고용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의 양이 푯말의 최대치를 넘기느냐가 최대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측우기를 다시 제작해 사용하던 1789년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수표교가 넘는 데 이르지 않고 장맛비가 온종일 내리는 데는 이르지 않았으나, 두 달에 걸쳐 장마가 계속되고 있으니 농사에 병이 생길 것이 우려된다”고 하면서 홍수의 지표로 수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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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상 측우기는 눈의 양도 잴 수 있다. 그 안에 내려 녹은 양이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승정원일기』를 보면 겨울에 눈이 내린 경우에도 측우기 물의 양은 0으로 잡혀 있다. 이는 측우기의 용도가 객관적인 물의 양을 재는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측우기는 비의 양만을 재는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뭄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