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민주화는 걸출한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공장과 신화』는 1970년대 폭풍처럼 몰아친 성장신화 속 영등포공단 대일화학, 롯데제과,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노동민주화 이야기를 담았다. 신화란 힘든 일을 이루었을 때 기적과 같은 성취를 이루어 사회적 규범과 연대의 동력원이 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된 전쟁의 폐허인 50년대와 부정한 수단으로 집권연장을 회책한 정치적 혼란의 시대인 1960년대에 이룬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은 신화로 호명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특정세력이 전략적으로 그 주체를 변조한 신화라면 신화의 주체와 내용을 제대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여성노동자들의 공장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현대사의 왜곡된 신화를 비판하고 교정하고자 한다. 서울로 상경하는 예비 여성노동자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 꿈을 다룬 제1부 서울의 꿈. 1970년대 후반 영등포공단의 대일화학, 롯데제과, 해태제과 세 사업장의 구체적인 노동민주화 이야기를 담은 제2부.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 학계나 시민사회 진영에서 목소리를 높여 온 뉴라이트의 현대사관을 문제 삼은 왜곡된 신화를 파헤친다.
■ 저자 이영재
저자 이영재는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동ㆍ서 비교정치사상 전공)로 있으면서 한국정치사상학회 이사, 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 역사와 책임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09년 시기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체득한 과거청산과 민주주의에 대한 천착,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개인들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관련 저술 활동을 해왔다. 최근에는 ‘공감이론’과 ‘나눔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며, 한국 근ㆍ현대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한국 근ㆍ현대 정치사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저술로는『민주주의 강의2: 사상』(2007, 공저) 『자유ㆍ희망ㆍ진보를 향한 교육민주화』(2011) 『민의 나라, 조선』(2015) 『민주장정 100년, 광주ㆍ전남 교육민주화운동사』(2016)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이행기 정의의 본질과 형태에 관한 연구」(2012) 「공자의 ‘서(恕)’ 개념에 관한 공감도덕론적 해석」(2013) 「한국민주주의 공고화와 5ㆍ18특별법」(2015) 「다층적 이행기 정의의 포괄적 청산과 화해 실험」(2015) 「데이비드 흄의 공감 개념에 관한 연구」「스코틀랜드 도덕철학의 전통에서 본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의 함의」(2015)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제Ⅰ부. 서울의 꿈
01. 왜곡된 과거
1. 사회정의와 과거청산
2. 불완전 청산
3. 왜곡된 사회적 관습
02. 여성노동자, 그들은 누구인가.
1. 시대적 배경
2. 여성노동자에 대한 초기 연구
3. 여성노동자를 규정한 담론들
4. 장밋빛 탈출구, 공장
보론 01. 1970년대 강권정치 : 판옵티콘적 정치사회를 구축한 유신체제
1. 판옵티콘의 정치사회
2. 반공-유신체제의 규율사회
03. 노동현장 속으로
1. ‘유신 공장’의 탄생
2. 기율권력과 공장 관리
보론 02 : 저항주체와 비판이론
1. 비관적 정치이론과 주체의 소멸
2. 소통이론적 대안 : 여전히 남은 문제들
04. 공장의 분노
1. 폭력, 불공정, 그리고 분노
2. 저항의 동력
제Ⅱ부. 영등포 여성노동자 이야기
01. 해고에 맞선 대일화학의 여성노동자
1. 갈등의 시작
2. 노동조합이 회사의 손아귀로
3. 노동조합 탄압
4. 해고와 블랙리스트
02. 1980년 5월의 민주노조, 롯데제과
1. 갈등과 긴장의 고조
2. 노동조합의 변화
3. 투쟁의 성과
4. 파업농성과 후폭풍
03. 해태제과의 8시간 노동제 쟁취
1. 8시간 노동제의 서곡
2. 투쟁
3. 폭력사태
4. 다시 8시간 노동제를 향하여
제Ⅲ부. 왜곡된 신화
01. 애국자로 둔갑한 ‘산업화’ 세력
1. 건국세력
2. 산업화세력
02. 권위주의와 민주화
1. 이승만-박정희-전두환
2. 불가항력적 근대화의 길- New 식민사관
3. ‘보이는 손’에 의한 불공정 성장
03. 박정희 성장신화의 허구성
1. 성장신화와 근거 없는 주술
2. 한국의 근대성장과 식민지배
3. 성장신화의 실체
4. 경제성장과 민주화
에필로그
참고문헌
공장과 신화
서울의 꿈
여성노동자, 그들은 누구인가.
