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저자는 코넌 도일이 당대 법 과학의 발전 양상을 두루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코넌 도일은 때로는 왓슨, 때로는 홈스의 입을 빌려 당시의 첨단 법 과학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저자는 그런 것들이 실제 일어난 사건과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코넌 도일이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수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어야 더 좋았을지, 범인이든 수사관이든 누가 어떤 식으로뛰어났는지 등을 흥미롭게 살펴본다.
■ 저자 E. J. 와그너
범죄 역사가 겸 강사이자,추리 소설 작가이다.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학의 롱아일랜드 자연과학 박물관에서 해마다 열리는 법과학 포럼의 사회를 맡고 있다. 와그너의 글은「엘러리 퀸스 미스터리 매거진」「뉴욕 타임스」「랜셋」 등에 실리고 있다.
■ 역자 이한음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과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과학소설집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가있으며, 역서로 『생명』『리처드 도킨스』『DNA, 더블댄스에 빠지다』『자연의 빈자리』『핀치의 부리』『복제양 돌리』 등이있다.
■ 차례
들어가는 글
1. 사자와의 대화
2. 야수 이야기와 검은 개
3. 옥에 티
4.독살의 증거
5. 변장과 수사관
6. 가스등에 비친 범죄 현장
7. 범죄자의 초상
8. 어둠 속의 총격
9.발자국
10. 오물
11. 악마의 편지
12. 피의 목소리
13. 신화, 의학, 살인
참고문헌
옮기고 나서
찾아보기
셜록 홈스의 과학
옥에 티
셜록 홈스 소설에는 날거나 기거나 미끄러지면서 다니는 특이한 동물과 곤충이 많이 등장한다. 『얼룩 띠』의 뱀, 『사자의 갈기』에 등장하는 해파리,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에서 농부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사냥개 등이 그렇다. 하지만 그 기이한 동물들은 단순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들은 과학적 탐구를 위한 장치이다. 코넌 도일은 동물들과 그들의 서식지를 파악하고 분류하는 데 열심인 괴짜 아마추어 자연학자들의 시선을 통해 그 동물들을 묘사하곤 한다.
19세기는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일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던 시대이다. 코넌 도일도 당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주제로 자주 강연을 했고, 찰스 다윈과 그 후계자들의 이론에 관심이 있었다.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에서 박물학자 스태플턴은 무모하게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황무지 지대를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파리인지 나방인지 작은 날벌레 한 마리가 우리 앞을 지나가자, 스태플턴은 즉시 놀라운 행동력과 속도로 그것을 뒤쫓아 달려갔다.” 스태플턴은 그 곤충이 ‘키클로피데스(cyclopides)’라고 믿는다. 그 곤충은 영국 황무지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그가 그 곤충을 서둘러 열심히 뒤쫓은 것도 이해가 된다. 코넌 도일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바스커빌 황무지는 숨겨진 야생의 비경 속에 온갖 난초가 사는 특별한 곳이다.
그 소설에서 난초와 나방이 나오는 부분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틀림없이 찰스 다윈이 38년 전에 했던 기이한 예측을 떠올렸을 것이다. 다윈은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별난 또는 크리스마스난(angraecum sequitedale)이라는 깊이가 거의 30센티미터에 달하는 꿀주머니를 지닌 특이한 난을 소개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어딘가에는 그 꿀주머니 바닥까지 닿는, 따라서 그 난의 꽃가루를 옮길 수 있는, 약 30센티미터에 달하는 긴 주둥이를 가진 나방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그 생각을 1862년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영국과 외국 난초들의 다양한 고안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발표했다.
코넌 도일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셜록 홈스는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자료, 세심한 방법을 요구한다. 당시의 헌신적인 아마추어 자연학자들이 바로 그런 견해를 갖고 있었다. 곤충과 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고 분류하고, 그렇게 모은 정보를 토대로 체계적인 추론을 하는 행위는 법과학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자연학자들은 곤충이 수백만 종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또 곤충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들도 많았지만, 그들도 집에 들어오거나, 정원에 우글거리거나, 진찰실이나 연구실이나 병원에 침입할 때 유충이나 배설물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동물과 인간의 사체에서도 발견되었다. 변사체가 있는 현장에서는 그런 곤충들이 발견되곤 했다. 과학은 이런 말없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받아내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유럽 대다수 지역에서는 그것이 새로운 개념이었지만, 사실 중국에서는 1235년부터 그 개념을 활용하고 있었다. 송자가 지은 최고의 법과학 책이라고 알려진 『세원집록(洗寃集錄)』에는 한 작은 마을에서 난도질당해 죽은 남자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상처의 모양과 깊이로 볼 때 농부의 낫에 베인 듯했다. 탐문을 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딱 잡아뗐다. 수사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마을 공터로 자기 낫을 들고 와서 땅에 죽 놓으라고 명령했다. 낫은 다 깨끗해 보였다. 그런데 작은 파리들이 모여들더니 굶주린 듯 빙빙 맴돌다가 식욕이 동했는지 윙윙거리면서 한 낫에 내려앉았다. 거기에 남아 있는 약간의 피와 살에서 풍기는 냄새에 끌린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낫의 주인은 자백하고 말았다.
서양에서는 17세기까지 곤충의 활동을 관찰해 오긴 했지만, 엉뚱하게 해석하곤 했다. 삼켰을 때 환각이나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곤충이 많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곤충들은 유혹하거나 살해하는 데 쓰일 마법의 비약을 만드는 재료가 되곤 했다. 영국 시골에는 가족이 사망하면 그 소유지에 있는 꿀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알리지 않았다가는 벌들이 화가 나서 벌집을 버리고 떠나거나 유족에게 꿀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파리와 구더기뿐 아니라 꿀벌과 딱정벌레도 썩어 가는 살에서 자연히 발생한다고 굳게 믿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이론이 타당한지 검증하는 실험을 최초로 한 사람은 이탈리아 아레초 출신의 의사 겸 시인인 프란체스코 레디였다. 그의 실험은 1668년에 이루어졌다. 그는 푸주한(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파는 일을 하는 사람)과 사냥꾼이 싸놓지 않은 고기보다 잘 싸놓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덜 생긴다는 것을 관찰했다.
레디는 악취 나는 고기를 세 개의 단지에 담았다. 하나는 뚜껑을 열어 놓았고, 하나는 천으로 덮어 두었고, 다른 하나는 단단히 밀봉을 했다. 며칠이 지난 뒤 열어놓은 단지의 고기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천으로 덮어 둔 단지에도 파리들이 몰려들긴 했지만, 고기에 구더기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밀봉한 단지의 고기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 레디는 구더기가 파리의 애벌레이며, 파리가 썩어 가는 고기에 알을 낳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일부 곤충들이 썩어 가는 고기에 알을 낳고 그 알이 자라면서 모습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이었다. 각 곤충이 정확히 어떻게 시체에 자리를 잡는지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예측할 수만 있다면, 살해당한 시각을 파악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은 탁월하긴 했지만, 실용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체에는 많은 종류의 곤충이 모여들며, 각각의 종은 나름대로의 번식 습성을 갖고 있다. 게다가 곤충은 냉혈동물이므로 번식과 섭식 행동이 주위 온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일부 곤충들은 다른 곤충의 모습을 흉내 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꽃등에과 곤충들이 대표적이다. 꽃등에과 동물들은 꿀벌이나 말벌과 무늬나 색깔이 비슷한 것이 많다. 그들은 주로 오염된 물에 살지만 시체에도 모여들곤 한다. 이런 갖가지 변수 때문에 유충과 번데기를 포함해 시체에 모여드는 곤충들을 정확히 분류해 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레디의 실험이 있고 나서도 한참 동안 곤충과 범죄 수사를 연관 짓는 연구는 주류 학술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850년에 프랑스에서 이 자연과학 연구를 혁신적으로 활용한 사례가 나타났다. 한 임대 주택을 수리하던 일꾼들이 벽난로 뒤쪽 벽돌 몇 개가 엉성하게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벽돌을 떼어 내자, 신생아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시신이 나왔다. 시신은 미라가 되어 있었다. 열기에 노출되어 말라서 그렇게 된 것이 분명했다. 시신에는 구멍과 구석구석마다 다양한 곤충들이 살고 있었다.
일꾼들은 오래된 집의 벽이나 천장에서 이런 가여운 시신들을 이따금 찾아내곤 했다. 부정한 열정의 산물을 낳은 젊은 여성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육중하고 두꺼운 건축 구조 사이에 그런 가여운 아기들을 숨기곤 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살해당한 것일까, 아니면 사산아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한 것일까? 경찰은 검시관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아기는 달을 채우고 나왔을까? 사산아였을까? 살아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살다가 죽었을까? 사망 원인은 무엇일까? 살인이라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누구일까? 3년 동안 그 집에 세를 든 사람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점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했다.