시대적 배경
1950년대 한국사회는 전쟁에 따른 피해를 수습하고, 파괴된 생산시설들을 복구하며, 경제활동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 확보에 주력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떠났던 피난민들의 상당수가 일시 피난했던 타향 또는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950년대 최초의 이촌향도(離村向都)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를 위한 자금 확보, 차관도입,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국내 자본의 동원을 위한 금리 현실화 등을 단행했다. 산업화로 인해 도시에 생산시설들이 들어서자 노동자들이 빠른 속도로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생산시설들이 가동되면서 노동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부족한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 노동자로 자리 잡았다.
산업화의 방향이 수출에서 활로를 찾으면서, 해외시장에서 수출상품의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정부와 자본은 경쟁력 우위를 위해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장려했다. 이 정책의 주요 대상이 되었던 계층은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서 온갖 악조건을 감내해야 했던 이농한 젊은이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이었다.
1970년대 초반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던 노동현장에서는 인간적인 대우와 공정한 분배(임금)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71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그 촉매 역할을 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현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촉발되었고, 특히 종교계 인사들과 대학생들이 호응했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초기 연구
1960년 제조업 여성취업자는 전체 여성노동자의 6.3%에서 1975년 16.8%로 크게 늘어났고, 제조업 부문내 성별 비율도 1960년 26.6%에서 1975년에는 37.8%로 증가하였다. 대규모 공장의 여성노동자 고용율도 크게 증가하였다. 1966년 영세기업(10~49인)이 28.5%, 중소기업(50~199인)이 26.4%, 대기업(200인 이상)이 45.1%였지만, 1970년도에는 각각 17.8%, 23.7%, 58.5%로 증가했다. 70년대 초반에는 여성노동자 10인 중 6명이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규모 공장에 새로운 공장제 노동방식이 도입되고, 젊은 여성 노동인력이 폭발적으로 유입되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자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가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그동안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시기별로 크게 세단계의 특징을 보이며 발전해 왔다.
첫째, 1980년대 초반 여성노동자 연구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실태를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연구들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연구들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등장했다.
세 번째로 여성노동자들의 실태보고나 노동운동 연구와 구별되는 방향에서 말 그대로 여성노동자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시작되었다.
공장의 분노
폭력, 불공정, 그리고 분노
각종 미시사법과 판옵티콘적 기율권력에 철저히 포섭되어 있었고, 다른 동료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새벽 같이 미싱을 타야하는 경쟁관계에 내몰려 있었지만 이러한 노동구조가 여성노동자들의 본성적 도덕감각까지 말살하지는 못했다. 낯선 서울의 대형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부대끼며 생활해 온 이들에게 이기적 욕구 외에 이와 구별되는 다른 감정인 사회적 연대감이 작동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비인간적 만행에 특히 분노했다.
1) 깜빡 졸았다고 뺨을 때리나?
박말순이라는 동료가 야간작업을 하면서 잠깐 졸았다. 순찰을 돌던 남성 관리자가 박말순의 조는 모습을 보고 작업장으로 들어와서 박말순을 바(bar)에 올라서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뺨을 때렸다. 신미자는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문계장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롯데의 여성노동자들이 분노한 것은 문계장의 체벌이 통상적인 도덕감각의 허용범위를 넘어선 폭력 행사였기 때문이다. 여성노동자들은 이 비인간적 폭력행사를 목격하고 본능적으로 분노했다.
2) 관리자들의 폭행과 특권의식
1970년대 노동현장에서 관리직들이 여성노동자를 폭행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 관리자 혹은 책임자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남성들이다. 같은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조장이나 반장은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 대기업 공장의 남성 관리자들은 일종의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관리자들은 욕을 입에 달고 다녔고, 툭하면 여성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3) 성별 위계질서의 만연과 남용
여성노동자들은 주로 여성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경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남성들과 취업경쟁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문제는 작업장 내에서 작동하는 성차별에 근거한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심각한 문제였다. 남성 관리자들은 자신의 권한을 악용해 여성노동자들을 희롱하기도 했다.
영등포 여성노동자 이야기
해고에 맞선 대일화학의 여성노동자
1. 갈등의 시작
1) 야유회 사건과 서명운동
1976년 봄꽃이 한창이던 5월 대일화학의 여성노동자들은 고된 생산현장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라인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요일 야외 나들이 계획을 짜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공장은 여성노동자들이 손꼽아 기다려 왔던 이날 특근을 통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일화학 여성노동자들은 오랜만의 나들이 계획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진행하겠다는 팀이 많았다.
그런데 김경애가 산업선교회 야유회에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고모부에게 들키고 말았다. 김경애의 고모부는 대일화학 새마을 차장이었다. 결국 김경애를 제외한 7명만 야유회를 다녀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모부가 회사에 야유회 사실을 알려 놓은 것이다. 야유회에 참석한 다음날 월요일 출근해보니 이미 회사에서는 야단이 나 있었다.
공장장이 직접 나섰다. 공장장은 생산부 사무실로 한 사람씩 불러 출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시말서를 쓰도록 했다. 회사는 여성노동자들이 산업선교회가 주관한 야유회에 참여한 것을 못마땅해 했다. 회사는 이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 산업선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여성노동자들은 퇴근 후 영등포 산업선교회를 찾아가 산업선교회 실무자들과 상의한 끝에 노동청장과 대일화학 사장에게 호소문을 쓰고 동료들의 서명을 받기로 했다. 기왕 호소문을 쓸 거면 그 동안 느끼고 있던 문제들을 다 적기로 했다. 가장 큰 불만은 월급이었다. 1976년 월급을 일당으로 계산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460원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냉면 한 그릇이 470원이었으니 하루 종일 일해도 냉면 한 그릇 먹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호소문을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요구사항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현장 주임급들은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반장까지는 전부 서명해 주었다. 얼마 후 이 사실이 회사에 알려졌고, 퇴근 시간 무렵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다음날 드디어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조회시간에 사장이 언성을 높이며 집안일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 여성노동자들을 나무랐다. 현장에서는 과장이 과원들을 모아놓고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했다.
노동조합 탄압
1) 임마누엘 수도원 수련회
1980년 5월 17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전두환 신군부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한 날이자 광주민중항쟁 바로 전날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다니던 대일화학 여성노동자 40여명은 5월 16일 서울 세검정에 있는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1박2일 수련회를 가졌다. 그날 밤 새벽 1시까지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이튿날 일정을 위해 모두가 수면을 취하려던 참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수도원 창문을 두드렸다. 인명진 목사를 연행하려고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놀라서 창문으로 내다보니 밖에는 총을 든 계엄군인들 몇 백 명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산선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인명진 목사뿐만 아니라 다른 민주인사들도 밤새 대부분 감금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짓밟으면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노동계 정화조치를 단행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해 7월부터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을 해 왔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난폭한 탄압을 시작하였고, 민주노동운동을 해왔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1980년 5월의 민주노조, 롯데제과
노동조합의 변화
1) 14년 장기집권 노동조합
당시 롯데에는 3~4년 이상을 근무해도 노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노동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공장 한 구석에는 버젓이 화학노조 롯데지부라는 현판을 단 노동조합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지부장 정00는 자그마치 14년 동안 롯데제과 노조위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노동조합은 노동법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회사가 설립해 놓은 어용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의 이런 사정이 김00 같은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산업선교회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점차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산업선교회 회원들과, 김00, 허00 같은 여성노동자 대의원들이 이 유명무실한 노동조합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2) 임금인상 농성 사건
롯데제과의 임금인상은 보통 연중 2차례 있었다. 1979년 롯데제과의 재정상태는 신축건물을 증축하고 롯데축산을 설립하고, 후지칼라를 인수할 정도로 양호했다. 1979년 상반기 매출액이 436억 원으로 1978년 상반기 매출 280억 대비 55.3%가 늘었다.