묻힌 지 오래된 시신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다각도로 연구한 다르부아 시립병원의 M. 베르주레 박사에게도 견해를 밝혀 달라는 요청이 왔다. 베르주레는 기존 법의학 방법들을 이용하여 그 문제에 접근했다. 시신을 해부하여 뼈의 크기를 재고, 건조된 조직을 상세히 검사했다. 그는 아기가 달을 다 채우고 나왔으며 태어날 때 살아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아기의 시신이 벽돌 무덤 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알아내려면, 곤충학이라는 자연과학을 동원해야 했다. 그는 시신에 살고 있는 나방, 진드기, 번데기 등을 꼼꼼히 관찰하고 분류한 끝에, 시신이 적어도 2년 동안 벽 속에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따라서 가장 최근에 산 세입자들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고, 1848년 여름에 살았던 한 젊은 여성이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했다. 이웃들과 집주인은 사야르 부인은 그 여성이 임신을 했었다고 믿었지만, 아기를 본 적은 없었다. 그 여성은 체포되어 기소되었지만 유죄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주변 정황은 의심스러웠지만 베르주레는 아기가 살해당해 죽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베르주레는 1855년 보고서를 쓸 때 곤충이 시신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당시 알려진 약간의 지식을 언급하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1878년 브루아르델은 비슷한 사례를 접했고, 베르주레의 책을 안내서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브루아르델이 부검을 맡은 신생아 미라는 다양한 절지동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다. 브루아르델은 종군 수의사인 피에르 메그냉과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한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은 나비 유충 진드기의 껍질과 배설물, 나방 유충을 찾아냈다. 살았거나 죽은 진드기도 많았다. 이런 사항과 시신에 붙은 식물의 잔해, 곤충의 수를 종합하여 과학자들은 시신이 5~7개월 동안 현장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시신에 있는 동식물을 관찰하여 얻은 증거를 잘 보관해 두었다. 그들은 그 자료들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들은 셜록 홈스가 원했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자료들을 수집했다. 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자연과학과 법의학의 연관성도 점점 강해졌다. 메그냉은 그 주제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책을 쓸 생각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연구는 1887년 『무덤의 동물상』, 1894년 『시신의 동물상』으로 집대성되었다.
장기간 묻혀 있던 시신에 동식물이 미치는 영향을 더 상세히 이해하고자, 19세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법의학 전공의들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또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후 조건에서 각종 곤충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관찰하기 위해 동물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한 채 연구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부 딱정벌레의 몸에 사는 아주 작은 진드기들이 그 딱정벌레를 통해 시신에 옮겨질 수 있음을 관찰했다. 바퀴를 비롯한 좀 큰 곤충들은 피와 체액 속을 걸어 다니므로 사망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까지 그런 것들을 묻힐 수 있었다. 곤충은 사망 당시나 사후에 손상을 입히곤 한다. 그런 지식들을 통해 재판에서 많은 큰 오류를 막을 수 있었다.
188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9개월 된 아기가 사망했다. 3일 뒤에 부검을 해보니 얼굴에 상처가 나 있었다. 아기의 병력 기록이 있긴 했지만, 그 상처를 본 경찰은 아버지가 아기에게 황산을 먹인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당시에는 버거운 아기를 처리할 때 그 방법이 흔히 쓰였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은 그 상처들이 바퀴들이 물어뜯은 자국임을 보여 주었다. 아기의 아버지는 투옥된 지 몇 주 뒤에 풀려났다.
범죄 수사에서 곤충과 식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런 사례들은 당시 유럽 중부의 과학계에서 많이 논의되는 주제였다. 코넌 도일은 1890년 베를린과 빈에서 몇 달간 지낸 적이 있다. 그가 본래 의학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런 연구의 발전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은 곧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캐나다에서는 와이어트 존슨과 제프리 빌뇌브가, 미국에서는 머리 모터가 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곤충 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서서히 명백해져 갔다. 실험실의 과학자들이 송장벌레, 쉬파리, 개미, 바퀴, 진드기 등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사이에, 영국에서 놀라운 발견이 보고되었다. 열정적인 나비 수집가인 스태플턴과 수수께끼 같은 황무지에서 자라는 난초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가 출간된 지 한 해 뒤인 1903년이었다.
유명한 은행 가문의 후손이자 헌신적인 자연학자인 월터 로스차일드와 그의 박물관 관장인 칼 조던은 주둥이 길이가 약 30센티미터인, 즉 수수께끼의 난인 별난의 꽃가루를 옮길 수 있을 만큼 주둥이가 긴, 가공할 만한 나방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나방은 40년 전 다윈이 추정한 대로 마다가스카르에서 발견되었다. 박각시나방의 일종인 그 나방의 정식 학명은 크산토판 모르가니 프라이딕타이다. 다윈의 예측이 옳았음을 가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셜록식 과학적 추론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입증한 사례였다.
『사자의 갈기』에서 셜록 홈스는 자신이 은퇴한 뒤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한편으로 과학적 호기심이 넘친다는 의미의 말도 한다. “내 집은 쓸쓸해. 이 땅에는 늙은 집주인인 나와 벌만 있을 뿐이지.” 『마지막 인사』에서 코넌 도일은 홈스가 은퇴해서 걸작을 썼다고 말한다. ‘여왕벌을 격리시켰을 때의 관찰 결과를 포함한 꿀벌 사육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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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와 관심사가 같은 연구자가 정말로 그런 제목의 논문을 쓴다면, 거기에는 꿀벌처럼 가장한 채 시체를 찾아다니는 꽃등에과 곤충 이야기도 분명히 포함될 것이다. 홈스가 단지 여가 활용 차원에서 그런 책을 쓴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중요한 법과학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꼼꼼한 연구였을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