노동조합의 정00 지부장이 사측에 20% 인상요구안을 가지고 노사협의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실체 자체를 아예 몰랐을 때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1979년 10월 임금임상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임금임상 요구안까지 소문으로 들어 미리 알고 있을 정도로 노동조합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00 부녀부장의 영향으로 노동조합 내에서 그나마 노동자 편에 서 있던 부녀부 회원들과 일부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파업과 농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정00의 선동으로 1979년 10월 18일 아침 9시에 A, B조 교대시간에 옥상 식당에 500여 명의 노동자가 결집했다. 이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 측과 노조 측에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안을 내걸고 농성하였다. 그러나 결국 회사 측에서 세운 노동조합의 소극적 협상으로 롯데제과의 임금임상은 물가상승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0% 인상에 그치고 말았다.
투쟁의 성과
1) 대의원 직선제
1978년 무렵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산업선교회 활동이 활성화되고, 소그룹 모임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김00, 신00 등 산업선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노동조합에 대의원 직선제를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 더해 대의원 직선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던 계기는 앞선 신00의 노조지부장 선출 항의사건이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의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의원을 부서에서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신00이 대의원 선출을 직선제로 하자고 준비해간 내용을 낭독하자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곳곳에서 욕설이 터지고 신00을 둘러싸고 대의원 서넛이 달려들기도 하고, 심지어 10여 명의 대의원들이 위협하고,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폭행을 가할수록 유리한 것은 역으로 신00이었다. 신00의 존재가 점차 롯데제과 노동현장에서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롯데에서 대의원 직선제가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였다. 첫째, 현장에서 산업선교회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직선제 요구가 제기되었던 것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둘째, 신00을 중심으로 한 돌출적 직선제 요구 사건이 발생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셋째, 정년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정00 지부장이 자리를 보전할 생각이 없었던 것도 롯데 노동조합에 대의원 직선제가 관철될 수 있는 긍정적 요소 중의 하나였다.
이런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결국 롯데제과에 직선제 대의원 선거가 관철되었다. 노동조합 대의원을 현장 노동자들의 손으로 선출하는 것은 노동조합을 명실상부한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조직으로 바꾸어내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해태제과의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
1) 투쟁의 서막
여름휴가가 끝나고 7월 30일 B조가 주간 출근, A조가 야간 출근이었다. 7월을 하루 남겨둔 시점에서 생산부장은 8시간 노동제에 대해 "언젠가 불황을 넘기고 실시하자.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매번 지켜지지 않는 약속에 지쳐 있던 여성노동자들은 생산부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확히 언제 실시할 수 있는지 확답을 요청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여성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회사는 남자 기사들을 동원하여 여성노동자들의 8시간 요구를 힘으로 막아섰다. 1979년 8월 3일 새벽 캔디부 여성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후 퇴근하려고 할 때 회사 측에서 간부들과 기사들을 동원하여 현장문을 잠그고 길을 막아서는 등 공포분위기를 만들며 여성노동자들을 위협했다. 여성노동자들에게 회사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은 회사보다 더 큰 장애물이었다. 회사 측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어떠한 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산업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노동청장님게 드리는 탄원서를 여성노동자들 24명의 명의로 만들어 제출했다.
누구나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이 줄 것이라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던 때 해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하더라도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임금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위 탄원서에서 보듯이 여성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으로 살 수 없다면 임금을 인상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지 잔업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탄원서 이후 회사 측의 탄압은 점차 도를 넘었다. 8월 3일 오후 4시 퇴근시간도 8월 2일 캔디부 상황만큼이나 심각했다. 생산현장의 여성노동자들 대다수가 회사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회사는 남자기사 20여 명을 동원하여 대의원과 반장을 겸하며 평판이 좋은 이숙자를 회의실에 감금한 채 회사 편을 들어 여성노동자들을 설득하도록 협박했다.
다시 8시간 노동제를 향하여
추석 휴무를 끝내고 돌아왔는데 현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할 것 같은 어떤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스켙부의 김진남, 박용순, 손영현 등 3명이 8시간 퇴근에 동참하였다. 충격을 받은 회사는 다시 소개자를 동원하고, 현장관리자들은 집에 전화를 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래도 이들 3명은 꿋꿋이 잘 견뎌 나갔다. 15명에서 18명이 된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의 언론플레이에 항의하기 위해 다시금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렇듯 1979년 7월부터 시작된 8시간 노동제 투쟁이 해를 넘겨 8개월 이상 전개되었다. 7월 한 달간 비스켙부의 도급폐지 싸움, 8월부터는 8시간제 준법투쟁으로 캔디부/캬라멜부/껌부를 합해 600~700여 명이 참여했던 이 싸움은 9월 초순부터는 회사의 탄압으로 대부분이 주저 앉고 15명이 남았다. 9월 21일부터 3명이 늘어나 18명이 되었고, 10월 15일에는 다시 2명이 가세하여 20명이 되었다.
1) 8시간 노동제 쟁취, 그러나…
1980년 2월 마지막 날 각 현장 관리자들은 현장 노동자들과 조회를 했다. "3월 1일은 휴일이므로 3월 2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한다." 환호성과 기쁨으로 공장이 들썩였다. 8시간 노동제 시행 후 첫 급여일인 4월 11일, 서울시의 직권조정결정에 따라 지급된 급여는 12시간 노동보다 4시간이나 단축되었음에도 기본급 10%가 인상되어 지급되었다. 지난 8개월 동안 8~9만원의 급여를 뒤로 한 채 4~5만원으로 생계를 꾸려 오면서 8시간 노동제를 고수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실이었다.
8시간제는 전 식품업계까지 확대실시 되었다. 언론에서도 해태제과를 필두로 롯데/동양제과 등 주요 식품업체 근로자들이 지난 4월 서울시 직권조정을 통해 하루 8시간 근무조건을 얻어낸 것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다.
왜곡된 신화
권위주의와 민주화
보이는 손에 의한 불공정 성장
상술했듯이 권위주의 통치기 한강의 기적은 굴욕적 한일협정에 따른 일본 차관과 독립축하금 명목의 배상금, 베트남 파병, 중동건설, 서독으로 간 광부와 간호사,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10대 여공들의 저임금 노동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박정희 정권의 치적이라고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요강을 이어 받아 이를 시행한 것이 전부다. 그 자본축적의 방식은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노동탄압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원시적 자본축적과 임의적 분배로 일관했다. 박정희 정부는 정경유착의 부패 사슬을 만들고, 노골적으로 대기업을 편들고, 이들에게 집중적인 특혜를 허용했다.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실질적 주체들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지 않았다. 불공정에 대한 반감이 사회 곳곳에 누적되었고, 공정한 분배의 요구는 불순한 빨갱이들의 주장으로 몰려 철퇴를 맞았다. 이러한 원시적/편파적 자본축적 방식과 마치 모래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처럼 기초가 부실한 생산력 발전의 누각은 당연히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의 수가 늘어가고 국민의 교육수준이 올라가는 것과 비례하여 이 불공정에 대한 반감이 거세게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성장신화의 허구성
성장신화와 근거 없는 주술
한국사회에서 박정희는 강력한 성장신화의 아이콘 그 자체다. 최근 종편이 허용된 이후 TV조선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소일하는 한국의 특정 실버세대들에게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불가능했을까?라고 묻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불경죄에 해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한국 성장신화의 아이콘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카리스마적 회고 심리가 그 영애(令愛)까지 대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할 만큼 강력한 실체적 힘을 갖는 것이라면, 이 도발적 상상을 더 밀어붙여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불가능했나? 사실이 그렇다면, 왜 2012년 12월 한국 대선에 관심을 가졌던 해외 언론에서는 박정희를 한국 경제성장의 영웅이 아니라 독재자로 기억하고 있을까?
뉴욕타임즈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전 독재자의 딸로 소개한 바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박 후보의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을 18년간 한국의 독재자로 묘사하였다. 영국의 BBC 방송 역시 박정희를 한국경제의 성공신화를 이룬 영웅이 아니라 군부독재자로 표제어를 뽑았다. 박근혜 정부의 집권 4년의 경과를 돌아보면, 불행하게도 이 예측은 정확히 적중했다.
2012년 9월 14~15일 흥미로운 주제(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로 4개 학술단체의 연합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태헌 교수는 <경제발전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유신체제와 그 유산>이라는 논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다"는 주장은 한낱 근거 없는 주술에 불과하다고 일갈하였다. "박정희 시대의 주술화는 한국의 제대로 된 경제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과 군인들, 일제강점기 하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선조들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경제발전을 박정희 개인의 업적으로 대체해 놓고 나면,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만다. 그의 업적이 친일행적, 유신독재, 인권탄압, 민주주의 억압 등의 실정을 상쇄하고도 남는 게 아니라, 그런 수준에서의 경제성장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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